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2025.02.09. 주일 낮 예배)
본문 말씀 : 누가복음 22:39-46
주제 :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1. 나가사
예수님은 여러가지 권면의 말씀을 마치시고, 마지막 유월절 만찬의 장소를 떠났습니다. 그것을 39절은 ‘나가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습관을 따라 감람 산으로’ 가셨습니다. 분명히 그곳으로 가면 유다가 군병을 데리고 올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시면서도 조금도 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그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먼저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시고는 기도하셨는데,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하지요. 이어서 44절에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와보시고 제자들이 잠든 것을 보시고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잡으러 오는 무리에게 잡혀 가셨습니다.
2.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기도를 하셨는데 그 기도가 너무 간절해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다고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위해서 그토록 간절히 기도하셨길래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을까?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역시 그날 있을 십자가형을 당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십자가형을 몸서리처지는 형벌이지 않습니까? 그것을 생각하면 정말 끔찍할 것입니다. 누가 그런 형을 당하고 싶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그만큼 당하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신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100% 인간입니다. 고통과 아픔은 여느 사람처럼 똑 같이 느낍니다. 그러니까 그 고통을 피하고 싶었겠지요.
물론 그 외에도 여러가지 아픔이 있습니다. 우선 완전하신 신이신 예수님이 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죄인이 되면 아버지와 끊어져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되는 고통 이것도 참기 어려운 고통일 것입니다. 그런 아픔을 찾아야 하지요. 그럼에도 이런 고통을 견디면서 십자가형을 당해야 하는 이유는 이렇게 해서 유월절 희생의 제물이 되어야만 주님의 사명을 온전히 완수할 수 있고 그로 인해서 인류를 구원하여 영생에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한 번 생각해보지요. 예수님은 죽음도 자신이 선택했기 때문에 죽는 것인데 그렇다면 죽는 방법도 선택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죽으면 그 목적을 이룰 수 없는 것일까요? 예를 들면 단번에 죽으면 안될까요? 단 한 칼에 심장을 찔러 죽으면 안될까요? 그러면 고통없이 간단하게 죽지 않겠습니까? 왜 꼭 그렇게 오랜 시간 고통을 당하면서 꼭 십자가 형으로 죽어야 할까요?
3. 나를 기념하라.
예수님께서는 조금 전에 성만찬을 하셨어요. 그때 빵과 포도주를 주시면서 나를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1:25을 보시면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에수님께서는 마실 때마다 주님을 기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빵과 포도주는 그들의 주식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밥을 먹을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밥을 하루에도 세번씩은 먹습니다. 하루에 세번이라는 말은 언제나 나를 기념하라는 것이며 그것은 언제나 나를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받아서 사도 바울은 26절에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해야 한다.‘고 하였어요.
주님은 기억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한 번 두 번 기억되기를 원하신 것이 아니라 식사를 할 때마다 그러니까 언제나 기억되기를 원하셨습니다.
4. 엉뚱한 것을 기억하는 사람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기억합니까? 당시 그들은 예수님을 선지자 중의 한 분이거나 아니면 기적을 베푸는 사람 혹은 그들을 로마의 압제 하에서 건져내줄 그런 사람으로만 기억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기억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시는 분, 그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 하나님의 아들로 기억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강하게 남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으셔서 죽음으로서 독특한 메시지를 남기기를 원하셨습니다. 죽음을 깊이 남기고 다시 살아나심으로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 깊이 남게 하고 다시 살아나심으로서 영생을 주실 수 있는 분으로 기억 속에 깊이 남기를 원하셨어요.
이렇게 강한 기억을 남게 하는 방법으로는 십자가형만한 것이 없습니다.
5. 메시지를 깊이 남기는 여러가지 방법
사람들은 자기가 이야기를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때 여러가지 방법을 택합니다. 정상적인 경우에는 말로 대화를 함으로서 자기의 이야기를 하겠지요. 그러나 그런 정상적인 방법이 모두 막히면 비상한 방법을 사용합니다.
