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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을 맞아 많은 분들이 좋은 글을 쓰셨습니다. 너무 많아 일일이 올리기 벅차 우선 손닿는 것만 올립니다. 이 외에도 많으니 한번 찾아보세요. 못 올린 글들은 저또한 기회 닿는데로 추가하겠습니다.
(출처: 강* 주, 하* 효, 박*호 등)
(아래: 강* 주)
4.3을 기억하며...
“...고통 속에 허구한 밤 뒤채이는
어둠을 본 적 없는 나는 알 수 없네
링거를 맞지 않고는 잠들 수 없는
그녀 몸의 소리를
모든 말은 부호처럼 날아가 비명횡사하고
모든 꿈은 먼 바다로 가 꽂히고
어둠이 깊을수록 통증은 깊어지네
...
지금 대명천지 훌훌 자물쇠 벗기는 배롱한 세상
한 세상 왔다지만 꽁꽁 자물쇠 채운 문전에서
한 여자가 슬픈 눈 비린 저녁놀에 얼굴 묻네...”
-허영선 시인의 <무명천 할머니> 중에서.
제주 4.3 다음해, 1949년 1월. 경찰이 무장대로 오인해 발사한 총탄에 턱을 맞고 쓰러져서 50여년 간
말도 못하고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한평생 무명천으로 턱을 감싼 채로 살다가 2004년에 돌아가
신 故 진아영 할머니..
‘
(아래: 박* 호)
1948년 제주4,3은
2014년 강정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1894년 갑오동학농민전쟁에서는 지배계급이 일본제국주의를 불러들여 자국의 백성들을 학살하고, 일제치하의 식민지가 되었다.
1945년 일제가 쫓겨간 그 자리에 미제국주의가 들어와 미군정청 지배하에 있음을 선포한다.
1948년 제주도민 3만명을 학살했다.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1950년 한국전쟁, 1980년 광주항쟁, 등 인민들에 대한 학살은 계속되고 있다.
‘48년 제주 4*3항쟁 일에 즈음해서’
1947년 제28주년 3*1절 기념식을 맞아 좌파세력이 주도한 시위에서 미군정경찰(친일경찰이 그대로 이어짐)의 발포사건이 ‘4*3으로 가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희생자 가운데는 국민학생과 젖먹이를 안고 있던 20대 여인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희생자는 경찰서와 상당히 떨어진 곳에 쓰러져 있었다. 희생자중 1명을 빼놓고 나머지는 모두 등뒤에 총탄이 맞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총탄의 피해자는 시위군중이 아니라 관람군중이었던 것이 밝혀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피해자 보상, 발포 책임자 처벌,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축출하는 등의 요구를 걸고 47년 3*10 총파업이 민*관을 포함해서 시작된다. 관공서뿐만 아니라, 통신기관, 운송업체, 공장 근로자, 각급 학교, 심지어는 미군정청 통역단 등 현직 경찰관들이 파업에 동참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나중에 경찰관 66명이 파면 처분된다. 이후 미군정청은 민심 수습보다는 좌익 척결에 주력하는 정책을 펴갔다.
미군정청과 제주 주둔 미 방첩대(CIC)에 의해서 3*1사건 이후 1948년 ‘4*3’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검속됐다. 이로 인해 유치장은 차고 넘쳤다. 제주 주민과 경찰간의 충돌이 여러차례 발생하게 되었다. 미군 정보보고서에 의하면 1947년 8월에 이르러 반미 삐라도 살포되고 있다고 보고되고 있는데, 그 보고내용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한국을 강탈하려는 미군을 몰아내자”는 등 미군을 공격하라는 선동적인 삐라가 최근 제주도에 뿌려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무렵 뿌려진 삐라 내용 가운데 가장 많이 거론된 것은 보리공출 문제였다.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고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되어감에 따라 한반도의 외딴 섬 제주도에는 긴장감이 고조되어갔다. 세계적 수준의 동*서 냉전체제는 1947년 3월 대소 강경정책이라는 ‘트루만 독트린’ 선포 이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동*서 냉전이 첨예하게 표출되던 곳이 한반도였으며, 결과론이지만 제주도는 그 결정적인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1950년 한국전쟁 또한 이 연장선상에서 발발하게 된다.
