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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사카 유지 교수가 말하는 영화 '파묘'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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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묘’가 반일영화니 좌파영화니 민족감정을 악용한다는 기이한 비판이 나왔지만 개봉 12일 만에 관객수 600만을 넘었으니 나도 보러 갔다.
영화를 보면서 느낀 것은 이 영화를 만든 장재현 감독은 일본의 음양도를 제대로 공부한 훌륭한 감독이라는 점이었다. 오히려 일본에서 만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상당한 일본문화가 녹아들어 있는 영화였다.
영화 파묘
우선 영화에는 악지에 묘지를 만든 기쓰네(=여우)라는 일본 스님이 언급되는데 그 기쓰네 스님은 음양사였다. '파묘'에서 중요한 키워드가 바로 '음양사'다. 음양사란 일본역사에서 6세기쯤 백제로부터 전래된 음양오행설을 설파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일본 왕조에 들어가 국가기관을 만들어 점을 보기도 하고, 땅의 길흉(풍수)을 보고, 천체관측, 달력작성, 날의 길흉판단 등을 직무로 했다.
이후 음양사들은 일본의 신도나 불교를 이용해 주술적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일본 왕조나 무사정권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다. 한마디로 일본역사에서 음양사, 음양도는 사무라이시대가 끝나 근대화된 일본이 시작된 후에도 1945년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할 때까지 일본중앙정부의 체계화된 직책이었다.
이 영화에서는 그런 일본의 음양사들(=여우들)이 범(=한반도)의 허리를 끊었다고 표현했다. 이것은 음양사들이 조선의 기운을 죽이기 위해 한반도의 허리에 해당하는 땅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의미다.
쇠말뚝은 한반도의 명산 여러 곳에서 발견되어 한때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쇠말뚝은 일제가 한반도의 기운을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근대적 개발을 위해 박은 것이라는 주장이 나와 일반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영화 '파묘'는 그런 쇠말뚝에 대한 관심을 다시 환기시켰다.
영화에서 지관이 문제의 묘 속 관을 꺼내 이장할 때 '잘 쓰고 갑니다'라며 이순신 장군의 이미지가 있는 100원 동전을 던지는 장면, 장재현 감독은 인터뷰에서 '보통 풍수사들이 이장을 할 때 묘자리 값으로 땅의 신에게 동전을 던지기도 하는데 10원은 흙의 색과 비슷하여 100원으로 연출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이 영화의 주제와 우연히 오버랩 된 것 같다'는 표현을 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북한산(삼각산)의 정상에는 26개나 쇠말뚝이 한곳에 박혀 있었다고 그것을 기억하는 강북구의 전 공무원이 증언한다. 사람의 이름을 쓴 종이나 헝겊 등에 쇠말뚝을 박아 저주하는 방법은 일본에서 음양사들이 자주 사용한 저주방법 중 하나였다.
영화 '파묘'에서 음양사는 스님의 모습을 빌려서 기쓰네(=여우)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일본에서 음양사들은 저주를 퍼붓기 위해 불교나 신도를 악용했다. 그리고 불교의 경전 중 반야심경을 독경하면서 그 독경의 힘으로 상대를 저주하는 것이 음양사들의 중요한 수법이었다. 영화에서도 무사귀신이 독경을 했는데 그것이 반야심경이다. 그런데 반대로 반야심경은 상대방의 저주를 막아내는 힘도 있기 때문에 최민식, 김고은, 유해, 이도현 등이 몸에 반야심경을 써서 무사귀신의 공격을 막으려고 했다.
키쓰네의 저주를 막아내기 위해 주인공의 얼굴에 쓰여진 반야심경
'파묘'의 감독은 일본의 음양도와 불교(=밀교), 신도 등의 융합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훌륭하게 영화 속에 녹였다.
1941년 12월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본의 군부는 음양사들을 시켜 저주의 힘으로 미영 연합군이 불타서 전멸하도록 매일 열렬하게 저주를 올리게 했다. 이런 이야기는 모두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저주는 결국 저주를 잘못 사용한 사람에게 돌아오는 성질이 있어 일본은 도쿄대공습,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로 상징되듯 반대로 자신들이 비참하게 불에 타 버렸다. 음양도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을 잘못 저주하면 그 저주가 자신에게 돌아와 반대로 저주를 받는다는 일본 음양도의 역습을 스스로 체현한 것이 당시의 일제였다.
