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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고요의 힘☆]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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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의 힘]
안경원 시집 / 시로여는세상시인선 030 / 시로여는세상(2016.02.01) / 값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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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의 힘
안경원
스칸디나비아반도를 내달리는
근육질의 등짝 같은 산맥을 연모하는
차가운 바다는 너무도 절절하여
산은 뭉텅뭉텅 죽음처럼 끊어진다
섬 섬 절벽 피오르드 푸른 핏줄
아득히 솟은 바위의 단칼에 베인 자국
사람의 오감으로는 닿기 버거워
뭉크의 절규만큼이나 막막한 고요다
북위 60도를 넘어
세상은 드디어 조용해지고
사람의 혀는 빙하를 말할 수 없다
무엇이 무엇에게로 흘러서
저토록 깎고 끊어내고 녹일 수 있을까
거대한 산맥 나뉘고 나뉘어
서로를 바라보게 할 수 있을까
비는 하염없이 내리고
물가에 매어놓은 작은 배 한 척
제 비늘 털어내느라
잔물결 섬과 섬 사이로
수백만 년 녹아 흐르는
에메랄드빛 열정을 타고 번진다
닻줄 풀고 싶은 행인
거대한 고요를 마신다
- 노르웨이 피요르드 해안 올례순드와 게이랑에르와 송내 피요르드 해안을 지나며 씀
소용돌이 1
안경원
황사로 시야가 뿌옇다
순환도로를 질주하는 차들의
뛰는 심장, 폭발하는 엔진들
잣나무들은 어제 내린 비로
제 몸의 향기를 뿜어 날리고
다람쥐 몰아내는 청설모는
먹이를 쥐고 손놀림이 바쁘다
잣송이 열리면 남김없이 파먹느라
나무에서 나무로 날아다니는
그 성정을 보며 혀를 찬다
산 아래 사람의 마을에선
그런 일로 늘 소란스러우니
그 모든 것이 역사를 만들기도 한다
다리 위에서
안경원
흐르는 강물 한 조각 떠서
겨울 오후 의 햇살을 담는다
강을 건너는 자의 시간은
달리의 시계처럼
늘어져 누워 속절없으니
햇빛 남실거리는 강물 한 조각
이내 박제가 되어 버린다
하류를 향한 저 물결은
텅텅 비어서 가는지
뒤죽박죽 모순을 몰고 가는지
도시의 찌꺼기를 힘겹게 끌며 가는
저 흐름이 노역으로 보이는 것은
휩쓸려 가는 눈물과 슬픔 때문일까?
세상의 물줄기는 이어지고 또 이어지고
살면서 들이마신 것 내뱉은 것도
이어지고 또 이어져서
퍼즐 한판 만들며 가는 것이련만
다리 끝나고 강이 안 보이게 되면
그런 흐름 모른 척 없는 척
하루하루 사막 만들면 갈 거 같네
한계령 안개
안경원
천 길 낭떠러지 끝이 안 보이네
설악의 계곡을 울리던
지난 밤 물의 우렛소리
소리를 버리고 안개로 피어오르네
번지고 깨뜨리더니 점령하고 휘감아
까마득히 젖은 계곡이 없어졌다 하네
보이는 것 잡히는 것 모두 사라졌다 하네
시산간이 이리저리 헤매며 가는 날
안개, 끝이 안 보이는 천 길 낭떠러지를
거꾸로 바로 뒤섞고 있네
우문현답
안경원
네 삶에 화내지 마라
다른 길이 있었더냐
하루하루 키워 온 나무는
작고 가늘어도 옹골차다단다
폭풍우에 눕게 되면 눕고
잘라져 의지가 되어야 하면
단단한 의자가 되련다
하루 속의 천 년
천 년 속의 하루
그런 날에 마음 바치련다
그 소리 받아
안경원
너희들 몸살 앓는 소리 들린다
아니, 백 년 이백 년 살아온
당신들 근육 앓는 소리 들린다
산수유 달큼한 향내
봄 산을 깨울 듯 달랠 듯
겨울 지나오며 무엇을 버렸는가
버리자 알게 되는 것 있었는가
내 속에 웅크린 당신들 목피 같은
인내와 침묵
다소 찬 바람에 명주실처럼 잣는다
당신들 언 흙 녹이느라
뚝뚝 뿌리 뻗는구나
그 소리 받아 뚝뚝 시 쓰고 있다
양파가 썩다
안경원
겨우내 베란다에 누워 있던 양파들
하나씩 집어다 썰고 볶아대면
제 정체성을 팍팍 쏘아대는데
겨울 나는 동안 뾰족한 싹을 낸
양파 하나가 가만가만 파 잎을 밀어낸다
드러누운 채 그런 추진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여러 가닥으로 뻗어 나오는 파 잎의 의욕이여
쭈글쭈글해지도록 진을 빼는
양파의 몸엔 슬픈 기색이 없다
곰팡이까지 덮여 꼴이 말이 아닌데
나는 끝을 보겠다고 오며 가며 말을 건넨다
흙에 들어가 썩지 않아도 썩는 길이 있구나
양파는 진액 팍팍 쏘아대며
죽어야 사는 그 고단한 역설을
내게 보이고 싶었는가
나도 알긴 안다
그것은 윤리가 아니라 생존의 길인 것도
때로 매우 장엄하다는 것도
몬스터 이야기
안경원
여섯 살 난 외손녀가 에니메이션 이야기를 한다
몬스터가 사람들 그림자를 잡아먹는데
잡아먹히면 죽는다는 것이다
심상찮은 뜻이 있지 싶다
실체를 죽여야 그림자가 없어지는 게 상식인데
하긴, 그림자는 실체의 끄나풀이지
그림자를 한입에 삼켜버리거나
총으로 맞히거나
망망대해에 던져버리면
실체는 존재의 파탄을 보며
아아, 어찌하려나, 어찌 보면
이미지가 실체를 앞지르는 이 시대의 흔한 일이다
둘은 제각각 돌아다니며
세상은 대혼란에 이르렀고
사람들은 분열증에 허덕인다
몬스터는 역시 몬스터다, 그걸 어찌 알았지?
