윤증과 박세채의 학문적 교유*
고 영 진** Ⅰ. 머리말 Ⅱ. 학맥과 사상적 특성 Ⅲ. 학문적 교유 1. 懷尼是非 2. 성리학 3. 예학 Ⅳ. 맺음말
Ⅰ. 머리말 尹拯과 朴世采가 주로 활동했던 17세기 후반~18세기 전반은 조선 중기와 후기의 전환점이 되는 시기였다. 말하자면 그가 살았던 시대가 역사적인 시기 구분의 기준이 될 정도로 중요했으며 그만큼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의미이다. 조선 사상계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었다. 17세기는 16세기 중반부터 뿌리내 린 사림의 지배체제가 내외적인 충격에도 불구하고 그 지배 구조를 공고히 했 던 시기였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사림 지배체제의 확립 이후 조선 사상계의 주류로 자리 잡아가던 성리학의 역사적 기능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 는 계기가 되었다.1) 당시 조선에는 두 가지 선택의 길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중화세계의 붕괴 라는 현실을 부정하고 조선에서 그 중화를 세우려는 길과 다른 하나는 중화세 계의 붕괴를 인정하여 대명의리론을 포기하고 청처럼 새로운 질서를 구축해 나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서인의 집권은 의리명분적 요인이 사회경제적
****이 논문은 2007년 광주대학교 대학연구비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 ****광주대학교 교수
1) 고영진, 조선시대 사상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풀빛, 1999), 83~104쪽 2 역사학연구 제31집
요인보다 조선사회에서 더 큰 규정력을 가지게 하였다. 따라서 조선은 전자의 길을 선택했으며 이후 조선의 역사는 전자의 방식에 의해 전개되었다. 두 차 례의 예송을 비롯한 왕실전례논쟁을 거치면서 예치가 사회를 이끌어 가는 하 나의 방도로서 부각되고 복수설치의 방법으로 북벌론이 제기되었던 것도 그러 한 선택의 결과였다. 그러나 18세기로 넘어가면서 조선은 농업 중심의 사회에서 상공업 중심의 사회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이앙법의 확대로 인해 농업생산력이 발달하고 상품작물의 재배와 지방 장시의 발달로 인해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하였으며 수 공업이 발달하고 양반신분제가 동요하였다. 또한 정치적으로 예송을 거치면서 붕당 간의 대립은 격화되고 급기야는 하 나의 붕당이 정국의 주도권을 독점하고 그러한 붕당이 급격하게 교체되는 환 국이, 처음에는 서인과 남인 사이에, 그리고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실세하고 난 뒤에는 노론과 소론 사이에 계속 일어났다. 이는 사상적 차이에 의한 정치적 대립이 정점에 달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 사상이 사회의 변화 속에서 현실적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시 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 결과 산림의 존재는 약화되고 국왕의 역할이 증대하였으나 오히려 그 과정에서 외척과 벌열이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하 였다. 송시열과 훈척의 결합, 노론과 소론의 분열은 이러한 상황에서 나타난 상징적인 사건인 것이다.2) 윤증 집안은 충청도 尼山(지금의 논산) 지역에 재지적 기반을 가진 유력 사족 가문이었다. 그의 조부 尹煌은 성혼의 문인이자 사위로 관직이 대사간까 지 올랐으며 병자호란 때 척화를 강력히 주장하다 전쟁이 끝난 뒤 영동으로 귀양가기도 했던 인물이다. 또한 부친 尹宣擧는 김집의 문인으로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나 송시열·이유태·권시·윤휴 등과 교유하며 당대 대표적인 산 림의 한 사람으로서 활동하였다. 윤증 역시 부친처럼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나 부친과 유계·권시·김 집·송시열 등 당대의 명유들에게 수학하고 박세채·박세당·나양좌 등과 교유하 며 자신의 학문적 깊이를 더해갔다. 이 글은 윤증과 그의 평생 학문적·정치적 친구였던 박세채와의 교유관계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2) 고영진, 「송시열의 사회개혁사상」, 역사문화연구 18(2003). 윤증과 박세채의 학문적 교유 (고영진) 3
Ⅱ. 학맥과 사상적 특징 어려서부터 부친을 모시고 학문연구에 힘썼던 윤증(1629~1714)은 14세 (1642) 때 부친의 친구인 유계가 3년 동안의 유배를 끝내고 금산에 자리 잡 자 그에게서 수학하여 1년 만에 경서와 史書를 두루 섭렵하고 시와 문장에도 능하게 되었다. 19세(1647) 때 권시의 딸과 결혼한 것을 계기로 그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心學에도 관심을 보였다.3) 23세(1651)에 김집을 찾아가 그 문하에 출입하였으며 24세(1652) 때는 송준길을 찾아가 뵈었다. 26세(1654)에 조익을 찾아 뵙고 29세(1657) 때 송 시열에게서 수개 월 동안 朱子書를 배운 뒤에 사제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1658년 부친을 도와 家禮源流를 수정했던 윤증은 이후 박세채와 서신을 왕복하며 復讐之義에 대해 논의하고 이듬해 황산서원에서 사우들과 주자서를 강론하는 등 활발히 학문 연구와 교류를 하였다. 또한 1658년 처음 조정에 천거된 이후 한번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나 제1차 예송이 벌어지자 1660년 권시·유계·이유태 등과 서신을 왕복하며 서인 의 입장을 지지하는 등 주요 사건이나 쟁점이 있을 때마다 자신의 견해를 피 력하였다. 그러나 1681년 부친의 묘갈명 문제를 계기로 윤증은 스승인 송시열과 결별 하고 그 해 김익훈고변사건에서 송시열이 김익훈을 스승 김장생의 손자라는 이유로 옹호하여 소장사류들의 비판을 받음으로써 결국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 로 갈라지게 되고 윤증은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윤증의 사상 형성과정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첫째 시기는 10세(1638)부터 29세(1657)까지로 한편으로는 성혼으로부터 이어지는 가학 적 전통을 계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계·권시·김집·송시열 등 당대의 명유들 에게 수학하면서 자신의 학문적 깊이를 더해갔던 시기였다. 둘째 시기는 30세(1658)에서 52세(1680)까지로 박세채 등 사우들과 서신 을 통해 활발히 학문을 토론하였으며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지만 주요 사건이 나 쟁점이 있을 때마다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던 시기이다. 마지막 시기는 53세(1681)부터 죽을 때까지로 송시열과 결별하면서 사상
