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론 – 권지성
극우 개신교가 사회의 약자들인 성소수자들, 난민들, 여성들, 장애인들에 대한 혐오의 감정과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목회 세습, 교회 권력의 부패와 같은 문제에는 침묵하거나 옹호하는 자기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김혜령 박사는 “혐오”를 개인에 대한 ‘싫어함’의 감정적 반응을 넘어 “사회 속에서 특정 집단이나 집단에 속한 개인에 대해 차별을 고착화시키거나 재생산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미움의 감정”으로 정의한다. ‘혐오’는 기득권에 대한 공적인 ‘분개’와 구분되어야 하며, 사회 구조의 소외된 소수자들을 향한 차별과 배제의 폭력적 언어 행위와 연결해 생각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 책의 기고자들은 한 가지 질문에 대답하고자 한다. 「현재의 한국 개신교 교회는 한국 사회의 어떤 계층을 향한 혐오를 쏟아내고 있으며, 무엇이 보수 개신교 진영으로 하여금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를 생산하게 만들었는가?」 한국 교회의 혐오의 언어가 어떠한 방식으로 생산․유통․확장되고 정치 선전의 도구가 되었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혐오와 배제의 언어가 남용되고 있는 현상과 그 원인에 대해 집중 탐구한다.
1. 철학적 ․ 신학적 시각
[1] 혐오의 논리와 일인칭 시점 : 동일성 지향을 바라보는 시선들
김남호(울산 대학교 출강 교수)
- 한국 교회의 혐오의 주 대상은 ‘동성애와 동성애자’다. 2019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에 따르면 회원국 39개 가운데 한국의 동성애 관용도는 평균 5.1보다 훨씬 낮은 2.8로 끝에서 네 번째 낮은 수치다. 회원국 중 20개국이 동성 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해주고 있는데 한국은 그렇지 않다. 그들을 혐오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도덕적인 배려를 받을만한 가치가 없는 대상으로 보고 있다.(‘해충’처럼)
- 1973년 미국 정신의학협회(APA)는 동성애를 정신질환 목록에서 제외시켰고, 대한민국 중고등학교 성교육 지도 지침서에도 동성애를 인간적인 삶과 애정의 형식으로 인정하고 있는데(2003. 4. 2 자료) 왜 많은 기독교인은 동성애를 반대하고 혐오하는가?
- 레위기 20장 13절.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① 절대 윤리주의 관점
도덕적 옳고 그름에 대하여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명령은 시대, 문화를 초월해서 지켜야 하는 명령으로 이해한다.
종교 근본주의 관점
문자주의 : 성경을 기록된 그대로 믿고 따를 것을 강조하여 해석과 적용의 문제를 소홀히 한다.
② 플레처의 상황윤리학에서 제시한 ‘회색 영역’(grey area)
도덕적으로 참과 거짓이 명확하게 갈라지지 않는 문제들의 영역
예. 2차 세계 대전 때 유대인들을 집안에 숨겨둔 사람이 나치 경찰들에게 진실을 말해야 하는가?
레위기 11장 7절에 돼지 고기 먹는 것을 금했는데 왜 지금은 먹고 있는가?
③ 주관적 윤리상대주의
각자 알아서 판단하라는 것.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개인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도덕을 취향과 성향으로 취급한다. 예를 들어서 봉사를 좋아서 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살인, 강간, 테러, 학살 등에 대해서 비난할 수 있는가?
- 피터 싱어(P. Singer)의 ‘이익 평등 고려의 원칙’
「 고통을 피하고, 능력을 개발하고, 먹고 자는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 아이들이 있을 때 그들을 사랑하고 돌보고, 다른 사람과 우정과 애정을 즐거이 교환하고, 타인들로부터 불필요한 간섭을 받지 않고, 자신의 (삶의) 계획을 자유로이 추구하는 이익」
싱어는 이런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라면 그 무엇이든 상관없이 차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유로 인종이나 성별 등은 차별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동일성 지향을 가진 그들 역시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이므로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해와 공감보다 이 인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익을 추구하는 주체는 저마다 ‘고유한 일인칭 시점’을 갖고 있다. 각자의 시점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무이함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고 나의 시점은 너의 시점과 다를 수 있다. 나뿐만 아니라 타인도 이익을 추구하는 개별적 주체임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2] 내 양떼를 지키는 개 중에도 둘 만하지 못한 자들
- 권지성(스위스 로잔 대학교 연구 교수)
- 욥기 30장 1절. 사회 하층민에 대한 욥의 혐오 발언
“그러나 이제는 나보다 젊은 자들이 나를 비웃는구나. 그들의 아비들은 내가 보기에 내 양 떼를 지키는 개 중에도 둘 만하지 못한 자들이니라.”
욥을 히브리인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욥 1장 5절. 21장 42절)이고,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1장 5절)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전통과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욥의 절망과 고통은 다층적이고 복잡하다. 재산, 자녀,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라 자신이 믿었던 하나님에 대한 배신감과 고립감, 또한 인간관계 혹은 자신이 속한 사회 속에서 겪는 엄청만 절망감이다. 욥기 19장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욥은 친구들과 공동체의 혐오 대상이 되었다. 그는 형제들, 친척들, 남종들과 여종들, 아내와 자녀들, 어린아이들, 친구들과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외면 받고 배제되고 조롱을 받는다. 친구들은 신명기적 신학을 대변하고 있다.
