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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영광] 47
#.1 씬. 바닷가. (낮)
강석, 단아 바다를 바라보며 서있는.
단아 : 예전에 할아버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왜 바다가 강보다 낮은 줄 아냐구.
강석 : (단아를 보는)
단아 : 제일 낮은 곳에 있어야 세상에 모든 강물을 다 받아 안을 수 있어서 그런 거라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그러셨어요. 바다 같은 사람이 되라고.
(강석을 보고, 손을 잡는) 당신 곁에서, 당신의 아내로 그렇게 살 거예요.
바다처럼, 늘 낮게 흐르면서 세상의 모든 강물을 받아 안을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강석 : 그럼 나 역시도 그렇게 되겠군. 언젠가는 내가 당신인지, 당신이 나인지 모르게 될 테니까.
(단아를 다정하게 끌어안는)
#.2 씬. 강석의 집 거실.(밤)
영자, 전화 하고 있는.
영자 : 아니, 사부인, 제가 그렇게 혼수 취소해 주십사하고 말씀 드렸는데
왜 전에 말씀드린 그대로 해 보내셨어요?
#.3 씬. 석호의 방.(밤)
영인 : (전화 중) 대금을 다 치러서 그렇기도 하지만,
사부인이 저희 애를 위하시는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뭐든 해드리고 싶었어요.
석호, 흐뭇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
영인 : 한다고는 했는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요.
#.4 씬. 강석의 집 거실.(밤)
영자, 전화 중, 천갑, 런닝 셔츠 바람으로 나오는.
영자 : 마음에 들다마다요. 취소해 주십사, 하고 이렇게 다 받으려니 정말 면구스럽네요.
손님들은 다 가셨어요? 네, 고생 많이 하셨는데, 그럼 쉬세요, 사부인. 들어가세요. (전화 끊는)
당신, 정말 왜 그래?
천갑 : 내가 뭘?
영자 : 이젠 며느리도 얻었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훌러덩 벗고 살거냐구?
천갑 : 이 짓도 애들 신혼여행 간 동안만이다.
내가 며느리 앞에서까지 이렇게 훌러덩 벗고 살겠냐? 나도 편한 시절 다 갔다.
천갑과 영자, 대화 하는 사이, 아줌마 나와서 인터폰 받고.
아줌마 : 혜주 들어오네요.
영자 : 제발 이제부턴 우리도 우아하게 좀 살자. 명문 종가에서 며느리까지 맞아들인 마당인데.
천갑 : 그러는 당신이나 조심해라. 제발 사오정 짓 좀 하지 말구.
혜주, 현규 들어오는. 현규, 혜주를 부축하는.
영자 : (현규 보고 일어서며) 아니, 어떻게 같이 와?
천갑 : (일어서며) 어서와, 어서.
영자 : 근데, 혜주야 왜 그러니? 어디 아파?
현규 : 죄송합니다.
영자 : (혜주 잡으면서) 얼굴이 왜 이렇게 핼쑥해?
현규 : 결혼식 끝나고 영화 보러 갔었는데. 영화 내용에 어린 아이들 연쇄 살인범에 관한 얘기가 있었어요.
그거 보다가 정신을 잃어서....
영자 : 아니, 왜 그런 영화를 봐? 쌔고 쌘 영화 다 놔두구?
천갑 : 그래서? 병원엔 갔었어?
현규 : 네. 진정제 맞았습니다. 입원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그냥 데려왔습니다.
영자 : 어서, 올라가서 눕자. 치료 받아서 좀 나은가보다 했더니, 이게 또 무슨 일이래.
(혜주 데리고 올라가는)
현규 :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천갑 : 아냐, 아냐, 우리 혜주 때문에 고생했을 텐데, 그냥 가면 쓰나? 들어와, 밥 먹고, 나랑 술 한 잔 해.
#.5 씬. 혜주의 방.(밤)
혜주, 침대에 눕히는 영자.
영자 : 오늘 같이 좋은 날, 왜 그런 이상한 영화는 보고 쓰러져?
혜주 : 죄송해요. 반편이 짓 안하려고 했는데....
영자 : (혜주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혜주야?
혜주 : 네?
영자 : 엄마가 너한테 맨날 반편이 반편이 그런 거 말이야.
혜주 : .....
영자 : 미안해. 엄마, 너 미워서 그런 거 아니야. 기 못 펴고 사는 네가 안쓰러워서 그런 거지.
혜주 : 알아요, 엄마.
영자 : 이제 새언니도 들어왔고, 엄마도 철 많이 들었으니까
다시는 너한테 반편이니 뭐니하는 소리 안할 거야.
#.6 씬. 호텔 내 레스토랑.(밤)
강석, 단아 차 마시고 있는.
강석 : (찻잔 내려놓으며) 다 마셨죠? 다 마셨으면 올라가죠.
단아 : (미소 지으며) 난 아직 다 안마셨는데요.
강석 : 아니, 무슨 차를 그렇게 천천히 마셔요? 빨리 마시고 일어서요.
단아 : 왜 그렇게 서둘러요?
강석 : 몰라서 물어요?
단아 : (웃는)
강석 : 내가 오늘을 얼마나 기다린 줄 압니까?
단아 : .....
강석 : 내가 왜 그렇게 결혼 빨리 못해서 안달을 부렸겠냐구요?
단아 : (곱게 흘겨보면서) 우리 너무 너무 힘들게 결혼한 사람들이거든요.
천천히 차 마시면서 얘기 좀 해요.
강석 : 얘기는 나중에 합시다.
단아 : 정말 이럴 거예요?
강석 : (보다가, 옆으로 지나가는 종업원에게) 여기요? 커피 한 주전자 가져다주세요.
종업원 : 네?
강석 : 커피 한 주전자요.
종업원 : (웃으면서) 리필해 드리겠습니다. (하고 걸어가는데)
강석 : 한 주전자 가져다 달라니까요.
단아 : 왜 그래요? 창피하게.
강석 : 그러니까 사람 성질을 왜 건드려요?
내가 아주 오늘밤 커피 한 주전자 들이키면서 여기서 밤을 새 볼라니까.
그만 룸으로 올라 가자고만 해봐.
단아 : (웃는)
#.7 씬. 강석의 집 거실.(밤)
천갑, 현규, 술을 마시고 있는. 영자, 안주를 가져다 놓으며 앉는.
영자 : 연어 샐러든데, 이것도 좀 먹어 봐요.
현규 : 네, 감사합니다.
천갑 : (현규의 잔에 술을 따라 주면서) 혜주 저 놈이 우리한테는 가슴에 진 응어리라네.
내가 세상에 원한이 많아 잘못 사는 바람에 저 여리고 순한 놈 가슴에 못을 박았어.
현규 : .....
영자 : (눈물을 훔치면서) 현규 학생 부담스럽게 그런 얘기는 뭐하러 해?
천갑 : 이보게, 현규 학생?
현규 : 네?
천갑 : 친구든 뭐든 다 좋아. 학교 다닐 때도 집에 친구 한번 데려온 적 없는 놈이, 혜주 저 놈이야.
그런 놈이 자네 사진도 컴퓨터에 잔뜩 넣어놓고 그랬다는 거 아닌가.
현규 : .....
천갑 : 자네는 그냥 친구로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지만, 혜주 저 놈은 아닌 거 같네.
영자 : 부담주지 말라니까.
천갑 : (현규의 손을 잡고) 뭐라도 좋으니 우리 혜주 저 놈 옆에 오래 오래 좀 있어주게.
내 사위가 돼주겠다고 하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내가 그런 욕심은 안 부림세.
그저 우리 혜주 옆에서 우리 혜주 좀 오늘처럼 챙겨주고, 그래주게? 그럴 수는 있지?
현규 : 네, 그러겠습니다.
전화벨 울리고.
영자 : (눈물 닦으면서, 전화 받는) 여보세요? 어, 그래, 하교수? 잘 도착 했어?
#.8 씬. 호텔 룸.(밤)
단아, 전화 중. 강석, 의자에 앉아 흘겨보고 있는.
강석 : 전화는 나중에 해도 된다니까요.
단아 : (곱게 흘겨보면서, 가만있으라고, 손가락 입에 가져다 대는)
강석 : 아니, 도착 했다는 전화가 뭐 그리 급하다구?
단아 : (화를 내는 시늉하고) 네, 어머님. 저희 아주 편하게 잘 있어요.