3) 明齋先生年譜(奎11535). 4 역사학연구 제31집
적으로도 務實과 實心을 강조하는 등 변화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이러한 변 화가 노론의 공세에 정치적·학문적으로 대응하며 점점 체계화되고 정체성을 띠어 갔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윤증의 사상이 처음부터 정통 주자성리학과 차이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첫째 시기인 17세기 중반 그는 주자성리학을 배우는 데 충실하였으며 둘째 시기인 17세기 후반에 가면 주자와 이이의 학설을 중심으로 자신의 사 상을 정립해 나갔다. 그러나 17세기 말 조선사회가 중기에서 후기로 급격히 변화해가고 동시에 노소분당 등 여러 가지 정치적 사건이 일어나 자신이 소론의 영수로 자정해 가는 상황 속에서 윤증은 자신의 사상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데 거기에 영향 을 미친 것이 바로 성혼으로부터 이어지는 가학적 전통이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써 그 문하에서 정제두 와 양득중 등을 배출하였다. 결국 윤증은 그동안 독자성이 약했던 성혼의 사 상이 자기 정체성을 가지면서 조선 후기 실학과 양명학으로 전환해 가는 과정 에서 중요한 가교 역할을 했던 것이다.4) 박세채(1631~1695)는 기묘사림이었던 朴紹의 고손으로 그의 집안은 본래 전라도 나주에 기반하였다가 조선 초기 서울지역으로 올라가 자리 잡은 명문 사대부 가문이었다. 증조부인 朴應福은 대사헌으로 임진왜란 때 선조와 왕비 등을 호종하다 병사하였으며5) 조부인 朴東亮은 선조 遺敎七臣 중의 한 사람 으로 형조판서 등을 지냈고, 부친인 朴漪는 홍문관 교리와 사헌부 장령 등을 지냈다. 박소는 김굉필의 문인이었으며 박응복은 서경덕 문인인 이중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부친 박의는 이항복과 장인 신흠의 문인으로 문장에 뛰어났으며 정홍명·이시백·장유·김육 등과 교유하였다. 박세당과는 8촌간이었으며 박세당 의 형인 박세후는 윤증의 매형이다 박세채는 7세(1637) 때부터 부친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11세 때(1641) 擊蒙要訣을 배우면서 학문의 지침으로 삼았다. 이후 여러 경전과 諸家의 문
4) 고영진, 「명재 사상의 형성 과정과 한국사상사적 의의」, 務實과 實心의 유학자 명 재 윤증(청계, 2001). 5) 박응남의 형인 朴應順은 懿仁王后의 아버지로 선조의 장인이었으며 박세채의 백부 인 朴瀰는 선조의 부마였다. 윤증과 박세채의 학문적 교유 (고영진) 5
장을 두루 섭렵하였다. 16세(1646) 때 박지계의 문인이었던 원두추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18세(1648)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9세(1649)에 김집을 찾 아 뵈었으며 20세(1650) 때 김상헌을6) 찾아 그 문하에 들어갔다.7) 1650년 성균관에 있을 때 이이와 성혼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영남유생 유직에게 형벌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효종이 반대하자 과거공 부를 포기하고 낙향하여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1659년 세자익위사 세마로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 해 기해예 송이 일어나자 송시열·송준길 등 서인과 의견을 같이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번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66년 東儒師友錄을 저술하여 우리나라의 道學師友의 연원을 정리하였으며 1674년에는 갑인예송으로 남인 이 집권하자 閔愼代服사건으로 削去仕版 당하기도 하였다. 그가 관직에 나아가기 시작한 것은 53세인 1683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은 뒤 송시열의 권유로 출사하면서였다. 이후 이조참의, 공조참판, 대사헌, 이조판서, 우참찬 등을 역임하였으며 1688년 「陳時務萬言疏」를 올렸 다. 1689년 기사환국 때 다시 물러나 학문 연구에 힘썼으며 1694년 갑술환국 이후 다시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박세채의 사상 형성과정도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시기는 7세(1637)부터 28세(1658)까지로 신흠과 연결되는 가학적 전통을 계승하고 김상헌에게 수학한 뒤8) 이후 스스로 독학하면서 학문을 이루었던 시기이다. 둘째 시기는 29세(1659)부터 52세(1682)까지로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낙 향하여 윤증 등과 교유하며 학문 연구에 힘쓰며 心學至訣, 朱子大全拾遺 등 많은 저술을 하면서 예송 등 중요한 사건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다 가 서울에서 쫓겨나기도 했던 시기이다. 셋째 시기는 53세(1683)부터 죽을 때까지로 비로소 출사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노론과 소론이 분기하자 조정을 시도하였으나 결국 소론의 영수가 되어 노론과 대립하였던 시기이다. 박세채의 사상은 첫째 시기와 둘째 시기인 17세기 중후반에는 윤증과 마찬
6) 金尙憲은 尹根壽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윤근수는 기묘사림 金湜의 문인인 金德秀 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7) 南溪年譜(古貴 2511-25-3) 8) 김상헌은 박세채가 문하에 들어간 지 2년 뒤인 1652년 세상을 떠났다. 6 역사학연구 제31집