우리는 전태일이라는 사람을 잘 압니다. 우리의 노동 환경이 너무 열악했을 때, 그는 노동자에게도 최소한의 노동조건을 달라고 투쟁하다가 더 이상 방법이 없으니까 온 몸에 석유를 뿌리고 분신자살을 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뜻을 알렸습니다. 그 덕분에 사람들이 노동문제에 눈을 돌리게 되고 많은 근로자들의 환경이 급속도로 개선되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전태일이라는 사람을 기억합니다.
전에 안경전이라는 사람이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로잡겠다고 환단고기라는 책을 설명하는 강연회에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역사는 중국에 의해서 사정없이 날조되었다고 하면서 우리가 말하는 단군은 절대로 신화가 아니라 분명한 역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아무리 주장해도 정통 역사학자들은 아예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 사람은 자기의 전재산을 다 바쳐서 그것을 연구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책을 만들고 온 세계를 다니면서 그것을 증명할 근거를 찾았습니다. 그가 스위스 그랜드호텔에서 강연을 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사람을 모았는지 모르겠는데 거의 3,000명이 모였어요. 그는 그렇게 하느라고 자기의 전재신을 다 바쳤다고 합니다. 자기의 뜻을 밝히려고 이렇게 애를 씁니다.
2023년 5월에 소설가 김진명씨가 ‘풍수전쟁’이라는 소설을 출판했습니다. 김진명씨는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셨을 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책을 내서 박 대통령이 죽은 것은 박대통령이 핵을 만들려고 했기 때문에 미국에 의해서 암살 당한 것이다 라는 의문을 가지게 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이번에는 풍수전쟁이라는 책을 발간했는데 그 소설에서 한 젊은이가 우리나라 역사는 일본에 의해서 무참하게 축소되었다고 아무리 주장하고 외쳐도 아무도 이것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으니까 그는 문화부장관을 납치해버립니다. 장관이 납치를 당하니까 온 나라가 떠들고 온갖 언론이 앞다투어서 그 기사를 내보냈어요. 그때 그 젊은이가 그 장관을 자기가 주장하는 그 역사의 현장에 두고 찾아가라고 했어요. 그때 우리나라의 역사는 일본에 의해서 사정없이 축소되고 저열한 국민이 되었다고 자기의 소신을 밝힙니다. 그제야 사람들이 그가 말하는 것에 주의를 가지고 그것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소설입니다.
그런데 24년 12월에 윤 대통령은 이 나라가 분명히 잘못된 세력에 의해서 끌려가고 있는데 아무리 호소해도 언론도, 국민도, 자기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지 않으니까 대통령직을 걸고 계엄을 일으켜서 주의를 집중시켰습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조금씩 주의를 기울여주었고 드디어 전한길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윤대통령이 일으킨 것은 계엄령이 아니라, 계몽령이라고까지 해주는 단계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기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서는 목숨도 바치고, 재산도 바치고 자기의 지위도 던집니다.
6. 예수님을 기억합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으로 항상 기억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구원이나 영생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너무 무관심합니다. 사람들은 그저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건강하게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좀더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즐겁게 살 수 있을까? 이런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이럴 때, 예수님의 메시지를 제대로 전하려면 충격적인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형이었어요. 오랜 시간 동안 서서히 죽으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각인되고 그 죽는 모습을 보고 ‘그는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그는 진정 의인이었도다.’ 라고 스스로 깨닫게 하고 그리고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그가 전하는 말씀대로 그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되겠다.고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형을 당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무엇을 기억해야 하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그를 믿으면 우리는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겠다고 기억해야 하는데 우리는 얼마나 그를 기억합니까?
예수님은 먹고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라고 하셨는데 나는 얼마나 예수님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보다 어떻게 하면 더 건강하게 살 수 있을까에 더 관심이 많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을까에 더 관심이 많지 않습니까?
여러분 주님을 제일 윗자리에 올려놓으십시오. 주님을 가장 기초되는 자리에 두십시오. 항상 주님을 기억하고 언제나 주님을 기뻐하면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