큰 일 치르시느라 많이 고단하시죠? 네, 네. 그 사람 바꿔 드릴게요.
강석 : 나까지 뭘 바꾸고 그래요?
단아 : (수화기 내밀면서) 빨리 안받을 거예요?
강석 : (전화 받고, 급하게) 어머니, 우리 잘, 아주 잘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끊어요. (수화기 탁 내려놓는)
단아 : (기가 막혀서 보는)
#.9 씬. 강석의 집 거실.(밤)
영자 : (수화기 보면서) 아니, 얜 뭐가 이렇게 바뻐?
천갑 : 왜?
영자 : 지 말만하고 툭 끊잖아, 강석이.
천갑 : 그 전화 아마 하고 싶어서 한 전화 아닐 거다. 하교수가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한 전화지.
강석이 그 자식이 지금 집에 전화하고 그럴 정신이나 있겠냐? 딴 데 정신 팔려 있을 텐데.
영자 : (흘겨보면서) 현규 학생 듣는데.
현규 : .....
천갑 : 이 친구가 앤가, 이 친구도 알 거 모를 거 다 알아.
#.10 씬. 호텔 룸.(밤)
단아, 전화기 버튼 누르는.
강석 : 아니, 무슨 전화를 또 해요?
단아 : 우리 집에는 안 해요?
강석 : 그런가. 해야 하는구나.
단아 : 할머니?
#.11 씬. 종가 마루.(밤)
삼월, 전화 받고, 태영, 진아, 말순, 조만 뒤에 서있는.
삼월 : 이실장 운전하고 가서 피곤해하지 않아? 그래, 그럼 다행이구.
태영 : 저 좀 바꿔주세요.
말순 : 또 무슨 주책을 떨려구?
영인, 방에서 나오는.
삼월 : 잠깐만, 어머니 바꿔줄게. (수화기 내밀면서) 단아, 잘 도착했다네요.
영인 : 네. (전화 받고) 단아야?
#.12 씬. 호텔 룸.(밤)
단아 : (전화 중) 저희 잘 도착했어요, 어머니. 할아버님께도 말씀 올려주세요.
강석 : 나 좀 바꿔줘요.
단아 : 잠깐만이요, 어머니, 이 사람이 드릴 말씀 있나 봐요.
강석 : (전화 받고) 어머니, 이서방입니다.
영인E : 그래, 이서방. 좋은 시간 보내고 와.
강석 : 어머님?
#.13 씬. 마루.(밤)
영인 : 응?
강석E : 따님 훌륭하게 키워 제게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인 : (울먹하고) 내가 키운 건 아닌데.... 그래, 말이라도 고맙네. 어서들 쉬어.
태영 : 어머니, 어머니, 저 좀....
영인 : 할 말 있어? 잠깐만, 자네 작은 형님이 바꿔달라는데....
태영 : (얼른 수화기 뺏어 들고) 야, 강석아?
삼월 : 이서방이라고 해야지.
태영 : 야, 이서방아?
강석E : 네, 형님?
태영 : 팔 굽혀 펴기 좀 했냐?
말순 : (태영 등 때리면서) 내가 이럴 줄 알았어.
태영 : 오늘 거사를 치러야할 텐데, 준비 운동 제대로 했냐구?
안했으면, 지금 나가서 호텔 다섯 바퀴 돌고, 허리 돌리기도 좀 하고..
말순 : 어이구, 이 주책아.
#.14 씬. 호텔 룸.(밤)
강석, 전화 중, 웃고 있는.
강석 : 호텔 다섯 바퀴나 돌아야 합니까? 저 기본 체력은 좀 되는 놈인데요.
태영E : 잘난 척 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심장이 벌렁거리면, 나가서 술 몇 잔 마시고.
강석 : 저기요, 형님,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만 끊으시죠.
태영E : 건투를 빈다.
강석 : 네, 형님.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웃으며, 수화기 내려놓는)
단아 : 작은 오빠가 뭐래요?
강석 : 딴 짓 하지 말고, 제발 좀 자라십니다.
#.15 씬. 호텔 전경.(밤)
#.16 씬. 호텔 룸.(밤)
조명 끈 상태에서, 초 몇 개가 타고 있는. 강석, 단아, 잠옷 차림으로.
강석, 단아의 등 뒤에 앉아있는. (단아, 원피스형의 잠옷으로)
강석 : (단아의 어깨의 흉터 뒤에서 바라보는. 그 흉터에 손을 얹는)
단아 :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며, 강석의 손에 손을 얹는) 보기 흉하죠?
강석 : ......
단아 : .....
강석 : 많이 아팠겠군요.
단아 : .....
강석 : 없애주고 싶은데, 화상 흉터라 함부로 치료를 할 수도 없다고 아버님이 그러시더군요.
단아 : 네. (옷을 올리려고 하면서) 보지 말아요. 내 흉터인데도, 나도 보는 거 힘들어요.
강석 : (단아의 손을 막고) 겨울이면 종종 덧이 난다고 하던데?
단아 : 네.
강석 : 덧이 나서 괴로워하는 당신 보면, 마음이 아프겠지만,
그래도 사랑할 겁니다. 당신이 가진 거니까. 아파하는 당신 보면서, 같이 아파할 겁니다.
단아 : ....
강석 : (단아의 어깨 흉터 위에 입을 맞추는)
단아 : (눈물이 흘러내리는)
#.17 씬. 종가 전경.(밤)
#.18 씬. 삼월의 방.(밤)
삼월, 식은땀을 흘리며 누워있는. 조만 잠결에, 삼월의 신음 소리 듣고 눈을 뜨는.
조만 : (놀라서 일어나는) 할머니? 할머니?
#.19 씬. 부엌.(밤)
조만, 약탕기에 약을 데우고 있는,
영인, 들어오는.
영인 : 뭐해? 조만씨?
조만 : 왜 안주무시고 나오세요?
영인 : 피곤해서 그런가 영 잠이 안와서.
조만 : 할머니가 좀 아프신 거 같으세요.
#.20 씬. 삼월의 방.(밤)
영인, 삼월 일으켜 앉히고 약을 입에 대주는.
조만, 불안한 표정으로 옆에 앉아있고.
영인 : 정신은 있으세요?
삼월 : (힘겹게 끄덕이는) 괜찮아요.
영인 : 병원 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열이 많으신 거 같은데.
삼월 : 아니에요.
#.21 씬. 석호의 방.(밤)
석호, 잠들어있는데, 영인 들어오는.
석호 : (영인 들어오는 소리에 일어나는) 잠이 영 안와?
영인 : (앉으며) 삼월 할머니가 편찮으셔.
석호 : 뭐?
영인 : 쌍화탕 데워서 드렸는데, 그걸로 될는지 모르겠어.
석호 : 맥을 놓으셨나 보구만.
영인 : (보면)
석호 : 단아 때문에 오죽 속을 태우셨겠어?
단아 결혼 시키고, 그동안 긴장이 풀어지셔서 맥을 놓으신 걸 거야. (일어나는)
영인 : 왜?
석호 : 어떠신가 가서 보고 오려구?
영인 : (잡으며) 주무시는 거 보고 왔어. 주무시게 둬.
석호 : 건강하신 어른이신데, 걱정이네.
건강하셨던 분이 한번 호되게 아프시면, 기력이 금방 쇠한다고 하던데.
#.22 씬. 호텔 전경.(새벽)
#.23 씬. 호텔 룸.(새벽)
강석, 옆으로 손을 뻗다가, 옆 자리가 비어있자, 눈을 뜨는.
창 앞에 서있는 단아.
강석 : (일어나서 단아 뒤로 다가가 안는) 왜 벌써 깼어요? 날 밝으려면 한참 더 있어야 하는데?
단아 : (어깨를 감싸 안은 강석의 팔을 어루만지면서)
내 인생에 이렇게 눈 뜨는 아침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어요.
누군가의 곁에서 잠이 들고, 그 누군가의 옆에서 눈을 뜨는 어느 날 아침이 있을 거라곤.
자다가 믿기지 않아서....오랫동안 강석씨 얼굴을 들여다봤어요.
이 모든 게 다 꿈은 아닐까. 삼월 할머니가, 단아야 왜 이렇게 못 일어나니, 하면서
흔들어 깨우시는 건 아닐까.