미국측에 의해서 제안된 신탁통치안은 미영소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합의되었으나(미제국주의는 어떤 의도였는지, 의도는 없었는지), 남한은 이승만 미괴뢰정권에 의해서 단선단정을 요구하게되고 남한만의 단독선거 윤곽이 드러난 1948년 2월 이후 미군정과 좌파간에 치열한 대립국면이 표출됐다. ‘매카시즘’이라고 명명된 미제국주의의 사회주의 확산을 막기위한 제주도에서의 인민 탄압과정에서 일제경찰을 비롯한 서북청년단과 제주도민과의 갈등이 조장되어 빚어진 긴장상황을 남로당 제주도당이 5*10단독선거 반대투쟁과 접목시켜 일으킨 사건으로 판단할 수 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를 전후해 무장봉기의 신호탄이 올랐다. 350명의 무장대는 이날 새벽 도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했다. 무장대는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 단선*단정 반대와 조국의 통일독립, 반미구국투쟁을 봉기의 기치로 내세웠다. 한편, 미군정장관인 딘 소장에 의해 처음 발언된, 무장대 ‘북한군 유입설’ 외에 ‘북한선박 출현설’, ‘소련 잠수함 출현설’ 등을 유포한다. 이후에는 모두 허위임이 밝혀졌으나 당시에는 강경탄압작전의 중요한 명분으로 작용했다.
미군정은 무장봉기가 발생하자 4월 5일 아침 전남 경찰 약 100명을 응원대로 편성해 급파하는 동시에 제주경찰감찰청 내에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해 사령관으로 경무부 공안국장 김정호를 파견하였다. 미군정은 제주도을 타 지역과의 해상교통을 일체 차단하고 미군 함정을 동원해 해안을 봉쇄하였다.(80년 광주항쟁에서의 타 지역과의 봉쇄를 우선하고 광주도민에 대한 학살을 감행했다.) 미군정 수뇌부는 4월 17일 제주주둔 미군 제59군정중대장 맨스필드중령을 통해 경비대 9연대에게 진압작전에 참여토록 명령했다.
4월 28일 토벌대 김익렬 연대장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 간의 평화협상이 추진되고 있었다. 그러나, 4월 27일과 28일 이틀 동안 미군정 사령관 하지에 명령에 의해서 ‘대대적인 토벌 작전’ 이 전개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김익렬과 김달삼은 서로 공격하지 않는다는 평화협정에 합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협상 사흘만인 5월 1일 우익청년단이 제주읍 오라리 마을을 방화하는 세칭 ‘오라리사건’(작전명; ‘메이데이‘ 하늘에서는 미군 정찰기가 오랫동안 맴돌면서 이 상황을 촬영하고 있었다.)이 벌어지고, 5월 3일에는 미군이 경비대에게 총 공격을 명령함에 따라 협상은 깨어졌고 이후 제주4*3사건은 걷잡을 수 없는 유혈충돌로 치닫게 되었다.
미제국주의와 미군정 수뇌부의 좌익 사회주의자에 대한 말살정책은 제주도에서의 군사작전을 수행하는 브라운 대령의 짧은 발언이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
제주도민의 3명 중 1명 꼴의 사망자가 발생했다는데 거의 동의가 있는 듯하다. 학살자를 제외 한다면, 제주도민 중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하겠다. 하지만, 피해자 모든 분들게 죄송한 말씀이지만, 여기서 끝났다면 오히려 다행이었지 않을까 싶다.
육지의 한반도 민중에게 까지 전쟁을 통한 학살이 준비되고 있었다. 50년 6*25전쟁이라고 칭해지는 미제국주의가 배후 조종한 한국전쟁을 통한 사회주의자 말살을 위한 민중 대학살이 벌어지고 말았다. 48년 4*3 이후 67년이 지난 지금껏 국가보안법으로 마녀 사냥을 하고 있고, 군사훈련으로 인민의 삶을 옭아매어 노예의 삶을 강요하고 있다.
“48년 제주 4*3항쟁은 오늘까지 진행되고 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중심으로-
(아래: 하*효 사진, 글 / 박 **전송)
"제주도민을 다 죽여도 대한민국 존립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상상할 수도 없는 말을 내뱉으며 20
만의 제주도민 중 3만명을 무참하게 학살했던 4.3항쟁. 이승만과 미군정은 10세 이하의 어린애들도
수없이 죽였다.....
