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사
운문사는 557년(신라 진흥왕 18), 혹은 560년에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한 신승(神僧)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 신승은 북대암 옆 금수동(金水洞)에 작은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수도하였는데, 마침내 도를 깨닫고 도반 10여 명의 도움을 받아 7년 동안 동쪽에 가슬갑사(嘉瑟岬寺), 서쪽에 대비갑사(大悲岬寺), 남쪽에 천문갑사(天門岬寺), 북쪽에 소보갑사(所寶岬寺), 중앙에 대작갑사(大鵲岬寺) 등 다섯 암자를 창건하였다. 이 가운데 대작갑사가 곧 지금의 운문사인 것이다. 그리고 대비갑사는 지금의 대비사를 가리킨다. 그런데 당시 대작갑사가 창건된 목적은 흉맥을 진압하기 위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운문사 동쪽에 솟아있는 산을 지룡산(池龍山)이라고도 부르지만 옛날 명칭은 호거산이라고 하였으니, 곧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형국인 것이다. 풍수지리적으로 본다면 용맹한 호랑이가 흉맥을 누르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산 정상에는 호거 산성이 있다. 이렇게 신승이 다섯 갑사를 지은 것은 이 지역이 교통상의 요충지였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대작갑사 외에 나머지 네 갑사도 역시 흉맥을 진압하는 지세로 교통상의 요지가 되는 입지를 이용하여 세워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운문사 가는 노송길
운문사 입구
운문사 범종각
운문사 전경
운문사 승가 대학
운문사 원응국사비
고려 중기의 승려 원응국사의 비로써 높이 2.3m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귀부와 이수는 상실되었고 3조각으로 절단된 비신만이 복원되어 있다. 비(碑)의 앞면에는 그의 행적이 행서로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국사의 운문사 경내에 전하는 고려 중기에 세운 원응 국사의 비는 보물 제316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높이 230㎝, 너비 91㎝이다. 비석의 보호각은 1963년에 지어졌다. 현재 비신을 받치는 부분인 귀부(龜趺)와 비신의 머릿돌인 이수(栗首)는 결실되었고, 세 조각으로 절단된 비신만이 복원되어 있다. 비의 앞면에는 원응 국사의 행적이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문도들의 법명이 있다. 건립년대는 그 부분이 파손되어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국사가 입적한 다음해에 인종이 국사로 봉하고 윤언이(尹彦灑)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다는 비문 내용으로 보아 대략 1145년(인종 23) 이후로 추정된다. 비신 앞면 상단부에는 '원응국사비명(圓應國師碑銘)'이라는 제액(題額)이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해동금석존고(海東金石存攷)』 등을 통해 탄연(坦然) 스님이 글씨를 쓴 것으로 추정된다.
운문사 칠성각
운문사 칠성각내 치성광여래불탱
운문사 처진 소나무
천연기념물 제180호
처진 소나무는 가지가 밑으로 축 처진 모습을 하고 있으며 매우 희귀하다.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는 운문사의 앞뜰에서 자라고 있으며 높이는 9.4m, 둘레는 3.37m이다. 나무의 모습이 낮게 옆으로 퍼지는 모습 때문에 한때 반송(盤松:키가 작고 밑동부터 가지가 옆으로 퍼지는 소나무)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이 나무는 3m 정도의 높이에서 가지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밑으로 처지기 때문에 처진 소나무로 본다. 운문사는 1,400년 전에 지었다고 하고 임진왜란(1592) 때 이 나무는 상당히 컸었다하니 나무의 나이는 약 400년 정도로 추정된다.
