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12.31. 대민(주일낮)
신앙의 발자취(행20:26-28) 대민성결교회 이석민 목사
[26]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한 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지난 51주를 보내고 나니 세월이 참 빠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 빠른 세월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시야에서 놓지 않으시고 관심을 가지시고 도우셨습니다.
성도 된 우리는 올 한해를 돌아보며 자신이 남겨놓은 신앙의 발자취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지나온 발자취가 화려하게 빛났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악취는 풍기지 않았는지 내 양심을 두드리는 소리에 얼마나 귀 기울이는지 이대로 내 인생의 종말이 온다 해도 부끄러운 삶은 아닌지 내 스스로 자랑은 못해도 다른 사람이 잘 살았노라고 인정해 줄 수 있는 삶을 살았는지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아 잘못된 구습의 어리석음을 버리고 한 차원 높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여야 합니다.
누군가가 쓴 인생의 십계명중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인생에는 연장전이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온 발자취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습니다.
하루에 크건 작건 좋은 일을 하십시오. 그것이 자신의 삶을 빛나게 할 뿐 아니라 사람답게 사는 일입니다. 좋은 일 하는 사람의 얼굴은 아름답게 빛납니다. 마음에 행복이 가득 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강조하시기를 후손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역사 속의 사람의 발자취를 가르치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발자취를 더듬어보면 그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흔적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 앞에 내 것 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의 믿음뿐입니다.
내 것 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일생을 걸어왔던 발자취와 흔적들 뿐입니다.
성도의 기본 생활은 예수님을 삶의 모방하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같이 모방하여 살 수는 없지만 다만 그의 걸어가신 발자취를 따라 가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의 시대가 어수선해서 이 땅에 참 스승은 없다할지라도 성도 된 우리에게는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위대한 스승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우리 예수님을 닮는 삶을 살 때 참다운 그 리스도인의 발자취를 남깁니다.
고린도전서15장10절에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은 지나온 인생의 발자취를 하나하나 회고해 보면서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였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을 보내면서 우리에게도 이런 진솔한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1.증언의 발자취(26-27)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사도행전을 전도행전이라고도 불리워집니다.
오오다니 겐지 라는 학자는 말하기를 교회의 첫째 사명은 전도이다 만일 전도하지 않는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는 없는 것과 똑 같으며 전도는 성도의 직업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전하는 일 그것은 살고 죽는 생명의 가치를 논할 만큼 소중한 일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만이 직장도 의미가 있고, 직업도 의미가 있고, 재산도 의미가 있고, 성공도 의미가 있고, 결혼도 의미가 있고, 학문도 의미가 있고, 잘 난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을 최초의 이방인 사역자라고 부릅니다.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 지경을 넘어서 이방 민족들에게도 복음이 증거되었으며, 드로아의 환상을 통하여는 유럽에까지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서 수많은 전도자들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그리스도를 증거 한 결과, 지금 그리스도의 복음은 온 세상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미전도 지역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 지역에 대한 선교는 우리들의 몫입니다.
복음 전도자들은 복음의 내용 전부를 잘 알고 그 내용 전부를 잘 전해야 합니다. 복음 전도자의 최고 모델인 사도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증거 한대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의 내용 전부를 남김없이 다 전했다고 했습니다. 절반만을 전하지 않고 전부 다 전했다고 했습니다.
본문27절에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그가 복음의 일부만을 전했다면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는 말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20장21절에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이 말씀에서 사도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하고 다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 되심을 믿는 믿음,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믿음이 우리가 가져야 할 최고의 믿음입니다.
사도행전20장24절에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며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조차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고 고백함으로서 우리가 믿는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바울의 사명은 곧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사명(diakoniva)이란 말은 종으로서 시중드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공무상의 직무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께 받은 직무가 있습니다. 그 직무는 일시적인 것도 있고 평생 담당해야 될 것도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복음 전파의 직무를 평생 직무로 여겼습니다. 죽을 때까지, 세상 떠나는 날까지 감당해야 될 직무가 바로 복음 전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받은 사명은 먼저 주 예수님께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에 의해 임명이나 추천 받은 것이 아니라 임명권자가 하나님이시기에 그 어떤 것보다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요 다음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이라 했습니다.
“은혜의 복음”이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것으로 나 같은 죄인 구해 주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사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이요 3일 만에 부활하사 산 소망이 되신 것이요 이 복음을 증거 하는 전파 하는 것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사명입니다.
그 사명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명령입니다.(마28:18, 막16:15-행1:8) 이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으리라(고전9:16)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로 하나님을 증언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인용하면서 복음의 핵심적인 진리를 전파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밀사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요, 감격이요, 자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입을 열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신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가슴 속에 기운이 솟아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증언할 때에 우리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면서 이것은 나를 사용하여 하나님 자신의 일을 하고 있다는 감격에 빠지게 됩니다.