- 욥기 30장 1절에 욥의 젊은이들에 대한 태도가 문제다. 그는 자신의 가축들을 지키는 개와 함께 있을 정도의 가치도 없는 사람들의 자식들로 말한다. ‘개’가 부정적으로 쓰이든 가치 있는 동물로(애완동물, 재산을 보호하는 동물) 쓰이든 개와 인간을 비교하는 것은 구약에서 한 개인에 대한 극단적인 모독 행위다.(삼상 17장 43절. 삼하 3장 8절. 왕하 8장 13절) 공동체에서 빈민과 고아와 과부를 돕고 장애인들과 가난한 자들을 돌보았으며 공정한 판관으로서 불의한 자를 처벌한 욥이(29장 12-17절) 인간성을 멸시하고 말살하는 잔혹함을 보이고 있다. 그들은 ‘고토에서 쫓겨난 자들’(욥 30장 8절)이다. 욥이 그렇게 혐오 발언을 한 것은 첫째로, 과거에 소유했던 것을 더 이상 가지지 못했다는 상실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욥은 도시의 이웃들에게 받는 모욕은 견딜 수 있지만, 광야의 동물만도 못한 인간들로부터 받는 비웃음을 견딜 아량은 없었기 때문이다.
- 욥은 한국 개신교 역사 속 일부 극우적 정치 성향을 가진 개신교의 형태와 유사하다. 과거에 박해를 받아가면서 일반 민중을 대변하다가 독재 정권 시절에 반공 사상으로 권력자들과 함께 한 그들은 지금 이주 노동자, 무슬림, 난민, 성소수자 등을 교회의 적으로 치부하고 혐오를 조장하고 있다. 그들을 이웃 사랑의 대상, 복음 전도의 대상이 아니라 배제의 대상으로 여긴다.
[3] 혐오의 장소에서 만난 뜻밖의 환대
- 신숙구(횃불 트리니티 신학대학원 교수)
- 소셜 미디어를 중심으로 가짜 뉴스를 생산하고 전파하는 일에 일부 보수 기독교 단체가 깊이 관여되어 있는데 이런 혼돈과 증오가 혼재된 현실 속에서 개신교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개신교인이라면 우리의 생각과 경험이 아닌 성경 말씀에 기초해서 사고하고 행동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 요한복음 4장에 나타난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
바리새인의 싸늘한 시선을 눈치 챈 예수님은 갈릴리로 떠나는데 왜 우회하는 길이 아닌 사마리아를 거쳐 가는 길을 선택했을까? 지리학적으로 가까운 거리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이다(4절의 ‘하겠는지라’는 신약성경에서 주로 아버지의 뜻이나 구속사적 역사에서 성취되어야 할 예언에서 쓰임). 사마리아인은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정복당한 뒤에 여러 지방 족속들과 결혼을 하여 나온 후손들로, 순수 혈통을 내세운 남 유다 사람들에게 이방인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다.
-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온 목적은 정치적인 독립을 위함도 아니고 위대한 제국을 세우기 위함도 아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인류를 해방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의 비판과 개혁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로 향해 있었다.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의 기득권을 향한 날카로운 칼날처럼 보였을 것이다. 지금 개신교는 더 이상 사회 주변부에 머물며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기득권을 누리고 사회의 책임을 회피한 채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철옹성 안에 그들만의 왕국을 세워나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율법적으로 흠이 많고 사회적으로 배척 받은 자들을 대할 때 자신의 도덕적 우월감으로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나 부자나,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높은 지위에 있는 자나 낮은 자나, 율법적으로 흠이 많은 자나 적은 자나 상관없이 동일하게 대하신다. 바리새인이자 유대인의 지도자였던 니고데모를 대할 때에도, 상종도 하지 말아야 할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을 때도 예수님의 행동은 한결 같다. 그 어떤 사회적인 편견이나 고정 관념에 사로잡히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이자 목표로 삼으시는 모습에서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을 엿볼 수 있다.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딱 하나 거듭났는가? 하는 것이다.
- 근래 보수 개신교 중심으로 열린 반정부 집회에서 나오는 구호나 연설에는 분노와 혐오를 보여주는 살기를 느끼게 한다. 2018년 제주도에 입국한 예멘 난민들의 거취에 대해서도 그들이 무슬림이라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개신교 신도들이 그들의 인권까지도 무시하면서 난민 허가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것이 성경적일까? 초등학생들 사이에도 차별과 혐오 언어가 난무한다는 기사가 나왔다.(엘사. 기생수. 빌거. 이백층 등) 교회는 어떠한가? 당회와 공동체의 주축이 되는 사람들은 주로 많이 가지고 많이 배운 이들이다. 돈 있는 자들이 중요 결정을 내리고 목회자도 많이 가진 성도의 눈치를 본다. 가난하고 사회의 주변부에 머무는 성도들은 차별을 받고 있다. 혐오와 차별의 근본 원인 중 하나는 나는 그들과 다르다는 도덕적 또는 사회적 지위에서 오는 우월감이다. 마치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잣대로 죄인들을 멸시하고 문벌 없는 예수님의 배경을 업신여기는 것과 같다.
-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 24절에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왔음을 밝혔다. 새 언약 시대가 도래했음을 가리킨다. 새 언약 시대에는 율법의 기준이 아니라 새로운 영적,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웃을 대해야 한다. 새 언약을 지탱하는 두 기둥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고, 유대인과 이방인은 어떤 차별도 없다는 것이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를 갈라놓았던 모든 차별과 경계가 무너지고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는 시대가 예수님으로 인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자들을 틀렸다고 비난하고 나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자들을 업신여기고 나의 도덕적 기준에 못 미치는 자들을 증오하는 태도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세가 아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자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시고 자신보다 낮은 자들은 어린아이라도 업신여기지 아니하시고, 율법적으로 흠이 많은 자를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감싸 주신다.