이 처진 소나무는 고승(古僧)이 시들어진 나뭇가지를 꺾어서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스님들은 매년 봄·가을에 뿌리 둘레에 막걸리를 물에 타서 뿌려주는 등 정성을 다하여 가꾸고 있다.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는 나무의 모양이 매우 아름답고, 전형적인 처진 소나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며, 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도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운문사 만세루
만세루(萬歲樓)는 팔작지붕에 앞면 7칸, 옆면 3칸의 규모를 하고 있다. 조선시대 초중기에 건립된 누각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때 대웅전은 소실되었으나 만세루는 손상되지 않고 보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35년 지붕을 수리하였고, 1980년 지붕이 붕괴되어 다시 보수하였다. 건축 양식을 보면, 기단은 막돌쌓기의 기단으로 건물에 비하여 비교적 낮은 편이고 건물 내부 바닥의 마루판도 일반적인 누각에 비하여 높지 않은 편이다. 주춧돌은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막돌초석이며 덤벙주초 형식을 취하고 있다. 건물의 네 면을 창호 없이 모두 개방한 것이 운문사 만세루의 특징이다. 만세루의 용도는 옛날 북쪽에 있었던 대웅전을 향하여 위치하면서 법회나 설법시 사용하던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면적은 200여 평이다. 사찰 입구에 지금의 범종루를 짓기 전에는 종각을 겸하여 사용하였다. 당시 사용하던 운문사 대종(大鍾)이 만세루에 있다. 이 대종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용뉴 부분은 떨어져 나갔고, 종신에 보살 입상 2위가 새겨져 있다. 또한 상단에 원형의 테를 두르고 범자(梵字)를 새겼으며, ꡐ운문사대종(雲門寺大鍾)ꡑ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현재 이 범종은 사용하고 있지 않다.
운문사 명부전
운문사 명부전내 지장보살상
운문사 관음전
관음전(觀音殿)은 팔작지붕에 앞면과 옆면 각 1칸씩의 규모로, 건축 양식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건물은 1979년에 중수하였다. 안에는 중앙의 불단 위에 관음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후불탱으로는 1865년(고종 2)에 조성되고 1940년에 개비된 수월관음도가 모셔져 있으며, 그 밖에 1861년(철종 12)에 조성된 신중탱이 있다
운문사 관음전내 관세음보살상
운문사 작압전
작압(鵲鴨)은 처음 보양 국사가 지었고, 1105년(고려 숙종 10) 원응 국사가 3중창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중건되었는데, 이름 그대로 까치집 모양을 하고 있으며 경내의 전각 중에서 가장 작은 건물이다. 편액은 '작압(鵲鴨)'으로만 되어 있으나 편의상 작압전이라고 부른다. 이 편액은 1910년에 쓴 것이다. 그런데 이 작압의 원형은 신라시대에 조성한 전탑 형식의 불전(佛殿)이었다. 훗날 세월이 흘러 무너지자 1935년 무렵에 벽체의 벽돌을 제거하고 목조 건물의 형태로 완전히 새롭게 만들었다.
운문사 작압전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317호
작압(鵲鴨) 내에 봉안된 석조 여래좌상은 석불 좌대의 사리공(舍利孔)에서 865년(신라 경문왕 5)에 해당하는 '함통육년(咸通六年)'의 연호가 새겨진 사리합(舍利盒) 등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어 이 불상 역시 그 당시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크기는 불신 높이 63㎝, 대좌 높이 41㎝, 광배 높이 92㎝이다. 이 석불은 항마촉지인에 결가부좌의 자세로 대좌와 광배를 모두 갖춘 완전한 불상의 형태이다. 다만 불상은 화강암 위에 호분(胡粉)이 두껍게 칠해져서 본래의 모습을 잘 알 수가 없는 것이 아쉽고, 얼굴의 채색도 조잡하여 복원 작업이 시급하다. 나발(螺髮)의 머리에는 둥근 육계가 높직하게 표현되었다. 원형(圓形)의 상대석엔 14엽(葉)의 앙련이 조각되어 있으며, 연화문이 매우 화려하게 표현되어 있다. 또한 불신의 신체 비례는 둔감하며, 불의(佛衣) 안에 내의의 일종인 승각기가 묘사되었으나 옷주름 선은 힘 없이 흘러내리고 있다. 이 석조 여래좌상은 제작년대가 거의 확실하여 9세기 불상 양식의 한 표준작이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운문사 사천왕 석주