예수님 자신도 사역 핵심을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 이 세상에 오셨음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누가복음4장18-19절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복음은 어느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 그리고 민족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전 세계의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전 생애를 복음을 전하는 일로 일관하셨으며 지상에서의 사역을 다 마치시고 하늘나라로 승천하시면서도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것을 명령하실 정도로 복음 전파에 대한 예수님의 집념은 강렬하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정신을 받들어 열심히 복음을 증언해야 합니다.
성도 된 우리가 흠 없는 생활을 할 때, 생명의 말씀의 참됨이 드러납니다. 뿐만 아니라, 만일 성도들이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 복음 전도자들의 수고는 헛되고 그들의 사역은 결실 없는 사역이 될 것입니다. 참된 성도들은 목사의 기쁨과 자랑입니다.
금년의 발자취가 증언의 발자취가 되었기를 바라며 내년에도 증언의 발자취를 남기시기를 바랍니다.
2.자기와 양떼를 위하여 삼가는 발자취(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초대교회 당시의 장로라면 오늘날 교회를 책임진 목사에 해당됩니다. 지금의 교회 제도와 비교하면 사도행전 6장에 등장하는 집사가 교회 장로에 해당되고, 초대교회 장로라면 주로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을 했던 지금의 목회자에 해당됩니다. 이렇듯 에베소 교회를 책임지고 말씀을 가르치는 장로들을 불러 사도 바울이 준 첫 번째 권면이 바로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감독자가 양떼를 위하여 자기를 삼가는 일은 당연한 도리입니다. 또한 자기를 위해 삼가는 감독자라야 양떼를 위해서도 삼갈 수 있습니다.
'삼가라'는'무엇에 대해 주의를 집중하라', '전력하라', '관심을 가져라',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자신과 양떼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스스로 삼가던 바울에게서 바르게 살아가는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본절에서 ‘감독’(ejpivskopo")은 사도행전 20장 17절의 ‘장로들’과 같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또 사도행전 20장 28절 끝에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다’(poimaivnein)는 말은 ‘목자’(poimhvn)라는 뜻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초청한 에베소 교회의 감독은 장로요 목자의 이름을 가진 영적인 지도자들입니다. 성령님께서 양떼(교회)를 위하여 저희를 감독자(장로, 목자)로 삼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삼았다’는 말은 ‘만들었다’, ‘임명하다’, ‘세우다’라는 뜻으로 성령께서 목회자들을 택하고, 부르고, 임명하셨다는 뜻입니다.
교회의 직분자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양떼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돌보아야 합니다. 그 관심과 돌봄은 바울이 모범을 보여준 대로 겸손한 자세와 기도와 눈물입니다. 바로 이 점이 세상의 회사나 학교에서 맡은 사장이나 이사, 부장이나 과장, 교수나 교사 등의 직분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영국 런던에서 대형백화점을 경영했던 셀프리지(Gorden Selfridge)라는 사람은 상관(boss)과 지도자(leader)의 차이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상관들은 사람들을 몰고 가지만 지도자는 그들을 인도한다. ·상관은 위협적인 경우가 많이 있지만 지도자는 감동적일 때가 많다. ·상관은 '나는'이라는 말을 자주하지만, 지도자는 '우리'라는 말을 자주한다. ·상관은 잘못된 것을 책망하지만, 지도자는 잘못된 것을 고쳐준다. ·상관은 '가라'고 명령하지만, 지도자는 '갑시다'하고 말한다.」 다스리고 명령하는 상관보다는 솔선수범하여 본을 보여주며 인도하는 지도자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리더는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사역자는 교회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세워가야 합니다. 무엇이 교회를 세우는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더불어 희생과 헌신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교회 사역과 영혼 구령에 대한 책임감과 부담감을 가지고 사역해야 합니다.
세상 지도자는 권위로 일하지만 교회 지도자는 섬김으로 일합니다.
세상 지도자는 세상적인 목적을 위해 일하지만 교회 지도자는 하나님의 양을 섬기기 위해 일합니다.
양을 다스리는 사람은 어느 모로 보나 양 무리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양에게 거치는 지도자는 양들로 넘어지게 하는 장로요 양떼들에게 깊은 신앙을 주고 아름다운 생활의 열매를 맺게 하려면 먼저 자신이 양 무리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장로는 양떼의 영혼의 빚진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가르칠 뿐 아니라 권면하는 일에도 삼가야 합니다. 죄는 양떼의 생명을 죽이기 때문에 늘 회개를 권고해야 합니다. 바른 교훈에 순종하도록 주의 이름으로 권면해야 합니다. 사탄의 궤계에 넘어가지 않도록 늘 경계하도록 해야 합니다.