가지로 주자와 이이의 학문에 기반하여 자신의 사상을 정립해 나갔으며 셋째 시기인 17세기 후반에 가서는 노소분당 등 정치적 격변 속에서 황극탕평론을 제시하고 이황사상 등에 포용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신흠에서 부친으로 이어지는 가학과 스승 김상헌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9) 이처럼 윤증과 박세채는 사상적으로 주자와 이이의 학문에 기반하다가 1680년 경신환국 이후 노소분당의 정치적 변화 속에서 소론으로 자정하면서 사상적 변화를 가져오는데 이는 자신들의 家學的 전통과 다양한 학문적 脈 때 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성혼→윤선거→윤증으로 이어지는 학문적 흐름과 윤근수→ 김상헌→박세채로 이어지는 학문의 흐름은 서로 결합하여 소론의 사상적 기반 이 되었는데 이를 상징적으로 나타내주는 것이 바로 윤증과 박세채의 학문적 교유였던 것이다.10)
Ⅲ. 학문적 교유 윤증과 박세채는 윤증이 30세, 박세채가 28세 때인 1658년(효종 9)부터 학문적 교유를 시작하였다. 두 사람의 교류 사실을 明齋先生年譜와 南溪年 譜에 의거하여 연대별로 정리하면 다음의 <표 1>과 같다. <표 1> 明齋先生年譜와 南溪年譜에 나오는 윤증과 박세채의 교유 내용
9) 도민재, 「남계 박세채」, 한국인물유학사⑶(한길사, 1996). 10) 황의동은 우계학파가 전기에는 서인, 후기에는 소론으로 지칭되었으며 창녕 서씨 의 가학으로 출발하여 파평 윤씨, 풍양 조씨, 안동 권씨, 반남 박씨, 전주 최씨 등 을 거쳐 하나의 학맥을 형성하며 발전했다고 보았다(황의동, 우계학파 연구, 서 광사, 2005 참조)
연도 교유 내용 1658년 9월 윤증이 박세채의 서신에 답함(春秋, 禮記의 復讐之義에 대해서). 1660년 2월 윤증이 박세채를 방문함. 5월 박세채가 윤증에게 近思釋義를 논한 서신을 보냄. 1664년 6월 박세채가 윤증에게 復讐之義를 논한 서신을 보냄. 1670년 1월 박세채가 交河에 있는 윤증을 방문함. 윤증과 박세채의 학문적 교유 (고영진) 7 이를 보면 두 사람은 박세채가 죽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교류를 했음을 알 수 있다. 교유 내용은 성리학과 예학 등 학문적인 것과 회니시비와 노소분당 등 정치적인 것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윤증과 박세채의 교유는 문집에 있는 서신들을 통해서 좀더 상세히 드러난 다. 윤증의 문집에는 윤증이 박세채에게 보낸 서신이 모두 43편 수록되어 있 는데 상당수가 연보에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시기별로는 주로 1670년대 후반부터 1690년대 중반에 걸쳐 있으며 내용적 1671년 10월 윤증이 윤선거의 행장을 박세채에게 찬술해 줄 것을 청함. 1672년 9월 交山에 성묘가는 길에 坡山에서 박세채와 만나 며칠 동안 강론함. 1676년 2월 윤증이 定山에서 박세채를 만남. 1677년 1월 윤증이 박세채의 서신에 답함(윤선거 비문 문제). 12월 박세채가 윤증의 서신에 답함(회니시비 문제). 1680년 1월 윤증이 박세채가 心學旨訣을 논한 서신에 답함. 11월 박세채가 윤증의 서신에 답함(聖學輯要와 擊蒙要訣에 대해서). 1681년 7월 박세채가 윤증의 서신에 답함(노소분당 문제). 1682년 5월 윤증이 박세채를 松都 甘露寺에서 만남. 11월 윤증이 박세채의 서신에 답함.(회니시비 문제) 1683년 2월 박세채가 윤증이 出處에 대해 논한 서신에 답함. 5월 박세채와 윤증이 漢江 과천에서 만나 함께 묵음(출사 문제). 윤6월 박세채가 윤증에게 서신을 보냄(회니시비 문제). 1684년 2월 윤증이 박세채의 서신에 답함(회니시비 문제). 4월 박세채가 윤증의 서신에 답함(회니시비 문제). 5월 會寧人 崔愼이 박세채를 무고한 상소에 대해서 윤증이 상소하여 변명함. 5월 윤증이 박세채의 서신에 답함(회니시비 문제). 6월 박세채가 윤증의 서신에 답함(회니시비 문제). 1685년 7월 박세채가 윤증에게 서신을 보냄(노소분당 문제). 10월 윤증이 박세채에게 서신을 보냄(노소분당 문제). 10월 윤증이 박세채의 서신에 답함(회니시비 문제). 1688년 1월 윤증이 파주에 가서 박세당과 박세채와 만나 강론을 함. 1689년 6월 박세채가 윤증의 서신에 답함(송시열의 죽음에 대해서). 1690년 4월 윤증이 박세채의 편지에 답함(회니시비 문제). 1691년 7월 윤증이 박세채가 浦渚遺書에 대해 논한 서신에 답하고 발문을 씀. 1692년 5월 윤증이 박세채가 爲學之方에 대해 논한 서신에 답함. 1694년 7월 윤증이 박세채의 서신에 답함(進退之義에 대해서). 10월 윤증이 박세채의 서신에 답함(出處에 대해서). 1695년 2월 윤증이 박세채의 죽음에 곡함.
8 역사학연구 제31집
으로는 1680년대 초반까지는 예학과 성리학 등 학문에 관한 서신이 많고 1680년대 중반부터는 회니시비와 노소분당 등 정치적 사건과 관련한 서신들 이 많다. <표 2> 明齋遺稿에 수록되어 있는 박세채에게 보낸 윤증의 편지 박세채의 문집에는 박세채가 윤증에게 보낸 서신이 더욱 많아 모두 105편 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윤증과는 달리 박세채의 연보에는 이 사실들의 상 당수가 기록되어 있지 않아 흥미롭다. 시기별로는 1660년부터 박세채가 죽을 때까지 거의 매년 보냈음을 알 수 있으며 특히 갑인예송 때와 회니시비가 본 격화된 1680년대 전반, 갑술환국 때 보낸 서신들이 많다. 내용적으로는 1660년대는 예학에 관한 서신, 1670년대와 1680년대 초반은 예학과 성리학에 관한 서신 등 학문에 관한 것들이 많고, 1680년대 중반 이 후는 회니시비와 노소분당 등 정치적 사건과 관련한 서신들이 많다.
<표 3> 南溪集에 수록되어 있는 윤증에게 보낸 박세채의 편지
1. 懷尼是非 전체적으로 윤증과 박세채의 교유는 초기에는 주로 학문적인 것을 가지고 이 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처음 서신 교류를 할 때의 내용이 춘추와 예기 의 復讐之義에 관한 것이고 禮에 관해 윤증과 주고받은 문답들이 대부분 1660 년대~1670년대 초반인 점을 보아서도 그렇다.
연도 1658 1677 1678 1679 1682 1683 1684 1685 편수 2 3 2 3 2 2 6 3 연도 1687 1688 1689 1690 1691 1694 1695 편수 5 4 1 3 1 4 2 연도 1660 1662 1664 1665 1666 1667 1668 1670 1671 1672 편수 1 6 4 5 1 1 6 3 1 4 연도 1673 1674 1675 1677 1678 1680 1681 1682 1683 1684 편수 4 7 4 2 1 4 4 3 13 6 연도 1685 1686 1687 1688 1689 1690 1691 1693 1694 1695 편수 4 1 1 3 2 3 1 2 7 1 윤증과 박세채의 학문적 교유 (고영진) 9