보물 제318호
작압 내 좌우 벽면에 있는 사천왕 석주(四天王石柱)는 통일신라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석주 형태로 다듬질된 석면에 사천왕상이 새겨진 형태로 작압 내부 좌우 벽면에 대칭으로 각각 2기씩 전부 4기가 배치되어 있다. 각각의 높이는 114㎝·118㎝·122㎝·128㎝로 조금씩 다르다. 이 사천왕상들은 모두 무인(武人)의 복장으로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었으나,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있다. 또한 원형 두광을 지니고 악귀를 밟고 서 있는 자세로 천의 자락을 휘날리고 있다. 지물(持物)로는 보탑을 지닌 북방 다문천왕 외에 나머지 3위의 천왕은 칼과 봉(棒), 삼고(三納)의 금강저(金剛杵) 등을 지니고 있어 현재 이들 사천왕의 각각의 명호를 구별하기가 어렵다. 이 사천왕 석주가 언제부터 이 자리에 배치되었는지 잘 알 수 없는데, 본래부터 이렇게 위치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작압의 원형은 외형은 불탑이면서 내부는 불전으로 꾸며져 석조여래좌상을 봉안하였는데, 이 석주가 작압 창건 당시 외벽에 배치되었는지 혹은 지금처럼 내벽에 놓였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운문사 사천왕 석주
운문사 삼층석탑
보물 제678호
통일신라 시대의 삼층석탑으로 높이 5.4m 로써 대웅전 앞에 있는 이 석탑은 자리의 지세가 행주형(行舟形. 전복되기 쉬운 배모양)의 흉맥이라 하여 그 지세를 누르기 위하여 양쪽에 탑을 세운 것이라고 한다. 비로전 앞에 동서로 건립된 2중 기단 위의 3층 석탑이다.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중석을 한데 붙여서 짰고, 중석에는 각면에 우주(隅柱)와 탱주(撑柱) 2주(柱)씩이 있다. 갑석은 넓어서 안정되어 보이고, 상면에는 경미한 경사가 있으며 중심에 각형(角形)과 호형(弧形)의 받침이 있다. 옥개석은 처마 밑이 수평을 이루고 밑이 받침수는 각층 5단씩이며, 옥정(屋頂)에는 각형 1단의 얕은 옥신받침이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양탑에 노반이 있으며, 서탑에는 다시 그 위에 복발과 앙화가 남아 있다. 이 석탑은 붕괴 직전에 있던 것을 일제 강점기에 보수하였는데 이때에 8부중상 등 일부를 신재로 보충하였다.
운문사 오백전
운문사 오백전내 석가모니불
오백전 나한들
운문사 대웅보전앞 해태상
운문사 대웅보전
보물 제835호
대웅보전은 팔작지붕에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규모로, 대웅보전이 신축되기 전까지 대웅보전으로 사용하던 건물이었다. 1653년(효종 4)에 지은 건물로 건축년대가 분명할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이 잘 나타나고 있어 보물 제835호로 지정되어 있다. 기단은 막돌로 쌓고 상단석은 장대석(長臺石)으로 된 갑석을 놓아 정연하게 마무리하였으며, 정면 가운데 잘 다듬질된 4단의 계단을 놓았다. 주춧돌은 자연석이며 그 위에 민흘림의 둥근 기둥을 세우고, 기둥 윗 부분에 창방과 평방을 짜 맞추어 하부 구조를 구성하였다. 공포(蛋包)는 다포식으로 주두(柱頭) 위에는 주심포를 놓았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는 어간에 4구, 옆 칸에 3구씩 공포를 짜 놓았다. 정면의 창호는 모두 꽃살무늬 창호인데 맞은편 금당의 꽃살 창호와 함께 매우 아름답다. 안에는 비로자나불을 봉안하고 있다.
운문사 대웅보전내 비로나자불
운문사 비로전 삼장탱
우리나라에서 독특하게 발전한 그림이 삼장탱이다. 삼장보살이란 천장(天藏), 지지(持地), 지장(地藏)보살을 이르는 말이다. 중심에는 천정보살로 진주, 대진주보살이 협시를 이루며 여러 권속들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오른쪽(向左)에는 지장보살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권속들이 협시를 이루고 있다. 왼쪽(向右)에는 지지보살로 용수보살과 다라니보살이 협시를 이루며 그 권속들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운문사 대웅보전
운문사 대웅보전
운문사 응진전
운문사 응진전내
응진전내 나한상
응진전내 나한상
운문사 찾아가는 길
서울 방면에서 간다면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여 경산나들목으로 빠져나와 동곡을 거쳐 운문사로 간다. 대구에서는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