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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중국 진나라 끝무렵에 초나라의 항우와 한나라의 유방이 천하를 얻으려고 서로 다툴 때에, 항우가
유방을 불러다가 잡아서 죽이려고 홍문 땅에서 잔치를 벌였던 이야기를 단가로 짠 것인데, 홍문의
연회로 불리는 이 사건은 초한지의 가장 극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첫 귀절을 따서 '천하태평가'라고도 한다. 영웅들의 거동을 그린 것인 만큼 가락도 장엄하다.
중몰이 장단에 우조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일제강점기의 동편제의 거두 송만갑명창의 수제자 김정문
이 잘 불렀다고 한다.
[사설]
천하가 태평허면 언무수순허려니와, 시절이 분요허면 포연탄우 만날 줄을
사람마다 아는 바라. 진나라 모진 정사 맹호 독사 심하더니 사슴조차 잃단
말가. 초매의 영웅들이 질족자으 뜻을 두고 곳곳이 일어날저, 강동의 성낸
범과 패택으 잠긴 용이 각자 기병, 힘을 모아 진나라를 멸할 적에, 선입정
관중자면 왕허리라고, 깊은 언약이 어젠듯 오날인듯, 어찌타 초 패왕은 당
시 세력 힘만 믿고 배은망의허단 말가? 무죄한 패공이를 아무리 살해코저
홍문으다 설연을 헌들, 하나님이 내신 사람 천붕우출이라고 벗어날 길 없
을소냐. 유능제강 옛 말쌈을 일로 보아 알리로다. 위의를 살펴보니 백모,
황월, 장창, 대검, 청도, 금고, 대기치며, 영기, 방패, 숙정패, 주장, 능장,
사모창을 좌우로 늘어세우고, 중군의 주자기를 반공중 높이 추여 달고, 좌
상으가 앉은 영웅 누구라 누구 모아들고. 녹포 홍대 호수입으 팔척 장검을
비겼으니, 역발산 기개세라. 당시 호걸 초 패왕은 제일 좌상으로 앉으시고,
혹포 윤건에다가 옥결을 차시고, 창안학발에 표연히 앉었으니, 가빈칠십으
호기계으 신기모사 자부를 하던 범 증이가 분명허다. 동벽의 황금 전포 황
금 투구 조대를 둘러 띠고 좌수의 홀기를 들고, 우수으 칠성검을 두렷이 비
겼으니, 의리있고 사정없는 항 백이가 분명허구나. 서편에 앉은 영재가 정
신이 호매허고, 장검을 어루만져 실수를 기달리던 홍포은갑 저 장사는 항장
일시가 분명허다.위엄이 늠름, 살기가 등등, 이름이 모두 다 잔치가 될망정
어느 뉘가 아니 두려할거나, 대장부 평생 소원이 극락광야 너룬 뜰의 금잔듸
가 자르를 깔린디 이리뛰고 저리 뛰고 흔들 흔들고 거드렁거리고 놀아 보자.
[주석]
홍문연(鴻門宴) : 진(秦)나라 끝무렵에 섬서성 임동현 동쪽에 있는 홍구(鴻溝)의 군문(軍門)에서 항 우가 유 방을 불러다가 죽이려고 벌인 잔치. 그때에 진나라의 백성들은 가혹한 정치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초나라의 회왕이 진나라의 수도인 관중에 가장 먼저 들어가 다스리는 사람을 그곳의 임금자리에 앉히겠다고 하자, 패에서 군사를 일으킨 유 방이 함께 진나라를 치기로 했던 항 우를 제치고 먼저 관중으로 들어가 진나라를 항복시켰으므로, 양자강의 동쪽에 근거를 둔 항 우는 이에 화가 나서 제 힘만 믿고 스스로 서초의 패왕이라고 일컬었다. 그런데 항 우의 모사인 범 중이 유 방을 살려 두는 것은 뒤에 가서 좋지 않다고 하여, 홍문에다 잔치를 열고 항 장이 칼춤을 추는 체하면서 유 방을 죽이기로 하였으나, 항 우의 삼촌인 항 백의 도움으로 유 방은 목숨을 건졌다.
언무수순 -언무수문(偃武修文) : 칼쓰기보다는 글을 더 열심히 익히고.
분요(紛擾)허면 : 어수선하고 어지러우면.
포연탄우(砲煙彈雨) : ‘치열한 전쟁’을 비유한 말.
