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양 개평마을 정여창 고택
오늘의 마지막 일정으로 함양 개평마을의 정여택 고택에 갔다. 그는 자신을 겸손하게 낮춰 한 마리의 벌레라는 뜻으로 '일두'라 지칭했다. 일두 고택은 정여창이 태어난 곳으로 개평마을을 대표하는 고택이다. 경주 양동마을이나 순천 낙안읍성처럼 옛 마을을 그대로 보존해 오는 마을이다. 먼저 정여창 고택 울안으로 들어갔다. 이 집에서 태어났다는 후손, 할아버지가 인사를 한 후 정여택에 대하여 잠깐 설명을 들었다. 고택에는 원래 17동의 건물이 있었지만 현재는 사랑채, 안채, 문간채, 사당 등 12동의 건물만 남아 있다. 정여창 고택은 그의 높은 학문과 효행의 발자취가 곳곳에 서려있는 곳이다. 남도지방의 대표적인 양반가옥이다. 고고한 선비의 기품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지난 후에 후손들이 중건했다. 정여창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유배와 죽음, 부관참시까지 당했다. 영남 사림파의 희생이 컸던 무오사화는 일두 정여창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스승이었던 점필재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사초에 실리면서 김종직을 비롯해 김일손, 정여창, 김굉필 등이 죽거나 유배를 당했다. 일두 정여창은 목숨을 건져 유배길에 올랐지만, 결국 함경도 종성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시신은 제자들이 수습해 두 달이 걸려 고향 땅 함양으로 돌아왔다. 개평마을에서 약 4km 떨어진 승안산 자락에 일두 정여창의 묘가 있다. 일두 정여창의 위패를 모신 남계서원은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건립된 서원이다. 흥선대원군 때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다. 경상남도에서 유일하게 훼철되지 않은 서원이다. 마루에 앉아서 잠시나마 선비의 정취에 몸과 마음을 닦았다. 한국 전통식으로 가꾼 정원이 아름답다.
다음으로는 개평마을을 한바퀴 돌며 일두 정여택의 선비정신을 만나고, 그날의 역사를 체험했다. 양반 고장을 지칭할 때 '좌 안동, 우 함양'이라 하듯이, 함양 역시 안동 못지않은 양반 고장으로 손꼽힌다. 여기에는 조선 성리학의 대가인 일두 정여창의 고향이자 500여 년이 훨씬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개평마을이 있기 때문이다. 개평마을에는 일두 고택을 중심으로 마을 곳곳에 유서 깊은 고택이 남아 있다. 마을길 구석구석 시골 인심이 느껴지는 포근한 곳이다. 개평이라는 이름은 내와 마을이 낄 '개(介)' 자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했다. 개평마을 전체를 굽어볼 수 있는 일두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낮은 언덕을 따라 소나무가 서 있다. 300∼400년 된 적송이다. 언덕을 오르면 오를수록 개평마을의 전경이 소나무와 함께 어우러진다. 언덕 위에는 두 개의 소나무가 서로 반대방향으로 서 있는데 정여택의 고모인 할머니 소나무는 개평마을 안쪽을 바라보고, 고모부인 할아버지 소나무는 개평마을 바깥을 바라보고 있다. 정여택의 고모가 노씨 문중으로 시집을 간 기념으로 세운 두 개의 소나무다. 이렇게 둘이서 개평마을의 안과 밖을 지킨다는 것이다. 또 개평마을은 배 모양이라서 집안에 우물을 파지 않았다. 배 안에 우물을 파면 파산되기 때문이다. 일제시대에 일본인이 정여택 고택 안에 개평마을의 맥을 끊기 위해 우물을 팠는데 해방 후에 돌과 모래로 우물을 덮어 사용하지 않았다. 마을 밖에 5개의 공동 우물이 있다. 개평마을의 집들에는 실제로 사람들이 살고 있어 훈훈한 옛 정경이 그대로 느껴진다.
이것으로 국제펜 함양탐방을 마치고 상경길에 올랐다. 인삼랜드 휴게소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오늘은 구름이 많이 끼어 무더위를 피할 수 있는 축복의 날씨였다. 나의 남편 유기섭 수필가님을 비롯하여 많은 문우님들과 문우의 정을 나누며 뜻깊고 보람된 문학 나들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