- 제자들의 눈에는 사마리아 땅이 부정한 사람들이 사는 불결의 땅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추수할 곡식이 넘쳐나는 축복의 땅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또한 육의 눈으로 바라보면 혐오의 대상들이 가득하다. 사마리아 여인으로 인해 예수님을 믿게 된 마을 사람들의 간청으로 불경의 땅에서 이틀을 더 유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요 4장 40절) 이틀을 유한다는 것은 단순히 교제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의 집에서 같이 먹고 자는 것을 의미한다. 혐오의 땅에서 맛본 음식 맛을 제자들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고, 혐오의 대상인 사마리아인과 살을 맞대고 지낸 이틀은 그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을 것이다. 제자들에게 사마리아는 이제 곡식이 희어져 추수할 땅이 되었고 사마리아인은 그들과 영원을 함께할 친구가 되었다. 이것이 복음의 힘이다.
2. 역사적 ․ 문화적 시각
[1] 모두에게 파괴였던 시간의 바깥 : ‘제주 4.3사건’의 신학적 비망록
- 김진호(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기획위원장)
- 제주 4.3사건
이승만 정부가 ‘적에게 협력할 우려가 있는 자들을 제거하는 예방적 조치’라고 주장했지만 아이들까지 무차별 살해한 증거는 그 변명이 궁색함을 드러낸다. 1946년 제주로 인구(27만 6,000만 명 이상)의 9-11%가(2만 5천 명 – 3만 명) 국가에 의해 학살되었다. 중산간 지역 95% 이상의 집들이 불타 없어지고 영구적으로 사라진 마을도 100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 당시 제주도민 거의 절반 가까운 이들이 희생자 유가족이다. 국가는 가해자이고 조직으로 은폐․왜곡한 장본인이다. 제주 4.3사건 당시 토벌대는 무장대뿐 아니라 그들과 연계되었을지 모른다는 근거 없는 가정 아래 무수한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 1948년 체제 : 한반도에서의 냉전 체제
‘체제’라는 용어는 좁게는 ‘정치 체제’라는 의미이지만 넓게는 사람들의 일상에까지 침투한 관습, 습관, 편향 등을 의미한다.
1948년 체제 구축 – 세 범주
①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 질서를 ‘반공’이라는 새로운 증오의 질서로 구축하려는 미국
1823년 발표된 ‘먼로 독트린’이래 미국은 국제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왔는데 1947년 3월 12일 선포된 ‘트루먼 독트린’은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국제적 네트워크 건설’을 위해 미국이 ‘적극 개입’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 독트린은 한국에서 벌어진 엄청난 폭력적 사태의 배후가 되었다. 미국은 그리스와 한국 두 곳을 공산화될 우려가 농후한 지역으로 보았고 그것을 막아내기 위해 우파 세력을 적극 지원하고 그에 저항하는 세력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제거한다는 원칙을 적용했다. 그 결과 그리스에서는 5만여 명의 사망자와 70만 명의 난민을 발생시킨 내전이 일어났고 제주도를 ‘죽음의 섬’으로 만든 제주 4.3사건이 일어났다.
② 미국의 국제 정치적 전략에 기초해서 남한 사회를 ‘반공’이라는 증오의 사회로 구축하려는 남한 정부
1946년 여름부터 미군정청이 임명한 경무국이 좌파 사냥에 돌입한다. 미군정과 경무국은 자신들에 동조하는 적극적 지지자를 제외한 거의 모두를 ‘좌파’이거나 ‘좌파 협력자’로 간주한다. 이승만은 ‘남한 지역에 과도 정부를 세우는 것만이 공산주의를 막는 유일한 길’임을 주장했고, 미국의 사실상의 승인과 주도 아래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된다. 4월 3일 제주에서 벌어진 파출소 습격 사건은 그 총선거에 대한 저항의 표시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주에서만 3개 선거구 중 2곳에서 당선자를 내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승만은 제주에 대한 응징을 시작한다. 10월 11일 제주도 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했고, 17일에 이 섬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일본군 하사관 출신 송요찬 중령이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된다. 그 지휘 아래 군인들은 민간인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고 가옥을 무차별 파괴했다. 12월 7일부터는 일본군 준위를 지낸 함병선 중령이 계엄사령관을 승계하여 학살극을 이어간다. 1948년 가을부터 1949년 봄 사이에 제주 4.3사건 중 가장 많은 인명이 희생되고 가옥이 파괴되었다.
③ ‘반공주의적 증오의 신학’으로 주체를 형성해갔던 월남자 중심의 개신교 세력
‘서북 청년단’이 제주도민에게는 가장 잔인한 토벌자로 기억된다. 서북청년단은 서북 지역(평안도와 황해도) 출신의 젊은 월남자들이다. 해방이후 공산주의자들과 주도권 경쟁에서 밀린 개신교도들의 상당수가 월남했는데 다수가 자산가 집안 출신의 청년 남성이었다. 그들의 반공주의 성향이 월남할 당시부터 매우 강했다. 그 중심에는 월남자 교회들, 특히 한경직의 영락교회가 있었다. 한경직은 미군정 당국과 가장 긴밀한 네트워크를 가진 인사였다. 그들은 남한 사회의 우파 세력과 연결되었다. 서북청년단원들 1,000여명이 1948년 11-12월 사이에 제주도에 들어왔다. 그들 대부분은 경찰이나 경비대 소속이어다. 가장 무자비한 폭력을 행했다.
- 1948년 체제(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자임을 생각하고 읽을 것)
‘적’을 만듦으로써 존재하는 사회, 그 ‘적’을 증오하고 공격함으로써 생명력을 유지하는 사회, 특히 그렇게 만들어진 ‘적’을 ‘빨갱이’와 연결시켜 생각하도록 하는 사회, 그런 사유의 문법이 작동하는 담론의 질서다.
