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내입처(六內入處)와 육외입처(六外入處) >
사람에게 있는 감각기관으로서 안(眼-눈)ㆍ이(耳-귀)ㆍ비(鼻-코)ㆍ설(舌-혀)ㆍ신(身-몸)ㆍ의(意-뜻)라고 하는
6개의 기관이 있어서 이것을 육근(六根)이라고도 한다.
6근의 근(根)은 기관(器官)이라는 뜻 이외에 그 기관이 가지고 있는 기능까지 포함한 개념이다.
예컨대, 안근(眼根)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안구(眼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눈의 보는 기능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 ‘근(根)’을 내입처(內入處) 혹은 내처(內處)라고도 한다.
따라서 6근을 육내입처(六內入處) 혹은 6내처라고도 하게 된다.
※6근에서 제6의 의근(意根)은, 기능은 존재하지만
다른 5기관들처럼 직접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기관은 없다(오늘날엔 뇌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의식이 생기므로 일종의 기관으로 간주한다.
그러면 근(根)은 무엇이냐?
오온에서 정신영역인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이 어울려서 노는 차원에 매몰되지 않은,
원래의 어떤 기능, 어떤 능력이다.
그런데 눈이 뭔가를 볼 때, 있는 그대로를 보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중생들은 자기의 고정관념에 의해서 보게 된다.
즉, 우리가 뭔가를 인식할 때 자기의 고정관념의 작용에 의해서 때 묻은 인식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있는 그대로 바로 보지 않고 자기 생각, 자기 입장에서 본다는 말이다.
이 게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과 어울려서 노는 것을 말하고,
또한 이게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근원인 것이다.
한편 육근(6내입처)에 상응하는 바깥 세계의 대상, 즉 눈으로 볼 수 있는 빛깔과 형태[색(色)],
귀로 듣는 소리[성(聲)], 코로 맡는 냄새[향(香)], 혀로 느끼는 맛[미(味)],
피부로 감촉할 수 있는 것[촉(觸)], 마음의 대상인 [법(法)], 이것을 모두 합쳐 육경(六境)이라 부르는데,
이것을 육외입처(六外入處) 혹은 6입처(入處)라고도 한다.
말하자면, 육근(六根)은 육내입처, 육경(六境)은 육외입처라는 말이다.
특히 제6 의근의 대상은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
혹은 일체 현상[이것을 (法)이라 함]을 말한다.
즉, 12처(十二處) 가운데 11처에 포함되지 않은 모든 현상[법(法)]이 제6 의근의 대상이 된다.
12처란 불교의 여러 일체법 분류체계 또는 분석방식 중 하나로서,
존재 전체를 12처로 분류한 것이다. 즉, 안처(眼處). 이처(耳處). 비처(鼻處). 설처(舌處). 신처(身處).
의처(意處)의 6근과 색처(色處). 성처(聲處). 향처(香處). 미처(味處). 촉처(觸處).
법처(法處)의 6경의 총 12가지 처(處)로 분류 또는 분석하는 법체계이다.
여기서 11처란 ‘법처’를 제외한 나머지 11처를 말한다.
그리고 이 우주에 있는 존재의 수는 셀 수 없이 많지만 요약해서 분류하면 주관계와 객관계로 나눌 수 있다.
주관계를 구성 하는 것은 6근이고, 객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은 6경이다.
그러므로 주관과 객관의 모든 현상은 12처에 포섭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일체법의 분류 방식은 일체존재의 주체인 인간의 인식능력을 중심으로 구분해서 체계화한 것이다.
5온(五蘊)과 마찬가지로 12처의 교설도 일체법의 연기성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5온설이 물질영역보다 정신영역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한다면,
반대로 12처설에서는 정신영역보다 물질영역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하고 있다.
5온설에서는 물질영역을 색(色) 하나로 간단히 설명하고
정신영역은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으로 나누어 자세히 설명한다.
그런데 12처설에서는 정신영역은 의처(意處)와 법처(法處)로 간단히 설명하고,
나머지 10처에서 물질영역에 대한 설명을 더 구체적으로 하고 있다.
특히 이것은 물질이 실체라고 생각하거나 물질을 이루는 기본요소는 영원불멸하다고 생각하는
중생들에게 물질에 실체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어 일체를 구성하는 12처도
모두 연기하고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한 것이다.
12처(十二處)에서 처(處, 산스크리트어 āyatana)를 구역(舊譯)에서는 입(入) 또는 입처(入處)라고 했다.