사슴 : 진(秦)나라의 숭상 조 고(趙 高)가 이세(二世) 황제와 신하들이 자기를 어떻게 여기는지를 알아 보려고 사슴을 두고 말이라고 하니, 황제는 어찌 사슴을 말이라고 하느냐고 신하들에게 물어보자, 어떤 신하는 사슴이라고 대답하고 어떤 신하는 말이라고 대답하니, 조 고는 사슴이라고 말한 사람은 몰래 죽이고, 말이라고 말한 사람은 잘 대우했다. 그러고는 실권을 잡았는데, 그 뒤로는 ‘천하’를 ‘사슴’에 비유하여 말하게 되었다.
초매의 영웅들 : 초야(草野)의 영웅들, 진나라 말기에 천하가 어지러운 틈을 타서 사방에서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에 맞선 많은 이름없던 영웅들을 빗대어 한 말이다.
질족자(疾足者) : 빨리 달리는 사람. 곧, 빨리 달릴 수 있어서 천하를 얻을 수 있는 사람.
강동(江東) : 양자강의 동쪽 지방. 여기서는 초나라의 항 우가 군사를 일으킨 곳을 말한다.
성낸 범 : 항 우를 가리키는 말.
패택(沛澤)의 잠긴 용 : ‘패택’은 강서성 서주현의 패 지방에 있는 늪을 가리키며, ‘용’은 그의 어머니가 늪가에서 자다가 용을 만나는 태몽을 꾸고 낳게 되었다고 하는, 한나라 고조가 된 유 방을 말한다.
기병(起兵) : 군대를 일으켜.
선입정관중자(先入定關中者) : 진나라의 서울인 관중에 먼저 들어가는 사람.
깊은 언약 : 항 우와 유 방 두 사람이 관중을 향하여 떠나기에 앞서 의형제를 맺고는, 먼저 들어가게 되는 사람이 왕이 되기로 굳게 맺은 약속.
초(楚) 패왕(覇王) : 항 우. 진나라가 망한 뒤에 나라 이름을 ‘초’라 하고 스스로 패왕이라 일컬었다.
망의(忘義)허단 : 약속을 저바리더라는.
패공(沛公) : 한나라의 고조가 된 유 방.
설연(設宴) : 잔치를 베풂.
천붕우출(天崩又出)이라 : 하늘이 무너져도 또 솟아난다고 했으니.
유능제강(柔能制剛) : 부드러운 것이 오히려 굳센 것을 누름. 병법의 하나로, 약하게 보이어 적이 소홀해지는 틈을 타서 손쉽게 쳐부수는 전략.
위의(威儀) : 위엄있는 거동.
백모(白矛) : 하얀 창.
황월(黃鉞) : 누런 도끼.
청도(淸道) : 군대가 행군할 때에 맨 앞에 세우던 깃발.
금고 : 금고기(金鼓旗). 군악대의 하나인 취타수를 지휘하는 데에 쓰던 군기.
대기치(大旗幟) : 진중(陣中)에서 방위를 나타내던 깃발.
영기(令旗) : 푸른 비단 바탕에 붉게 ‘영(令)’자를 새겨 넣어 군령을 전하던 깃발.
숙정패(肅靜牌) : 군령으로 사형을 집행할 때에 다른 사람이 떠들지 못하도록 ‘숙’자와 ‘정’자를 적어서 세워 놓던 나무 패.
주장(朱杖) : 붉은 칠을 한 몽둥이. 매질을 하거나 주리를 틀 때에 쓰던 것인데, 무기로도 썼다.
능장(稜杖) : 출입을 막으려고 대궐 문에 서로 어긋나게 가로질러 두던 둥근 나무.
사모창(蛇矛槍) : 끝이 뱀의 머리처럼 세모꼴로 생긴 창.
중군(中軍) : 가운데에 자리잡은 군대.
수자기(帥字旗) : 진중이나 영문의 뜰에 세우던, 대장에 딸린 깃발.
호수입→호수염(虎鬚髥) : 호랑이 수염. 곧, 뻗친 수염을 말함.
역발산(力拔山) 기개세(氣世) : 힘은 산을 뽑고 기운은 세상을 덮을 만하다. 항 우가 지은 시 「해하가(垓下歌)」의 한 귀절.
흑포(黑袍) : 검은 비단으로 지은 도포.
윤건(綸巾) : 비단으로 만든 머리 쓰개. 보통 은자(隱者)들이 썼다.
옥결(玉) : ‘옥패’라고도 하는, 허리에 차고 다니는 옥.
창안학발(蒼顔鶴髮) : 창백한 얼굴에 흰 머리.