그러나 1670년대 후반 이후 회니시비와 노소분당의 와중에서는 정치적인 내용에 관한 서신과 만남이 많았으며 이때에는 주로 박세채가 송시열과 윤증, 소론과 노론을 중재하는 역할을 하였다. 부친 윤선거의 喪을 끝낸 1671년 윤증은 부친의 연보를 편찬하고 박세채에 게 부친의 행장을 찬술해줄 것을 청하고 이어 1673년 스승인 송시열에게 부 친의 묘갈명을 지어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송시열은 묘갈명을 박세 채의 행장을 참조하여 무성의하게 써서 보냈다. 윤증은 고쳐 달라고 청하기를 몇 번 하였으나 그 때마다 송시열은 마지못해 고쳐주기는 하였으나 자구 수정 에 그쳤다.11)
송시열이 40년 친구의 묘갈명을 이렇듯 무성의하게 써준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병자호란 때 윤선거의 행동과 이후 송시열과의 학문적 차이 때문이 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윤선거는 가족들과 함께 강화도로 들어가고 부 친 윤황은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권순장·김 익겸 등과 강화성을 사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성은 함락되고 친구들은 모두 자결하고 부인인 공 주 이씨와 숙부인 尹烇도 자결하였으나 자신은 목숨을 끊지 못하고 微服으로 갈아입고 남한산성으로 사신으로 가는 琛原君을 따라 강화도를 탈출하였다. 명분은 남한산성에 있는 병든 부친을 만나보고 죽겠다는 것이었지만 윤선거 는 강화도에서의 자신의 행동을 평생 부끄러워 하며 과거를 보거나 관직에 나 아가는 것을 포기하였다. 또한 죽은 아내를 위해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향리에 묻혀 학문에만 전념하며 송시열·송준길·이유태·권시·윤휴·안방준 등과 교유하였다. 그럼에도 송시열은 윤선거의 江都事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윤선거의 학문적 성격도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학 문은 외조부인 성혼으로부터 이어지는 가학적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여 主敬窮 理와 克己躬行을 중시하고 慤實과 實心을 특징으로 하였는데 이는 아들인 윤 증에게 그대로 이어졌다.12) 예학과 역학에도 조예가 깊어 유계와 함께 가례주 석서인 「가례원류」를 편찬하고 周易의 後天之說을 체계화한 「後天圖說」을 저술하였으며 近思錄에 주석을 붙인 近思源流를 편찬하기도 하였다.13)
11) 李銀順, 朝鮮後期黨爭史硏究(일조각, 1988), 29~66쪽 12) 황의동, 「미촌 윤선거의 생애와 사상」, 명재 윤증의 학문연원과 가학(예문서원, 2006). 10 역사학연구 제31집
또한 성혼의 학문을 정리하고 복권시키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김상헌 에게 성혼 비문에서의 임진왜란 관련 기사를 고쳐줄 것을 청하였으며 牛溪先 生年譜와 癸甲錄 등을 편찬하였다. 계갑록은 안방준의 混定編錄과 정철 가문의 觀時錄을 참조·보완한 것으로 성혼의 정치적 입장을 옹호한 것이다. 동방의 도학이 김굉필에 의해 창도되어 조광조·이황에서 내용이 채워지고 성혼·이이에 의해 밝혀졌다고 하여 이들과 정여창·이언적 등 일곱 선생의 저 술을 모아 近思後錄을 저술하고 성혼·이이 문인들의 학문과 언행 등을 정리 한 兩賢師友錄을 편찬하려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같은 스승의 문인이었지만 주자절대화를 추구하며 성리학 이념의 실천에 철저했던 송시열과는 달리 윤선거는 성혼의 절충주의적 성리학의 영향 을 받아 이단사상에 덜 엄격하였다. 따라서 송시열이 사문난적이라 공격했던 윤휴의 학문에 대해서 윤선거는 호의적으로 평가하고 교류를 계속하였으며 예 송에서도 윤휴를 두둔하는 태도를 보여 1653년 黃山書院과 1665년 東鶴寺 모임에서 서로가 격렬한 논쟁을 벌이는 등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14) 더욱이 윤휴가 보낸 제문을 윤증이 거절하지 않고 또한 윤증이 자신에게 묘갈명을 부탁하면서 함께 전한 「己酉擬書」에15) 윤휴와 허목을 사문난적이라 고 단정하지 말고 등용하여 쓰는 것이 인심을 얻는 길이라고 충고하는 내용 등이 들어있자, 송시열은 윤선거 부자를 더욱 못마땅하게 여기고 묘갈명을 무 성의하게 써주었던 것이다.16)
13) 魯西遺稿 附錄 上 「年譜,」, 「遺事」; 南溪集 권81 「成均生員贈吏曺參議魯西先 生尹公行狀」. 14) 우인수는 당시 윤선거가 송시열과 윤휴 간의 대립을 완화·중재함으로써 서인과 남인의 대립을 막후 조정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보았다. 즉 초기의 윤선거의 조정은 주로 송시열의 지나친 배척에 대해 윤휴를 옹호하고 송시열을 설득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졌으며, 후기의 조정은 두 사람 모두에게 충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禹仁秀, 朝鮮後期 山林勢力硏究, 일조각, 1999, 86~92쪽 참조). 15) 「己酉擬書」는 1669년 윤선거가 송시열과 윤휴의 조정 역할을 하면서 송시열에게 보내려고 하다가 못 보냈던 것으로, 서인과 남인의 消融保合을 강조하고 예송으로 처벌된 윤선도·조경·홍우원의 수용을 주장하였으며 허목·윤휴는 본래 사류로서 세 상을 미혹시킨 잘못은 있다 하더라도 포용해 함께 국사를 도모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魯西遺稿 別集 「疑答宋英甫 己酉」 참조). 16) 이은순, 「명재 윤증의 생애와 회비 시비의 명분론」, 務實과 實心의 유학자 명재 윤증(청계, 2001). 윤증과 박세채의 학문적 교유 (고영진) 11
그러자 윤증은 1681년 송시열의 처사를 ‘王覇竝用’, ‘義利雙行’으로 비판하 는 「辛酉擬書」를17) 작성하여 이듬해 박세채에게 보여주었다. 이때 박세채가 강력히 만류하여 서신은 발송하지 않았는데 박세채의 사위이자 송시열의 손자 였던 송순석이 이를 몰래 베껴다가 송시열에게 보였다.18) 송시열은 이를 보고 윤증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며 대노하였고 결국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의 갈등은 더욱 악화되었다. 더욱이 1684년부터는 양자의 대 립에 문인들과 일반 사류들이 가세함으로써 회니시비가 조정의 논쟁으로 비화 되고 노소분당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박세채는 회니시비를 斯文의 변고로 보고 양측의 화해와 조정을 시도하였 다. 그는 윤선거의 江都事에 대해 윤선거가 죽었어야 했다는 주장이나 꼭 죽 을 의리는 없다는 주장이나 모두 타당성이 있다고 보았다.19) 따라서 묘갈명으로 인해 서운함을 토로한 윤증에게는 수차에 걸쳐 부모와 스승의 경중에 대해 섣불리 판단하지 말고 제자로서의 도리를 저버리지 않도 록 설득하였다.20) 한편 송시열에 대해서는 강도사의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사 생의 도리를 생각하여 윤증을 용서하고 비문도 성의 있게 고쳐줄 것을 청하였 다.21) 이 시기 그가 경전과 문집 등을 참고하여 「師友考證」을22) 저술한 것도