즉 일제는 1945년 패전까지 음양사들을 국책에 동원했다. 그런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일제강점기에 음양사들(=여우들)이 조선침략(1592-1599)과 일본의 세키가하라 전투(1600)를 통해 만 명을 베어 죽여 신이 된 일본 무사귀신의 미라에 쇠말뚝을 꽂아 한반도(=범)의 허리 부분에 그 귀신을 세워 박아서 한반도를 영원히 지배하려고 했다는 게 '파묘'의 중요한 모티브 중 하나다.
그리고 그런 일제의 저주를 풀어서 한반도의 진정한 해방을 성취해야 한다는 게 영화 '파묘'가 말하고 싶은 주제라고 나는 이해했다. 그리고 영화에서 무사귀신이 두 번 큰 불덩어리가 되어 공중을 날아다니는 장면이 나오는데 원래 일본의 유령은 작은 불덩어리가 되어 주변을 날아다닌다. 그런 영혼의 모습을 '파묘'에서는 활활 타오르는 큰 불덩어리로 표현했다. 그것은 사악함의 크기를 표현했다고 본다. 일제강점기 일제는 한반도를 지배하기 위해 영화처럼 음양사들을 시켜 한반도에 주술적 공작을 펼쳤을 것이다. 그 당시 음양도는 일본의 국책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영화에서 귀신이 말했다. "자신은 남산의 조선신궁에 묻혔어야 했는데 음양사들이 나를 이런 것에 묻었다." 만 명을 베어죽여 신이 된 자신은 당연히 조선신궁의 신이 되어 조선인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어야 했는데 자신을 이상한 곳에 묻었다고 화를 냈다.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조선인 대학살을 저지른 인물도 '도요쿠니신사'의 신으로 모셔져 있다. 도요쿠니신사는 일본에 네 곳이나 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낭인도 신사의 신으로 모셔져 있다. 그런 사악한 인물들도 일본에서는 오히려 신이 되어 신앙의 대상이 되는 일본의 특이한 문화를 영화 '파묘'는 잘 표현했다.
일제강점기에도 일제는 풍수지리에 입각하여 서울을 점령했다. 서울은 사방으로 현무, 청룡, 백호, 주작의 풍수에 맞춰 설계한 도시였다. 그런데 일제는 현무 위치에 있는 북악산 앞에 조선총독부를 세워서 경복궁을 눌러버렸고 주작의 위치인 남산에 조선신궁을 건립했다. 청룡과 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과 낙산에는 그 정상에 쇠말뚝을 박았다.
이처럼 일제는 수도 서울(한양)을 점령했을 때도 근대적 기법뿐 아니라 음양사들의 풍수지리적 수법도 동원했다. 조선에서 풍수지리는 국가와 왕의 기를 살리기 위해 활용되었으나 일본에서 풍수지리는 막부의 기를 살리는데도 사용되었지만 음양사들에 의해 상대를 저주하는 기술로도 많이 이용되었다.
영화에서는 최민식이 지관으로 나왔지만 일본에서는 음양사들이 지관이었다. '파묘'에는 한국 지관과 일본의 사악한 지관, 바로 음양사의 대결이 펼쳐진다. 영화에서는 최민식이 풍수사(지관)로 나왔는데, 일본에서는 음양사들이 풍수사인 셈이다. '파묘'에는 한국의 풍수사와 일본의 사악한 풍수사, 바로 음양사의 대결이 펼쳐진다.
무당 김고은의 배후에는 수호령 할머니가 있는데 그 영혼은 혼령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도 수호령의 개념이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신들은 김고은이 말한 '정령'이 되어서 삼라만상에 붙어 존재한다. '파묘'는 그런 일본의 종교 신사신도문화가 잘 녹아들어가 있다. '파묘'는 일본 역사와 전통 문화를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되고 재미있는 매우 훌륭한 작품이다. 강력히 일견을 권한다.
[호사카 유지 교수]
영화 파묘에서 일제강점기 시절 한반도 호랑이의 맥을 끊기 위해 ‘만 명’을 죽인 일본 장군의 시체에 칼을 넣어 인간쇠말뚝으로 만들고 첩장시킨 음양사이자 친일파 박씨 집안에는 공을 많이 세워 명당을 소개해준다는 명목으로 접근한 승려 기순애, 여우요괴의 자식이라는 소문이 있어서 ‘여우음양사’라고 불리었다고 하며, 극 중 이름은 무라야마 준지로 나온다.