隕石 1
안경원
러시아 첼랴빈스크 하늘에서
비 오듯 쏟아져 내린 돌들은
적막 고요한 우주를
무서운 속도로 돌던
뜻 없는 돌들
땅을 꺼지게 하고
집을 흔들어 부서뜨리며
사람들을 주저앉히는데
뜻 없는 돌조각 같은 삶의
빈 곳 메마른 곳 날 선 곳에
마구 부딪쳐 번쩍 불꽃
돌이여, 깨어나라고
느닷없이 알려 주네
잊고 있던 우주의 돌에 맞으면
소우주도 대우주도 잊게 하는
21세기 자본주의 파편 같은 내 삶이
돌이 아님을 번쩍 깨닫게 되겠다
밑 빠진 독
안경원
옆구리에 밑 빠진 독 하나 있으면 좋으련만
붓는 대로 담는 대로 빠져나가게
아무것도 저장도 발효도 안 되도록
의식의 그물망 살아온 만큼 질겨져
불에 태우거나 염증의 칼로 베어내야 할 듯
퇴적층 켜켜 은모래든 거친 돌이든
세월만큼 진득해진 기나 긴 서사
마음을 비우며 넘은
깔딱 고개 몇몇 있지만
마음은 가벼워질 뿐
사소한 일들은 다시 바닥을 만든다
비탈길을 만든다
또다시 오르막길을 가야 할 까
거미는 보이지 않고 거미줄만 고요한데
빛바랜 사진도 마모된 벽화도
단조로운 음계로
모든 것 흘러감을 노래한다
바람 센 봄날
안경원
벚꽃 꽃망울들 발그스름 긴장하고
개나리 노랗게 숨죽인
바람 센 봄날
흙에서 잠자던 지난가을 낙엽까지
들쑤셔 거리로 쏟아내는
미친 바람에선
피 냄새가 난다
이 봄에 어찌된 일인가
꽃봉오리마다 핏방울 맺히니
소리치며 피어날 때
듣는 귀에는 땅속 지하수 터지는
진동과 파열음
열린 눈에는 푸른 하늘에
발끈 발끈 선혈이 짓는 무늬
방향을 잃은 바람은
찢으며 터뜨리며 시간을 휘젓고
피범벅 속에 태어나는 아이들의 울음과
재빨리 지는 꽃들
청년의 이마에 파이는 주름과
희게 센 수염이 구름 날리듯 지나가는
쓸쓸한 장면들은
이 봄에 어찌 된 일인가
비 오는 날
안경원
오늘 내리는 비는
가을 중간쯤을 적시는 비
감나무도 모과나무도 아직 푸르고
그들의 열매도 아직 푸른 기 많아
밤의 찬 이슬이나 몇 차례 찬비를
거역할 수 없이 맞아야 하리
시간이 몹시도 툴툴대며 서성거린다
함부로 그린 소용돌이처럼 뒤섞이는
생각들의 줄기를 잡으려니
덜 익은 채 몇 해를 넘긴 열매들
죽은 채 뒤엉킨 뿌리들이 딸려 나온다
쏟아낸 말들이 거친 돌멩이로
흙에 엉겨 붙어 있어
풀어줄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거리의 바닥을 때리는 비는
창문을 훑어 내리는 비는
황무지 같은 생각의 벌판을 적시고
비뚜름하게 기대선 나무들의 숲을 뒤흔든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
언제부터 중심은 의심을 받았는가
중심이 여럿이라고도 하고
중심이 필요 없다고도 하고
뒤섞여 나아가야 한다고도 하고
유목의 시대라고도 하고
흐르는 세상이라고도 한다
욕망은 멈출 줄 모르고
수렁은 더 깊어지는 세상살이에
한참을 걸어왔는가
빗소리가 정수리를 치는 듯하다
가을날에 눈물겹다
안경원
바람 쌀쌀해지고
마른 잎들 거리를 헤매고
햇빛은 공기를 쪼갤 듯한데
하늘이 가만히 내려다본다
사람의 마음 가운데로 그 눈길 내려온다
바람은 발등을 쓸며 지나가고
바람을 찢는 가시들도 함께 쓸며 가고
스며드는 것은 쓸쓸한 장엄
순례자를 생각한다
닳아 해진 신발과 거친 손
기나 긴 항거와 끝내 순응은
그의 검은 눈동자 속에 고인 가을 하늘
벗을수록 빛나는 나무의 실존
그 순응도 장엄하여
벗은 가지를 휘감는 가을빛이 눈물겹다
슬프다 하지 마라 두렵다 하지 마라
파도가 바위에 부딪칠 때마다
희디흰 물보라로 어둠의 핵을 깨뜨리듯
서둘러 다시 쓸려나가듯
스스로 헐어야 닿는 순례의 길에서
바위도 파도도 가혹함을 노래한다
가을날은 걸음을 멈추개 한다
가만히 하늘 올려다보면
마음 부서져 가벼워지니 눈물겹다
입동 무렵
안경원
지난 밤 찬비에
헐벗은 나무들 더 헐벗고
드러난 까치집이
편안한 방과 의자들을
한순간에 날려 보낸다