17) 「辛酉擬書」는 윤증이 송시열의 학문과 행동을 비판한 글로. 윤증은 송시열의 世道 가 주장이 강하고 편벽되어 주자가 경계하는 王覇竝用과 義理雙行을 벗어나지 못 하였으며 평생을 바쳐 주창해왔던 大義도 구체적으로 이룩한 것은 하나도 없고 자 신의 祿位와 名聲만 높아졌으니 편벽된 기질으로 고치고 實心으로 주자학의 근본 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明齋遺稿 別集 권3 「擬與懷川書 辛酉夏 辛酉以後 往復」 참조). 18) 黨議通略 肅宗朝 「尼懷의 釁端」 “未幾有南人權以鋌者 時烈之外孫而拯之妻姪也 與拯言時烈事勸拯諫之 拯自言擬書未寄 且誦王伯義理語 以鋌歸語時烈 時烈索其書於 世采 世采諱之 時烈孫淳錫世采婿也 竊得之以示時烈 時烈大怒曰 拯必殺我.” 19) 南溪集 外集 권3 「答宋質夫 乙丑正月二十七日」 “江都云云 近於馬肝之說 不敢深 論 鄙意若以學問前事斷之 則可死與不可死 皆無所害矣 最似完備 但人見若不同 奈何 奈何.” 20) 南溪集 권22 「與尹子仁 二月四日」; 권29 「答尹子仁 甲子四月四日」; 권29 「與尹 子仁 四月二十六日」; 권29 「答尹子仁 六月十六日」; 外集 권4 「答尹子仁 丁巳十二 月十二日」. 21) 南溪集 권26 「答宋尤齋 乙丑八月二十二日」; 南溪集 外集 권3 「答宋質夫 乙丑 正月二十七日」; 南溪年譜 49年 丙辰 「答尤菴宋公書論尹魯西喝文」. 22) 南溪集 권64 雜著 「師友考證 丙寅七月晦」. 12 역사학연구 제31집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23) 1683년 송시열이 출사하자 박세채는 그를 도와 세도를 만회하고자 출사하 였다. 그러나 그는 윤증도 출사하여 함께 국사를 담당해야 세도를 회복할 수 있다고 보고 이를 위해서는 두 사람의 화해가 선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면서 윤증에게는 출사를 종용하는 한편 송시열 도 설득하여 그로부터 윤증에 대해 별다른 유감이 없다는 답변을 얻어내는 성 과를 거두기도 하였다.24) 박세채는 이 사실을 윤증에게 서신을 보내어 알리고 윤증의 출사가 위로는 군주의 배려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師友의 의리를 온전히 하는 의미가 있다고 강조하며 출사를 권유하였다.25) 결국 여러 번에 걸친 박세채의 권유와 숙종 의 부름을 받고 윤증은 1683년 5월 과천에 이르렀다. 이때 박세채가 찾아와 하루 밤 묵으면서 출사할 것을 설득하였는데 윤증은 선결 조건으로 세 가지를 제시하였다. 첫째는 남인과 서인의 怨毒이 너무 깊어 풀 수가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三 戚의26) 위세가 너무 강해 제지할 수 없다는 것이며, 셋째는 송시열의의 세도 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27) 이는 송시열과 훈척이 손을 잡은 상황에서 자 신이 나가 보았자 별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현실 판단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문제는 박세채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윤증은 낙향하였다. 그 뒤에도 박세채는 중재 노력을 계속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송시열 이 죽자 박세채는 송시열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고 心喪 素帶하였으며 윤증에 게 편지를 보내어 구견을 버리고 화해하고 스승을 위해 望哭할 것을 청하기도 하였다.28) 그러나 윤증은 이를 거절하였다.
23) 南溪集 外集 권5 「與尹子仁 七月二十九日 別紙」 “近有人言弟作師生說以害於兄 想此類不一其數 末流之弊 誠可憂也 然所謂師生說 不無苗脈 自往復書出世之後 京中 縉紳章浦論此者 不問曲折輒曰 師者道之所在 道非則可絶.” 24) 禹仁秀, 朝鮮後期 山林勢力硏究(일조각, 1999), 92~99쪽. 25) 南溪集 권22 「與尹子仁 二月四日」 “今夜與尤齋同宿 吃吃說兄邊事 函丈爲言吾於 子仁 別無一毫疑障 采勸爲書喩以必來之意 函丈快諾 今日兄之一行 上可以酬聖主之 遇 下可以全師友之義 盖書札傳說 每每轉激 不如合堂開懷 一言便釋也.” 26) 三戚은 光山 金氏, 淸風 金氏, 驪興 閔氏이다. 27) 肅宗實錄 권14 숙종 9년 5월 丙午. 28) 南溪集 권29 「答尹子仁 庚午正月四日」 “亦嘗爲兄思之 當其喪歸也 特以舊義大禍 略爲之望哭 恐與前日 處義或不甚礙 近聞一士友言 若爲一文字祭告墓前 俱道彼此幽 윤증과 박세채의 학문적 교유 (고영진) 13
2. 성리학 윤증과 박세채의 성리학은 기본적으로 주자와 이이의 사상에 기반하고 있 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 나아가 거기에 그치지 않고 務實과 實心을 강조하고 이황사상에 대해 포용적인 모습을 보이는 등 주자와 이이에만 머물지 않으려 는 모습도 공통점이 있다. 윤증은 理와 氣의 관계를 理氣不相雜과 理氣不相離의 관계로 이해하고 본체 에서의 理氣二元과 理先氣後를 인정하였다. 이는 주자의 견해와 다르지 않다. 또한 윤증은 주자에 기반하면서도 본원적인 측면보다는 현상적인 측면을 중시 하여 기가 리를 포함한다는 氣包理在中을 주장하였다. 이는 윤증의 사상이 이 이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그는 이기심성론의 여러 곳에서 理 氣之妙와 理通氣局, 氣發理乘一途 등 이이의 학설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29) 그러나 송시열과 결별하게 되는 후기로 가면 사상적으로 변화가 일어나 務 實을 학문의 근본으로 삼고 實心으로 實功에 힘쓰며 實學을 우선할 것을 강조 하였다. 또한 磻溪隨錄의 跋文을 쓰면서 그 규모와 식견을 높이 평가하고 世務에 뜻있는 자는 이 책을 취하여 시행할 것을 강조하였다. 한편 그의 문하 에서 정제두나 양득중 등 양명학적 경향을 지닌 인물들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그의 학문을 조선 후기 실학과 동일시하거나 양명학 을 수용하였다는 견해도 있으나30) 그렇게 단정 지어 보기에는 문제가 없지 않다. 윤증 사상에는 조선 후기 실학의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사회경제 적 개혁안을 구체적으로 다룬 글이 보이지 않으며 정제두와의 서신에서 윤증 은 양명학의 한계를 지적하고 양명학 공부를 포기할 것을 권유하기도 하기 때 문이다.31) 성리학에 대한 체계적인 글이 거의 없는 윤증에 비해 박세채는 평생에 걸 쳐 성리학에 관한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의 저술은 크게 유학의 道統을 정리 한 것과 性理書에 대한 연구, 예학에 관한 것으로 나눌 수 있다.32)