눈을 뜨면, 당신이란 사람을 만난 적도 없고,
학교로 가야 하는 늘 똑같은 일상이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강석 : 왜 그런 이상한 생각을 해요?
단아 : 믿기지 않아서요.
강석 : 만약 당신이 꿈이라면, 정말 이 모든 게 꿈이고, 깨어나서 당신을 만난 적도 없는 거면.
난, 다시 잠이 들 거예요. 다시는 깨어나지 않도록 아주 깊은 잠이 들 겁니다.
단아 : (돌아서서 강석의 얼굴을 두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꿈이 아닌 거에 감사해요.
당신이 이렇게 내 앞에 있고, 이렇게 만질 수 있다는 거에.
그래서 살면서 가끔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날이 있더라도
많이 힘들어하지 않고, 많이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참아낼 거예요.
이 사람이 내 앞에 있으니까, 이 사람을 이렇게 만질 수 있으니까. 그거면 됐다, 그러면서....
강석 : (단아를 조심스럽게 안으면서) 다른 생이 아닌, 이번 생에서,
다른 어딘가에서가 아니라 내가 사는 이 땅에 태어나, 나와 만나줘서,
나를 만나 스쳐지나가지 않고, 알아봐주고, 사랑해줘서 고마워요.
#.24 씬. 종가 마루.(낮)
석호, 수영, 태영, 동동, 빗자루, 총채, 들고 서있는.
영인 : 자, 다들 시작하죠.
태영 : 저희도 어제 손님 치르느라 고단했는데.
영인 : 그러는 여자들은 안 고단하구? 뭐하세요?
주정, 삼월 데리고 삼월의 방에서 나오고. 조만 따라 나오고.
진아, 말순, 걸레 들고 나와서 태영과 수영에게 건네는.
영인 : 여자들은 찜질방 가서 땀 좀 빼고 올 테니까 잘들 좀 부탁해요.
진아 : 저흰 그냥 청소나 돕고 있었으면 하는데요, 어머님.
영인 : 시어머니 명령이야. 반항 할 거야?
만기 방에서 나오는.
영인 : 아버님. 삼월 할머님 몸도 안 좋으신 거 같고 해서 여자들은 찜질방 좀 가려구요.
만기 : (삼월 보면서) 많이 안 좋은 게요?
삼월 : 아닙니다, 회장님, 쌍화탕 먹고 땀 쭉 내고 자서 개운한데 이렇게 가자고 잡아끄네요.
주정 : 음식 준비에 혼수 준비에 할멈 그동안 너무 무리했어.
한증막 들어가서 땀 더 내야한다니까 왜 안가겠다고 고집을 부려?
만기 : 모시고들 다녀오너라.
영인 : 그리고요, 아버님.
만기 : 그래?
영인 : 며늘애들 이젠 좀 편한 옷으로 입혔으면 하는데, 안될까요?
만기 : 그렇게 하려무나. 나 산책 하고 올 테니 고생들 하거라.
(나가는. 식구들 모두, 다녀오세요, 하고 인사하는)
영인 : (진아와 말순에게) 어서 옷 갈아입고 나와.
태영 : 난 있지 형.
수영 : (보면)
태영 : 어머니랑 아버지 결혼 하신 이후로, 나도 여자로 태어날 걸 그랬다는 생각이 간절해.
동동 : 죄송해요, 큰 아버지. 우리 아빠 이렇게 철없는 소리 할 땐, 우리 아빠 아들인 게 창피해요.
수영 : (웃는) 나도 네 아빠가 저럴 땐, 네 아빠 형인 게 조금은 창피하고 그렇다.
#.25 씬. 경주 유적지 일각.(낮)
강석, 단아 걷고 있는.
단아 : 아버님 생가는 몰라요?
강석 : 그런 거 없어요.
단아 : (보면)
강석 : 할아버지랑 할머니가 남의 집 문간방에 세 들어 사실 때 태어나셨대요.
할머니는 아버지 다섯 살도 되기 전에 돌아가시고, 할아버지는 아홉 살 때 돌아가셨대요.
단아 : .....
강석 : 경주 이씨라고 하는 것도 아버지가 그냥 여기서 태어나셔서 경주 이씨다 그러는 거예요.
할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네가 무슨 이씨다 그런 말씀 해주신 적이 없대요.
단아 : ....
강석 : 아마, 사는 게 고돼서 그런 거 따질 겨를이 없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할아버지 자신도 무슨 이씬지 모르고 사셨을지 몰라요.
단아 : .....
강석 : 우리 아버지가 왜 그렇게 족보까지 사서 뼈대 있는 집안 자손으로 행세하고 싶었는지 알 거 같죠?
단아 : (강석 손 잡으며) 나 아버님, 어머님한테 잘 할게요.
강석 : (미소 짓는데)
단아 : 그러려면 강석씨 협조가 필요한데.
강석 : 무슨 협조요?
단아 : 우리 연극할 때 했던 대로만 하면 되는데?
강석 : (의아하게 보는)
#.26 씬. 경주 일각.(낮)
강석, 단아, 자판기 커피 들고 앉아있는.
단아 : 자, 그럼 복습해요.
강석 : (어이없어 하며 보는) 지금 신혼여행 와서 그런 거 연습 하자는 게 말이 됩니까?
단아 : 어, 이건 엄마가 끓여준 국 맛이 아니네.
이 사람이 음식 솜씨가 좀 있다고 해도, 엄마 솜씨만은 못해요.
강석 : 지금 그걸 꼭 해야 하냐구요?
단아 : 결혼 하자마자, 바로 반기 드는 거예요?
강석 : 반기 드는 게 아니고.....
단아 : 어머니, 이 사람이 골라준 이 넥타이 이 양복하곤 좀 안 어울리는 거 같죠?
엄마가 다시 골라주세요.
강석 : 너무 속 보이거든요. 나 어머니가 골라주는 넥타이 맨 적 없어요, 내가 알아서 골라 매고 다녔지.
단아 : 그럼, 그건 너무 오번 거 같고.
강석 : 우리 지금 이럴 때 아니거든요. 신혼여행 와서 닭살 행각할 시간도 없는데,
난데없이 무슨 연기 연습은 하자고 이럽니까, 이러길?
단아 : 나 시부모님께 이쁨 받는 며느리이고 싶거든요.
그거 강석씨가 중간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는 거예요.
강석 : 그리고, 강석씨가 뭡니까? 결혼도 한 이 마당에.
단아 : (보고)
강석 : 다른 거 다 집어치고, 그 연습부터 합시다.
나, 저기 가 있을 테니까 불러 봐요. 여보 하고. (일어나서 걸어가는)
단아 : (웃으며 보고 있는)
강석 : 여보, 나 불렀어?
단아 : 아니요.
강석 : (노려보는) 제대로 합시다. 뭐라고,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
단아 : 아무 말도 안했어요.
강석 : 제대로 하자니까.
단아 : (웃는) 여....
강석 : (기대에 차서 보고 있는데)
단아 : 기 와서 앉아요.
강석 : 저 마누라가 정말....(울리는 핸드폰) 네, 작은 형님?
#.27 씬. 종가 마루.(낮)
태영, 핸드폰 하고, 석호, 수영, 동동 청소하는데.
태영 : 거사는 잘 치뤘냐?
석호 : (흠, 흠 기침하고 만기의 방으로 들어가는)
수영 : (흘겨보면서) 아버지, 민망해 하신다.
태영 : 가만 좀 있어봐. 총각일 때하고 세상이 달라 보이지?
#.28 씬. 경주 일각.(낮)
강석 : (단아 옆으로 걸어와 서는) 저만 그렇겠습니까?
형님 여동생은 처녀일 때하고 얼굴색부터가 다른데요.
단아 : (당황해서, 일어나며, 강석의 어깨를 때리는) 지금 뭐하는 거예요?
강석 : 작은 형님이 첫날밤 잘 치뤘냐고 물으시잖아요?
형님 여동생이 일어나자마자, 여보, 잘 주무셨어요, 그러는데 닭살 올라 죽는 줄 알았습니다.
단아 : (어깨 더 때리면서) 그만해요.
강석 : 지금 관광하고 있는데, 어찌나 손을 꼭 붙잡고 안 놔주는지 화장실도 못가고 있다는 거 아닙니까?
단아 : (핸드폰 뺏으려고 하는) 그만 하라니까요.