본문을 통하여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그리스도와 교회와 말씀과 기도에 늘 붙어있으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마음과 눈이 멀어지는 것, 교회와 성도들로부터 마음과 눈이 멀어지는 것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사명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스스로 조심하다, 주의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자신에게 철저하라는 말입니다. 사명자로서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자신을 위하여 삼가고, 온 양떼의 본인 되기 위하여 삼가고, 교회의 유익이 되기 위하여 행동을 삼가할 때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돌려집니다.
매사에 마음과 말과 행동을 삼가 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 많은 것으로 영광을 돌려 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기와 양떼를 위하여 삼가는 발자취가 있기를 바랍니다.
3.교회를 보살피는 발자취(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마태복음 16장에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시몬의 이름을 베드로라고 하시면서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이고 그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신다는 말씀은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다가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모인 단체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즉 우리를 구원하실 구원의 주님으로 고백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모인 귀중한 단체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세운교회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이 되심을 믿는 것이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죽을 대신 형벌을 받으시기 위해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우리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세우신 너무나 귀한 곳입니다.
사실 영(靈)이신 하나님은 피를 흘릴 수 없기 때문에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태어나셨으니 그가 곧 인자되신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성령님은 세 가지 위대한 창조에 성부 성지와 같이 동역하셨습니다. 천지를 창조 하신 때와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인자로서 잉태되실 때와 교회를 창립(創立) 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강림하실 때가 그것입니다.
참 하나님께서 참 사람이 되셔서 피를 흘리신 것은 온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함일 뿐만 아니라, 최종적인 목적은 만세 전부터 하나님의 의중에 감추었던 비밀의 경륜(經綸) 곧 교회를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입니다. 이 섭리를 따라 이 세상에 오셔서 구속을 완성하기 위하여 고난의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고 이제 곧 하나님의 교회가 다 완성이 되면 속히 다시 오실이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피는 곧 생명입니다. 그 생명의 피를 팔아서 무엇을 산다면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를 단적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예수님의 피보다 더 고귀한 피가 없다면 그 거룩한 피로 교회를 사신 것은 세상에서 교회보다 소중한 곳이 없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정말 사랑하는 믿음의 성도는 예수님이 그렇게 사랑하신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1장23절에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하는 것은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는가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교회를 부탁하고 에베소를 떠나왔지만, 실제로 그들에게 교회를 맡긴 주체는 자신이 아니라 성령님이라고 바울은 확신했습니다.
그는 또한 장로들을 감독자로 부르면서 그들이 에베소교회의 양 떼를 위한 목자임을 주지시켰습니다. 성령님께서 그들을 감독자로 세운 것은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보혈로 사신 교회를 올바로 양육하기 위해 에베소에서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였다고 했습니다(행 20:31). 교회는 이렇게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입은 자로 보살피게 하는 곳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께서 그 장로들을 감독자로 세운 뜻은 주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기 위함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은 영혼의 목자이시며 감독이십니다.(벧전 2:25). 지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가치 있는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를 돌아볼 것을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예수님의 심정으로 명령합니다. 장로나 감독자를 위하여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예수님께서 보혈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위하여, 교회의 교회됨을 위하여, 교회의 건강함을 위하여, 사역자가 존재함을 분명히 하십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교회의 본질’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사람이나 이 세상의 산물이 아닌 특별한 하나님의 신적 산물이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구속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직접적 산물, 자기 피로 값을 치루고 속량해낸 무리들의 모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성도)는 마땅히 이 세상의 모든 개인이나 가정이나 단체와 구별되는 신령한 단체요, 구원 받은 거룩한 무리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양무리 들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떠난 후에 거짓선지자들과 자신의 말을 듣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주와 주님의 말씀에 부탁한다. 그 말씀이 여러분은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시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신다. 자신이 깨어서 쉬지 않고 각 사람을 눈물로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고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교회를 보살피라”고 하였습니다.
감독자는 예수님의 피 값으로 구원 받은 사람들이 거짓 선지자들과 자기를 따르게 하는 사람들에게 미혹 당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과 말씀을 믿고 따르도록 교회를 보살펴야 합니다.
우리도 자신과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고 예수님과 말씀을 의지하여 교회를 보살피시기를 바랍니다.
지나온 올 한해의 발자취가 교회를 보살피는 발자취가 되었기를 바라며 내년에도 교회를 보살피는 발자취를 남기시기를 바랍니다.
1.증언의 발자취(26-27)
2..자기와 양떼를 위하여 삼가는 발자취(28)
3.교회를 보살피는 발자취(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