蘊 庶幾無憾於幽明 亦似有理 第以終無古義 可證者 不敢質言也.” 29) 황의동, 「명재 사상의 성리학적 특성」, 務實과 實心의 유학자 명재 윤증(청계, 2001). 30) 李銀順, 朝鮮後期黨爭史硏究(일조각, 1988), 19~25쪽; 金吉洛, 「明齋 尹拯의 陸王學」, 儒學硏究 5(1997). 31) 송석준, 「명재 윤증의 심학 사상」, 務實과 實心의 유학자 명재 윤증(청계, 2001). 14 역사학연구 제31집
박세채는 11세 때 격몽요결을 배우면서 학문의 지침을 삼은 이후 이이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였으며 뒤에 그에 관한 자료를 모아 栗谷四書諺解, 栗 谷續集, 栗谷外集, 栗谷別集 등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그는 理學通錄補集과 伊洛淵源續錄을 저술하여 공자에서 주자 로 이어지는 유학의 도통을 정리하고 주자대전습유 등을 저술해 주자의 학 문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또한 朱子讀書法을 엄격히 고수하는 등 주자의 정론에 충실하고자 하였다.33) 반면 양명학에 대해서는 윤증보다 좀더 엄격하였다. 박세채는 문인인 정제 두가 양명학을 연구하고 있음을 알자 여러 차례 서신을 보내 주자학으로 돌아 오기를 바랐다. 그는 양명학이 禪佛敎와 같다고 규정하고 「王陽明學辨」과 「良 知天理說」을 지어 조목조목 비판하였다.34) 그러나 이기론에서는 理의 氣에 대한 주재성, 근원성을 강조하고, 사단칠정 론에서는 四端은 理가 주가 되니 理發이라 해도 무방하고 七情은 氣가 주가 되므로 氣發이라 해도 무방하다고 하여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수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35) 박세채의 이기심성론은 문인인 임영에게 그대로 이어진다.36) 성리학에서의 윤증과 박세채의 학문적 교유는 주고받은 서신을 통해 엿볼 수 있다. 1658년 처음 학문적 교류를 시작할 때 두 사람은 춘추와 예기 의 복수지의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내용의 핵심은 청에 대한 복수와 병자호란 순절자의 자손의 출사 문제로 두 사람 다 화이론에 입각해 있지만 약간의 차 이가 있었다. 즉 박세채가 大賢 이상은 출사할 수 있으나 그 아래는 물러나 몸을 지키
32) 박세채의 주요 저서 목록에 대해서는 우경섭, 「朴世采의 朱子學 연구와 朱子大全 拾遺」, 韓國文化 39(2007), 141~142쪽의 <표 1> 참조. 33) 정경희는 박세채가 정치적으로 소론에서 노론으로 전환하였지만 학문적으로는 처 음부터 주자주의를 엄격히 고수하였다고 보았다(정경희, 「17세기 후반 ‘전향노론’ 학자의 사상-박세채·김간을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3, 1994 참조). 34) 김교빈, 「조선 후기 주자학과 양명학의 논쟁-정제두와 박세채·윤증·민이승·박심· 최석정의 논쟁을 중심으로」, 시대와 철학 10(한국철학사상연구회, 1999); 이영 호, 「南溪 朴世采의 大學 解釋을 통해 본 17世紀 朱子學的 經學의 일면」, 大東 漢文學 12(2006). 35) 도민재, 「남계 박세채」, 한국인물유학사⑶(한길사, 1996); 황의동, 「남계 박세채 」, 우계학파연구(서광사, 2005). 36) 고영진, 호남사림의 학맥과 사상(혜안, 2007), 71~75쪽. 윤증과 박세채의 학문적 교유 (고영진) 15
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 데 비해, 윤증은 오랑캐의 화를 면할 수 있으면 功 이 매우 위대하다는 것은 의로움을 조금 굽혀 큰 이익을 얻으려는 枉尺計功의 병폐를 면치 못하며, 하루라도 빨리 치욕을 씻는 것이 군자가 마땅히 행하여 할 의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空言無實의 병통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라며 實心 과 實功에 힘쓸 것을 주장하였다.37) 박세채와의 편지에서 자신의 부친의 학문은 內와 實이며 송시열의 학문은 外와 名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던38) 윤증은 1680년에는 박세채가 자신이 저술 한 심학지결에 대해 의견을 구하자 편지로 답하였다. 심학지결은 박세채가 정구의 心經發揮를 읽고서 고금의 경전과 선유들 의 經에 대한 설들을 모아 편찬한 책이다.39) 윤증은 이 책이 張栻이 仁을 말 한 것을 모은 뜻과 같다고 보았으며 후학에게 유익함은 물론 자신이 배우는 바에도 더욱 정밀해질 것이라고 평가하고 總言敬条 등 18개 항목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40) 박세채는 학문하는 방법은 거경과 궁리 두 가지이지만 실은 하나로 모두 敬으로써 주를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41) 따라서 심경을 강조하였고 심학 지결을 저술까지 한 것이다. 윤증 역시 心을 중시하였다. 그는 마음을 세우 는 것을 마땅히 첫째로 주를 삼아야 한다고 하여 학문의 근본이 마음 공부에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42) 두 사람의 心과 敬을 중시하는 학문경향은 서로의 학문 교류를 통해서 형성되었던 것이다. 1691년에는 박세채와 조익의 저술인 포저유서에 대해 논하고 그 跋文을 썼다.43) 조익은 윤증이 26세(1654) 때 찾아 뵙고 가르침을 받았던 인물이다.
37) 明齋遺稿 권10 「與朴和叔 世采 戊戌」 “今曰 雖不能尊中國攘夷狄 使吾東免於夷 狄 其功亦已偉矣云 則不免有枉尺計功之病矣 今曰 一日而雪此讐恥 君子只當行其義 也云 則又不免有空言無實之病矣 … 而所謂仕之之義 則恐無以易和兄之說也 盖大賢 以上 則出而有爲 以下則退而守身.” 38) 明齋遺稿 別集 권3 「答朴和叔 甲子」 “先人之學 內也實也 尤翁之學 外也名也.” 39) 南溪集 권69 「跋心學旨訣 戊午十月」. 40) 明齋遺稿 권11 「與朴和叔 壬戌至月二十八日」 “所輯心學旨訣 卽張南軒類聚言仁 之意也 無論有益於後學 自家所學當益以之精切矣.” 41) 南溪集 권54 雜著 編錄 「隨筆錄 丁未十二月十二日始錄」 “學者固當以居敬窮理爲 主 然亦不可不潛心於此而服膺焉 必有互發之益 聖門爲學之法 皆有二塗而其實一也 要皆以敬爲主.” 42) 황의동, 우계학파 연구(서광사, 2005), 245쪽. 16 역사학연구 제31집