떨구어야 할 낙엽들
흩어야 할 둥지
머리에 이고 담고 있다면
가을 찬비에 젖어보아라
찬비에 찬바람에 실려 오는
시베리아 고기압이 끌고 오는
끝과 시작이 있다
나이 먹은 나무들의 함성을 듣는다
죽은 가지 죽은 둥지에 갇힌
검은 새떼들 끼룩끼룩 날아가고
분장 속에 굳은 얼굴들
한잎 두잎 매달려 있다
잃어버린 목소리가
죽었다고 외친다
눈꽃
안경원
눈꽃 만발한 겨울 숲에선
죽음의기미가 감돈다
숲은 겨울도 식물성으로 간다
숨소리도 아우성도
거친 껍질의 체취도
눈꽃이 닿는 순간
한 세상을 넘어간다
어제 내린 눈에
아무 발자국 안 보이니
이곳은 어제 그곳이 아닌가 보다
박새들의 노래가 이미 낯선 곳
눈꽃들의 푸른 눈동자, 하얀 심장은
처음 부르는 노래로
세상의 어두운 눈을 밝힌다
던져 놓고 온 내 생애의 누더기들
든 뒤 저 머나먼 곳, 사막을 간다
모래 한 줌으로, 시간은 증발하고
빗속에 숲을 걷다
안경원
초록이 초록을 밀어올려
수많은 잎들 장엄하다
초록이 초록을 생겨나게 하여
축축한 땅을 덮고 하늘을 가리니
비 내리는 숲에 든 자들
초록에 저를 몰아넣고
몸속인 듯 걷고 있다
비에 젖어 쩔쩔매는 벌 두 마리
날려다 자빠지기를 반복한다
오동나무에 두둑두둑 비 떨어진다
소리 내서 말하고 싶은 게 있나 보다
능선에 선 굴참나무들 몇이
반쯤 갈색이다
병들었나 보다
초록이 갈색이 되는 가을에
여럿이 적막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비에 젖은 산이 묵묵부답이다
벌레들
안경원
벌레들
사람 몸을 습격한다
사람에게 짓밟혀 죽는다
벌레들
사람 영혼 속을 들락거린다
파먹기도 하고 쪼아서 빛나게도 한다
얄금얄금 작은 칼로 혹은 비장한 날갯짓으로
세포를 뜯고 실핏줄을 뚫고 살을 썩게 한다
우주의 한 파트를 담당하는 동력이다
벌레들
강골의 소나무를 쓰러뜨리고
붉은 장미의 뜨거움을 뚫는다
그들도 숲에서 신의 은총을 받는다
무엇인가에 재물로 바쳐지며
새들의 목청을 살려내는
조화 속을 모르는 이 있는가
우울을 파먹는 벌레들이
뇌 속 어두운 골짜기를 날곤 한다
내게는 상처였고
그에게는 피 묻은 가격이었음을
오래전 일들은 남의 일이 되었지만
벌레들은 잠깐씩 불을 켜고 지나간다
불을 끄는 벌레들이 그들을 제압한다
하얀 접시
안경원
한가운데 소박한 들꽃 몇 가닥 모여 있고
테두리 따라 연녹색 잎사귀
심심하게 뿌려져 있는 하얀 접시
가마에서 지옥 불 이기고 나와
싫지도 좋지도 않게, 말없이
나물도 부침도 담고
뜨겁게 구운 고기도 담는다
비워지면 소박한 들꽃 빙긋이
버려질 때까지 말없이 가겠노라고
하루하루 싫지도 좋지도 않게
그러자고 활활 타오르는 불길 견디고
식탁 위에 올라앉는다네
밥 먹는 입이며 손이며 물끄러미 바라보며
파도치는 세상 어찌 살아가려는가
불도 물도 몇 번인가 지나갔지만
몇 번 더 지나야 한다네
하얀 접시 더 쓸 수없는 날
걸어온 흙길에 물 섞고 불 섞어 구우면
투박한 접시 하나 나 살던 자리에
놓이려나, 할 말은 더더욱 없겠지만
늙은 제라늄
안경원
늙은 제라늄이 베란다에서 꽃을 피우자
애썼다고 말을 건넨다
밖에 화단에 핀 앳된 제라늄은
붉은 기가 대단하다
꽃 핀 마당도 지나 걸어나가면
어디에 또 꽃이
허공을 찌를 듯이 피어 있을까
피어서 세상을 향해
의기양양 눈길을 날리고 있을 까
베란다 안에 가둬놓은 연민으로는
한 걸음도 걸어나갈 수 없다
제라늄도 그것을 알고 있다
올 겨울엔 결단을 내려야 한다
저물녘, 무심하게
안경원
가볍게 떠 있는 구름 조각은
옅은 오렌지색과 회색으로 물들여
저무는 하늘에 띄우는
누군가의 못 부친 편지들
가벼운 바람에 흐르더니 펼쳐지더니
잔광에 눈물 보이더니
어두워지는 하늘 속으로 스며들어 간다
바람은 멈췄다 울컥하다
낮은 지붕 아래 열린 창문에
잠간 눈길을 주다
바람의 길을 간다
푸른 하늘은 여전히 푸른데
빛은 어디로 갔나