한국의 주류 개신교의 ‘증오의 신학’ 중심에는 ‘이단 만들기’가 있다. 신앙의 위기가 올 때 사탄의 하수인으로 ‘이단’을 찾아 낙인찍고 공격하였다. 그러다보니 자기 성찰할 틈을 갖지 못했다. 예수는 이스라엘 사회에 널리 확산되어 있던 증오의 신학에 맞선 예언자였다. 누군가를 죄인들로 낙인찍는 신앙의 메커니즘을 비판했고, 죄인으로 낙인찍힌 이들의 자기 파괴적 양상이 사람들을 위기에 빠뜨린다는 주장에 반대하면서 오히려 죄인으로 낙인찍힌 이들이 세계의 구원자라고 선포했다. 이것이 예수의 평화 신학이다.
그리스도교는 ‘저 위’에 있는 거룩한 신의 소리를 듣는 일에 모든 노력을 기울여온 종교의 역사를 갖고 있다. 제주에는 무수히 많은 샤먼이 있다. 그들은 국가에 의해 학살된 유골이 발굴되는 곳마다 위령제를 주관한다. 그들은 저 높은 곳에 있는 지극히 숭고한 신의 소리를 듣는 자가 아니다. 저 땅 속 깊은 곳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희생자들의 소리를 듣는다. 서남동은 민중신학자란 ‘한의 소리를 듣고 증언하는 사제’라고 규정한바 있다. ‘한의 소리’란 고통이 시달리고 죄 담론에 치여서 자기를 표현할 언어를 상실한 자들이 외치는 소리다.
[2] 한국 기독교 : 시민 종교와 정치 종교 사이에서
- 최종원(캐나다 밴쿠버 기독교세계관대학원 교수)
- 시민 종교와 정치 종교
시민 종교(civic religion)는 교회의 역할과 국가의 역할 사이의 분명한 차이가 있는데, 그들을 공통으로 묶어 주는 것은 ‘시민’이다. 시민 사회의 형성과 발전을 위하여 종교가 해야 할 역할과 국가의 역할 사이에 서로 호응하는 것도, 긴장하는 것도 존재한다. 여기에는 분명 상호의 존재 인정이 된다.
정치 종교(political religion)는 특정한 이념으로 모인 집단이 배타적인 성격을 띠게 되고, 그 집단은 이데올로기에 경도(기울어짐)되어 폭력적인 방식으로 신념을 표출한다.
⇒ 한국 근대와 기독교 성장은 궤를 같이 한다. 근대화, 산업화를 통해 형성된 한국의 자본주의는 금욕과 성실을 통해 신적 축복을 갈망하며 성장한 한국 교회 속에서도 구현되었다. 한국형 자본주의에 기대어 성장한 한국 교회는 근대화를 추동하는 국가주의의 가치에 철저히 순응하고 부응하는 모습이다.
- 정치 종교로 등장한 한국 기독교 역사
① 1948년 5․10선거 당시 교회는 ‘기독교선거대책위’를 구성, 이승만(감리교 신자) 정권을 무조건적으로 지지
② 1948년 10월 ‘여순 사건’
한국 기독교와 반공주의가 만난 것으로 한국 사회뿐 아니라 한국 기독교 향후 노선에도 큰 영향을 준다.
제주 4․3과 여순사건 : 남한 내에 뿌리 내린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그들과의 싸움을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전투로 인식
③ 한국 전쟁
‘친미반공’을 확고히 한다. 기독교인들은 공산주의와 악마를 동일시하였다. 반공을 위해서는 부정 선거도 용납되고 쿠테타도 용인될 수 있었다.
④ 4․19혁명 / 5․16 군사 쿠테타
한국 교회에서의 반공은 시공간을 초월한 유일무이한 신앙고백이었다. 쿠테타의 세력은 ‘반공’을 내세웠다. 군사 쿠테타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미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한경직, 김활란 등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민간사절로 파견되었다.
⑤ 개신교의 베트남 파병지지(1965년 국회에서 가결)
베트남전은 공산주의를 상대로 자유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이 치르는 싸움이라는 구도가 형성되어 있었다. 1965년부터 한국대학생선교회 대표인 김준곤 목사의 제안으로 국회조찬기도회가 열리기 시작. 1976년에 국가조찬기도회로 바뀐다. 1968년 대통령이 참석한 대통령조찬기도회가 열렸고 김준곤은 군사 쿠테타의 성공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칭송하였다.
⑥ 1973년 5월 여의도 광장에서 진행된 빌리 그래함 목사의 초대형 전도 집회와 그 이듬해 열린 ‘엑스플로(EXPLO) 74’ 집회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실현될 수 없었다. 빌리 그래함은 세계적인 전도자인 동시에 공산주의에 맞서 자유를 선포하는 자유주의의 홍보대사였다. 그는 미국을 대표하는 전도자로 개신교나 유신 정권 각각의 필요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카드였다.
⑦ 내부의 저항
1969년 박정희 정권의 삼선 개헌을 저지하기 위한 범국민투쟁위원회의 결성이 첫걸음이다. 김재준 목사가 위원장이 되고 재야, 문학계, 법조계 및 학계에서 참여하였다. 향후 민주화 운동의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천주교와(정의구현전국가사제단) 진보 개신교 인사들은 시국 선언, 금식 기도회 등을 통해 대중을 결속하고 민주화 운동의 촉매 역할을 하였다.
⑧ 광주 5․18민주항쟁
전두환 신군부가 무력으로 항쟁을 참혹하게 진압하였는데 개신교는 또 다시 신군부에 적극 협조한다. 1980년 8월 6일 서울 롯데 호텔에서 열린 조찬 기도회에서 한경직 목사는 전두환을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주신 모세와 같은 지도자이며, 만연한 사회악을 제거하고 정화하는 일에 앞장 선’ 인물로 치하하고 설교를 한다.
⑨ 1997년 외환위기
IMF구제 금융 사태로 인해 신자유주의 광풍이 불어 닥쳐 극단적인 양극화가 나타났다. 신자유주의 체제에 발 빠르게 적응한 것이 대형 교회였다. 대형화기 신의 축복이요 절대 가치가 되어버렸다. 사회 정의나 공정을 향한 목소리는 제어되었다.