예전에 4.3항쟁에 관한 다큐를 보는데 죽음을 앞두고 있는 어떤 할머니가 하시는 말, "우리 아기 왔
어? 우리 아기 왔어? 우리 아기 올 때 까지는 난 못죽어....."
4.3항쟁을 다룬 이산하 시인의 '한라산'과 강요배 화백의 '젖먹이'를 올린다.
혓바닥을 깨물 통곡없이는 갈 수 없는 땅. 발가락을 자를 분노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 제주도에서,
지리산에서, 그리고 한반도의 산하 구석 구석에서 민족해방을 위하여 장렬히 산화해 가신 전사들에
게 이 글을 바친다.
-이산하 -
한라산
서시
이산하
지금으로 부터 어언 120여년 전 동아시아의 해군기지로서 조선이 결정된 지 80년의 모진 세월이 흐른 1945년 불볕여름, 한 손엔 '빵'과 또 다른 한 손엔 '해방군'의 탈을 쓰고 발톱까지 무장한 채 당당하게 상륙한 그들은 마침내 순결한 조선의 하늘과 푸른 산하를 두 토막으로 분질러 놓았다.
그리고 다시 40여년의 기나긴 세월이 흘렀건만 총독부가 대사관으로 바뀌었을 뿐, '창살 없는 감옥' 식민지 산하는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제국주의 침략사 120여년, 다시 쓰여져야 할 피어린 민족해방투쟁의 한국현대사. 압제의 사슬을 이빨로 뚝, 뚝, 끊으며 붉은 피로 얼룩진 그 장엄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우리 어찌 잊을 것인가. 바람부는 대로 쓰러지는 풀잎이 아니라면 결코 그들의 노예가 아니라면 우리 어찌 보고만 있을 것인가.
이 땅은 아메리카의 한 주(州)
그들의 병영에서 짐승처럼 사육되어 왔던 수많은 날들 그 수많은 신음의 밤들을 누가 잊을 것인가 누가 잊으라고 하는가.
1948년 4월 3일 '제 2의 모스크바' 밤마다 먼저 간 동지들의 피를 묻고 살을 묻고 뼈를 묻는 혹한의 한라산 그 눈 덮힌 산하, 붉은 피를 흘리며 끝내 숨져간 이름없는 해방전사들의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끝내 이어지는 저 붉은 핏자국을 누가 잊는가 누가 잊을 것을 강요하는가 동상으로 썩어 문드러진 발가락을 자르며 뼈를 깍는 모진 고문에 여성전사들의 생리마저 얼어붙는 밤. 그들은 기어이 갔다. 총알 박힌 다리를 절룩거리며 동지의 어깨에 매달려 진지로 돌아가다 진지로 돌아가다 끝내 쓰러져버린, 그들은 갔다. 기어이 갈 곳으로 가고야 마는 것인가
분노없이는 갈 수 없는 땅 통곡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 제주도의 혁명전사들은 그렇게 갔다. 尾帝(미제)의 각을 뜨다 적의 가슴팍에 불을 지르다 끝내 다 뜨지 못한 채끝내 다 지르지 못한 채 한 줌 피 묻은 뼛가루로 날아갔다.
적과 더불어 싸워서 죽은 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아라 깃발을 덮어다오 인공의 깃발을 그 밑에 죽기를 맹세한 깃발
30여년만에 걸어보는 이 학살의 숲은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산등성이마다 뼛가루로 쌓여있는 흰 눈이며 나뭇가지마다 암호를 주고 받는 새들의 울음소리며 멀리 사람 실은 배 한 척, 돌 실은 배 한 척, 떠나는 바다며 굶주린 배를 움켜쥔 채 허겁지겁 땅을 파헤쳐 씹고 또 씹었던 이 풀뿌리와 나무껍질이며 마지막 남은 이파리마저 가솔린 냄새를 풍기며 불탔던 이 학살의 숲은 아직도 총소리로 가득하다.