영역, 들어오는 곳, 들어오는 것이라는 뜻이다.
대상이 들어오는 여섯 가지 기관인 6근(六根=六內入處)과
그 기관에 들어오는 여섯 가지 대상인 6경(六境=六外入處)을 합쳐 12처라 한다.
12처에서 ‘처(處)’는 마음[心]과 마음작용[心所]을 생장(生長) 시키는 문(門)이라는 뜻을 가진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12처의 각 처(處)가 현재 생겨나 있지 않은 마음과 마음작용을 생겨나게 하고
이미 생겨나 있는 마음과 마음작용의 세력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12처에서 마음에 해당하는 의처(意處)와 마음작용과 마음작용의 대상을 합친 것에 해당하는
법처(法處)를 제외한 나머지 10가지 처, 즉 5근(五根)과 5경(五境)을 통칭해서
10색입(十色入) 또는 10색처(十色處)라고 하는데,
이는 마음과 마음작용을 생겨나게 하고 강화시키는 10가지 물질의 문이다.
부파불교의 전승에 따르면, 부처님은 유독 수행자들이 물질[色]에 대해 어리석은 생각을 해서,
물질을 ‘나[我]’ 혹은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유형의 수행자들에게
물질을 5근(五根)과 5경(五境), 즉 10색처로 나누어 상세히 설명하기 위해 12처를 설했다고 한다.
이 6근과 6경이 ‘나’라는 자아의식과 결합돼 인식의 토대로 작용하면
6근은 6내입처(六內入處), 6경은 6외입처(六外入處)가 된다. 이를 확실히 기억하기 바란다.
즉, 6내입처와 6외입처가 6근ㆍ6경과 같은 것이 아니라
6근ㆍ6경이 자아의식과 결합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앞에서 「6근=육내입처, 6경=육외입처」라고 말한 것을 여기서 부분 수정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이 접촉을 하면 의식(6識)이 발생한다.
즉, 안식ㆍ이식ㆍ비식ㆍ설식ㆍ신식ㆍ의식, 이렇게 6식이 생기는데, 이를 의식계라 한다.
그리하여 육근, 육경, 육식, 합쳐진 것을 18계(界)라 한다.
위에서 설명한바와 같이, 인간은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의
육근(六根)을 통해 외부의 대상을 인식해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 안의 감각기관인 육근을 통해 외부의 대상인 육경(六境)을 인식하다 보니,
내 안에 육근이 진짜로 있고, 내 밖에는 육경이 진짜로 있는 것 같은 착각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내 안에 육근이 진짜로 있고, 내 밖에 육경이 진짜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연 따라 그 기능과 활동을 할 뿐이지만 우리 어리석은 중생은
그러한 감각활동을 하는 존재를 ‘나’로 여기고, 그 감각의 대상을 진짜로 있는 ‘세계’로 분별하게 된다.
육근이라는 인연 따라 생겨난 감각기능과 활동을 ‘나’라고 여기는 잘못된 착각을 육내입처(六內入處)라고 하고,
그 감각 대상을 실체적인 ‘세계’라고 생각하는 허망한 착각을 육외입처(六外入處)라고 한다.
이 육내입처와 육외입처를 합쳐 12처(處)라고 부른다.
즉, 육근은 인연 따라 생긴 우리 안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과 감각기능, 감각활동을 의미하고,
육내입처는 그 육근을 보고 ‘나’라고 착각하는 어리석은 의식을 뜻한다.
육근이 대상을 감지하는 것을 보고 내 몸 안에 외부 대상을 감각하는 자아(自我)가
실재적으로 있다고 느끼는 마음이 바로 육내입처이다.
육내입처에서부터 자아관념, 잘못된 허망한 아상(我相)이 생겨난다.
<금강경>에서 끊임없이 외치고 있는 아상(我相) 타파도 이러한 육내입처의 가르침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육근이 번뇌에 오염돼 있는 상태에 나타나는 잘못된 의식이 바로 육내입처인 것이다.
부처님은 육근이 청정하지만, 중생들은 육근이 오염돼있다.
청정과 오염의 차이는 있지만 육근은 부처든 중생이든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리고 감각기능과 감각활동은 부처이든 중생이든 누구나 죽을 때까지는 할 수밖에 없는 활동이다.
반면에 육내입처(오염된 육근)는 중생에게는 있지만, 부처에게는 없다.