- 현재 한국 사회에서 보수 기독교는 친미반북의 완전한 자유 민주국가를 지향한다는 미명하에 전체주의의 속성을 띤 종교의 색깔을 도드라지게 보이게 되었다. 교회 세습이나 목회자의 성추문에 대한 대응에서 드러나는 전반적 윤리의식의 실종, 각종 사회적 쟁점에 관해서 교회가 보여주는 공감 능력 상실의 사례들, 극단적 선동에 넘어가는 맹목적인 정치 성향 등은 한국 사회에서 보수 기독교가 시민 종교로 자리 잡는데 철저하게 실패하였음을 확신시켜준다. 대다수 시민들에게 지금 한국 기독교 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태극기 부대, 교회 세습, 반동성애 광풍 등이 아닐까 싶다. 교단에서 정한 세습금지법도 대형 교회의 힘 앞에서는 무력하게 무너졌고, 교단 총회에서는 반동성애를 노골적으로 내세우며 사회적 소수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시민 종교의 목적은 종교인을 넘어 시대정신에 호응하는 시민을 양성하는 일과 연결된다. 교회는 시민을 길러내는 곳이어야 한다.
[3] 혐오와 한국 교회, 그리고 근본주의
- 배덕만(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전임연구원)
- 다수의 전문가들은 한국 교회가 혐오의 주체가 된 이유를 근본주의의 영향에서 찾았다. 한국 교회가 혐오의 주체로 기능한 경우 더 이상 한국 사회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된다.
- 감정으로서 혐오는 ‘극도의 싫음, 역겨움, 적대감’을 뜻하는데 사회적 현상으로서 혐오는 이런 개인적 차원의 감정과는 내용과 범주 면에서 차이가 있다. 법학자 홍성수는 “혐오는 그냥 감정적으로 싫은 것을 넘어서 어떤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부정하거나 차별하고 배제하려는 태도”라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혐오는 힘없는 약자를 대상으로 한 비열한 폭력으로 주류에 의해 비주류에게, 다수에 의해 소수에게, 강자에 의해 약자에게 행해진다. 혐오는 단순한 발전에서 파괴적 폭력으로 빠르게 나아간다. 강력한 힘을 가진 다수가 자기 방어나 반격의 기회도 능력도 없는 소수를 향해 잔인하게 작동하고, 주변 사람들은 무관심 속에 외면하거나 수동적으로 묵인한다. 혐오는 소수자에 대한 다수의 조직적․제도적 폭력이며, 강력한 힘에 의한 일방적 공격이다. 경제적 불황과 정치적 불안, 이데올로기, 그리고 종교가 결합할 때 혐오는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 한국인의 외국인 혐오증은 매우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예를 들어서 제주도 예멘 난민을 받아들이는 문제에서 반대(61.1%)가 찬성(35.8%)보다 두 배 가까이 많았다.
- 개신교는 한국 사회의 ‘혐오’ 이슈를 둘러싸고 가장 자주 언급되는 종교 집단이다. 성소수자, 이방인, 타종교인 등이 타자화 되었고 공격의 대상으로 지목되었다. 특별히 근본주의적 개신교인들은 ‘동성애, 이슬람, 차별 철폐’를 그대로 두면 한국 교회가 원천적으로 없어진다고 말한다. 보수 개신교는 선거 때마다 정치인들에게 동성애 반대와 차별 금지법 제정 반대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 한국 교회가 사회적 소수자들을 향해 표출하는 언어와 행동은 매우 거칠고 폭력적인 혐오 표현이며, 이로 인해 소수자들은 심각한 정신적 위협과 사회적 박탈을 경험하고 있다. 한국 교회에 ‘사랑’이 요구된다.
[3] 무엇을 위한 낙태 반대 운동인가?
- 이욱종(미국 클레어몬트 대학원대학교 종교학 박사)
-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가 형법 제 269조 1항 ‘자기 낙태죄’와 형법 제 270조 1항 ‘동의 낙태죄’에 대한 헌법 불합치 판결을 내리자 열흘 뒤 개신교 70여 개 교단 소속 교회들이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 예배’로 모여 ‘낙태 혹은 임신 중단’을 공식적으로 정죄했다.
- 한국 개신교의 낙태 반대 운동의 역사적 흐름
① 1912년. 일제하에서 낙태죄를 조선형사령으로 법제화
② 1920년. 경제난의 원인으로 인구 증가가 부각되어 산아제한의 필요가 대두되었고, 신문에 피임약까지 광고
③ 1930년 말. 낙태와 피임에 대한 통제가 강화 – 징병대상 확보 위한 것
④ 1953년. 국회에서 낙태죄를 형법으로 규정
⑤ 1960년대. 경제 발전 이유로 인구 억제 정책 시행
⑥ 1973년. 보건 의학적 • 범죄적 사유 등으로 낙태를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모자보건법 제정
⑦ 현실.
공권력의 특별한 제지 없이 낙태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처벌 사례는 거의 없는 ‘낙태죄의 사문화’ 현상이 발생
⑧ 한국 개신교의 낙태 반대 운동 부각
민주 정부가 세워진 후 사회적 의사 표명이 자유로워진 1990년대부터. 기독교윤리실천운동, IVF(한국기독학생회) 등 낙태반대운동연합이 1994년 결성되어 전국적 시민운동으로 부각
⑨ 최근 합동 측과 고신 측이 동성애 허용과 낙태 허용을 ‘반기독교적’이라고 선포, 교단적 대응 나섬 – 낙태 허용이 기독교 절대 진리에 반한다는 입장
- 1990년대부터 한국 보수 개신교의 낙태 반대 운동은 전국을 돌며 다양한 거리 캠페인, 정기 세미나, 서명 운동 등을 전개하는 방식으로 사회를 향해 낙태의 비윤리성 강조하기 시작. 인간 생명체의 시작을 수정된 순간이라고 정의했고, 수정 이후의 모든 낙태 행위를, 개인 사유에 대한 예외 없이, 살인으로 규정(시 139편 13절, 16절. 눅 1장 41-42절, 렘 1장 5절 등 근거). 태아의 인격성을 강조하여 낙태의 절대적 부당성과 살인죄의 심각성 강조. 태아의 약자성과 생명 선택권도 부각시킨다. 낙태 행위자의 강자성과 자기 결정권의 비인간적 폭력성도 극대화하였다. ‘러브이즈플러스’라는 보수 개신교 단체는 ‘차별금지법(동성애) 반대 낙태 반대를 위한 백만 대회 천만 성명’ 운동을 현재 진행 중이다.