포저유서는 庸學困得, 論孟淺說, 書經淺說,易象槪略 등 모두 10책 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박세채가 제목을 붙이고 의심나는 곳을 해설하고 윤증 에게 발문을 부탁한 것이다.44) 1692년 윤증은 박세채가 성혼이 지은 爲學之方을 거경과 궁리로 분속하 여 책을 만들어 질정을 하자 서신으로 답하였으며45) 이를 계기로 자신도 「題 爲學之方圖」라는 글을 지었다. 여기서 그는 立志가 아니면 시작이 없고 務實 이 아니면 끝마침이 없다고 하여 입지와 무실을 학문적 탐구의 궁극적 목표로 삼고 있다.46) 성리학에서의 윤증과 박세채의 교유는 성리학에 관한 저술, 특히 박세채의 저술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주로 心學的 내용과 학문하는 방법 등을 중심 으로 논의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3. 예학 윤증과 박세채는 모두 예학의 대가였다. 윤증은 30세인 1658년 부친을 도 와 가례원류를 수정하고 1660년 권시·유계·이유태 등과 예송에 관해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서인의 예설을 지지하였다. 1672년에는 김장생의 喪禮備要를 교정하여 중간하였으며 1678년에는 가례원류를 교정하고 1680년 박세채와 왕복 교정하여 「國恤中四禮私議」를 저술하였다. 66세인 1694년에는 김집의 疑禮問解續을 교정하고 跋文을 지었으며 1713년에는 유상기와 가례원류에 대해 논하고 1714년에는 장손 윤동원에 구술하여 喪禮遺書와 祭禮遺書를 저술하기도 하였다.47) 윤증은 많은 친구·문인들과 예에 관해 서신을 주고받아 뒤에 明齋先生疑禮
43) 明齋遺稿 권12 「與朴和叔 辛未閏七月十九日」; 「與朴和叔 甲戌七月十三日」. 44) 明齋遺稿 권32 「浦渚遺書跋 壬申」. 45) 明齋先生年譜 六十五年 壬申 五月 “玄石以牛溪先生所抄爲學之方 分屬居敬窮理 兩段 而以書來質 先生書訂之曰 受之應仲二段 只是初學功定 滄洲又諭 至語錄諸段 只論立志務實等事 今以居敬窮理四字排定 恐未安穩.” 46) 明齋遺稿 권30 「題爲學之方圖」 “所謂立志務實二目 則拯之僭取兩先生之意而添之 者也 盖非立志則無以始 非務實則無以終 此擊蒙要訣及聖學輯要 皆以立志爲首章 而 學方所摭諸書 無非實下工夫之意故也.” 47) 明齋先生年譜 참조. 윤증과 박세채의 학문적 교유 (고영진) 17
問答을 남겼으며 문집에도 관련 내용들이 적지 않게 실려 있다. 명재선생의례 문답은 주자가례의 체제·항목을 중심으로 王家禮를 첨가해 편집한 家禮問答 書로 구체적으로는 의례문해와 가례원류, 상례비요 등을 참조하였다.48) 이 책에서 윤증은 문인들의 질문에 다양한 근거를 들어 대답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주자가례와 이이의 격몽요결을 중시하였다.49) 구체적인 禮 의 시행에 있어서는 주자가례를 기본을 하고격몽요결과 상례비요 등을 참고할 것을 강조하였다.50) 또한 전거가 불분명할 경우는 情禮와 時宜에 합당한 것인지의 여부와 중국 과 우리나라의 문화적 차이 등을 판단의 주요 기준으로 삼아 禮의 합리성과 시의성, 지역성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51) 박세채 역시 29세인 1659년 기해예송에서 송시열·송준길 등 서인과 의견을 같이 하여 기년복을 주장하였으며 「服制私議」를 저술해 3년설의 부당성을 주 장하였다. 1674년 갑인예송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자 閔愼代服 사건으로 삭거 사판 당하기도 하였다. 1683년 송시열이 효종대왕의 세실 문제를 거론하자 신중히 처리할 것을 건 의하며 반대하였으며, 이어 송시열이 태조의 시호를 더 높일 것을 주장하자 박세채는 위화도회군은 춘추대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化家爲國’을 위한 것 이므로 시호를 더할 필요가 없다고 역시 반대하였다.52) 그는 다양한 형태의 예서를 저술하였는데 六禮疑輯은 주자의 儀禮經傳 通解의 家·鄕·邦國·王朝禮 체제를 모범으로 삼은 정구의 五先生禮說分類의 체제를 계승·발전시켜 천자례와 사대부례를 각각 관혼상제례, 鄕禮, 相見禮, 雜禮 등으로 나누어 저술한 것이며, 家禮要解는 주자가례의 내용에 대한 정밀한 주석서이다.
48) 明齋先生疑禮問答 「凡例」 “一此編類例 雖一依問解 而間或參據家禮源流 以序次 之 … 一此編主於家禮 故凡問辭之出於家禮者 只稱某條某文 而不書冊名 一問答疑節 之已見問解及備要者 並刪去.” 49) 趙駿河, 「明齋 尹拯의 禮說」, 儒學硏究 5(1997). 50) 明齋先生疑禮問答권7 「時祭」 “大抵著於家禮者 當以家禮爲準式 家禮或有未備 而 著於要訣備要者 實參古今之宜 則亦當從而行之 不可以不在家禮而去之 未知如何.” 51) 한기범, 「명재 윤증의 예학사상」, 明齋 尹拯의 생애와 사상(충남대 유학연구소, 2001). 52) 姜信曄, 「朝鮮後期 南溪 朴世采의 禮治論」, 慶州史學 9(1990). 18 역사학연구 제31집
또한 三禮儀는 四禮 가운데 상례를 제외한 관·혼·제례의 과정을 주자가 례를 기본으로 하고 儀禮, 家禮儀節, 國朝五禮儀, 격몽요결 등 고금 의 예서를 참조하여 정리한 것이다. 南溪先生禮說은 박세채가 친구·문인들과 예에 관해 주고받은 서신들을 주 자가례와 의례문해의 체제를 주로 참조하여 정리한 것인데 四禮를 중심으로 하면서 書院과 王朝禮를 첨가하여 다루고 있어 윤증의 명재선생의례문답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53) 박세채는 주자가례와 의례를 중시하였으며54) 특히 구체적인 禮 시행에 있어서는 주자가례를 주로 하면서 의례와 國制를 참고하였다. 그는 變禮에 대해서 典據를 매우를 중시하였으며 따라서 俗禮를 따르는 데는 신중하였 다.55) 윤증과 박세채의 예학 교류는 두 사람의 연보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명재 선생의례문답에 두 사람이 주고받은 서신 내용이 38항목이나 실려 있다. 주 로 박세채가 질문하고 윤증이 대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뒤의 <부표 1>은 서신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한 것이다. 시기적으로는 서신에 기록되어 있는 박세채의 관직이 이조참의로 되어 있 는 1항목만 제외하고는 지평인 것으로 보아 현종 중반인 1660년대 후반, 즉 윤증과 박세채의 나이가 40세 전후에 두 사람의 문답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 음을 알 수 있다.56) 명재선생의례문답과 남계선생예설, 그리고 두 사람이 서로 문답한 내용 을 살펴보면 성리학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공통점이 눈에 띤다. 의례문해 의 체제를 기본으로 하여 관·혼·상·제례를 중심으로 하면서 왕조례를 첨가한 점, 내용에서 주자가례를 기본으로 하면서 古禮나 俗禮를 참작한 점 등이 그것이다. 다음의 두 사람의 문답은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준다.