표연(飄然)히 : 속세를 떠난 듯이.
가빈칠십(家貧七十)으 호기계(好奇計) : 기묘한 계략을 잘 쓰던 범 증이 나이 칠십이 되어서야 항 우의 모사(謀士)가 되었던 일을 가리킴.
신기모사(神機謀士) : 하늘의 조짐을 귀신처럼 알아내는 모사.
범 증(范 增) : 초나라 항 우의 모신으로, 항 우로부터 아버지 다음으로 친애하고 존경하는 사람이란 뜻의 존칭어인 ‘아부(亞父)‘라고 불리었으며, 홍문의 잔치에서 유 방을 죽이도록 했으나 뜻을 이르지 못하고, 뒤에 항 우와 사이가 벌어져서 팽성에서 죽었다.
동벽(東壁) : 동쪽 벽.
조대(帶) : 검은 띠.
홀기→홀(笏) : 벼슬아치가 임금을 만날 때에 조복에 갖추어 손에 쥐던 것인데, 일품에서 사품까지는 상아로, 오품 아래로는 나무로 만든 것을 썼다.
칠성검(七星劍) : 북두칠성을 새겨 넣은 칼로, 춘추 시대 때에 초나라 사람인 오 자서가 이 칼을 썼다고 한다.
항 백(項 伯) : 항 우의 숙부. 홍문 잔치 때에 범 증의 지시를 받은 항 장이 칼춤을 추며 유 방을 죽이려 하자, 항 백이 칼춤을 추며 유 방을 막아 주어서 항 장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영재(英材) :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
호매(豪邁) : 호기가 있고 영특한데. .
홍포은갑(紅袍銀甲) : 붉은 도포에 은빛 갑옷.
[유방! 건달이 천하 통일의 위업을 닦기까지]
유방은 기원전 256년 패현(沛縣)에서 출생했다. 패현은 현재 산동반도 남쪽에 위치한 강소성(江蘇省) 서주시의 풍현(豊縣) 마을로, 상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 전까지 이 지역은 초나라의 영토였다. 유방은 어린 시절에는 큰형의 집에 얹혀살았고 젊은 시절에는 이른바 '유협(遊俠)'의 무리에 끼어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유협은 문자 상으로는 무리를 지어 다니는 협객들을 의미하지만 현대적인 해석은 '건달'이다.
그는 나이가 들어 철이 났는지 고향으로 돌아와 정장(亭長)으로 자리를 잡았다. 정(亭)은 10리마다 하나씩 설치된 공공 숙박시설로, 그리 많지 않은 정졸(亭卒)이 배치되어 기초적인 치안기관을 겸하는 곳이었다. 정장은 현재의 파출소장 정도 되는 직책인데, 지역의 유력자가 관리들에게 돈을 내고 사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은 가능한 정확하게 사실을 기록하려고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때문인지 그는 한나라의 관료 출신이었지만, 나라의 창업자라 해도 이 시기의 유방에 대해서는 냉정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매일같이 집안에 틀어박혀 하는 일 없이 먹고 놀기만을 즐기면서 입으로만 호언장담을 하였으며 술과 여자를 매우 밝혔다.
항우가 몰락한 국가와 가문의 원한을 갚고자 진나라 타도의 기치를 든 반면, 유방은 농민 반란에 참여하려는 의사를 별로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반란군을 이끌게 된 발단은 시황제가 시작한 만리장성 공사였다.
이 대규모 토목사업은 제2대 황제 호해 시절에도 계속되었는데, 아무리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라고 해도 노동력이 무한정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진나라는 죄수들을 모두 축성공사에 동원했다.
호해가 즉위한 바로 그해, 정장이었던 유방에게 죄수 호송 명령이 떨어졌다. 그런데 유방이 죄수들을 호송하던 도중에 다수의 탈주자가 발생하고 말았다. 가혹한 법률로 유지되던 진나라인지라 유방은 범죄자로 몰려 중형을 받게 될 입장이 되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술을 거나하게 먹고 나서 죄수들을 모두 풀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집으로 돌아올 수가 없게 된 유방은 떠돌다 패현 주변의 지형이 험한 곳에 머물게 되었다. 이때 죄수들 중에서 오갈 데가 없던 젊은이들이 유방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유방은 그들을 데리고 일종의 도적단을 구성했다. 공교롭게 바로 이 시기에 진승이 난을 일으켰다.