나의 발도 두 눈동자도
빛을 못 따라가
하늘이 어둡다고 한다
못 부칠 편지들 다시 쓰는
저물녘 반 시간
먼 바다 수평선을
빛의 파도가 넘는다
거대하게 고요하게
친구 생각
― 故 강경화 시인을 추억하며
안경원
순례의 길에서 만난 많은 질문들이 생각나네
답을 찾은 것은 아니었지
이곳을 떠나면서 질문은 중단되는 것이니
이곳에서 만난 질문들은
그곳에서 다정한 꽃들로 피어있을 듯
이곳에서 찾으려던 파란 꽃 검은 꽃이
그곳에도 없겠지?
손바닥만 한 마당을 떠나며 시작한
순례의 길은 질문과 답 사이
거대한 시계추를 밟고 다닌
느린 걸음이었네
이곳은 여전히 수많은 질문들이 얽혀 있고
곳곳에서 총성 들리고
답을 찾았다고 고함치는 소리가
순례의 길을 뚝뚝 끊어버리고 있다네
그것이 늘 등 뒤에 바짝 붙어 있는 것 같아도
여기서 멀긴 먼가 보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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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순환이라는 삶의 조건 속에 살며
순환을 벗어나려고도 하고
순환하므로 안주하려고도 한다
그러나, 순환은 같은 길을 가는 것이 아니다
순환 속에서 변전과 대립과 융화를
생성과 소멸을, 성장과 쇠락을 겪으면서
질문은 계속된다. 살아가므로 질문하고
질문하므로 시를 쓴다.
터널을 지나오면서 켜 놓은 불빛이
멀리서 깜빡거린다
이 길로 해서 어디에 이르는가
다시 시집을 엮으면서 묻는다.
2015년 겨울
안경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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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원 詩集 [※고요의 힘※]
[ 해설 ] -
구름이나 코스모스가 되는 순간
최서진
1.
안경원의 시집을 읽고 나면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담담한 산책자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시인은 삶의 붉은 길을 따라 걸어가면서 걸음마다 간직한 벼랑을 고요하게, 아직도 물감이 흘러내리는 듯한 수채화처럼 그려낸다. 시의 행간에는 삶의 무수한 벽 사이 속에서 모든 것들이 생성하고 소멸하고 변화를 반복한다. 그 사이에는 뜻밖의 ‘깊이’가 존재한다. 사이가 깊어진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사이 속으로 깊숙이 휘말리는 것을 뜻한다. 사이에서, 깊은 사이의 심연에서 또 다른 내가 태어난다. 나와 무수한 타자와의 거리에서 자기 상실과 자기 회복을 통해서 외로운 시선과 표정도 뚜렷이 드러난다. 이 시집을 통과하는 주된 표정들 속에서 시적 문장은 구름처럼 흩어지고, 다시 코스모스처럼 피어난다. 이 지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생성과 소멸 사이, 그리고 길을 통해 이르는 허공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존재와 인간 사이가 인생의 길이며, 그 길 위에 시인과 사유가 풀밭처럼 놓여 있다. 안경원은 번민과 갈등을 겪으면서 참다운 인간 존재로 거듭나는 길을 탐색한다. 그 결과로 ‘시인의 길’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둠과 바람과 고통을 잘 아는 이웃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깨닫은 과정으로 집약할 수 있다.