- 낙태 추정 수는 연간 100만 명이 넘는다는 주장도 있으나 보건복지부 낙태 발표에 의하면 2008년 24만 1,411건 / 2017년 4만 9,764건. 변화의 원인은 피임 실천율의 증가와 여성 인구의 감소로 본다. 2019년 한국 갤럽 조사에 따르면 낙태가 살인이라고 생각하는 비율이 1994년에 전국성인대비 78%였으나 2019년에는 45%로 감소. 1991년 국민의 81.6%가 낙태 허용과 규제 완화를 지지했는데 2019년 여성의 75.4%가 낙태의 개정을 찬성
- 미국 개신교의 낙태 반대 운동이 미국의 정치 상황을 따르는 것으로 보고 한국 개신교도 같은 현실로 본다. 낙태 반대 운동이 생명을 위한 운동이라기보다 정치가들의 정치 생명을 위해 태아의 생명을 정치적 선전문구로 활용하는 것으로 본다.
- 한국 개신교의 낙태 반대 운동 대안
① 보수 개신교의 신앙 정체성을 위해 보수 세속 정치 세력과 오래된 연대를 끊는 방안
② 낙태에 대한 편견과 집단 트라우마 주입을 통한 정죄에 치중했던 기존의 방식 바꿀 것 – 현실 사회 낙태율 저하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③ 성경 무오성에 근거한 무조건 낙태 반대에 대한 대안. 리처드 헤이스는 『신약의 윤리적 비전』에서 성경은 낙태에 대해 실질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고 함
④ 생명 사랑 실천의 폭을 넓힐 것. 취업난, 주거 불안, 저임금에 시달리는 젊은 세대들을 향해 낙태가 죄라고 외치기보다 임신, 출산, 양육의 전인적인 보호가 필요한 일들을 함께 나누면서 구체적으로 사랑을 실천
3. 실천적 시각
[1] 학력•학벌주의와 한국 교회
- 오제홍
- 학력•학벌주의 속에서는 개개인의 자아가 자기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자에 의해서 규정되고 사유적 인간이 아닌 기능적 인간으로 전락하게 된다. 사회 깊숙이 뿌리 내린 학력•학벌주의가 교회 내에 깊숙이 침투하여 계층적 차별 문화를 만들어냈다.
- 학력(學歷)은 학교와 같은 교육 기관에 다녔던 경력을 나타내고 학벌(學閥)은 학문을 닦아서 얻게 된 사회적 지위나 신분을 나타낸다. 어느 지역, 어느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는지 출신 학교에 따라 사회적 지위나 등급이 부여되는 것이 학벌이다. 학력과 학벌이 절대적 기준으로 작용될 때 학력주의 혹은 학벌주의가 된다. 우리나라는 학력주의에 근거한 학벌사회로 분류된다. 현대 사회의 학력•학벌주의는 조선의 분당 정치를 역사적 기반으로 하여 일제 시대에 식민 사회를 운용하는 시스템으로 악용․고착화된, 식민 지배의 유물이다.
- 한국 사회의 발전과 함께 성장한 한국 교회는 사회가 가진 문제를 그대로 흡수했는데, 우리 사회의 물질만능주의가 기독교 문화에 영향을 끼치면서 부자 교회와 가난한 교회, 대형 교회와 소형 교회 등 물적/양적 기준으로 교회를 구분하기 시작했다. 교회가 흡수한 사회 문제들 중 가장 으뜸은 학력․학벌주의다. 교회 안에서 직분을 맡을 때 사회적 위신/ 신분이 크게 영향을 미친다거나 목회자의 경우 명문대 출신과 유명 교단의 신학대학원 출신을 우대한다. 담임 목사 청빙 과정에서 일반 명문대, 신학대학원, 해외 유학에 박사 학위를 선호한다.
- 교회는 사회적 지위나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되는 공동체이며, 학력이나 학벌이 능력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교회의 구성원은 모두 잠재적 지도력을 가지고 있다. 교회는 말씀의 선포와 전도, 가르침과 훈련, 예배와 같은 본질적인 가치 외에도 교제와 섬김과 같은 행위들이 종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다.
무어(한국 이름은 모삼율. 1846-1906년) 선교사는 곤골당 교회(승동교회)를 중심으로 백정 해방 운동을 전개, 우리나라 최초의 백정 출신 장로인 박성춘을 세우기도 했다. 1894년 갑오경장 당시 동료 선교사인 에비슨(O. R. Avison)과 함께 대한제국정부에 신분제 철폐 및 천민들에게도 공민권을 보장해 달라는 탄원을 제기하며, 신분 제도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2] 혐오와 차별의 공간, 그리고 예수
- 김승환
- 공간은 인간이 거주하는 물리적인 장소를 넘어서 영적․정서적이며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복합체다. 인간으로 존대한다는 것은 특정한 공간에 머무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공간을 통해 삶을 영위해 나간다. 그러나 공간의 영성과 초월성이 상실된 현대 도시는 개인과 집단의 욕망만을 표출하는 장으로 전락하였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땅은 투기의 대상이며, 성공의 척도다.
