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3월 호 '여성(女性)'에 실린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정현웅(鄭玄雄) 그림이 실려 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白石, 1912~1996)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한국인이라면 거의 다 아는 시, 백석(1912~1996)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이다. 백석이 서울 청진동에 살던 연인 ‘자야’에게 북으로, 만주로, 말 그대로 ‘깊은 산골로’ 가자고 조르던 시기 미농지에 써줬다고 알려진 시다. 시인은 1938년 초 어느 눈 내리는 겨울에 이 시를 썼을 테고, 그해 잡지 ‘여성’ 3월 호에 발표했다.
그런데 이 시가 처음 세상에 나올 때 아름다운 채색 그림이 함께 실려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당나귀 위에 그은 뭉툭한 선 하나와 여백(눈을 표현했다)으로 ‘푹푹 눈 내리는 밤’을 절묘하게 그린 그림이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에는 푹푹 눈이 나린다”는 구절로 시인이 담아낸 ‘근원을 알 수 없는 깊은 그리움’을 이토록 잘 드러낼 수 있을까 싶다. 그림을 그린 이는 화가 정현웅(鄭玄雄, 1910~1976). 지금은 이름조차 생소하지만 당대엔 최고 인기 삽화가였다.
*브로맨스(Bromance) : 형제(brother)와 로맨스(romance)가 결합된 조어로 남자들 사이의 진한 유대와 우정을 지칭하는 말.
◇신문 삽화계의 스타, 정현웅
정현웅의 부친은 영친왕의 아들, 이우 왕자의 가정교사였다. 그래서 궁에서 일하는 사람이 많이 살던 궁정동(지금의 효자동)에서 태어났다. 명문 경성제2고등보통학교(경복고 전신)에서 일본인 미술교사에게 처음 유화를 배웠다. 학창 시절 이미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입선해 재능을 인정받았다. 후에도 선전에 여러 차례 입선해 서민의 삶과 애환을 담은 소박한 작품을 남겼다. 비록 도록에 흑백 도판으로만 남아 있지만 말이다. 그중 1940년 작 ‘대합실에서’는 리얼리즘 화풍이 뚜렷한 작품이다. ‘삼등 열차’로 유명한 프랑스 화가 ‘도미에’가 한국에도 있었나 싶을 정도로 인상적이다.
정현웅의 1940년 작 ‘대합실에서’. 리얼리즘 화풍이 뚜렷하다.
선전에 유화 18점을 발표했지만 한국 전쟁을 거치는 동안 거의 소실됐다. 정현웅은 전쟁 통에 궁정동 집을 빼앗기고 떠돌이 생활을 했다. 그러다 집에 돌아와 보니, 모든 작품이 불쏘시개로 태워진 상태였다. 포화 속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고 한다. 이중섭 등 당시 유명 작가의 수많은 작품이 불쏘시개로 쓰였다는 얘기가 많다.
전해지는 정현웅의 유화는 딱 한 점뿐이다. 1928년 작 ‘소녀상’. 그가 불과 18세 때 그린 작품이다. 그림 속 소녀는 정현웅의 어린 누이다. 앳된 소녀는 다소곳하면서도, 걸상에 옆으로 기대앉아 반듯하게 정면을 응시하는 당찬 모습을 보인다. 이 작품은 누이 집에 있었기에 전화(戰火)를 피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유족은 3년 전 이 그림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정현웅의 유화 작품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소녀상'. 어린 누이를 그린 그림이다.
정현웅은 화가이기도 했지만 삽화가, 장정가로 더욱 명성을 누렸다. 1935년 스물다섯에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원래는 광고부 직원이었는데, 이무영의 소설 ‘먼동이 틀 때’ 삽화를 그리던 이마동이 병원 신세를 지게 되면서 정현웅이 ‘대타’로 투입됐다. 그런데 이 대타 삽화가가 ‘히트’를 쳤다. “혜성과 같이 출현하여 삽화계에 폭탄적 경이를 이루었다”는 평가까지 나왔으니까.
이후 그는 한용운의 ‘박명’, 이태준의 ‘청춘무성’, 박태원의 ‘삼국지’ 등 수많은 유명 신문 소설의 삽화를 그렸다. 당시 신문 소설은 누가 글을 쓰느냐에 따라 신문 판매 부수를 결정할 만큼 초미의 관심사였다. 신문 소설에 삽화를 그리는 삽화가 역시 어떤 예술가보다 높은 대중적 파급력을 지녔다. 요즘으로 치자면 시청률 대박인 드라마와 인기 웹툰 같은 위상이었다고나 할까.
◇옆자리 동료에서 예술 동지로
정현웅은 1936년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동아일보가 무기 정간당한 후 사직하고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이후 조선일보를 비롯해 자매지 ‘조광’ ‘여성’ 등의 수많은 삽화를 그렸다.
이곳에서 정현웅은 운명의 동료를 만난다. 바로 백석이다. 정현웅이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 ‘조선일보 맨’이었으나 시에 전념하겠다고 사표를 내고 함흥으로 갔던 백석이 다시 돌아왔다. 자매지 ‘여성’의 편집장으로! ‘여성’은 조선일보에서 1936년 4월 창간한 월간 여성지로, 나올 때마다 매진 행렬을 기록할 만큼 인기가 높았다. 이 잡지를 백석과 정현웅이 함께 만들었다.