이러한 오염된 육내입처를 소멸할 때 모든 괴로움은 소멸된다.
경전에서는 이러한 육내입처를 멸함으로써 얻게 되는 경지를 멸진정(滅盡定)이라고 한다.
육내입처는 감각기관이거나 감각기능이 아니라
감각기능을 보고 ‘나’라고 착각하는 허망한 의식(오염된 의식)을 말한다.
그래서 뒤에 나올 12연기에서도 육내입처는 소멸돼야 할 것으로 보고,
육내입처가 멸하면 생노병사의 모든 괴로움이 소멸한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육내입처는 소멸돼야 할 허망한 의식이지만, 육근은 잘 지키고 수호해 청정하게 지켜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자기 육내입처로써 자기가 만들어 놓은
외부의 세계(육외입처)를 인식하고 경험하며 살고 있다.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의 생각이 대개 다르다.
즉, 내가 세상이라고 여기는 것과 다른 사람이 세상이라고 여기는 것이 엄밀히 따져 같을 수가 없다.
모든 외부대상은 저마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르게 지각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세상이라는 실재적 존재라는 것이 하나 있어서 사람들마다 그것을 느끼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백 명의 사람이 있다면 백 가지 종류의 세계가 있다는 말이다.
저마다 자기 육내입처로써 육외입처라는 세계를 지각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나도 이 세상도 모두 독립적으로 실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서 연기해 존재하는 인연가합의 존재일 뿐이다.
마음에서 허망하게 만들어 낸 것들일 뿐이지, 실재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따라서 육근(六根)의 의미도 새롭게 이해돼야 한다(다시 수정해야 한다).
기존의 이해로는 육근(六根)은 감각기관을 의미했다.
그러나 육내입처는 신체의 기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6근의 지각활동 내지는 인지활동을 의미한다.
육내입처는 이러한 인지활동에서 발생하는 의식이다.
육근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육내입처에 대한 바른 이해로 이어지고, 나아가 모든 근본불교의 바른 이해로 이어질 것이다.
'입처(ayatana)'는 중생들이 ‘자아(自我)가 머물고 있는 곳’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육내입처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며 부처님은 어떤 과정을 통해 이것을 발견했을까?
<잡아함 57경>은 육내입처가 오온의 근거를 찾은 결과 드러난 것임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육내입처와 육근은 각기 다른 의미의 개념이다.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 지각활동이 의근에 의지해 지속되며,
이들 지각 활동은 수명이 계속되는 한 지속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육내입처는 무명(無明)에서 연기한 것이지만 육근은 수명(壽命)에 의지해 지속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명에서 연기한 육내입처는 무명을 멸하고 멸진정을 성취하면 사라진다.
그러나 육근은 멸진정에 들어도 사라지지 않고 생명활동이 끝나야 사라진다.
육내입처와 육근은 이렇게 서로 다른 것이지만 이들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육근은 삶의 기초가 되는 인지활동을 하는 기관을 의미하고,
육내입처는 인지활동에 인지의 주체인 자아가 존재하고 있다는 착각이다.
이러한 인지의 주체라고 착각한 자아가 육내입처인 것이다.
따라서 육내입처를 무상한 것으로 관찰하는 것이 정사유(正思惟)이다.
육내입처를 바르게 사유해 무상함을 관찰함으로써
육내입처에 대한 집착을 끊으면 마음이 바르게 해탈할 수 있다.
그런데 바르게 사유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집착과 욕탐을 일으켜 업(業)을 짓기 때문에 육내입처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근의 수호는 육내입처의 무상함을 관찰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인지활동(육근)을 할 때 인지의 주체(육내입처)가 무상하고 무아라고 생각해(정사유)
집착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육근의 수호이다.
바르지 못한 사유(부정사유)는 인지활동(육근)을 할 때
인지의 주체(육내입처)가 무상하고 무아라고 사유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어리석음(무명)에서 집착을 일으켜(애) 그 집착(욕탐)을 만족시키기 위해 업을 짓고,
그 결과 업을 짓는 업의 주체, 즉 자아로 취착된 것이 육내입처인 것이다.
이와 같이 육내입처는 망념이기 때문에 멸진해야 하지만
육근은 우리의 삶을 바르게 지탱해주는 기관을 의미하기 때문에 바른 삶이 되도록 수호해야 한다.
즉, 육근의 수호를 통해 망념인 육내입처를 멸진(滅盡)하고 무아(無我)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