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화(墨畵) / 김종삼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 시집 ‘십이음계’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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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안에서 그림이 그려지고, 읽으면서 고개가 끄덕여지면 일단은 좋은 시라 할 수 있다. 다음은 가슴에서 알싸한 바람이 일거나 명치끝이 아리거나, 좌심방 우심실이 데워진다면 성공한 시라 해도 무방하겠다. 게다가 의미 연결이 탄탄하고 짧게 농축이 되었으며, 다시 찾아 읽고 싶은 밑줄 쳐진 시라면 아주 잘 된 시라고 보아도 되겠다.
1960년대 말에 쓰진 김종삼 시인의 묵화가 바로 그런 시의 모범이 아닐까 싶다. 삶의 노고와 적막이 녹아있는 풍경을 단색의 묵화로 깔끔하게 그려냈다. 묽고 진한 먹물과 굵고 가는 붓놀림만으로 한국적 아름다움과 품위를 획득한 그림이 선명하다.
멀뚱한 눈망울, 자존심처럼 세운 뿔, 굵은 목덜미, 바위산의 능선 같은 등, 빵빵한 체통으로 그려지는 소는 농촌에서 가족과 같이 친근하고 귀한 가축이다. 언젠가 꿈 해몽 책을 보았더니 소는 집안 식구, 협조자, 집, 재산 등을 상징하는 동물이라고 나와 있었다. 당연한 은유다. 특히 그 눈망울은 삶의 깊은 시름 가운데서도 다 알고 있다는 듯 온유하다.
불교에서는 '십우도(十牛圖)'라 하여, 인간사 깨달음의 과정을 설명하며, '마음'을 찾아가는 행로를 '소'를 찾는 모습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시인의 절제된 언어가 소와 할머니와의 따스한 교감을 넘어 득도의 적막에까지 이른다. 할머니의 주름진 손과 소의 눈망울은 서로 다 알고 있다는 듯 손이 얹어지는 것으로 그 뿐, 고개 끄덕일 필요도 없이 적요하다.
최근 입소문 마케팅으로 관객몰이를 하고 있는 '워낭소리'는 이 묵화의 영상버젼이라 할 수 있다. 삶과 죽음 그리고 동행이라는 묵직한 테마를 다루고 있지만 쌔빠지게 일만하다 늙은 소 한 마리가 우리에게 선물로 주고간 투명한 눈물과 볼그족족한 눈시울 만으로도 그 값어치는 충분하다. 미친 소 이야기로 지랄 같았던 지난 해 몇 달 동안 그들에게 참 미안했다.
ACT4
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
향목님! 어쩌면... 저도 저번에 한국 갔을 때 맨 먼저 달려가 '워낭소리' 보고 맨 먼저 떠오른 게 이 시였거덩요...^^ 좋은 건 언제 봐도 좋은 거 같아요, 이 시처럼! 영화 '워낭소리'처럼!! 이 음악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