유방은 졸지에 반란군을 이끌게 되었다. 여기에 고향 친구들과 혈기 넘치는 젊은 사람들이 합세하자 이럭저럭 300명의 병력이 되었다. 유방은 패현의 현령을 살해하고 스스로 패공(沛公)이라고 칭했다.
유방과 항우는 초나라 출신의 동향인이었으며, 군사를 일으킨 시기도 비슷했다. 초기의 지휘자는 항량(項梁)이었다. 항량은 항우의 숙부로, 어릴 적에 부모를 잃은 항우를 키운 사람이다. 항량은 그동안 숨어 지내던 왕족 심(心)을 찾아내 왕으로 옹립했다.
심은 회왕(懷王) 의 손자이다. 초나라는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할 때 마지막까지 저항한 나라이다. 회왕은 수많은 일화를 남겼던 낭만적인 통치자로 초나라 사람들에게는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항량은 심을 할아버지와 같은 회왕(懷王)으로 봉해 초나라 사람들의 정서를 자극했다.
초 회왕은 비록 허수아비 왕이었지만 그동안 진나라의 폭정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질서를 상징하는 존재로 부상했다. 반란은 초나라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었고 스스로 왕을 칭하는 인물들이 많았기 때문에 항량은 반란의 명분에서 다른 경쟁자들을 압도했다.
그는 명목상으로는 회왕 휘하에서 군사 작전을 주도하는 상장군이었으며 유방은 그 휘하의 장군 중 하나였다. 이때에 유방은 이미 불혹의 나이를 넘어서고 있었으며 항우는 스물여섯 살이었다.
기원전 208년 초나라의 반란군은 진나라의 수도 함양(咸陽)을 향해 기세 좋게 북상을 시작했다. 군대는 둘로 나뉘어 한쪽은 항량이, 다른 쪽은 항우와 유방의 연합부대가 양쪽에서 밀고 올라갔다. 이들은 진군하면서 그 지역의 반란군을 흡수해 점차 군세를 키우며 기세를 올렸으나 항량이 진나라의 장군 장한(章邯)의 반격을 받아 전사하면서 일단 주춤했다.
유방과 항우의 경쟁 관계에서 먼저 두각을 나타낸 쪽은 항우였다. 항량의 후임으로 상장군에 오른 송의(宋義)라는 장수가 진나라의 반격으로 위기에 처한 조(趙)나라의 반란군을 나 몰라라 하자 항우는 송의를 죽이고 자신이 상장군이 되어 조나라에 대한 구원에 나섰다.
항우가 소수의 병력으로 진나라의 대군에 대승을 거두자 이제 그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높아지게 되었다. 각지의 반군이 항우의 휘하로 집결하고 진나라의 장수들이 잇달아 투항했다. 그들 중에는 지난해 항량을 패사시킨 장한도 있었다. 이 시기에 유방은 항우 휘하에 있던 여러 부장(副將) 중 하나일 뿐이었다.
항우의 유방의 운명을 가른 한 가지
유방이 급속도로 부상하게 된 계기는 진나라의 왕궁에서 발생한 반역 사건이었다. 진나라의 실력자인 환관 조고는 승상의 자리까지 차지했지만 이 정도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세운 황제 호해를 살해하고 호해의 조카인 공자 영(嬰)을 진왕(秦王)으로 세웠다.
이때에 황제로 칭하지 못했던 이유는 진나라가 거의 무너져 겨우 수도 함양 인근의 관중(關中) 지역만을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왕 영은 망국의 원흉이었던 조고를 속여 단신으로 오도록 하여 직접 칼로 찔러 살해하고 그의 일가족까지 모두 참살했다.
진나라에서 이러한 혼란이 계속되자 초 회왕은 최종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누구든 진나라의 수도 함양에 가장 먼저 입성하는 장수를 관중의 왕으로 봉하겠다고 선언했다. 유방이 일약 스타가 된 것은 바로 이 경쟁에서 승리하면서였다.
유방은 남쪽으로부터 곧바로 북상해 별다른 어려움 없이 함양에 입성하여 진왕 영의 항복을 받고 옥새를 넘겨받았다. 반면 동쪽에서부터 진격한 항우는 진나라의 산발적인 저항을 분쇄해야 했으며 이 때문에 진격은 더디기만 했다.
