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 스님의 강연, ‘윤회와 해탈’을 듣고
국회정각회가 법륜 스님을 초청하여 법회를 열었다. 여기서 법륜 스님은 윤회와 해탈이라는 주제로 설법을 했다. 설법은 불교의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법륜 스님은 이 이야기에서 화두로 ‘두려움’을 제시했다. 그 이야기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두려움은 무지에서 비롯된다. 알고 나면 두려움이 사라진다. 그런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사람은 내세가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환생 즉, 윤회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이 인도 고유의 신앙전통이다. 이런 윤회는 불교가 본래부터 가르친 것이 아니다.
부처가 수행을 통해서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 인간이 경험하는 괴로움은 욕망의 집착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려면 지혜가 필요하다. 그 지혜는 지금 하는 일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를 예측하는 것이고(천안통, 天眼通) 또한 지금 일어나는 일이 어떤 일의 결과인지를 파악하는 것이며(숙명통, 宿命通), 현재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깨어 분별하는 것이다(누진통, 漏盡通). 이런 깨달음과 지혜를 통해서 행복과 불행의 롤로코스터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 해탈이다.
법륜 스님은 윤회와 해탈에 대하여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설명한다. 하나는 종교적인 입장에서 바라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리를 탐구하는 입장에서 바라본 것이다. 그 진리를 달마, 담마, 曇摩) 또는 다르마라고 부른다. 아마 헬라인들은 그것을 ‘로고스’라고 부를 것이다.
종교적인 입장에서 윤회는 사람이 죽은 후에 다시 살아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런 끝없는 윤회의 과정을 벗어나 극락에 가는 것이 해탈이다. 이런 생각은 사람의 현재 상태를 과거의 어떤 일 또는 전생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기고 숙명론에 빠지게 하거나 현재의 불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그릇된 길로 인도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종교적인 입장에서 이해하는 윤회는 이미 그 안에 문제를 가지고 있다.
부처는 진리 탐구를 통해서 사람이 욕망을 이루어 행복하다 생각하거나 그 욕망을 이루지 못하여 불행하다 느끼는 고락(苦樂)의 롤러코스터같은 과정을 윤회로 보았다. 거기서부터 벗어나 고요함(적정, 寂靜)에 이르는 것을 열반이나 해탈로 이해했다. 여기에 지혜와 수행이 필요하다. 부처가 말하는 열반의 경지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자유와 유사하다. 예수께서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32)고 하셨다.
이와 관련하여 법륜 스님이 불자들에게 권면하는 것은 무엇인가? 종교적인 의미에서 윤회와 해탈을 이해하는 데서부터 벗어나 점차 진리를 탐구하여 욕망의 실체를 파악하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를 괴롭게 하는지를 이해하는 구도의 차원으로 윤회와 해탈을 이해하는 데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나는 법륜 스님의 강연을 듣고 불교의 가르침은 행복한 삶을 위한 지혜를 배우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행복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그렇게 하려면 고통의 원인인 욕망을 통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 점에서 불교의 가르침은 깨달음과 수행을 중시한다. 인간은 가끔 멀리 있는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가까이에 있는 가족을 미워하는 존재다. 그런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에 이르는 길을 얻는 것이 곧 열반이다. 이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그것은 생활의 지혜처럼 보인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서 그런 지혜를 터득해 간다. 그 지혜는 보통 연륜과 함께 성장한다.
법륜 스님은 지구의 자전과 공전 현상을 통해서 무시무종(無始無終)의 개념을 설명했다. 원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법륜 스님은 현상에서 원리를 발견하고 그 원리를 이 세상의 존재 근원까지 적용했다. 즉, 천체운동의 현상에서 원운동을 보고 무시무종의 원리를 발견한 후에 그 원리를 전혀 다른 영역에 적용했다. 이미 존재하는 물질의 운동현상을 그 물질의 존재 원인에 대하여 설명하려고 했다. 그것은 적용의 오류다. 그 둘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삶의 지혜나 윤리적 통찰로 우주 전체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것은 기독교계에서 창조과학회가 과학자들의 진화론을 그릇된 이론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유사하다. 일부분의 이야기로 전체를 판단하는 잘못을 하는 것이다. 성경의 창조 이야기가 인간의 본분과 이 세상의 의미에 대한 설명이라고 본다면 그 충분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 과학자들의 발견을 판단한다면 그것은 적용의 오류에 해당한다.
불교의 가르침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 가르침과 지혜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라면 그것은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이 세계의 일부분이다. 내면을 밝히는 지혜로 세계의 문제와 근원까지 재단한다면 그것은 많은 문제를 유발할 것이다.
기독교회가 가르치는 창조와 종말의 이야기는 불교의 가르침인 윤회와 해탈과는 다르다. 윤회와 해탈이 욕망에 대하여 이해하고 그 집착에서 벗어나 고요함에 이르는 지혜라면, 창조와 종말 이야기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인생이 어떤 의미인지를 깨닫고 그 목적에 충실함으로써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게 하는 지혜다.
내가 보기에, 불교의 지혜가 고요함의 자유에 이르기 위한 것이라면 기독교의 지혜는 삶을 개척하고 가꿈으로써 더 나은 세상이 되게 하는 길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사실 그 두 가지 지혜가 다 우리에게 필요하다. 불교의 윤회 사상이 단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듯이 기독교의 창조론과 종말론도 천체의 회전운동을 관찰한 것으로 쉽게 재단되어서도 안 된다.
기독교회가 말하는 창조론이 과학계의 진화론과 다툼을 유발한다면 그것은 창조론을 오해한 것이며, 종말론이 사람들에게 공포를 유발한다면 그것은 종말론을 오해한 것이다. 기독교회의 창조론과 종말론은 현실과 이 세상을 이해하고 어떻게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끝>.
참고자료:
법륜 스님의 강연: 윤회와 해탈
https://youtu.be/hi8XvI775FU?feature=shared
과학과 신앙의 조화를 위한 성경읽기(조해강 목사)
https://youtu.be/ygFQSSjBH0U?si=-YHPk5G2-VbGeU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