- 국가 인권 위원회가 발표한 ‘2019년 혐오 차별 국민인식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국민의 64%가 지난 1년간 온라인 또는 오프라인에서 혐오 표현을 접했다. 74%가 전라도나 경상도 등 특정 지역 출신에 대한 혐오다. 지역 차별이 기득권의 안전과 이익을 지키는 수단이 되었다. 강남과 비 강남, 수도권과 지방으로 구분되는 공간의 차별이 문화 사회적 지위 같은 신분의 대물림으로 이어지고 있고, 아파트 브랜드에 따라, 사는 동네 이름에 따라 거주민들의 신분과 사회적 위치가 결정된다. 외국인 밀집 지역 같은 곳은 공간의 파괴자 또는 잠재적 위협자로 인식되어 공간으로부터 배제된다.
- 예수님은 나사렛 출신으로 출신지에 따른 배척을 받았고, 도시로부터 거절당했고 도시민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사마리아 같은 차별의 땅 한복판에 서 있었던 화해자였다. 요한복음 1장에서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는가?”라고 말한다. 어느 누구도 주목 하지 않은 땅에서 메시아의 탄생이 예고되었다. 사마리아인들은 혼혈인이다. 유대 사회는 그들을 철저하게 배제했다. 그러나 사도행전 1장 8절에 혐오와 배제의 땅 사마리아도 복음이 선포되어야 할 대상이고 빌립이 전도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도시의 치유자였다.
-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는 도시로 묘사되는데 천상의 새 예루살렘은 모든 민족과 방언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적 공동체로서 진정한 화해와 포용의 도시다. 화해와 포용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공간의 공공성, 민주성, 인간성이 필요하다. ① 공간의 공공성은 모든 사람에게 개방적이며 참여하는 이의 주체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② 공간의 민주성은 다양한 시민이 참여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자유스럽게 대화가 오고 가고 서로의 만남에 위계질서가 사라지는 보편적인 공간으로 공간적 정의를 추구한다. ③ 공간의 인간성은 모든 인간의 동등한 존엄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공간이 운영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장애인들의 보행을 돕고, 보행자 중심의 동선을 설계할 것 등.
- 교회는 모두를 향해 열려 있는 공간이자 동시에 세속적 욕망을 성화시켜 이기적 개인을 이타적 개인으로 전환시키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교회라는 대안 도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구현하는 정치체여야 한다. 교회는 화해와 포용적 공동체로서 타인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초청할 수 있어야 한다.
[3] ‘맘충’ 혐오의 후기-근대적 의미 – 백소영
- 21세기가 시작되면서 후기-근대 사회에서 생겨난 혐오적 단어가 ‘맘충’이다.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사는 전업주부에 대한 표현이다. 남편은 생활전선에서 고생하는데 맞벌이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여자들이라는 뜻으로 쓰인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혐오 대상을 ‘충(蟲)’(벌레 같은 존재라고 멸시)이라고 붙이는 것이 하나의 문화 현상이다.
- 맘충에 대한 젊은 남성의 혐오는 ‘밥 그릇’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젊은 남자들은 공적 영역으로 들어와 성취하는 여성들을 경계해왔다. 안정적이고 양질의 직장 선택이 극도로 줄어든 상황에서 또래 여성들은 직업 안전성을 위협하는 적대적 구성원이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사적 영역인 가정에 남기로 한 또래 여성들을 향해 가혹함을 표출한다. 젊은 남자들의 응시 안에 ‘전업주부’는 생산 활동을 하지 않고 남편의 생산 노동에 얹혀사는 기생충으로 비하된다. 후기-근대를 사는 젊은 남자들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여성은 ‘돈도 벌고 밥도 하는 여성’이다. 비혼과 전문 직업을 선택한 또래 여성들도 전업주부를 선택한 여성들을 ‘경쟁에서 도태된 존재’로 응시한다.
[4] 성소수자 혐오와 차별의 반대 편에서 만나는 낯선 하느님 – 민김종훈/ 자캐오
- 2019년 겨울, 중국 후베이 성 우한 시를 중심으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확산되자 보수적인 개신교회와 신자들을 중심으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는 그리스도교를 탄압해온 중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얘기가 퍼졌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동성애를 옹호하는 차별금지법 등을 추진하면 비슷한 심판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심판을 피하려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정책을 만들지 말고 회개해야 하는데, 그 내용으로 차별금지법, 간통죄폐지, 낙태죄 폐지, 동성결혼 합법화 추진 등을 지목한다. 그러면서 혐오와 차별의 언어로 공격한다.
- 그리스도교 지도자들과 신자들, 교회가 “신의 뜻이자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이라는 이름으로 성소수자들을 향하여 혐오와 차별의 표현을 쓰고 있다. 개신교회 지도자들과 신자들은 동성애를 비롯한 다양한 성수수자에 대한 ‘제대로 된 사실’과 정직하게 마주한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 성소수자의 관점이 성서를 읽고 해석하는 새로운 관점이 되어야 한다. 금기와 경계 너머에서 만날 수 있는 하나님에게 안내하는 ‘급진적인 사랑’이다.
⇒ 저자의 견해인데, 발제자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생각이다.
[5] 아랍 난민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자 - 혐오와 차별을 넘어 포용과 환대로
- 한동희
- 아랍 국가들은 정치와 경제의 어려움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내전과 테러가 증가 했으며, 극단주의 이슬람 세력의 확장과 쇠퇴로 인해 유례없는 난민 사태가 발생했는데 아랍 국가들 가운데 시리아는 내부 난민을 포함해 1,300만 명이 고통을 겪었고 예멘은 난민 365만 명이 생존을 위한 이주를 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일부가 한국에 도착해 쟁점이 되었다. 2018년 제주도에 500여명의 예멘 난민이 집단적으로 도착을 했는데 특히 개신교인의 난민 수용 반대 비율은 58%로 종교들 가운데 가장 높다. 현재 예멘 난민의 75%는 국내의 중소도시에 정착해서 제조업에서 일하고 있다.