함양에 진주했을 때 유방의 처신은 모든 정치가들이 참고해야 할 정도로 기가 막혔다. 그는 왕궁과 창고를 폐쇄해 약탈을 방지하여 민심을 안심시킨 다음, 유력자들을 모아놓고 진나라의 법률 체제를 폐지하고 이른바 '약법삼장(弱法三章)'을 공표했다. 살인, 상해, 절도, 이 세 가지의 범죄만을 처벌한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진나라의 가혹한 법률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이는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유방의 개인적인 기질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일자무식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가난해서 공부를 못한 것이 아니라 꽤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음에도 당시 일반적으로 교사를 겸하던 유학자들을 경멸했기 때문에 하지 않은 것뿐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파락호 생활을 할 때 유학자들이 머리에 쓰고 다니는 망건을 빼앗아 거기에 소변을 보곤 했다.
그는 법가(法家)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서민의 입장에서 법가에 입각한 진나라의 엄격한 통치가 만들어 낸 부정적인 결과를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유방은 비록 천하를 얻은 후에는 통치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유가와 법가의 학자들을 등용하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당시의 일반 서민들과 마찬가지로 도가(道家)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도가의 정치철학은 한마디로 '최소의 정치가 최고의 정치'라고 할 수 있다.
유방이 부드러운 정치로 민심을 크게 얻은 반면 그보다 40여 일 늦게 함양에 입성한 항우는 졸렬한 처신으로 스스로 위신을 추락시켰다. 그는 사람들의 동정을 받던 진왕 영을 처형했을 뿐 아니라 왕족들을 모두 몰살하고 왕실의 보물과 여인들을 약탈했으며 아방궁(阿房宮)을 불태워 버렸다. 또한 시황제가 묻힌 여산릉(驪山陵)을 파헤쳐 부장된 보물까지 반출했다.
항우는 회왕을 의제(義帝)로 옹립하면서 스스로 패왕(覇王)이라고 칭했다. 명칭 자체가 과거 춘추 시대에 여러 나라를 누르고 권력을 잡은 통치자를 의미하는 패자(覇者)와 전국 시대 각 나라의 통치자를 칭하는 왕(王)을 합쳐서 만든 것이니 상당히 복고적인 명칭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칭호에서만 복고적인 취향을 보인 것이 아니라 진나라를 멸하는 데 공을 세운 18명에게 왕(王)의 칭호를 주고 지역을 분할해 봉토를 나누어주어 전국 시대로 회귀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패공(沛公) 유방 역시 이 18명의 왕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에게 주어진 봉토는 약속되었던 관중의 땅이 아니라 그 귀퉁이에 붙어 있는 좁은 땅 한중(漢中)이었다. 그렇다고 유방이 대놓고 불만을 표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유방의 휘하 병력은 10만 정도였는데 반해 항우는 40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함양에 입성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유방에게 꼭 부정적인 상황인 것만은 아니었다. 항우가 시황제를 대신한 오만한 권력자로 처세하는 동안 유방은 사람 좋은 '형님'의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항우가 세운 질서는 시황제가 타파했던 구질서로 복귀한 것이었으며 결과적으로는 아둔한 시행착오였다. 인간의 본성은 수백 년 전이나 그 당시에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전국 시대와 마찬가지로 군웅들 사이에서 크고 작은 다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들 중 가장 위험한 인물은 바로 정치에는 관심 없고 주색잡기에만 몰두하고 있는 듯 보였던 한왕(漢王) 유방이었다.
그는 바로 다음 해인 기원전 205년부터 스스로 자신이 받았어야 했을 봉토라고 믿던 관중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관중을 나누어가진 사람들은 항복한 진나라의 장수들이라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유방은 비교적 용이하게 이 지역을 접수해 나갔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항우는 다시 한 번 황제 시해라는 결정적인 자충수를 두고 말았다.
그가 황제로 추대했던 의제(義帝)는 군주로서 훌륭한 품성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천하가 안정되자 의제는 점차 민중들의 지지를 얻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스스로 군주로서의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항우에게는 의제의 존재 자체가 큰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항우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사고 과정이 상대적으로 단순한 편이었다. 그는 자신만큼이나 단순한 사고 체계를 가진 영포(英布)를 시켜 의제를 살해했다. 의제가 살해되자 민심이 크게 동요했다.
이러한 절호의 기회를 놓칠 유방이 아니었다. 그는 정성스럽게 의제의 제사를 지내어 동요하고 있는 민심을 자신의 편으로 쏠리게 한 다음 제후들에게 자신과 함께 궐기해서 황제를 살해한 역적 항우를 토벌하자는 격문을 띄웠다. 여러 제후들이 이에 동조해 휘하에 집결한 병력이 순식간에 60만을 돌파하자 유방은 기세가 한껏 올랐다.