강석 : (핸드폰 안 뺏기려고 하면서) 그것뿐인 줄 아세요?
#.29 씬. 마루.(낮)
태영 : (핸드폰, 맛이 가는 표정으로) 됐다, 됐어, 끊자.
강석E : 더 있다니까요, 형님.
태영 : (전화 확 끊어버리는) 이 자식 새신랑이라는 놈이 왜 이렇게 뻔뻔해?
수영 : (웃으면서) 그러니까 왜 실없이 전화해서 놀려 먹으려 하냐?
태영 : 이 자식, 이거 단아 호텔방에서 한 발짝도 못나가게 하고 있는 거 아냐?
수영 : (동동 보면서, 태영 발 밟는)
태영 : (얼굴 찡그리며) 아프다.
#.30 씬. 경주 일각.(낮)
단아 : (강석을 노려보는)
강석 : (딴청하고 있는)
단아 : 나 집에 얼굴 어떻게 들고 들어가라고 이래요?
강석 : 그러니까 여보라고 부르랄 때 불렀으면 골질 안하잖아요?
단아 : 안나오는 걸 어떻게 해요?
강석 : 아니, 그게 왜 안나오나? 그냥 부르면 되는데.
그럼 앞으로 나 뭐라고 부를 겁니까? 강석씨, 쭉 그럴 겁니까?
어머니, 아버지 앞에서도 강석씨, 강석씨 그럴 거냐구요?
단아 : 저기요. 그러면 되죠.
강석 : 저기가 어딘데요?
단아 : (흘겨보는)
강석 : 나중에 애기 낳고 나서도, 애들 앞에서 저기요, 그럴 겁니까?
단아 : 아니요. 그땐 누구 아빠, 그러면 돼요.
강석 : (보고)
단아 : .....
강석 : 누구 아빠.....(미소 지으며) 신기하네. 누구 아빠라....여보보단 그게 더 괜찮겠다.
단아 : (미소 짓는)
강석 : 우리 이 참에 애기 이름이나 지읍시다. 당신하고 내 이름 한자씩 따서 강단 어때요?
자식, 이름 진짜 포스 있네. (단아 손 잡고) 강단 엄마, 밥 먹으러 갑시다.
단아 : 그럼 둘째 이름은 아석으로 지을 거예요?
강석 : 어, 그건 좀 그렇다, 아, 석죽어, 그렇게 들릴 수도 있잖아요.
#.31 씬. 식당.(낮)
강석, 밥 먹다, 놀라서 보는.
강석 : 며, 몇 명이요?
단아 : (시침 뻑 까고) 일곱이요, 럭키 세븐.
강석 : (물마시면서) 이, 일곱을 낳겠다구요?
단아 : 하는데 까진 해보려구요. 가뜩이나 인구도 준다는데, 사회에 기여 좀 하죠 뭐.
강석 : 그래도 일곱은 좀 과하지 않나? 그럼 당신 몇 년이나 배불러 있어야 하는지 알기나 해요?
단아 : 10년 안짝이면 해결 될 거예요.
강석 : 정말 낳겠다 그거죠? 일곱을?
단아 : 삼월 할머니랑 약속 했어요.
강석 : 아니, 그런 걸 신랑하고 의논도 안하고 자기 혼자 막 약속하고 그러면 어쩝니까?
단아 : 왜요? 애기 많은 거 싫어요?
강석 : 함지고 간 놈 있죠? 내 친구?
단아 : 네.
강석 : 그 자식, 아들 딸 둘인데, 하마터면 이혼할 뻔 했거든요.
단아 : 무슨 말이에요?
강석 : 죽자 살자 연애해서 결혼한 놈인데, 와이프가 애기 낳고 나선 거들떠도 안 보더래요.
애기는 똥 싸 놓은 것도 이뻐서 어쩔 줄 모르면서
저는 들어오면 들어오나 보다, 나가면 나가나 보다 그러드래요.
그래서 그 자식 바람 필 작정까지 했었다는 거 아닙니까?
단아 : 지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
강석 : 우리 이건 확실하게 합시다.
단아 : 뭘요?
강석 : 나중에 그 자식 와이프처럼 그럼, 나 우울증으로 입원해 버릴 테니까 알아서 해달라구요.
일곱도 좋고, 열일곱도 좋은데, 애기들한테 홀려서 나 본 척 만 척 하면 확....
단아 : 확 뭐요? 바람 피겠다구요?
강석 : 내 새끼들이지만, 그 자식들하고 확 한판 붙을 겁니다. 니 엄마 내놔 하고.
단아 : 포스 있는 우리 강단이가 질까 모르겠네요.
#.32 씬. 부엌.(낮)
수영, 태영, 동동, 식사 준비하고 있는.
태영 : 너무 하는 거야, 너무. 청소는 그렇다 쳐. 밥도 안 챙겨주고,
알아서들 챙겨 먹으라고 전화만 삐쭉하시는 처사가, 이건 해도 너무한다는 거지.
수영 : 야, 찌개에 침 튄다. 이왕 할 거면, 거품 물지 말고 그냥 좀 하자.
석호, 들어오는.
석호 : 난 뭐하랴?
수영 : 빨래 다 너셨는데 좀 쉬세요, 아버지.
석호 : 나 없으면, 태영이 쟤가 니 엄마가 너무한다고 더 난리칠 거 아니냐?
태영 : 아버지?
석호 : 왜?
태영 : 제가요, 어젯밤만 해도 우리 색시들한테 상까지 주시는 어머니한테 진짜 잘하자,
마음 굳게 먹었었거든요.
석호 : 그럼 그냥 쭉 굳게 먹지 그러냐?
태영 : 그게 되냐구요? 이 집안 남자들 부려먹자고 작정하고 결혼하신 것 같은 어머니 보면서
그 마음이 쭉 가지냔 말이죠?
동동 : 아빠?
태영 : 왜?
동동 : 아빠 원래 이랬다 저랬다가 특기잖아?
#.33 씬. 수영의 방.(밤)
수영, 진아 앉아있는. 진아, 수영의 손에 로션 짜서 발라주는.
진아 : 저도 물일 하고 나면 이거 꼭 발라요. 천연미네랄이라 흡수도 잘되고, 냄새도 좋고, 촉촉하고.
어떡해요? 우리 신랑 이러다 주부 습진 걸리면?
수영 : 주부 습진은 문제가 아니고, 귀가 멀 거 같아요.
진아 : 네?
수영 : 태영이 자식이 하루 종일 얼마나 툴툴대는지 귀 아파 죽겠어요.
진아 : (웃는)
수영 : 난요. 우리 색시 찜질방에서 푹 쉬고 오는 게 좋아서
진짜 아무 말도 안하고 일만 열심히 했어요. 나 너무 착하죠?
진아 : (웃으며) 네. 우리 신랑이 최고예요.
#.34 씬. 태영의 방.(밤)
태영, 어깨 주무르고 있는 말순.
말순 : 더 해야 해?
태영 : 진짜 어깨가 빠질 거 같다니까. 아버지랑, 형이 뭐 할 줄 아는 게 있는 줄 아냐?
하루 종일 집안 일 나 혼자 한 거나 다름없다니까.
말순 : 나 졸린데.
태영 : 하루 종일 찜질방에서 실컷 자고 왔을 텐데, 왜 벌써 졸려?
말순 : 찜질방에서 안 잤어. 어머니랑 고모할머님 젊은 시절 얘기 듣느라.
태영 : 수다 떠느라 신들 나셨겠네, 아주. 아, 더 꽉 꽉 좀 주물러.
말순 : 주무르고 있잖아. (힘껏 주무르는)
태영 : 야, 야, 어깨 분지를 일 있냐?
말순 : 꽉 꽉 주무르라면서?
주정E : 얘들아?
말순 : (일어나서 문 여는) 네 할머님.
주정 : 동동이 아직 안자는 거 같던데, 니들 이래도 되겠니?
하루라도 반성문 안 쓰고 지나가야 하지 않겠냐구?
말순 : 네.
주정 : 조심들 하면서 살자. (문 닫아주는)
말순 : (발로 태영 차면서) 조심들 하라시잖아?
태영 : 어쭈 차. (말순 끌어당겨서 레슬링 하는)
말순 : 어쭈랄라, 덤빈다 이거지. 엎어치기 들어간다. (둘이 실랑이하는데)
문 벌컥 열리는. 동동 서있고.