-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이 아랍 난민 수용에 다소 비판적이고,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무슬림 난민을 혐오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무슬림의 테러와 범죄가 증가할 것이라는 왜곡된 인식 때문이다.
- 시리아 그리스도인들은 생명과 위협에 노출되었지만 난민에게 음식을 제공했다. 노숙하는 난민들에게 음식을 제공했고, 의료 활동으로 건강을 돌보았다. 신앙과 목숨의 위협에 직면한 이라크 그리스도인들과 인접국인 요르단 그리스도인들도 피난처를 제공해 난민의 생명을 돌보았고 아동들에게 교육을 실천했다.
- 구약성경에 기록된 거류민과 나그네는 현대의 난민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구약성경은 난민을 학대하지 말고, 같은 민족으로 여겨 사랑하라고 명령한다.(레 19장 33-34절) 그들을 보호하고 함께 생활하며, 그들에게 음식과 의류를 공급하고, 압제와 학대를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출 22장 21절. 레 25장 35절. 신 10장 18절 등) 신약성경에도 난민을 대접하고 돌보라고 한다.(마 25장 32절. 딤전 3장 2절 등)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랍 난민에 대한 혐오, 차별, 배제의 모습을 버리고 포용과 환대를 실천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아랍의 무슬림들과 진정으로 대화하고,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며, 문화를 존중해야 한다. 피난처와 교육을 제공하고, 정신적 육체적 치료를 감당해야 한다.
[6] 교회 안에서의 장애인에 대한 혐오와 배제
- 김홍덕
- 한국 교회에서 장애인을 이해하는 방식은 대체로 세 갈래다.
① 죄에 대한 벌로 장애를 입었거나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 주신 과제를 가진 사람들 ② 불쌍한 존재들이므로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 그들은 축복에서 낙오된 사람들 ③ 그들을 통해 비장애인들이 얼마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인가를 깨닫게 해주는 도구들
- 장애인들에 대한 혐오와 배제
① 레위기에서 말하는 흠 있는 사람들이기에 성직이나 리더십에서 제외됨
② 스스로 신앙고백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성례전에서 배제됨
③ 그들은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함
④ 교회의 이미지에 흠이 되고, 교회 성장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본다.
- 이사야 61장 1-2절은 메시아의 공생애 사역의 사명 선언문이라 할 수 있다. 메시아 사역의 핵심 주제는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는 것이다. 소외된 자들에게 희년(주의 은혜의 날)을 선포하겠다는 희망의 메시지가 들어 있다. 누가복음 4장 18-20절에 인용한다. 본문에 등장하는 소외된 그룹은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들 등이다. 그들은 유대인의 틀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아웃사이더지만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는 인사이더다.
- 교회의 통합 원리
① 교회는 모든 면에서 그들의 접근권을 보장해주어야 하다. 예를 들어서 직분에서 차별 받아서는 안 된다.
② 교회는 장애인들에게 복지의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③ 교회는 본질상 모든 지체들이 모여 있는 그리스도의 지체다.
④ 교회는 현존하는 천국이다. 천국에는 아무런 차별이나 혐오가 없다.
[7] 어머니의 죽음, 어머니의 부활
- 조민아
- 2014년 4월 16일, 304명의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 사건이 누군가에게 조롱의 대상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일주일이다. 극우 사이트 ‘일간베스트’를 기점으로 끔직한 혐오 발언과 행위들이 퍼져나갔다. 모두의 눈앞에서 수백 명이 죽어간 참사가 일개 교통사고로, 사랑하는 아이들이 구조되지 못한 이유를 밝히려는 유가족들의 몸부림이 유난스럽고 몰지각한 행동으로 묘사되었다. 세월호 관련 사실 은폐, 축소, 왜곡이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개신교 일부가 세월호 피해자들에 대한 혐오감을 고취시키는 집단이 되었다.
- 목사들의 발언 예.
① 조광작 – 가난한 집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불국사로 가면 될 일이지 왜 제주도로 배를 타고 가다 이런 사단이 났는지 모르겠다.
② 전광훈 – 세월호 사고 난건 좌파, 종북자들만 좋아하더라. 추도식 한다고 나와서 막 기뻐 뛰고 난리야
③ 오정현 – 세월호 희생자와 실종자 가족들을 향해 미개하다고 한 정치인의 발언을 강단에서 옹호 한다.
④ 이재철 –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어떤 이유에서든, 어떤 단체든 우상이 되는 것은 금해야 하는데 세월호 유가족들이 슬픔을 당했기 때문에 그분들의 모든 것이 아무도 터치할 수 없는 우상이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니다.(노란 리본은 주술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 왜 이런 문제?
① 그릇된 종말론적 사고 – 선과 악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 소수자들을 악의 무리로 간주하고 혐오하고 제거하는 것을 자신들의 책임과 의무로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폭력도 정당화한다.
② 가족들에게 좌파, 반정부, 종북 색깔을 입히기 시작한 정치인들의 진영 정치 프레임을 따르기 시작
③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거대한 사회적 기호. 돈이 곧 축복이며 성공이 은총인 번영신학의 패러다임에서 가난은 죄요, 실패를 신의 저주라고 생각. 고통스러운 이웃들을 자기 삶의 경계 밖으로 밀어내고 모욕하고 무시하는 그들의 혐오는 ‘나는 아직 신의 축복을 받고 있다’는 거대한 환상에 안주한 모습이다.
첫댓글 진정한 하나님나라는 화해와 포용~
교회는 화해와 포용적 공동체로서 타인을 영원한 하나님나라로 초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