*영화 파묘에 일본 음양사 기순애(기쓰네)로 무라야마 준지의 캐릭터를 탄생시킨 실존인물 무라야마 지준은 1891년에 태어나 1968년에 사망한 일본의 민속학자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촉탁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일제강점기 한국의 민속과 관련된 많은 조사 자료를 남겼다. 조사에 경찰을 동원하였으며, 한국에 부정적인 관점과 서술이 있었고,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일조했다. 그의 저서 ‘조선의 풍수’와 ‘조선의 귀신’ 등은 우리나라 민간 신앙 전반을 알 수 있는 조사 보고서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일제의 효율적인 식민지 정책을 위한 의도가 깊게 깔려 있다. (한국인의 영성문화에 쇠말뚝을 박은 인물이라 생각된다.)
[비하인드컷] ‘파묘’ 음양사의 놀라운 실존모델
무라야마 지쥰이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20여년간 조선을 조사해 펴낸 책이 10권이 넘는다. 의식주, 사상과 성격, 시장, 전통놀이, 종교 등 폭넓고도 상세하다. 저서 『조선의 귀신』에는 “조선의 풍수설에서 자손의 운명은 조상 묘지의 좋고 나쁨에 영향을 받는다”고, 『조선의 풍수』에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가 조선 산맥에 쇠못을 박아 왕기를 제압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중요한 사료지만, 비판적으로 보란 게 학계 평가다. 효율적인 식민통치를 위한 자료였기 때문이다. ‘파묘’를 계기로 찾아보지 않았다면 잘 모르고 넘어갈 뻔한 사실이다.
‘파묘’ 열기를 해묵은 반일(反日) 몰이로 보는 시선도 있다. 그러나 관객 반응에선 반일 감정보단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 놀라움이 더 크게 느껴진다. 일제 쇠말뚝설은 괴담일지 몰라도, 조선총독부를 등에 업은 무라야마 지쥰의 이름은 우리 풍속사 연구자료 곳곳에 지금도 말뚝처럼 남아있다. 역사를 제대로 아는 데서 양국의 진정한 미래도 싹틀 수 있지 않을까.
[영화 '파묘'의 부자집안은 을사오적 5명 전원을 상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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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묘 주인공들의 이름 상덕, 영근, 화림, 봉길 등은 모두 대일항쟁기 독립운동가의 이름과 같다 . 최민식이 연기한 지관 상덕은, 김상덕으로 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을 지냈고 광복 이후 반민특위 위원장이었다. 유해진이 연기한 장의사 영근은 독립협회에서 활동한 고영근에게서, 김고은이 맡은 무당 화림은 임시정부와 조선의용군에서 활동한 이화림에게서, 이도현이 연기한 봉길은 홍커우 의거를 한 윤봉길에서 비롯됐다.
그렇다면 친일파 가문으로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 작명도 예사롭게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좀더 파해쳐보니 을사오적의 이름을 넣은 것으로 추정이 되었다.
영화 속에 나오는 친일파 가문의 일단 주요 배역인 박지용은 아들로 나오는데 아버지는 박종순이라는 인물이다. 그리고 파묘를 할때 관에 덮인 명정을 보면 중추원 박근현이라고 이름이 나온다.
박근현 (묘 주인공) - 박종순(아버지) - 박지용 (아들)
이 이름을 자세히 보면 을사오적의 이름이 나온다. 을사늑약 체결 당시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이다. 을사오적은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을 말한다.
이들의 이름이 파묘에 나오는지 살펴보면
파묘를 의뢰한 아들 박지용은 '지용'이라는 이름으로 보아 을사오적 이지용이다. 이지용은 백작 칭호를 받았고, 중추원 고문이 되어 거액의 봉급 역시 받았고 죽는 날까지 잘 먹고 잘살았다.
아버지, 회장인 박종순은 '박0순'으로 보아 을사오적 박제순으로 추정된다. 을사늑약을 도와 '을사오적'이 된 박제순은 1910년 국권침탈 때도 일본을 도와 '경술국적'이 됐다. 친일 2관왕이 된 것이다. 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죽을 때까지 호의호식했다. 영화의 친일파 집안의 성을 박씨로 잡은 것은 그가 일관되게 매국을 한 것에 기인한 거 같다.
묘의 주인공 박근현은 관뚜껑에서야 밝혀지는 이름이라 뒤늦게 알려지게 되었다. '근'이라는 이름자를 보면 을사오적 이근택이고 '현'으로 보면 을사오적 권중현이다. 권중현은 중추원 고문이었으며 일제강점기 때 역사를 왜곡하는 조선사편수회의 고문이었다.
정확하게 을사오적에서 따온 이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이지용,박제순,이근택,권중현 등 을사오적 중 4명의 이름이 모두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가장 악명높았던 이완용은 왜 없을까? 이미 영화 파묘 전반이 이완용 집안을 모티브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파묘에서 부자집인 의뢰인(박지용 역) 집안과 이완용의 실제 집안 이야기와 유사한 점이 많다.