말순, 태영, 놀라서 보는.
태영 : 엄마, 아빠 그냥 노는 건데.
동동 : 진짜 궁금하네요.
태영 : 뭐가?
동동 : 왜 엄마, 아빠는 노는 것도 조용히 못 노시는지.
#.35 씬. 만기의 방.(밤)
만기, 누워있으면, 동동 들어오는.
만기 : 동동아?
동동 : 네, 할아버지?
만기 : 너무 엄마, 아빠한테 무섭게 하지 마라.
동동 : 할아버지가 모르셔서 그래요. 제가 이 정도라도 하니까 두 분이 어른처럼 보이는 거예요.
만기 : (미소 짓고) 그런 거냐? 네가 애 많이 쓴다.
동동 : 제가 사는 게 참 힘들어요, 할아버지.
#.36 씬. 호텔 전경.(밤)
#.37 씬. 호텔 룸.(밤)
강석 팔을 베고 누워있는 단아.
강석 : (팔이 저린다)
단아 : (역시 팔을 베고 누워있는 게 편치 않다)
강석 : (몸을 뒤척이며, 단아 몰래, 코에 침을 바르는)
단아 : (일어나 앉는)
강석 : (일어나 앉으며) 왜요?
단아 : 우리 뭐 잘못하고 있는 거 아닐까요?
강석 : 뭐가요?
단아 : 팔베개가 이렇게 불편한데, 이걸 어떻게들 하고 사는 거죠?
강석 : 그렇죠? 좀 불편하죠?
단아 : (끄덕이는)
강석 : 나만 그런 줄 알았네. (얼른 팔 주무르는)
단아 : 팔 저려요?
강석 : 네.
단아 : (강석 팔 주물러주면서) 우리 이건 하지 말아요.
나도 머리 밑에 강석씨 팔이 있으니까 잠도 안 들고 뒤통수도 저린 거 같고, 이상해요.
강석 : 가만있어 봐요. (일어서 테이블 앞으로 가서 컴퓨터 켜는)
단아 : 뭐해요?
강석 : 팔베개가 왜 이렇게 불편한 가 알아 보려구요.
단아 : 그런 것도 나와 있을까요?
강석 : 찾아볼게요.
시간 경과.
강석, 단아 누워있는. 강석, 단아의 목 밑으로 팔을 넣고 있는.
강석 : 아, 이렇게 하면 되는 거였네.
단아 : (웃는) 우리 제대로 하는 거 정말 없어요.
강석 : 팔베개라고 해서 진짜 팔을 베고 자는 건 줄 알았지. 목 밑으로 넣는 거란 걸 알았냐구요.
단아 : 우리 좀 바보 같지 않아요?
강석 : 이건 우리 둘만 아는 죽을 때까지의 비밀로 합시다. 남들이 알면 진짜 쪽 팔리니까.
단아 : 그래도 우리랑 똑같은 사람들도 있잖아요?
강석 : 인터넷에 올린 그 사람보단 나아요. 우린.
그 사람은 일주일이나 그러다가 팔 빠지는 줄 알았다잖아요.
단아 : (웃는)
#.38 씬. 호텔 룸.(새벽)
강석, 몸을 뒤척이다가 눈을 뜨면, 단아, 화장대 앞에 앉아 로션을 바르고 있는.
강석 : (일어나 앉으며) 왜 그렇게 잠이 없어요? 아직도 꿈인 거 같아서 그러는 거예요?
단아 : 나 때문에 깬 거예요?
강석 : (침대에 내려와 뒤에 서는) 벌써 세수 했어요?
단아 : (거울로 강석을 보면서) 우리 할머님이요. 삼월 할머니가 그러시는데,
시집오신 그날부터 단 하루도 세수 안한 얼굴로 할아버지 앞에 서신 적이 없대요.
강석 : .....
단아 : 어머니 시집 오셨을 때, 할머님이 어머니한테 잠깬 얼굴로 남편 앞에 나서지 말라고 이르셨대요.
그게 아내가 남편을 귀히 대하는 법이라고 하시면서.
강석 : (단아의 어깨 잡고) 그 어른들은 옛분들이시잖아요?
난 당신 바로 깨서 눈꼽 낀 얼굴로 나 봐도 귀여울 거 같은데.
단아 : 그 어른들 그 마음을 알 거 같아요. 평생 사랑한다는 말도 못하고 사셨던 분들일 테니까.
사랑한다는 마음을 전할 방법이 그런 게 아니었을까.
난 당신에게 고운 모습을 보이고 싶어서 조금 더 일찍 일어나 이렇게 단장을 하고 당신 앞에 선다고.
나도 그러고 싶어요. 그 어른들처럼 그렇게 부지런한 마음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싶어요.
강석 : (뒤에서 단아를 안으며) 사내로 태어나 당신 같은 여자를 아내로 맞은 나란 놈, 정말 운이 좋은 놈이에요.
단아 : (미소 지으며 거울로 강석을 바라보는)
#.39 씬. 마루.(새벽)
말순, 하품하면서 방에서 나오는데, 진아 한복 차림으로 방에서 나오는.
말순 : (보고) 형님?
진아 : (보고)
말순 : 오늘부턴 옷 편하게 입어도 된다고 허락 떨어졌는데, 왜 한복을 입고 나오세요?
진아 : 전 그냥 이렇게 입는 게 나을 거 같아요.
아침마다 한복 입으면서, 난 이 집안의 종부다, 생각하는 게 좋거든요.
말순 : (진아 끌고 한 켠으로 가서 서며) 나 계급장 뗀다. 형님아?
진아 : 네.
말순 : 형님 네가 이러면 난 뭐가 되니?
가뜩이나 선머슴 같은 나 물먹이자고 작정한 거 아니면 이러면 안 되는 거야.
진아 : 그런 거 아닌데.
말순 : 그런 거 아니면, 행동 통일 하자, 형님아.
수영, 태영, 방에서 나오다가 두 사람을 보는.
진아 : 한복을 입고 생활하니까 몸가짐도 조심하게 되고 그래서....
말순 : (자르며) 오진아?
진아 : (보면)
말순 : 계급장 뗀다고 했지?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이러지 말자, 진아야. 좀 봐주라.
(울상이 되서 매달리며) 응. 형님아? 형님아?
태영 : (수영에게) 우리 말순이 진짜 불쌍해 보이지?
수영 : (웃는)
#.40 씬. 수영의 방.(새벽)
진아, 단정한 옷으로 갈아입고 있는, 수영, 웃으며 보고 있는.
수영 : 우리 색시 진짜 의리파예요.
진아 : (웃으며) 실은요. 의리 때문이 아니라, 계급장 떼고 덤비는 동서가 무서워서 쫀 거예요.
수영 : (웃는)
#.41 씬. 경주 박물관.(낮)
단아, 메모 하면서 전시품 보고 있는. 그런 단아를 바라보며 서있는 강석.
#.42 씬. 경주 박물관 밖.(낮)
강석, 단아 걸어오는.
단아 : 언젠가 물었었죠?
강석 : (보면)
단아 : 박물관에서, 왜 방학인데 여행도 안가냐고 하면서. 모르는 거죠?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하는지?
강석 : .....
단아 : 그때, 가슴 속에서 뭔가 내려앉았어요. 이 사람은 나에 대해 많이 아는구나.
강석 : ....
단아 : 이 사람과 나 곧 끝날 텐데,
이렇게 나에 대해 알아주는 사람을 보내는 게 쉽지 않을 텐데, 어떡하나.
강석 : (손 잡고) 그래서 내가 매달렸잖아요?
단아 : (미소 짓고) 아마, 당신이 매달리지 않았으면, 어쩌면 내가 매달렸을지도 몰라요.
강석 : (웃으며) 행여나요.
단아 : 그날.....호수 앞에 당신이 나타났던 날.
한 백번쯤 여기 이렇게 와보고, 마음을 다잡아보고, 그래도 안 되겠으면 찾아가서
우리 이대로 끝나는 거냐고, 한번만 물어보자 그런 생각하고 있었어요.
강석 : 정말입니까?
단아 : 네.
강석 : 하여간 성질 급한 놈이 손해라니까.