때마침 항우는 제(濟)나라에서 발생한 내전을 수습하기 위해서 출병 중이었다. 유방은 초나라가 새로운 수도로 정해놓은 팽성(彭城)을 점령해서 그동안 항우가 갖은 악담을 들으며 모아놓은 보물과 여인들을 가로챘다. 격분한 항우는 예비병력 3만 5,000명만을 이끌고 팽성으로 달려갔다.
유방은 항우가 돌아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60만 대군을 믿고 느긋하게 기다렸다. 그러나 항우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대단한 전사였다. 유방의 60만 병력 중에서 40만이 전사하고 10만은 패주하다 폭우로 불어난 강물에 빠져 익사했다.
유방과 함께 직접 전투에 참가했던 세 사람의 왕들 중에서 두 명은 전사하고 한 명은 중상을 입은 채 도주했다. 유방도 항우의 맹추격을 받았지만 갑자기 몰아친 폭풍우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구해 살아남은 10만의 병력을 수습해서 관중으로 돌아왔다.
이 전투의 여파로 항우와 대치 중이던 제나라와 유방과 뜻을 같이했던 조나라, 위(魏)나라가 모두 항우 편으로 돌아섰으며 패현에 남아 있던 유방의 부모와 처자까지 초나라의 병사들에게 포로로 잡혔다.
그다음 해에 유방은 더욱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다. 그는 형양(滎陽) 성을 새로운 근거지로 삼았는데, 바로 그 성에서 항우의 대군에게 포위된 채 고립된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유방은 휘하의 장수인 기신(紀信)을 희생시키며 수십 기의 기병만을 데리고 탈출해서 도주하는데 성공했다.
형양 전투 이후에 초나라와 한나라의 대결은 대체적으로 균형을 유지했다. 군사적으로는 항우가 지속적으로 우세를 지켰지만 유방 휘하의 명장 한신(韓信)이 항우가 지키지 않는 지역을 공략해 한나라의 영역을 넓히고 재상 소하(蕭何)가 병력과 물자를 꾸준히 보충했다.
전쟁이 장기전의 양상으로 바뀌자 일반 백성들의 사정이 대단히 심각해졌다. 결국 항우와 유방은 화의를 모색하게 되었다. 기원전 203년 (그들은 그 당시 중국인들이 생각한) 중원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넓은 수로 홍구(鴻溝)를 경계로 해서 천하를 동서로 나누어 가지기로 합의했다. 그동안 초나라에 억류되어 있던 유방의 부모와 처자들은 송환되었다.
유방이 항우에 대해 급작스럽게 우세를 점하게 된 계기는 바로 이 협상이었다. 유방과의 화의를 철석같이 믿고 철군을 하던 항우에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유방이 갑자기 말머리를 돌려 항우의 배후를 친 것이다. 한신, 팽월(彭越)과 같은 한나라의 맹장들이 모두 동원된 전격적인 공세였다. 항우는 졸지에 수세에 몰리면서 해하(垓下)에서 포위되었다.
힘으로는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을 만한데(力拔山兮 氣蓋世)때가 불리하니 추는 나가지 않는구나(時不利兮 騶不逝).추가 나가지 않으니 내 이를 어찌할까(騶不逝兮 可奈何).우야 우야 너는 또 어찌할까(虞兮虞兮 奈若何). 이야기가 잠깐 옆으로 새는 것 같지만 이 칠언고시는 유명한 항우의 〈해하가(垓下歌)〉이다. 이 시에 나오는 추(騶)는 오추마로 알려진 항우의 애마이며 우(虞)는 항우가 사랑했던 여인 우희(虞姬)를 말한다. 우희도 오언고시로 답을 했는데 우리가 일상에서 많이 사용하는 사자성어 '사면초가(四面楚歌)'는 우희의 이 마지막 시에서 유래되었다. 우희 역시 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한나라 병사들이 이미 초나라 땅을 차지해서(漢兵己略地)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랫소리가 들리는데(四面楚歌聲)대왕의 의기가 이미 다하였으니(大王義氣盡)천한 이 몸이 살아서 무엇하리오(賤妾何聊生). 한나라와 초나라의 격렬한 투쟁은 간단한 속임수로 쉽게 결말이 났다.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사기》의 저자 사마천을 비롯한 대부분의 역사에서는 유방의 승리가 비열한 속임수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승리의 과정보다도 그 승리를 통해서 소모적인 전쟁을 끝냈다는 사실에 더 가치를 두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