영화에서 의뢰인의 형은 정신병원에서 자살을 한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실제 이완용의 장남은 26살의 어린나이에 사망했다. 영화에서는 관에서 나온 할아버지 귀신이 미국까지 날아가 며느리와 춤을 추는 다소 괴상한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 이완용의 장남이 요절하자, 이완용이 며느리와 간통을 해서 아들이 자살한 것이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영화에서 파묘를 하게 되는 것처럼 실제로 1978년 이완용의 증손자 이석형이 이완용 묘를 파묘를 하고 유골을 화장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영화 파묘는 친일파 중 한 집안에 을사오적을 모두 집어 넣었다. 독립운동가의 이름은 쉽게 알려진 반면 친일파 을사오적이 들어있다는 것은 뒤늦게 밝혀진 것 같다. 결국 친일파들이 나라를 팔아먹어서 생긴 여파가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각성시키고 있다.
장재현 감독은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외세에 당하기만 하고, 잔재가 곪은 게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해요. 발톱의 티눈을 뽑아내듯 우리 과거의 아픈 상처와 두려움을 '파묘'해버리고 싶었습니다." 라고 했다.
잔재 (殘滓)란 '쓰고 남은 찌꺼기'와 '과거의 낡은 사고방식이나 생활 양식의 찌꺼기'를 말한다. 친일파와 일제가 남겨놓은 잔재가 해방후 근 80년이 된 지금까지도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그 잔재가 무엇인지 영화는 콕 찝어서 얘기하지 않았지만 잔재 중에 가장 큰 것이 일제 식민사관이 아닐까 한다.
영화에서는 친일파는 중추원에 소속되어있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 중추원이 행한 악행 중 하나가 바로 우리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었다. 을사오적 중 권중현은 중추원 고문이었으며 권중현과 이완용은 일제강점기 때 역사를 왜곡하는 조선사편수회의 고문이었다.
이덕일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일본제국주의와 조선총독부가 만든 식민사학의 큰 틀은 '반도사관'이다. 일제는 1910년 한국 강점 직후 중추원 산하에 "조선반도사 편찬위원회"를 만들어 《조선반도사》 편찬에 나섰다. 한국사의 강역을 '반도(半島)'라는 틀에 가두어 놓고 편찬을 시작했다. 지금도 한국 강단사학계에서 영원한 스승으로 추종하는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편찬을 주도했다. 한국사의 무대는 대륙과 반도와 해양에 걸쳐 전개된 광활한 역사인데, 《조선반도사》는 대륙과 해양을 모두 삭제해서 반도로 축소하고 반도의 북쪽은 한사군이라는 중국 한(漢)의 식민지가 지배했고, 남쪽은 야마토왜(大和倭)의 식민지 임나일본부가 지배했다고 서술했다. 북쪽이나 남쪽 모두 식민지로 시작한 조선반도가 일제의 식민지가 된 것은 한국사의 당연한 귀결이니 '독립운동' 따위는 하지 말라는 논리였다.
일제 식민사관의 핵심 논리 : 단군신화, 한사군 한반도설, 임나일본부설이 아직도 우리 역사를 지배하고 있다.
중추원 산하에 "조선반도사 편찬위원회"를 만들어 《조선반도사》 편찬하였는데 그때의 역사논리가 지금도 우리 한국사 교과서를 지배하는 이론이다. 일제가 쇠말뚝처럼 우리 역사에 박아놓아서 지금도 이를 뽑지 못하고 있다.
성삼제 교수는 일본인 학자가 한 충격적인 말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일본이 조선 식민통치하기 위해서 역사를 조작해 놓은 게 있는데 당신네들 당연히 한국이 해방되면 당연히 복원될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도 60년대, 70년대, 80년대 되어도 그대로 있더라… 우리 일본을 탓하기 전에 당신네들 꺼를 먼저 봐라” 일본인이 한 그 말의 충격을 저는 아직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 식민사학과 식민사관의 잔재가 지금도 우리 삶속에 역사와 문화와 정신 속에 박혀있다. 영화에서 쇠말뚝과 같은 오니를 없애버리는 것처럼 그 잔재를 쓸어버리는 것이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줄 유산임을 마지막 장면 딸의 결혼식에서 보여주고 있다.
식민사관이 하나의 관이라면 그 관을 파묘하여 역사광복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깊히 절감한다. 그러나 일제 식민사관이 아직도 우리 관학계와 교과서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비판하는 책들이 21세기에도 계속해서 쏟아져나오고 있다.
[박찬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