움직이는 것은 모두 우리의 적이었지만 동시에 그들의 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보고 쏘았지만 그들은 보지 않고 쏘았다. 학살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 날 하늘에서는 정찰기가 살인예고장을 살포하고 바다에서는 함대가 경적을 울리고 육지에서는 기마대가 총칼을 휘두르며 모든 처형장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던 그 날, 빨갱이 마을이라 하여 80여 남녀 중학생들을 금악벌판으로 몰고가 집단몰살하고 수장한 데 이어 정방폭포에서는 발가벗긴 빨치산의 젊은 아내와 딸들을 나무기둥에 묶어두고 표창연습으로 삼다가 마침내 젖가슴을 도려내 폭포 속으로 던져버린 그 날
한 무리의 정치깡패단이 열 일곱도 안된 한 여고생을 윤간한 뒤 생매장해버린 그 가을 숲..... 서귀포 임시감옥 속에서는 게릴라들의 손톱과 발톱 밑에 못을 박고 몽키 스패너로 혓바닥까지 뽑아버리던 그 날, 바로 그 날 관덕정 인민광장 앞에는 사지가 갈갈이 찢어져 목이 잘린 얼굴은 얼굴대로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몸통은 몸통대로 전봇대에 전시되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빨갱이다 !' '빨갱이의 종말은 이렇다!' 광장을 가득 메운 도민들에게 허수아비의 졸개들이 이미 죽은 시체들을 대검으로 쿡쿡 쑤시며 소리쳤다. 처참하게 찢어져 형체도 알아볼 수 없었지만 도민들은 저건 이덕구, 저건 김운민, 저건 김병남, 남진, 박남해.... 속으로 속으로만 어림잡았다. 통곡도 오열도 없었다. 도대체 사람이어야 통곡이라도 하지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결코 죽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것은 푸줏간에 걸린 짐승일 뿐이었다. 한 개의 총알이 심장을 뚫고간 것은 차라리 행복한 죽음이었다. 해안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이 한라산을 미친듯이 뒤흔들고 있었다......
미군은 즉각 철수하라!
이승만 매국도당을 타도하자!
조국통일 만세!
제주 빨치산 만세!
붉은 저녁노을이 멀리 관덕정 인민광장 위로 지고 있었다. 산은 다시 한 번 알몸이 되고 그 빈 숲에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살아 흘러가고 죽어 흘러가고 마침내 살아있는 모든 것이 흘러갔다.
몸 가릴 곳 하나 없는 이 참혹한 겨울 숲. 마지막 몇 사람이 기적처럼 살아 걷는 이 학살의 숲, 누가 그 날을 기억하지 않는가.
돌려주자 오늘도 노란 유채꽃이 칼날을 물고 잠들어 있는 아! 피의 섬 제주도. 그 4.3이여, 우리의 심장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이 진달래꽃을 그 누가 꺽을 수 있으랴. 돌려주자 기름진 지주와 자본가의 살을 죽창에 꽂아 그들에게 돌려주자. 공장의 프레스에 싹둑싹둑 잘려나간 노동자들의 손가락을 포크레인에 찍힌 철거민의 팔과 다리를 얼어붙은 배추포기 같은 삶을 살다 농약 속으로 사라져간 농민들의 그 골수에 사무친 원한을
그리고 푸르른 5월의 금남로를 승냥이처럼 할퀴고 간 저 피 묻은 손을 찢어, 갈갈이, 찢어서 '조국 아메리카'의 후예들에게 돌려주자
그리하여 똑똑히 들어라 우체통이 빨간 것은 빨갱이 사상에 물든 탓이 아님을 바로 너희들 때문임을 한반도 인민들의 피가 붉은 것도 바로 너희들 때문임을 그리고 침묵하라, 피로 맺어진 ' 혈맹 우방' 이여 그대들이 두 눈 뜨고 살아있는 한 우리는 잠들 수가 없다. 너희들의 칼날 위에서 우리는 잠들 수가 없다. 그 누구도 잠들 수 없는 이 해방의 산하에 싹둑 잘려나간 손가락이 아직도 팔팔 살아 뛰는 붉은 피가 있어 농약 먹은 가슴으로 타오르는 싯붉은 피가 있어 탄환의 불꽃으로 탄환의 불꽃으로 저 헐벗고 굶주린 노동자 농민들의 여윈 손들이 숲을 이룰 때까지 마침내 해방의 숲을 이룰 때까지
적들의 심장에 불벼락을 안겨주자! 적들의 시체를 넘고 넘어 동지의 시체를 되돌려 받자, 받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