안경원은 70년대 후반과 80년대에 시작활동을 시작했다. 인간의 자유와 책임, 고독, 불안, 절망 등의 실존주의적 주제들을 붙잡고 시대의 암담함을 쓰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시집『盆地』는 심상에서 82년에, 두 번째 시집은 현대문학에서『오늘 부는 바람』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우리 사회에 산업화가 물밀듯이 밀려오고, 비인간화 되어가는 세태를 풍자하며 웅숭깊이 응시한다. 세 번째 시집은 『검은 풍선 속에 도시가 들어 있다』를 펴냈다. 세계가 향하고 있는 물질만능주의와 환경파괴를 인식하면서, 인간이 파괴 되어가고 있는 폐허의 풍경을 담담하고 절박하게 그렸다. 네 번째 시집『팔월』은 인간의 내적인 문제들로 시적방향을 잡아 시대의 문제를 개인의 내면에 대한 탐구와 연결지어 나가려는 시편들이다. 다섯 번째 시집『진흙이 말하는 것』은 자연 속에서 삶의 유사성을 찾으면서 삶의 이치를 알아가려는 시편들이다. 이제 여섯 번째 시집의 문 앞에 있다. 핵심적 시의 세계는 순환 속에 가는 순례라는 길에서 만난 오래 묵은 사유와 시간의 깊이이다. 고요의 깊이이다. 세계가 욕망으로 들끓는 사이에서 시인은 고요의 자세에 대해 깊은 우물처럼 천착한다. 마음이 마음에게 말을 건네는 다정한 고요가 아름다운 내재율처럼 시집 전체에서 흐른다. 슬픔의 끝에서 만난 세계, 고요의 화장하지 않은 민낯을 들여다본다. 연약한 존재가 연약한 존재들을 열정적으로 위로하는 고요의 아득함이 다정한 얼굴로 들키고 있다.
2. 슬픔의 미학
시인은 삶의 과정에서 상처와 아픔과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껴안는다. 유한한 존재가 소멸해가는 과정에서 삶을 일구는 감각만큼은 꽃을 피울 때의 열렬함이 드러난다. 변화하는 시기에 코스모스처럼 길가에 피어있는 시가 있다. 코스모스는 얼마나 꽃다운가. 흔들리면서 사는 것이 삶이라는 듯 시적 자아의 시의식이 고요의 깊이에 닿아 있음을 짐작케 한다.
다람쥐 몰아내는 청설모는
먹이를 쥐고 손놀림이 바쁘다
잣송이 열리면 남김없이 파먹느라
나무에서 나무로 날아다니는
그 성정을 보며 혀를 찬다
산 아래 사람의 마을에선
그런 일로 늘 소란스러우니
그 모든 것이 역사를 만들기도 한다
-「소용돌이1」부분
오래 된 절망은
겨우내 잠잠하던 나무에
꽃봉오리 돋듯 하네
두 눈 감으면 멀리 멀리 사라져 가는
지평선 아득히 광활한 밤에
홀로 걸어가는 집중력과 가벼움으로
소름돋듯 하네
극한 가까이서 구부러지곤 했지만
절망을 생크림처럼 만들어 먹으면서
삶이 안 끝나는 줄 알았다면
칵칵 뱉을 일이다. 걸려 안 넘어가는 것
몸을 부수고라도 지나가려하니
아무래도 안 되겠다
만개를 기다리는 꽃봉오리들
터지며 극한을 넘는 까만 방들
-「소용돌이2」전문
인간의 정서는 자아와 세계와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자아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또 어떻게 수용하는가”하는 문제에서 정서가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인식’이란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아는 것으로 ‘세계’와 ‘나’ 즉 인식의 대상과 인식하는 자아 사시의 상호작용이다. 시인은 삶이라는 대상 속에서 살아내는 일을 ‘소용돌이’라고 규정한다.
「소용돌이1」에서 ‘잣송이’를 파먹는 청설모의 분주한 손놀림에서 빼앗고 빼앗기면서 태어나고 죽고 사라짐이 반복되는 슬픔의 정서를 형상화한다. “나무에서 나무로 날아다니는” 청설모의 성정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은 비애적인 정서로 변주된다.
「소용돌이2」에서는 겨울나무와 꽃봉오리들의 이미지를 통해 절망과, 절망의 통과가 소용돌이치며 꽃으로 피어나는 것이 삶의 조건임을 인식시킨다. 그 인식은 소용돌이 속의 힘과 함께 비애감을 일으킨다. 시인의 슬픔은 인간의 숙명에 근원을 두고 있다. 그것은 뿌리 깊고 견고한 절대적 슬픔이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영원히 존재할 수는 없으며, 언젠가는 소멸하고 결국은 존재와 이별의 단계에 이르기 때문이다. 시인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면서 가는 이 순례의 길에서 외로움과 상실감 및 슬픔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고요하고 적막한 가운데 쓸쓸히 존재하는 자신의 상황을 되돌아보면 천지간의 그 어느 대상에도 위로 받지 못하는 인간존재의 처절한 인식을 가져다준다. 삶에 대한 절망적인 불안과 회의의 풍경이 벽지처럼 시 전체의 분위기를 이끌어 가고 있다.
