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mes Lee/Wikimedia Commons
내가 사는 이곳 텍사스 댈러스는 최고 기온이 요즘 42도까지 치솟는다. 밤 7시가 넘은 현재 기온이 40도다. 이 기온이 앞으로 열흘은 더 지속된다는 예보다. 밖에서 잠깐 일하다가 손바닥에 화상을 입고 그대로 돌아왔다.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면 거인국으로 끌려와 위험과 공포에 시달리며 사는 걸리버 같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이런 환경을 개선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며칠째 시달리고 있다. 이 무력감이 어디서 왔는지 찾아보려고 지금까지의 나를 있게 한 교회와 신학을 따라가 보아야 했다. 그리고 내 무력감이 역설적으로 내가 의지해 왔던 교회의 자기 생존 본능에서 왔다는 근거들을 찾게 되었다. 결국 그 공동체에 속한 나 자신도 내 문제를 벗어나 세상을 바꿀 힘이 없이 무력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내가 사는 이곳에는 Southern Baptist Seminary, Dallas Baptist University, Dallas Theological Seminary 같은 유명한 복음주의 신학교들이 있다. 또 이곳은 ‘바이블 벨트’라고 불릴 정도로 교회가 많은데, 매우 보수적인 남침례교 교회들이 대다수다. 내가 다니는 교회는 다양한 달란트와 은사로 사역하는 초교파 교회라 그 개방성이 마음이 들어 줄곧 다녀왔다. 복음적이면서도 매우 활발하게 선교, 봉사, 구제 사역을 펼치는 교회다.
그러나 팬데믹 당시부터 전형적인 미국 복음주의 교회가 갖는 한계를 이 교회뿐 아니라 주변의 복음주의 교회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설교와 기도 제목이 ‘교회가 어떻게 이 위기를 견뎌낼 것인가’ 하는 생존의 문제였다. ‘복음 전파’도 교회 생존의 연장선에 있어 보였고 지역 사회와 인류의 안녕은 주요 기도 제목에 들어가지 않았다. 옆집 구경하듯 한다는 말이 어울릴 듯하다. 당시 중국 탓을 하거나 코로나바이러스 발생을 음모론으로 가볍게 취급하였고 백신 주사 거부는 물론 마스크 쓰는 것조차도 격렬히 저항하는 교인이 너무 많았다. 교회 청소하는 한인이 마스크 쓰며 청소한다는 이유로 쫓겨날 뻔한 적도 있다. 온실가스에 의한 기후 변화와 지구 열대화가 사람들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파리기후협약을 탈퇴한 열렬한 트럼프 지지자들다운 모습 더도 덜고 아니었다.
내가 한국에서 다녔던 신학교나 다른 보수 교단 신학교 역시 별다르지 않다. 내가 속했던 교단도 여러 번의 위기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위기를 피하는 방법은 일관되게 동일하다. 일제의 핍박과 폐교 위기를 1938년 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 참배 가결로 피해 버렸고, 3.15 부정 선거를 저지른 이승만 정권을 교회 지도자들이 지지했고, 보수주의 교회 지도자 242명은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을 지지하여 정부로부터 안정된 지원을 받았다. 이런 식으로 사회 혼란기를 회피하며 교회는 안정을 얻어냈다. 그리고 1980년 전두환을 위한 국가조찬기도회 주요 참석자들 역시 박정희 3선 개헌 지지자들이었다. 이에 대한 주요 보수 교단들의 변명은 일관되게 “교회 생존을 위협하는 자유주의 신학과 공산 세력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였다. 이 대답이 얼마나 신앙적으로 모순이 있는지는 얘기하지 않겠다. 왜냐면 이 대답 자체가 교회가 스스로 무력하다는 것을 방증하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가 쇠락한 원인은 자유주의 신학, 교회 세속화, 성직자들의 타락, 교회 성장주의라고 박용규 총신대학원 교회사 교수는 말한다. 적극적으로 동감한다. 여기에 비판 없이 교회 안으로 스며 들어온 좌우/젠더 이데올로기, 경제 발전으로 인한 사회 변화 같은 여러 요인이 있다. 그러나 팬데믹 이후 예측할 수 없는 경제와 기후 문제를 겪는 뉴노멀 시대 위기에도 여전히 교회는 예전과 같이 ‘보신주의’ 외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자기의 앞가림만 하는 교회는 세상을 향한 빛을 비출 수 없기 때문이다.