53) 고영진, 조선시대 사상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풀빛, 1999), 336~337, 393~397쪽. 54) 六禮疑輯 권1 「凡例」 “禮之爲書 欲從古則有儀禮 欲通今則有家禮 其儀章度數之 間 非不明白整齊而然.” 55) 李承姸, 「南溪 朴世采의 예학에 관한 試論」, 韓國의 哲學 25(1997). 56) 「남계연보」에는 박세채가 사헌부 지평에 임명된 기록이 보이지 않으나 품계를 따 져보면 1666~1667년 경으로 추정되며 이조참의에 임명된 것은 1682년 8월, 그리 고 1683년 정월부터 3월까지였다. 윤증과 박세채의 학문적 교유 (고영진) 19
(문) 오늘날 사람들의 제례는 비록 禮法之家라고 칭해지는 집안에서도 각자 달리 행합니다. 한 집안에서 四宗에 증조부와 조부를 계승한 宗子는 한결같이 주 자가례를 따르고자 하지만 홀로 고조부를 계승한 宗子는 先世에서 행한 것 과 俗禮를 굳게 고집하여 행하고자 아니하고 혹 증조부 이하를 계승하는 경 우도 또한 그러하니 아버지를 계승한 小宗은 마땅히 그 집에서 古禮만을 행 해야 하는지요. 아니면 종자를 따라서 속례를 좇아야 하는지요(지평 박세채). (답) 이른바 제례를 각자 다르게 행하는 것은 주자가례와 국조오례의, 격몽 요결 등의 기록이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주자가례』를 따른 뒤에 大一統之義에 합하게 하면 그러한 폐단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一家의 어른이 先世에 행해오던 방식을 굳게 지켜 一說의 근거로 삼은 즉 非禮에 이 르지 않았다면 또한 잘라서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혹 절차가 변할지라 도 그 중에 나아가 나의 誠敬을 다해야 합니다. 만약 非禮인데도 그냥 픙속 을 따르는 경우라면 따라서는 안 됩니다.57) 그럼에도 두 사람의 예학에는 약간의 차이점도 보이고 있는데 윤증이 상 례비요나 격몽요결처럼 우리나라의 禮인 속례를 적지 않게 참조한 반면 박 세채는 의례경전통해등 고례를 중시하는 측면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이러 한 두 사람의 예학과 예학적 특성 역시 서로의 학문적 교류를 통해서 형성되 고 풍부해져 갔던 것이다.
Ⅳ. 맺음말 이상으로 윤증과 박세채의 학문적 교유관계를 회니시비와 노소분당, 성리학 과 예학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두 사람은 나이도 비슷하고 살아온 궤적도 비슷하며 학문적 특성과 성향도 비슷하였다.
57) 明齋先生疑禮問答 권7 「祭禮」 “問 今人祭禮雖號禮法之家各自異行 至於一家 有四 宗而繼曾繼祖之宗子 欲一倣家禮而行之 獨繼高之宗子 堅執先世所行及俗禮而不欲行 或至繼曾以下亦然 則繼稱小宗當只行古禮於其家耶 抑從宗子而循俗也 (持平 朴世采) 答 所謂各自異行者 有家禮五禮儀及要訣等書之不同故也 當一從家禮 然後合於大一統 之義而無此弊也 然一家長上堅執先世所行 而得一說爲據不至非禮 則亦難斷 然獨變似 當就其中盡吾誠敬而已 若非禮而循俗者 則不可從也.” 20 역사학연구 제31집
윤증과 박세채의 교유 초기에는 주로 학문적인 것을 가지고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처음 서신 교류를 할 때의 내용이 춘추와 예기의 復讐 之義에 관한 것이고 禮에 관해 윤증과 주고받은 문답들이 대부분 1660년대 -1670년대 초반인 점을 보아서도 그렇다. 그러나 1670년대 후반 이후 회니시비와 노소분당의 와중에서는 정치적인 내용에 관한 서신과 만남이 많았으며 이때에는 주로 박세채가 송시열과 윤증, 소론과 노론을 중재하는 역할을 하였다. 윤증과 박세채의 성리학은 기본적으로 朱子와 이이의 사상에 기반하고 있 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 나아가 거기에 그치지 않고 務實과 實心을 강조하고 이황의 사상에 대해 포용적인 모습을 보이는 등 주자와 이이에만 머물지 않으 려는 모습도 공통점이 있다. 성리학에서의 윤증과 박세채의 교유는 성리학에 관한 저술, 특히 박세채의 저술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주로 心學的 내용과 학문하는 방법 등을 중심 으로 논의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윤증과 박세채는 모두 예학의 대가였다. 명재선생의례문답과 남계선생예 설, 그리고 두 사람이 서로 문답한 내용을 살펴보면 성리학과 마찬가지로 여 러 가지 공통점이 눈에 띈다. 김장생의 의례문해의 체제를 기본으로 하여 관·혼·상·제례를 중심으로 하면서 王朝禮를 첨가한 점, 내용에서 주자가례를 기본으로 하면서 古禮나 俗禮를 참작한 점 등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예학에는 약간의 차이점도 보이고 있는데 윤증이 상 례비요나 격몽요결처럼 우리나라의 禮인 속례를 적지 않게 참조한 반면 박 세채는 의례경전통해등 고례를 중시하는 측면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이러 한 두 사람의 예학과 예학적 특성 역시 서로의 학문적 교류를 통해서 형성되 고 풍부해져 갔던 것이다. 전체적으로 윤증과 박세채는 사상적으로 주자와 이이의 학문에 기반하다가 1680년 경신환국 이후 노소분당의 정치적 변화 속에서 소론으로 자정하면서 사상적 변화를 가져오는데 이는 자신들의 家學的 전통과 다양한 학문적 脈 때 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성혼→윤선거→윤증으로 이어지는 학문적 흐름과 윤근수→ 김상헌→박세채로 이어지는 학문의 흐름은 서로 결합하여 少論의 사상적 기반 이 되었는데 이를 상징적으로 나타내주는 것이 바로 윤증과 박세채의 학문적
윤증과 박세채의 학문적 교유 (고영진) 21
교유였던 것이다. 이제 두 사람의 교유와 우정을 시 한편으로 갈음하고 글을 마치고자 한다. 박화숙에게 답하다58)
빈 서재에서 졸다 일어나 멀거니 앉았노라니 내 벗의 편지 온 줄을 꿈이 먼저 알았구나 놀라 읽노라니 여러 날 떨어져 있는 것 위안이 되는데 자세히 보노라니 얼굴을 마주 대했을 때와 똑 같네 중흥을 이루리라 한숨 쉼이 어찌 다르랴 평생의 곧은 의논 그저 이렇게 들었노라 서쪽으로 돌아간 시편에 노래 불러 답하고 싶지만 당시 북궐을 슬피 바라보던 비애를 다하기는 어렵구나
논문투고일: 2007.09.15 심사완료일: 2007.10.01
58) 明齋遺稿 권2 「酬朴和叔世采」 “睡起空齋坐似尸 我朋書至夢先知 驚披乍慰離群日 細讀全如對面時 太息中興能見否 平生讜議只聞斯 謳吟欲和西歸什 難盡當年北望悲.” 22 역사학연구 제31집
<부표 1> 明齋先生疑禮問答에서의 윤증과 박세채의 문답 내용 대항목 소항목 문답 내용 通禮宗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