꾹 참고 기다렸으면, 당신이 찾아와서 매달리는 거 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럼 그렇게 없어 보이는 짓 안 해도 됐을 거구. 근데, 한 백번쯤이 얼마나 되는 겁니까? 백일?
단아 : 아마, 한 십 년 쯤 되지 않았을까요?
강석 : (웃고) 성질 급하게 태어나길 잘했지. 아, 이건 처음부터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었던 거야.
이렇게 끝나는 거냐는 말 하러 십년 뒤에 찾아올 여자 기다리다 지레 죽고 말았겠네.
단아 : 밥 먹으러 가요. 여보.
강석 : 어, 도저히 안온다면서요? 그 말? 난 여보 소리 듣는 것도 한 십년 걸릴 줄 알았는데.
단아 : 당신 닮아서 나도 성질이 점점 급해져 가거든요.
#.43 씬. 부엌.(낮)
삼월, 찬장을 열어보며, 뭔가를 찾고 있는.
조만, 진아 장 봐가지고 들어오는.
조만 : 뭐 찾으세요? 할머니?
삼월 : 무청 말린 걸 여기 어디다 둔 거 같은데?
조만 : 그건 광에 있잖아요? 무청 말린 걸 언제 찬장에 둔 적이 있다고 그러세요?
삼월 : (멍하니 보는) 그런가? (나가는)
진아 : 많이 편찮으시고 나시더니 기억력이 떨어지셨나 봐요?
조만 : (대수롭지 않게) 그럴만한 연세도 되셨어요.
칠십도 훨씬 넘으셨는데 너무 빈틈없는 것도 인간미 없잖아요?
#.44 씬. 종가 마당.(낮)
삼월, 장독을 열어보면서.
삼월 : 무청을 어느 독에 넣어놨나. (장독 뚜껑을 여는)
#.45 씬. 강석의 집 거실.(낮)
영자, 전화 중, 천갑, 골프 연습하고 있는.
영자 : (확 얼굴 구겨지면서) 그, 그런 결혼이라뇨?
천갑 : (영자를 보는)
영자 : 참 말씀 묘하게 하시네요. 제 며늘아기가 어디가 어때서요?
(인상 더 구겨지고) 그런 말씀 하시는 거 들으니 사모님 인품이 의심스럽네요.
전요, 우리 아이 사람 됨됨이 하나에 반해서 며느리로 들인 거거든요.
사모님도 딸이 있으시면서 그렇게 말씀 하시는 거 아니죠?
우리 아이가 과거에 모진 일 겪은 거, 저는 마음 아프게 생각하면 했지, 다르게는 전혀 생각 안 해요.
네, 저 화통해요. 내 아들이 좋다고 하고, 저도 마음에 드는데 뭐가 문제랍니까?
근데요, 사모님? 저희 집안 걱정해주시는 건 고마운데, 그럴 정신이 있으세요?
그 댁 며느님이 무슨 제비한테 걸려서 돈 사고 크게 쳤다는 소문 있던데? 아, 네, 아니면 다행이구요.
근데 참 이상하죠, 왜 그런 흉흉한 소문이 그 댁엔 그리 자주 있나 모르겠어요.
그러죠, 끊을게요. (수화기 내려놓는) 옘병할 여편네. 즈네 집구석 단속이나 잘하라지.
천갑 : 어떤 옘병할 여편네야?
영자 : 그런 여편네 하나 있어.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란다고 웃기고 자빠졌네.
천갑 : 그런 여편네하곤 아예 상종을 하지마라.
영자 : 그럴 거야. 말 많은 여편네 몇 모이는 모임, 이참에 아주 끊어버릴 거야.
천갑 : 나가자.
영자 : 응?
천갑 : 이쁜 짓하는데, 눈깔만한, 아니 주먹만한 다이아 하나 사준다 내가.
영자 : 정말?
#.46 씬. 커피숍.(낮)
현규, 혜주 앉아있는.
현규 : 우리 누나가 예전에 읽던 순정 만환데. 너무 슬프다며 눈물까지 흘리면서 읽는 거야.
그래서 나도 읽어봤거든.
혜주 : ....
현규 : 한 소녀를 사랑하는 소년이 있다. 근데 소녀가 많이 아파.
그 소녀는 새벽마다 집 앞으로 산책을 나가. 아픈데도 왜 산책씩이나 나가냐구?
혜주 : .....
현규 : 새벽마다 그 소년이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가거든.
그 모습을 우연인 것처럼 보고 싶어서 아픈데도 산책을 나가는 거야.
혜주 : .....
현규 : 둘 다 바보처럼 서로 좋아하면서도 표현을 못하는 애들이었어.
우리 누나가 슬프고 아름답다면서 운 장면이 뭔 줄 아니?
혜주 : .....
현규 : 소년이 밤마다 소녀가 다니는 길 위에 있는 돌멩이들을 줍는 거였어. 혹시라도 걸려 넘어질까 봐.
혜주 : (눈물이 글썽한)
현규 : 내가 얘길 너무 감동적으로 했나보다.
혜주 : 어떻게 됐어요? 두 사람?
현규 : 몰라, 끝은 기억 안나.
혜주 : 소녀가 죽은 거군요?
현규 : (일어나며) 그땐 그 남자애가 진짜 이상했어.
걸려 넘어질까 봐 밤마다 돌멩이를 주우러 다닐 만큼 걱정이 되고 좋아하면,
그냥 좋아한다고 말하지, 뭐하러 이런 생고생을 하고 있나 그랬어.
좋아한다고 말하고 매일 찾아가서 얼굴을 보여주면 될 걸 진짜 궁상도 가지가지로 떤다 그랬는데.....
혜주 : (올려다보면)
현규 : (돌아서며) 나 이제 너랑 영화 보러 갈 거면, 꼭 미리 가서 먼저 보고 올 거야.
혜주 : (눈물이 흘러내리는)
#.47 씬. 경주 일각.(밤)
강석, 단아 앉아있는.
강석 : 아, 정말 좋다. 밤에도 헤어지지 않고, 이렇게 같이 있을 수 있으니까.
단아 : (미소 짓고)
강석 : 밤마다 당신 집 앞에 내려주고 돌아서서 가는 게 죽을 맛이었는데.
단아 : 나도 밤마다 돌아서서 집으로 들어가는 게 죽을 맛이었다고 해야 하는 거죠?
강석 : 나만이야 했겠어요?
단아 : (강석에게 팔짱을 끼며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살면서 가끔은 헤어져 있어야 하는 날도 있을 거예요.
강석 : 그런 날이 왜 있어요?
단아 : 당신 출장갈 수도 있고.....
강석 : 그런가. 아, 안돼, 안돼. 출장 갈 일 생기면 형님들더러 대신 가라고 할 거예요.
형님들하고 같은 회사에 있는 게 그래서 좋은 거 아니겠어요?
단아 : 그런 날이면, 당신이 없는 게 아쉬워서 잠 못 들고 밤새 뒤척였으면 좋겠어요.
10년 20년 더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도.
늘 곁에 있어서 아쉽다는 생각도 못하고 살다가 문득 그런 날이 오면
이 사람이 곁에 없다는 게 이렇게 이상하구나 하면서.
강석 : (단아의 어깨를 감싸 안는) 우리 그렇게 늙어가요.
앞으로 우리 인생에서 며칠이나 헤어져 있어야하는 날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날이면 밤새 잠 못 들고 뒤척이면서,
이 나이 먹어서도 이렇게 날 잠 못 들게 하는 사람이 내게 있어 참 다행이다 그러면서.
#.48 씬. 종가 전경.(낮)
#.49 씬. 마루.(낮)
태영, 말순, 장기 서있는.
태영 : 잘 왔어요.
말순 : 왜 장기는 데려오라고 한 거야?
태영 : 힘 좀 쓰시지?
장기 : 네? 네.
태영 : 오늘 힘 좀 써주쇼.
조만, 부엌에서 나오는.
조만 : 이경장님?
장기 : 조만씨, 저 왔어요.
태영 : 아니, 왜들 그렇게 얼굴이 벌개지시나?
#.50 씬. 부엌. (낮)
삼월, 진아, 영인, 음식 준비하고 있고, 주정은 오늘도 역시 음식이나 주워 먹고 있는.
조만, 들어오면서.
조만 : (들어오면서) 작은 오빠는 정말 왜 저러는지 몰라요.
주정 : (킥 웃으며) 너 정말 얼굴 벌개.
