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오산 이야기(6)
가장동에서 서동저수지까지
이 원 규
시청사가 운암뜰로 옮기기 전부터 몇 해 동안 공단조성을 반대하는 가장동 마을사람들은 시청 앞 정문 앞에 모여 데모 아닌 항의로 투쟁했다. 필자도 가끔씩 그들이 데모하는 현장에서 막걸리도 마시고 국밥도 얻어먹은 적이 있다. 필자와 안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살기 때문이다.
아스콘이 깔린 포장도로를 타고 배무니 고개를 넘는다. 뒤돌아보니 멀리 독산성의 모습이 보인다. 배만이 산 또는 의정평(艤艇坪)이라고 하여 배를 댔다는 고개이다. 또한 임진왜란 때 창원 유씨의 집안에 약관에 무과에 급제한 사람이 전사하여 시신을 묻고 상석을 세우려했으나 석물이 가라앉아 지금도 그 묘에는 석물이 없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함박산 아래 길옆에 귀례정 식당과 호화롭게 새로 짓는 고급저택이 보인다. 맞은편으로 몇 채의 공장 가건물도 있다. 서동저수지까지 이어지는 황금벌판도 이제 공단이 조성되게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귀례정에서 마을을 향해 남쪽으로 50m쯤 가다보면 커다란 소나무가 길가에 서 있다. 그 아래에 샘물이 있었는데 조선시대 세조 임금이 피부병을 치료하려 온양으로 온천욕을 가다가 잠시 멈춰 샘물을 마셨다는 곳이다. 물이 차고 좋아‘찬우물’이라 이름을 내리고 샘물 근처의 농토는 세금을 받지 말고 관리하라는 어명을 내렸다고 한다. 일제시대에도 이곳의 농토는 세금을 내지 않았다고 전한다. 한때는 임금이 드신 물이라 하여 찬우물 대신‘어정(御井)’이라 부르며 약수터로 이용하기도 했다지만 언젠가 우물도 메워졌다. 팻말조차 없어 마을 어르신이 일려주는 대로 그 위치만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우물의 곁으로 도로가 뚫리고 길 건너편은 야트막한 언덕이 되었다. 밤나무 가시송이들이 하얗게 발려져있다. 지난 추석에 땄던 모양이다. 위로 올라가니 공단이 들어설 울창한 숲이 있다. 지난여름 하얀 꽃을 피웠을 찔레나무 빨간 열매들이 다복다복 열려있다.
가장동 도로를 중심으로 한일농원이 있는 북쪽으로는 공단이 들어서게 된다. 이미 기전문화재연구원에서 지표조사가 시작되고 있다. 오강곡에서 내려오는 물이 흐르는 다리가 후문의 앞에 놓여있다. 철문은 없어지고 기둥 두 개만 남은 옛 한일농원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오르막길 양쪽으로 아름드리 오동나무, 미루나무, 단풍나무 등이 한일농원의 오랜 세월이라도 증명하는 듯 쓸쓸하게 남아있다. 덩그러니 빈 축사들. 일부는 벌써 주저앉았다. 커다란 느티나무 두 그루가 꼭대기에 있고 그 곁에 콘테이너 3개를 붙어놓은 기전문화재연구원 사무실도 있다. 멀리 가장동공동묘지와 오산신경병원 앞쪽까지는 지표조사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한일농원은 필자가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인 35년 전에 쌍용제지 위쪽의 가수리산 전체와 이번에 공단이 조성될 가장동 가재굴 쪽에 터전을 마련하였다. 특히 양계는 크게 번성하여 한일농원의 달걀과 닭고기를 먹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또한 아르바이트가 쉽지 않았던 70년대에 그곳은 방학기간을 이용하여 학비도 벌 수 있는 곳이었다. 대형 양계장이기에 가축의 폐사 방지를 위해 방역에도 만전을 기했다. 지금도 농원의 출입문에는‘농장 출입자는 발판 소독 후 통과바랍니다’라는 경고 표지판이 붉은 글씨로 남아있다.
오산신경정신병원에서 들려오는 스피커 음악소리가 오강곡과 가재굴 골짜기로 울려 퍼진다. 그곳에서 요양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축제를 마련한 것이라고 한다. 가장천이 흐르는 가장교 다리 옆의 건설 폐기물 집하장인 성철환경개발의 기계 돌아가는 소음도 요란하게 들린다.
한일농원 언덕길을 내려와 마을 앞 다리에서 서쪽 길로 올라갔다. 산비탈에 아담하게 지은 전원마을이 보인다.‘독장골길’이라는 도로명 표지판이 있다. 옛날에 옹기를 구었다는 골짜기이다. 그 아래 독장골 들판은 복토된 흙이 수북하다. 뒷논에서는 이제는 마지막이 될 추수를 하는 농민들의 검게 탄 얼굴이다. 그 동안 정들었던 이 땅을 떠나보내는 표정은 어둡게 보이지 않았다.
전원주택‘벚꽃마을’에 들어갔다. 지난 추석에 마지막 마무리를 끝내고 분양을 시작했다는 최순범(44세)대표는 초면인 필자에게 친절하게 그간의 과정을 설명해주었다. 그 동안 이곳의 터를 닦고 전원주택을 세우기까지 세 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다고 한다. 워낙 터의 기(氣)가 센 곳이라 그러한 것 같다고 했다. 옛날에는 이 골짜기를 들어오는 길목이 좁고 음침하여‘귀신골’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필자가 공사 중에 옹기 파편이라도 나온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산을 깎아내는 작업이 아니고 골짜기를 메워서 집터를 세웠기 때문에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앞으로 저수답이 있다. 벚꽃마을 독장굴과 뮤모텔이 있는 증터골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이 이곳에 모여 서동저수지로 흐른다. 지금은 물을 빼고 벼를 심어 마지막 추수를 기다리고 있다. 그곳에서 가서천이 흐른다. 이 하천도 공단이 조성되면서 복개되어 땅 밑으로 들어가고 폐지될 것이다.