잠시 희망을 찾았던 교회
1980년대 한국 교회의 역동성은 청년들에게서 나타났다. 이 시대에 청년들에게 가장 많이 읽힌 신앙 서적의 핵심 주제는 헤르만 리델보스, 조지 래드, 게할더스 보스 같은 학자들의 ‘하나님 나라’였다. 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이런 책들이 읽히면서 하나님 나라 신학은 그 세대를 지배하던 마르크스 자본론이나 주체사상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신학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전에 우리가 알던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영적 천국이었는데, 새로운 하나님 나라 신학은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영역이며 인간의 역사 가운데 실현하시는 이미 임한 그러나 앞으로 임할 완전한 통치”라고 하여 사회 정치 현안에 참여하는 길을 열어 숨통을 틔워 주었다.
그 이후 민주화 운동이 정점을 찍어가던 1986년 한국복음주의협의회를 비롯한 보수 교단들이 호헌 철폐, 직선 개헌 문제에 조금씩 직간접으로 발언하기 시작했다. 교회 지도자들이 스스로 시국 문제에 침묵을 지켜왔다고 말하며 앞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전 영역에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나게 해야 한다고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뒤에서 따라가는 형국이었다. 이미 민주화 운동은 천주교회나 사회단체, 대학이 끌고 가고 복음주의 교회는 어쩔 수 없이 따라가는 모양새였다.
2010년 복음주의자들의 제3차 로잔 대회에서 인류의 자원 낭비와 지구 오염을 죄악이라고 명시하는 의미 있는 선언이 있었다. 케이프타운 선언 제8항이 그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사랑한다. 이러한 사랑은 우리가 지구상의 자원을 허비하고 오염시키는 데 일조하며 소비주의에 대한 해악적 숭배에 공조하는 것을 회개하는 것이다.”
그러나 로잔 언약과 그 운동의 영향력은 한국 보수 교회에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었다. 이전부터 경제 안정을 바탕으로 소비문화가 정착되어 가는 시대에 들어섰고 경제 주체인 교인들에게 “과한 소비는 죄”라고 말하는 목회자가 설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디 이것뿐일까. 빈부 양극화를 초래하는 부동산 문제를 복음주의 교회는 언급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 “부동산 투기는 이웃의 땅을 빼앗는 죄악”이라고 할 목회자 또한 버텨 낼 수 없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다 그렇게 돈 버는 시대에 교회는 위험한 발언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그리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얼마나 교회와 무력한지 알 수 있게 할 근거가 될 뿐이었다.
이곳은 연일 타들어 간다. 텍사스 보건국(Texas State Health Department) 조사에 따르면 “더위나 더위와 관련된 질환으로 306명이 2022년에 생명을 잃었다.” 미국 전역에서는 700여 명이 같은 원인으로 해마다 생명을 잃는다. 민승기 포항공대 환경학과 교수에 의하면 “지금처럼 온실가스를 배출하면 2030년대에 북극의 빙하가 모두 녹게 되고 저 배출 정책을 쓰더라도 2050년대에는 북극의 빙하가 다 사라져 홍수 화재, 폭염, 폭풍, 같은 기후 변화가 급증할 것이다.” 이 이상 더 끔찍한 인류의 종말의 증거를 찾을 수 있을까 싶다.
‘삶은 개구리 증후군’이란 말이 있다. 처음부터 뜨거운 물에 넣은 개구리는 뛰어나오지만, 서서히 온도를 올린 물에 들어간 개구리는 결국 죽었다는 미국 코넬 대학의 실험에서 나온 말이다. 지금 인류는 삶겨지는 위기에 처한 개구리와 다를 것 없다. 그렇게 죽어 가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오늘도 어제처럼 산다. 교회도 지금까지 생존 본능을 발하며 버텨 왔지만, 이 위기는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다. 최근에 안토니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지구 온난화 시대는 끝났고 지구 열대화 시대가 도래했다”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거의 모든 과학자가 지구 열대화를 돌이킬 수 없다고 말한다. 인류가 처한 재앙을 돌이키기에는 늦었다는 것이다.
영화 ‘투모로우’가 생각난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누구나 자연재해로 죽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게 된다. 이제는 재앙을 막을 수는 없지만 늦추기 위해서라도 교회는 경고하고 움직여야 한다. 이 무력함이 교회의 나약함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을 나타내는 마지막 희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첫댓글 무섭네요...
그렇게 죽어 가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오늘도 어제처럼 산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