조만 : 할머니까지 왜 그러세요. (나가버리는)
삼월 : 너무 놀리지 마. 연애하는 표 안내려고 매일 옷 바꾸러 간다고 핑계 대는 쑥맥이야.
주정 : 재밌잖아? 발랑 까진 애면 무슨 맛에 놀려먹어.
근데 조카댁? 어쩐 일이예요? 감시가 주특기면서?
영인 : (웃으며) 사위 먹일 음식인데 뒷짐만 지고 있을 순 없잖아요?
주정 : 사위가 무섭긴 무섭네.
영인 : 백년손님이란 말이 괜히 있는 건 아닌가 봐요.
결혼 전엔 몰랐는데, 막상 결혼식 하고 신혼여행 다녀오는 사위 맞는다고 생각하니까
괜히 어렵고 뭐라도 더 내놔야 하는 거 아닌가 싶고 그러네요.
태영E : 야, 새신랑.
주정 : 어머, 왔나보네.
#.51 씬. 마루.(낮)
강석, 단아(한복 차림) 들어오는, 태영, 장기 서있는.
태영 : 야, 새신랑 너 왜 이렇게 피골이 상접하냐?
석호, 수영 방에서 나오는.
태영 : 형, 새신랑 얼굴 좀 봐. 애 아주 못쓰게 되서 왔네.
강석 : (웃으며, 석호에게 인사하는) 다녀왔습니다.
석호 : 그래, 어서 오게. 할아버님께 인사드려야지?
태영 : (단아 쿡쿡 찌르면서) 네 신랑 얼굴 진짜 많이 안됐다.
단아 : (곱게 흘겨보며, 부끄러워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52 씬. 사당.(낮)
강석, 단아 절을 하고 일어서는. 만기, 석호 서있는.
만기 : 단아 신랑입니다. 이 아이가 오늘 이렇게 자네 옆에 서있을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주신 어른들일세.
#.53 씬. 종가 전경.(밤)
식구들 웃음소리.
강석E : (비명에 가까운) 아, 형님, 형님.
태영E : 네가 도적놈인 거 아냐? 모르냐?
#.54 씬. 마루.(밤)
장기, 강석의 발을 묶은 끈은 어깨에 매고 서있고. 태영, 방망이로 강석의 발을 때리고 있는.
수영, 웃으며 강석의 발을 잡고 있고.
태영 : 형, 꽉 잡아.
수영 : 꽉 잡고 있잖냐?
영인, 삼월, 조만, 주정, 진아, 말순, 웃으며 보고 있고.
단아, 안쓰러워서 어쩔 줄 모르고.
단아 : 살살해, 작은 오빠.
태영 : 내 동생이 남편 편을 든다 그거지. 이 오라비가 분해서 못살겠네. (더욱 세게 강석의 발을 때리는)
영인 : 정말 아프겠네. 우리 사위 죽이겠어, 그만 좀 해.
태영 : 아니, 우리 어머니까지 사위 역성을. 분해서 팔에 힘이 들어가네, 이거. (마구 때리는)
#.55 씬. 만기의 방.(밤)
만기, 석호 앉아서 웃고 있는.
태영E : 귀한 내 여동생 도적질 해가는 놈을 어떻게 안 때릴 수 있겠냐, 그거지.
강석E : 아, 아, 진짜 아파요.
태영E : 그럼 아프라고 때리지, 간질이려고 때리겠냐.
영인, 들어오는.
영인 : 아버님? 좀 말려주세요. 저러다 이서방 진짜 병나겠어요.
만기 : 저것도 재미니 그냥 두거라.
#.56 씬. 마루.(밤)
강석, 비명을 지르고, 태영, 아주 신나서 마구 때리고.
영인, 만기의 방에서 나오는.
영인 : (삼월에게) 좀 말려보세요.
삼월 : (단아에게) 이럴 땐 색시가 노래라도 불러야 하는 건데.
단아 : 작은 오빠? 내가 노래할게.
강석 : 아니지, 그건. 당신 노래 들으면 더 때리실 텐데.
태영 : 허걱, 당신, 이 도적놈이 내 동생더러 당신이란다, 당신. 매를 버네, 벌어. (마구 때리고)
영인 : (태영 팔 잡으며) 이 도적놈 내 사위거든. 좀 봐줘. 진짜 이러다 사람 잡겠다.
태영 : 그럼요, 어머니. 이번 주엔 남자들이 청소랑 빨래 안 해도 되는 거죠?
영인 : (흘겨보고) 아, 좋아, 하지 마, 하지 마.
#.57 씬. 수영의 방.(밤)
수영, 태영, 강석, 말순, 진아, 단아, 주정 술상 앞에 놓고 앉아있는.
강석 : 진짜 아프다니까요.
태영 : 엄살 부리지마. 사정 봐가면서 때렸는데.
말순 : 그렇게 재밌는 건 줄 알았으면, 자기도 우리 집에 갔을 때 매다는 거였는데.
강석 : 아니, 뭡니까? 형님은 안하신 겁니까?
태영 : 난 이 사람 구제해 준 거지만, 넌 내 동생 도적질 해가는 거잖냐?
강석 : 진짜 여러 가지로 치사하십니다, 작은 형님.
태영 : 아직도 입이 산 거 보니까 덜 맞았나보네. 야, 다시 나가자.
강석 : 아닙니다, 입 다물면 되잖아요.
주정 : 야, 됐다, 됐어, 군기 팍 든 거 같다.
수영 : (웃으며 강석의 잔에 술을 따라주는) 신혼여행은 재미있었나?
강석 : (태영에게) 입 열어도 됩니까?
태영 : (주정에게) 얘 아직도 깐죽이는 거 보세요, 할머니.
주정 : (웃으며) 둘이 뭐했어?
강석 : 신혼여행 가서 할 게 뭐 있나요?
주정 : 뭔데?
단아 : (일어나서 나가는)
주정 : 단아, 너 어디 도망가니? 뭐 하긴 했나보네. 단아 얼굴 빨개져서 도망 나가는 거 보니.
#.58 씬. 부엌.(밤)
삼월, 그릇을 마른 행주로 닦아 올려놓고 있는.
단아, 들어오는.
삼월 : (돌아보면서) 왜요? 애기씨?
단아 : 할머니.
삼월 : (약간 멍한 느낌으로 보는)
단아 : (다가와 삼월 손잡고) 나 애기 때 그렇게 부르곤 처음이다, 삼월씨.
삼월 : (순간, 정신이 드는 느낌으로) 뭐 줄까? 왜 나왔어?
단아 : 나랑 우리 할머니가 정말 그렇게 많이 닮았어? 사진으로 뵈선 그렇게 많이 닮은 거 같지 않은데.
삼월 : (단아 머리 만지면서) 왜 안 닮아? 애기 때는 정말 똑같았는걸.
우리 애기씨 걸음걸이하며, 몸짓하며, 웃는 것도 어찌나 똑같은지.
너 어려서는 절로 애기씨 애기씨 그래지던 걸. 신랑 옆에 있지 뭐 하러 나왔어?
단아 : 할머니랑 작은 오빠가 놀려서.
삼월 : (웃고) 얼마나 짓궂게들 놀렸으면 우리 단아가 도망까지 나왔을까.
신혼여행 재미나게 보내고 온 거지?
단아 : (끄덕이는)
삼월 : 이젠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우리 단아 추운 줄 모르고 살겠네.
#.59 씬. 단아의 방.(밤)
원앙금침이 펴져 있고, 강석, 잠옷으로 갈아입고 방안을 둘러보며 앉아있는.
#.60 씬. 마루.(밤)
단아, 대야에 물을 담아가지고 욕실에서 나오는.
태영 : 뭐냐? 그거?
단아 : 아냐.
태영 : 강석이 발 부었을까봐 그러지 너?
단아 : 아냐. (얼른 가려고 하면)
태영 : (잡으면서) 너무 그렇게 위해주지 마. 저 자식 목에 깁스하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냐?
단아 : (곱게 흘겨보면서)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심하게 다루래?
#.61 씬. 단아의 방.(밤)
강석, 발 대야에 담그고 있는.
단아 : (강석의 발 만지면서) 진짜 벌겋게 부었네.
강석 : 작은 형님, 장난으로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매에 감정이 실렸드라구요, 감정이.