구두 밑창을 갈 때면 궁금해진다
뜯겨져 나간 것은
뭐라 하며 떠났을까?
내 몸과 마음을 받치고 다니는 두 발은
구두에 세들어 사는 동안
험한 세상 모진 풍파
간신히 헤쳐 가며
군데군데 굳은살 박이고
구두 밑창은 제 살 쓸어내며 시무룩하다
뒤축이 닳아 지축만큼 기울어
세상사도 기울어 보이는 날
소멸 이후가 궁금해진다
비벼 터진 혈흔 같은 것을
걸음걸음 찍고 다니다가
저녁노을 타고 사라지는지
깎아버린 소톱 발톱과 함께
모래더미를 만들고 있는지
두 발은 알고 있을까?
-「구두 밑창」전문
소멸에 대한 인식,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안타까움이 안경원의「구두 밑창」을 통해 발견된다. 시인은 삶의 고단함과 중압감을 담고 다니던 구두의 밑창을 갈면서 체험되는 상실의식을 강하게 표출시키고 있다. 구두 밑창을 바라보는 시인의 인식적 태도, 곧 존재에 대한 시인의 회의적인 내면세계를 형상화 한 것임을 보여준다. 낡아가는 것들이 시인의 고독감과 연결되어 통증으로 제시되고 있다.
“구두에 세 들어 사는” 인간 존재의 실존적 비애가 도처에서 발견된다. 시인의 삶에 무늬를 새기고 지나가는 중이다. “간신히 헤쳐 가”는 나약한 존재가 “구두 밑창”을 쓸어내면서 존재의 근원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발전하게 된다. 더 나아가 “소멸 이후”에 대한 질문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질문은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
안경원 시의 존재론적 관점을 보여주는 이 시에서 “구두 밑창”의 “소멸 이후”는 존재론적 고뇌로 형상화 되어 있다. 존재 탐구의 진지한 자세다. “두 발은 알고 있을까?”라는 질문에는 좌절의 심리가 드러난다. 그러나 ‘두 발’은 인간 의지의 표상이다. 그래서 걸음으로 길을 흔들고 바람에 새기고 모래라는 소멸의 흔적을 만들어 낼 것이라는 희망을 담고 있다. 구두 밑창이 영혼을 담는 몸이라면 두 발은 몸을 담는 영혼이다.
시인의 의식세계인 내면 깊은 곳의 둘레에는 어둠의 속성이 존재한다. “천길 낭떠러지 끝이 안 보이네”(「한계령 안개」부분)라는 문장은 시인의 자의식을 잘 나타내주는 문장으로 등장한다. “지고 온 것이 아니라/얹혀 온 것일 수도/돌아누워 몸의 주인 어디 갔나 하는가”(「여울목」부분)에서 살아온 날들이 그리 순조롭지만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겨울 지나오며 무엇을 버렸는가/버리자 알게 되는 것 있었는가”(「그 소리 받아」부분)은 존재론적 사유가 깊이 담긴 물음이다. 시는 자아 방어이면서 자아 승화이고 자아해방이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다. 자신에게로 끊임없이 나아가려는 노력과 좌절 사이에서 시인의 몸부림이 우리를 고통의 미학적 체험을 하게 만든다.
3. 비애의 미학
시인은 ‘양파’를 통해 내면의 비애의식을 형상화 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대상을 통해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고통의 흔적들을 응시하고 끌어내면서 변화하려고 노력한다. 이 행위를 통해 시인은 자신을 관통한 오랜 상처들을 위로받고 싶어한다.
겨우내 베란다에 누워 있던 양파들
하나씩 집어다 썰고 볶아대면
제 정체성을 팍팍 쏘아대는데
겨울 나는 동안 뾰족한 싹을 낸
양파 하나가 가만가만 파 잎을 밀어낸다
드러누운 채 그런 추진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여러 가닥으로 뻗어 나오는 파 잎의 의욕이여
쭈글쭈글해지도록 진을 빼는
양파의 몸엔 슬픈 기색이 없다
곰팡이까지 덮여 꼴이 말이 아닌데
나는 끝을 보겠다고 오며 가며 말을 건넨다
흙에 들어가 썩지 않아도 썩는 길이 있구나
양파는 진액 팍팍 쏘아대며
죽어야 사는 그 고단한 역설을
내게 보이고 싶었는가
나도 알긴 안다
그것은 윤리가 아니라 생존의 길인 것도
때로 매우 장엄하다는 것도
-「양파가 썩다」전문
존재에 대한 물음은 삶과 죽음에 대한 끝없는 물음이기도 하다. 시인은 ‘양파’의 소외와 고독을 시로 그려내면서 동시에 그것의 승화를 시도한다. 불안한 세계에서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의미를 추구해 나가는 시편들이다. 썩어야 산다는 존재의 길을 만들어내면서 인간 존재의 본질에 한발 더 다가간다.