백석은 사슴처럼 고아했던 백석, 희고 잘 생긴 백석, 손잡이를 손수건으로 감아 열 정도로 결벽증 있던 백석. 예나 지금이나 시인들이 사랑하는 시인! 그가 조선일보 출판부에서 늘 정현웅의 옆자리에 앉아 열심히 사진을 오려 붙이며 편집을 하고 있었다.
1939년 7월 호 '문장'지에 실린 정현웅의 '미스터 백석'. 옆자리에서 관찰하며 그린 백석의 옆모습이 인상적이다.
“미스터 백석은 바로 내 오른쪽 옆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사진을 오리기도 하고, 와리쓰게(레이아웃)도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밤낮 미스터 백석의 심각한 프로필만 보게 된다. 미스터 백석의 프로필은 조상(彫像)과 같이 아름답다. 미스터 백석은 서반아(스페인) 사람도 같고, 필리핀 사람도 같다… 미스터 백석에게 서반아 투우사의 옷을 입히면 꼭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현웅이 백석의 옆얼굴(프로필)을 그려, 잡지 ‘문장’에 발표한 글의 일부이다. 희대의 브로맨스가 따로 없다.
‘여성’은 이들이 함께 만든 잡지인 만큼 아름다운 시와 그림이 그득했다. 모윤숙의 ‘폭풍의 집’, 백석의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등 많은 시가 아름다운 채색 시화(詩畵)로 탄생됐다. 백석과 정현웅이 직접 콤비를 이뤄 시도 쓰고 그림도 그렸으니, 그것이 바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였다. 이 아름다운 시화의 전통을 우리는 왜 오랫동안 잊어버린 것일까. 이 시화들이 언젠가 책으로 다시 태어나길 고대해 본다. 이왕이면 학교에서 이 시를 가르칠 때 그림을 함께 보여 줬으면 한다.
영어 교사 시절의 백석./ 정현웅과 아내 남궁요안나의 신혼 여행 사진.
◇북으로 간 두 천재
동료로 둘의 만남은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백석은 다시 “시 100편을 써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만주로 가버렸다. 1940년의 일이다. 그리고는 “잘 도착했다”는 소식을 친구에게 전하듯, ‘북방에서 - 정현웅에게'라는 시를 써서 잡지 ‘문장’에 발표했다. 백석이 사람 이름을 제목에 달고 헌정한 유일한 시다.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를 숙신을 발해를 여진을 요를 금을/ 흥안령을 음산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 숭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이들의 웅혼하고 장대하고 고원한 감각은 다 어디로 떠났을까.
평안북도 정주가 고향인 백석은 북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정현웅은 한국전쟁 중 월북했다. 월북한 천재 예술가들이 일부 숙청되지 않고 있던 1957년, 정현웅은 백석이 쓴 동시집 ‘집게네 네 형제’를 장정하면서 뒤표지에 백석의 초상 드로잉을 한 번 더 남겼다. 멋들어진 트렌치코트를 입고, 생각에 잠긴 듯 측면을 응시하는 묵직한 중년의 백석이 그림에 담겼다.
백석이 펴낸 동시집 '집게네 네 형제'(1957) 뒤표지에 실린 중년의 백석 초상. 월북 후 정현웅이 그린 그림이다.
그 무렵이 마지막이었던 듯하다. 백석이 그나마 백석다움을 유지할 수 있었던 때가. 1958년 백석은 숙청되어 유명한 오지, 삼수갑산으로 쫓겨나 양치기 생활을 했다. 1996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기나긴 세월이었다. 정현웅은 북에서 출판 일도 하고, 고구려 고분벽화를 모사하는 일도 10년 가까이 했다. 1976년 폐암으로 예순여섯 생을 마감했다.
둘은 북으로 떠났지만, 그들의 인연은 남쪽에 남았다. 백석의 여인 ‘자야’는 기생 출신으로 평생 홀로 살며 고급 요릿집 대원각을 운영해 이룬 엄청난 재산을 불교계에 기증했다. 서울 성북동 길상사가 그녀의 재산이었다.
정현웅의 아내와 가족도 남았다. 이화여전 피아노과 출신의 아내 남궁요안나는 과외를 해서 번 돈으로 홀로 사남매를 훌륭하게 키웠다. 차남 정지석은 한미약품 공동 설립자다. 장남과 삼남은 미국에서 각각 의사, 건축가, 딸은 첼리스트가 됐다. 그의 손자는 자동차 회사 르노 프랑스 본사에서 10여년 이상 자동차를 디자인했다. 화가의 피는 손자에게로 이어진 모양이다.
백석과 정현웅. 우리 근현대사를 관통한 두 천재는 떠났지만, 언론사 동료로서 예술 동지로서 그들이 남긴 협업은 예술이란 이름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이 글에 소개된 작품은 2021년 5월 30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리는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에서 전시되었던 작품다.
정현웅의 1963년 작 '소몰이'.
[출처: 조선일보 2021년 03월 13일 [아무튼, 주말][김인혜의 살롱 드 경성(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