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강진 무위사(無爲寺) 답사를 마치고/안성환
무위사는 우리나라 남단 월출산의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강진의 탐진강을 따라 깊숙이 들어가면 주변은 아직도 목화를 수놓은 듯 하얀 눈들이 덤성덤성 무위사를 에워싸고 있었다. 야윈 겨울을 늠름한 자태로 이기고 있는 모습은 흡사 봄을 기다리기 위한 모습인 듯 했다. 내가 이곳을 답사지로 선택한 이유는 극락보전(극락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전각. 협시보살로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또는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모셔진다)의 건축과 경 내 불화(부처, 보살의 그림)를 보기 위해서다. 모두 국보와 보물들이다.
먼저 일주문을 통과하면 넓은 마당에 홀로 우뚝 서있는 극락전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여기 극락전은 국보13호이다. 고결한 자태로 그 기를 보여주며 아주 편안한 느낌을 준다. 미학과 건축의 가치를 담고 있는 곳이 분명했다. 극락전은 정면3칸 측면3칸 맞배지붕으로 단정하고 아담하였다.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 조선 초기에 지은 건물로 남부지방의 대표적인 맞배지붕이라고 한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화려하지 않지만 단아하면서 묵직한 울림을 전해준다. 건축의 세부적인 기법은 평면과 정면 모두 비례를 주어 사학계에서는 건축적 가치가 있다고 한다. 무위사가 이토록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건물전체가 소박하고 간결한 미학을 완성해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건축적 특징은 맞배지붕(지붕의 완각이 수직으로 잘려진 지붕. 옆면이 ‘∧’ 자 모양으로 된 지붕.)과 주심포양식(한옥건물 기둥머리 바로 위에 짜 놓은 공포)이다. 맞배지붕은 화려해 보이는 추녀(한옥건물에 네모지고 끝이 번쩍 들린, 처마의 네 귀에 있는 큰 서까래) 없이 용마루(지붕 가운데 부분에 있는 가장 높은 수평 마루) 까지 단순하게 삼각형으로 이루어진 형태이다. 특히 측면에서 보면 기둥과 보가 만나는 공간분할이 절제 되어 있으면서도 건축적으로 우수한 평가를 받고 있었다. 기둥과 지붕은 완벽한 일대일 비율이라 정면에서 보면 마치 잘 지은 초가삼간처럼 아주 아늑해 보이고 측면에서 보면 마치 큰 궁전을 보는 느낌처럼 무게감을 준다. 정말 주저앉아 놀고 싶을 정도의 감동을 주는 곳임에 분명했다. 사실 무위사는 긴 설명이 필요 없다. 보이는 그대로 보고 있으면 저절로 느낌이 온다. 더 놀라운 일은 그 시대에 전문적인 건축학을 학습하는 곳도 없었을 터인데 어떻게 이렇게 완벽한 설계를 할 수 있었을까 탄복 할 따름이다.
극락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경내는 부처님의 미소로 가득차 있다. 기록에는 일반적으로 극락보전에는 아미타불(서방 정토의 부처의 이름. 이 부처를 염하면 죽은 뒤 극락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 함) 좌상 옆으로 대세지보살(아미타불의 오른쪽에 있는 보살. 지혜문을 맡고 있으며 삼도의 중생을 제도하는 무상한 힘이 있다고 하는 보살)과 관세음보살(아미타불의 왼편에서 교화를 돕는 보살, 중생이 괴로울 때 그 이름을 외면 곧 구제한다고 함)이 있는데 여기는 지장보살(석가의 부탁을 받고, 부처 없는 세계에 머물면서 육도의 중생을 교화한다는 보살. 왼손에는 연꽃을, 오른손에는 보주를 들고 있는 모습임)과 관세음보살이 있다. 이유는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사이에 엄청 많은 사람들이 희생이 되었기에 그 혼을 기리기 위해 이렇게 모셨다고 한다.
부처 뒤에 후불벽화가 나오는데 무위사 기록에 의하면 파랑새가 그렸다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벽화를 자세히 보면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그리다가 만 것처럼 비어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는 벽화를 그리던 파랑새가 인기척을 느끼고 홀연히 사라지는 바람에 눈동자를 완성하지 못했다고 한다. 한참을 보고 있노라면 당장 붓을 들고 덧칠을 해 주고 싶은 심정이다. 더 꼼꼼히 보면 모두 완벽한 불화인데 왜 관세음보살의 눈동자만 저렇게 묽은 색으로 미완성으로 남아 있을까. 참 궁금했다. 잠시 단원 김홍도 작품을 연상해 봤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인 ‘씨름’ 만 봐도 오른쪽 아래 구석에 있는 구경꾼의 왼팔에 오른손이 오른팔에 왼손을 붙여 놨다. 왜 김홍도는 이렇게 자기의 그림에 한 점도 아니도 여러 점에 이같이 슬그머니 틀리게 그려 놨을까? 그 시대에 틀린 그림 찾기 놀이용 그림은 분명 아닐 텐데. 사실 김홍도는 벌레의 속 털까지 섬세하게 그리는 화가이다. 이런 그가 진짜 실수를 했을까? 진짜 실수 이었다면 해석은 완전히 달라 질 수 있다. 만약 그런 경우라면 절대 누군가가 복사한 그림이 아니라 원본이라 우선 판단된다. 왜냐하면 진짜 실수를 했다면 잘못된 부분을 고쳐 그렸을 테니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무위사 불화의 관세음보살의 눈의 미완성은 뭘 의미할까? 혹자는 600여년의 세월동안 뭉개졌거나 퇴색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 전체를 살펴보면 그렇게 보기에는 좀 거리가 멀어 보였다. 단순한 나의 생각을 이야기 하면 여기에는 작가의 의도가 숨어 있는듯 했다. 비움의 미학으로 생각했다. 허점을 남김으로 그 허점의 몫을 보는이로 하여금 생각을 유도하는 것은 아닌지 ‘시즉화 화즉시’ 즉 시를 보면 그림이 생각나고 그림을 보면 시가 생각나는 느낌, 아마 벽화의 관세음보살 불화도 눈의 미완성이었기에 옛 선현들은 저 단점에 파랑새를 끌어 들여 더 아름다운 지혜를 만들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번 무위사 불화를 통해 오늘날 우리는 평론이란 셈 치고 흠집 내기 좋아하는 이 시대에 본받을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번 극락보전을 감상하는 데는 울산문화아카데미에서 현장답사시 채무기교수님과 함께 하면서 익힌 얕은 식견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2025년 2월 15일 답사를 마치고 안성환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