「양파가 썩다」는 고통과 상처를 수용하는 시인의 방식이 드러난다. 모든 대상은 시인에게 와서 사물과 사람의 상처로 이어진다. 자신의 몸을 썰고 볶아대는 시간에서도 양파의 표정은 “슬픈 기색이 없다”라는 문장은 슬프다는 말보다 더 큰 슬픔을 증폭시키고 있다. 시인이 가는 삶의 여행길은 그리 순탄치 않다. 그러나 그 소용돌이 속을 시인은 조용하게 발걸음을 딛는 자이다. 양파의 모습을 끝까지 대면하면서 “흙에 들어가지 않아도 썩는 길”에 대해 생각한다. 이별과 상실 속에서 시인의 내부는 무덤과도 같았음을 짐작케한다. 개인이 현실이라는 허망함 속에서 스스로를 인식하게 될 때, 고독과 소외를 느끼게 된다. ‘죽어야 사는 그 고단한 역설’은 인간의 삶에 대한 철저한 자각이며, 인생의 무상함과도 연결된다. 내면적 갈등과 죽음에 대한 실체를 확인하는 일은 중요한 체험이다. 이 체험은 인생의 참뜻과 진실을 제시하며, 한 개인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스스로 깨우치게 한다.
시인의 자아가 세계의 현상성을 받아들이며 동화해 나가는 모습을 엿본다. ‘생존의 길’이 ‘장엄한 길’임을 체득한 시인은 삶의 허무를 받아들이고 소멸의 미학으로 세계를 인식하게 된 것이다. 사람과 바람은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이라는 자기 관조의 사유가 문득 발견된다.
러시아 첼랴빈스크 하늘에서
비 오듯 쏟아져 내린 돌들은
적막 고요한 우주를
무서운 속도로 돌던
뜻 없는 돌들
땅을 꺼지게 하고
집을 흔들어 부서뜨리며
사람들을 주저앉히는데
뜻 없는 돌조각 같은 삶의
빈 곳 메마른 곳 날 선 곳에
마구 부딪쳐 번쩍 불꽃
돌이여, 깨어나라고
느닷없이 알려 주네
잊고 있던 우주의 돌에 맞으면
소우주도 대우주도 잊게 하는
21세기 자본주의 파편 같은 내 삶이
돌이 아님을 번쩍 깨닫게 되겠다
-「隕石1」전문
「隕石1」은 시인에게 통증을 수반한 정신적, 심리적 경험이다. 헤겔은 “아픔을 통하여 사람들은 자신의 주체성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통증을 수반하는 슬픔은 어떤 경험보다 직접적이고 공격적이기 때문에 슬픔의 주체에게 자신의 존재를 무엇보다 절실하게 실감하게 한다고 이해될 수 있다.
“뜻 없는 돌조각 같은 삶”이라고 사람들의 삶을 깨우치고자 한다. “메마른 곳 날 선 곳에” 쏟아진 운석들에 부딪치고 깨지고 난 후에야 ‘돌’이 아님을 자각하게 된다. “돌이여, 깨어나라고”라는 고요한 비명은 그 자체로도 삼라만상에 대한 관찰자로서의 섬세한 마음이 느껴진다. ‘운석’을 통해 깨닫게 되는 행위를 통해 시인은 자신을 관통한 상처들을 위로받고 싶어 한다. 오래 돌보지 않은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불꽃을 운석을 통해 본 것이다.
마음을 비우며 넘은
깔딱 고개 몇몇 있지만
마음은 가벼워질 뿐
사소한 일들은 다시 바닥을 만든다
비탈길을 만든다
또 다시 오르막길을 가야할까
거미는 보이지않고 거미줄만 고요한데
빛바랜 사진도 마모된 벽화도
단조로운 음계로
모든 것 흘러감을 노래한다
흐르다 소용돌이치는 강물 한 줄기 있다면
밑 빠진 독 그곳에 놓아보겠네
나날이 작은 배 한척
그리로 띄워 보내보겠네
-「밑빠진 독」부분
「 밑 빠진 독」은 흘려보내서 벗어 버리고 싶은 기억들이 삶의 서사를 만들어가는 것임을 환기한다. 벗어버려도 새로운 상처의 기억은 다시 또 쌓이는 순환 속에 있는 것이므로 오히려 상처의 수용을 통해 극복해 가는 자세를 보여준다.