천수답 다리 앞에서 길을 건너 되돌아 웃말로 올라왔다. 서쪽 고개는 구불구불하여 아리랑고개, 왕열고개라고 하고 돌부처가 서 있던 자리라 하여 부처뎅이고개라고 불렀던 고개이다. 그 고개를 넘어가면 화성시 정남면 수면리 구룡식당 앞이다.
웃말 두소나무백이라고 하는 뒷산에는 커다란 소나무 두 그루가 있었는데 몇 해 전에 벼락을 맞아 죽었다고 한다. 옛날에 길을 잃으면 그 소나무를 보고 길을 찾았다고 한다. 버스정류장에서 마을 들어가는 첫머리에 발갛게 익은 감들이 주렁주렁 열린 붉은 벽돌집은 조석구 시인의 고향집이다. 앞으로는 텃논이 있고 뒤로는 야트막한 동산이 있다. 그 맞은편 밭머리에 공란식 수필가의 한옥도 있다. 무심결에 대문으로 들어갔는데 그녀는 왠일이냐며 금방 따온 것이라며 고추 한 봉지를 내민다. 별로 맵지 않으니 삶아 무쳐먹으면 맛있다는 말까지 덧붙인다. 못이기는 척 받아들고 나왔다.
윗말 텃논에서부터 국배미까지는 추수가 한창이다. 요즘에는 기계를 이용하여 벼를 베고 있다. 앞에서 벼포기를 끌어당기고 중간쯤에서는 알곡들이 빠진다. 트랙터가 지나가는 뒤편으로 잘게 썰린 볏집들이 바닥으로 깔린다. 아랫말로 내려오면 몇 채의 커다란 간판을 매달은 가든들이 길가에 줄지어있다. 삼거리에는 유태광 선배가 자신이 살던 집을 개조한 구래밭이라는 식당이 있다. 오산중고등학교 동창회 모임 장소로 자주 이용하는 식당이다.
마침 길옆에서 새참을 먹는 중인데 그 앞으로 지나가다가 막걸리 한 잔을 권하기 얻어마셨다.
가장천이 흐르고 지나가는 큰길가에는 유태찬 씨가 가꾸는 금성조경 농장이 있다. 온갖 조경, 정원수들이 울창하게 자라고 있다. 그 건너편에 움푹하게 들어간 슈퍼와 버스정류장이 마주보고 있는 가장리 삼거리이다.
남쪽 서동로를 따라가면 솔향가든이 있다. 그곳에‘구래정’이라는 현판이 걸린 노인정이 있다. 노인정 골목길을 따라 성님네 마을이 보이는 지점 산 밑에 가장장로교회(담임목사 이병태)는 1961년에 설립된 오래된 교회이다. 요즘 청학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한일농원 사무실 맞은편 언덕에 교회를 신축하고 있는 중이다. 오산시내 방향의 고개를 넘으면 한일농원 사무실이 있고 쌍용제지와 오산성당과 노틀담수녀원이 보인다.
도로표지판이‘서동로’로 표시되어 있지만 가장동보다도 먼저 생긴‘어은굴리(漁隱窟里)’혹은‘어은구리’라고 부르는 오래된 마을이다. 지명의 표기로 보아 예전에는 이곳에서 고기를 잡아 보관하는 장소가 있었던 모양이다. ‘가장(佳長)은 아름답다, 가장자리라는 뜻을 담고 있다. 산으로 둘러쌓인 분지형태의 마을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바닷물이 넘실거리는 상상을 하니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솔향가든에서 대가촌까지는 서동저수지 겸 낚시터이다. 그 밑으로 신동아아파트까지 황금빛 초평들이 이어진다. 1969년에 완공한 만수 면적 3.6ha의 서동저수지는 가장동 함박골과 가재굴, 독장굴 등에서 내려오는 가장천 물을 받아 저장하고, 마을 앞으로 길게 펼쳐진 초평뜰에 물을 대주고는 서리와 탑동을 거쳐 오산천 하류까지 2.6km를 흘러 평택시 서탄면으로 흐르는 황구지천에서 만난다.
평택시 서탄면과 오산이 경계를 이룬다. 오산중고등학교 출신인 이규황 시인의 고향이기도 하다. 1997년. 오산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하며, 전교조 오산 화성지회장으로 활동했던 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문학에 대한 열정과 기질이 대단했던 후배였다. 필자가 오산문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던 때였다. 그의 육신을 땅속으로 보내며 몇 권의 책도 함께 넣어주었다. 우리들은 슬픔의 발을 굴러 회다구지(달공)를 했었다.
몇 달 전에 그의 무덤을 다녀왔다는 김태우 시인의 시 한 편을 읽어본다.
그에게 또다시 열망처럼
봄바람 찾아왔다
소소소 스며드는 그 바람에서
죽어라죽어라 소리가 들린다.
사내의 머리맡 베개가 뒤척인다
그에게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다.
-김태우 시 <그에게 또다시>
첫댓글 어제 시험은 잘 보셨어요? 저랑 같은 강의실이었던것 같은데 아무리 찾아도 안계시던데요...^^
저는 과제물만 제출하고 오는 거였거든요.
우리 동네 오산 이야기 계속 된 연재 감사합니다...
오산에 산지 벌써 8년가까이 돼고 애착을 가지고 살고 싶어 지명의 유래나 옛 얘기들을 알고싶엇는데 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