단아 : (웃으며) 귀한 여동생 도적질 해 가는데 감정이 실리는 건 당연하죠.
강석 : 나 진짜 많이 아픈데.
단아 : (웃으며) 어떡해요? 우리 신랑. 이렇게 많이 아파서?
강석 : 딸은 꼭 낳아줘요.
단아 : 네?
강석 : 내가 오늘 당한 앙갚음 사위 자식한테 해볼 모양이니까.
단아 : (웃고) 장인이 사위 매다는 법은 없거든요.
강석 : 나 옹졸한 거 몰랐어요?
#.62 씬. 석호의 방.(밤)
영인, 결혼식 때 디지털 액자를 보고 있는.
석호, 세수하고 들어오는.
석호 : (앉으면서) 기분이 참 좋다. 우리 단아 방에서 신랑하고 두런두런 얘기소리 들리는 거 들으니.
영인 : 아직들 안자?
석호 : 뭐라고 뭐라고 하면서 웃음소리도 들리고 그래.
영인 : (액자 보여주면서) 우리 결혼하고 나서 참 많은 일 치뤘다, 그지?
석호 : 이날 당신하고 결혼하면서 기쁜 한편으론 마음이 참 많이 무거웠는데.
자식 셋 다 혼자 있는 거 보면서 에비가 저 혼자 좋자고 이러고 있구나 싶어서.
당신이 나한텐 복덩어리다.
영인 : 그지? 나 이 집안에 넝쿨째 굴러들어온 복덩어리지?
석호 : (손잡고) 고맙다, 영인아. 네가 우리 집안에 어떻게 적응하고 살까 내심 걱정 했는데, 너무 잘 해줬어.
영인 : 내가 그래. 안 해서 그렇지 마음먹고 하자고 들면 너무 완벽하게 해내는 게 내 유일한 단점이거든.
석호 : (웃는) 그런 단점이라도 없으면 너무 완벽하지.
#.63 씬. 단아의 방.(밤)
단아, 강석의 팔을 베고 누워있는.
단아 : 삼월 할머니가 이제 우리 단아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춥지 않게 지내겠네, 그러셨어요.
강석 : 겨울은 괜찮은데, 여름에도 이렇게 딱 붙어 지내면 땀띠 나는 거 아닐까?
단아 : (웃으며) 오늘에서야 우리 삼월 할머니 인생이 참 가엾구나 그래져요.
평생 저렇게 등이 시려운 채 사셨겠구나.
남자 여자 사이의 정도 모른 채, 그리워할 사람 하나 없이 사신 저 인생이 얼마나 허전하실까.
나도 어쩌면 저렇게 살아야 했을지 모르는데.....
강석 : (단아를 감싸 안는)
단아 : 그렇게 살지 않게 해줘서 고마워요.
#.64 씬. 종가 전경.(새벽)
#.65 씬. 하옹의 방.(새벽)
가족들 모두 상식을 올리고 있는.
만기 : (뒤에 서있는 강석에게) 이리 오게.
강석 : 네, (앞으로 나서는)
만기 : 오늘은 자네가 잔을 올리게.
강석 : 네. (잔을 들면, 석호 잔에 술을 부어주는)
강석, 술잔을 상에 올려놓고.
단아 : (울먹한 심정으로 바라보는)
삼월, 뒤에 서서 눈물을 훔치는.
주정 : 왜 그래? 할멈?
삼월 : 우리 단아 신랑이 올리는 잔을 받으시니 얼마나 흐뭇하실까 싶어서.
만기 : (눈시울을 붉히면서) 오늘은 자네 혼자 먼저 절을 올리게나.
강석 : 네. (절을 하는)
석호, 수영, 태영, 눈시울이 붉어지는.
#.66 씬. 만기의 방.(낮)
만기, 단아, 강석 앉아있는.
석호, 영인, 수영, 태영, 주정 서있고.
만기 : 단아야?
단아 : 네, 할아버님.
만기 : 너는 이제 이 집 사람이 아니라 저 사람 집 사람이다.
태어나긴 우리 집안의 여식으로 태어났지만, 죽을 때는 저 사람 집안사람으로 죽는 거란다.
이 집안의 여식으로 넌 우리에게 많은 기쁨을 주는 아이였다.
이제 저 사람 집안사람으로 또 그리 살아주길 바란다.
단아 : 네, 할아버님.
만기 : 이보게?
강석 : 네. 할아버님.
만기 : 죽어서도 저 아인 이 집안으로 돌아올 수 없는 거라네.
자네 집안사람으로 생을 마칠 저 아이, 부디 귀히 여겨주게나.
강석 : 그러겠습니다.
#.67 씬. 강석의 집 전경.(낮)
#.68 씬. 강석의 집 거실.(낮)
강석, 단아 들어오는.
천갑, 영자, 혜주, 순진, 아줌마 기다리고 있는.
강석 : 다녀왔습니다.
강석, 단아, 인사하고. 단아, 혜주 마주 보고 웃고.
천갑 : 들어가자. 우리 며느리 절 받아야지.
#.69 씬. 천갑의 방.(낮)
한식으로 바뀌어져 있는.
천갑, 영자, 강석, 단아 들어오는.
강석 : (방보고 놀라는)
영자 : 침대 있는 방에서 어떻게 절 받냐고, 이렇게 싹 바꾸셨다, 네 아버지가.
강석 : (웃으며) 참 대단하세요, 아버지.
천갑 : 자, 절 받자. (영자, 옆에 앉히고)
강석, 단아, 절하는.
천갑 : 고맙다. 그 우여곡절 다 겪으면서도 잘 참아내고 우리집 며느리가 돼줘서.
영자 : (다가앉으며, 단아의 손을 잡고) 우리 세상에 없는 시어머니, 며느리로 재미나게 살아보자.
단아 : (울먹한 느낌으로) 네, 어머님.
천갑 : 내가 절도 절이지만, 이 방을 왜 이렇게 바꾼 지 아냐? 재미나게 살아보려고 그런 거야.
영자 : 네 아버지, 니들이랑 고스톱 치려면 침대 없는 방이어야 한다고 이러신 거다.
강석 : 진짜 대단하세요, 아버지.
#.70 씬. 강석의 방.(낮)
가구, 모두 바뀌어 있고, 침대는 좀 더 큰 걸로.
강석, 단아 들어오는.
강석 : (방을 둘러보고) 이게 멋대가리 없는 내 방 맞나.
단아 : (웃고)
강석 : 아깝다.
단아 : (보고)
강석 : 곧 이사 가야 할 거니까.
단아 : 왜요?
강석 : 애들 일곱이 복작거리기엔 방이 너무 적잖아요, 이 집.
단아 : (웃는)
#.71 씬. 강석의 집 식당.(낮)
천갑, 영자, 강석, 단아, 혜주, 순진 식사하는.
천갑 : (수저 내려놓는) 자, 다 먹었으면 우리 본격적으로 시작해보자.
강석 : 뭘요? 아버지?
천갑 : 너 현금 좀 있냐?
강석 : 네?
천갑 : 오늘은 현금 박치기니까 없으면 가서 찾아와라.
강석 : 무슨 말씀이세요?
천갑 : 자식, 둔한 척은. 뭐긴 뭐겠냐?
영자 : 여보. 오늘 당장 그러는 건 좀 그렇지 않아?
천갑 : 오고 가는 현금 속에 싹트는 정이란 말도 있다.
#.72 씬. 천갑의 방.(낮)
천갑, 영자, 강석, 단아, 둘러 앉아 화투 패 들고 있는.
강석 : 아버지? 이건 좀 그래요. 오늘 집에 들어온 사람하고 고스톱부터 치자고 하시는 건?
천갑 : (단아에게) 내 캐릭터 특이하고 재미있지 않냐?
단아 : (웃으면서) 네.
시간 경과.
단아, 무안한 표정으로, 똥 싸놓은 거 가져가면서.
단아 : (강석을 보는)
강석 : (빙긋이 웃으며) 아버지, 광박에 피박이세요.
천갑 : 난 눈 없냐?
영자 : 난 광박 피박 다 면했는데.
강석 : 무조건 쓰리고예요. 쓰리고.
단아 : (어쩔 줄 모르는)
영자 : 여기서 쓰리고 안 들어가면, 바보다 너.
단아 : (하는 수 없이) 쓰...리...고.
그런 네 사람의 모습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