모든 시들의 탄생이 사랑과 위로를 위한 것이라면 이 시는 인간 존재의 숙명에 대한 위로에 닿아 있다. 그것은 뿌리가 깊은 절대적인 슬픔이다. “모든 것은 흘러감”을 노래하면서 그 흘러감 속에 실존적 체험에 기인한 깊은 수긍이 짙게 배어나온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도 이 삶을 멈출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안경원은 깊은 자아성찰을 통해 주변의 자잘한 사물을 통해 정화된 정서의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제시한다. 아픔은 그렇게 멀리 있으면서도 가까이 있다. 그것이 비록 허무한 일들로 이루어질지라도 각각의 몸을 극진하게 살아내자는 고요한 성찰이 드러난다.
안경원의 시는 삶의 벼랑을 사랑하는 일에 곤한 노래임을 선언한다. 그 노래는 사람이라는 바다에서 상처라는 벌로 뜬다. 연약한 존재인 사람은 병들고 아픈 존재이다. 인간의 근원적인 것을 꿰뚫어 보는 시선과 인간에 대한 깨달음을 획득해가는 시의 행간마다 시는 일이 흉터임을 표상한다. “아프고 찌르던 무엇인가를/생각할는지”(「흐르는 거울」부분)을 읽으며 그 찌르던 무엇조차 살아가는 일의 의미추구였음을 알게 된다. “방향을 잃은 바람은/찢으며 터뜨리며 시간을 휘젓고”(「바람 센 봄날」부분)은 근원적인 반성을 통하여 삶에 행방을 묻는다. 인간은 흉터로 살아가는 존재임을 드디어 깨닫게 한다.
4. 허무의 미학
안경원은 시를 쓰는 과정 자체를 하나의 구원이라고 보고 있는 듯하다. 시를 창작함으로써 심리적으로 카타르시스의 효과를 얻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의 인식은 시의 길과 삶의 길이 같은 길이며, 시를 사랑한 까닭으로 삶의 고통까지도 껴안아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시인은 스스로 시련과 정겨운 동무처럼 동행하며 즐거운 고행의 길을 가려고 한다.
스칸디나비아반도를 내달리는
근육질의 등짝 같은 산맥을 연모하는
차가운 바다는 너무도 절절하여
산은 뭉텅뭉텅 죽음처럼 끊어진다
섬 섬 절벽 피요르드 푸른 핏줄
아득히 솟은 바위의 단칼에 베인 자국
사람의 오감으로는 닿기 버거워
뭉크의 절규만큼이나 막막한 고요다
북위 60도를 넘어
세상은 드디어 조용해지고
사람의 혀는 빙하를 말할 수 없다
무엇이 무엇에게로 흘러서
저토록 깎고 끊어내고 녹일 수 있을까
거대한 산맥 나뉘고 나뉘어
서로를 바라보게 할 수 있을까
비는 하염없이 내리고
물가에 매어 놓은 작은 배 한척
제 비늘 털어내느라
잔물결 섬과 섬 사이로
수백만 년 녹아 흐르는
에메랄드빛 열정을 타고 번진다
닻줄 풀고 싶은 행인
거대한 고요를 마신다
-「고요의 힘」전문
“거대한 고요를 마신다”를 오래 되뇌어 본다. 스칸디나비아반도의 산맥과 절벽, 그리고 빙하를 떠올리며 다시 “막막한 고요”에 멈춘다. 시에 등장하는 ‘나’는 거대한 풍경에 흡착되어 가면서 거대한 고요 속에 함몰되어 있다.
시인은 ‘자신’을 찾아 슬픈 탐험을 시작했을 것이다. 스칸디나비아의 반도를 내달리며 잃어버린 시간과 상실을 받아들이고 넘어서기 위해서 분투하는 과정이 그려진다. “뭉텅뭉텅 죽음처럼 끊어”진 산을 바라보며 자신의 끊어진 시간을 떠올렸나보다. “단칼에 베인 자국”을 지닌 바위를 담담하게 바라보기 위해 “뭉크의 절규”를 고요하게 터뜨리면서 다시 자신의 밖으로 나오기 위해 몸부림친다. 이 필사의 자기탈출이 바로 안경원의 시 쓰기 방법이다. 회오리처럼 자신의 내면의 눈보라를 몰아내고 잠잠해진 내면으로 ‘빙하’와 함께 거대한 물음이 들어온다. “무엇이 무엇에게로 흘러서/저토록 깎고 끊어내고 녹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스스로를 구원하고 세상을 향해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이 시는 “수백만 년 녹아 흐르는” 빙하를 통해서 삶과 죽음이 분리되지 않는 순환론적 세계관을 말하고 있다. 시인은 빙하를 보면서 “에메랄드빛 열정”을 느끼며 삶의 고비를 넘어서고 있다.
눈꽃 만발한 겨울 숲에선
죽음의 기미가 감돈다
숲은 겨울도 식물성으로 간다
숨소리도 아우성도
거친 껍질의 체취도
눈꽃에 닿는 순간
한 세상을 넘어 간다
어제 내린 눈에
아무 발자국 안 보이니
이곳은 어제 그곳이 아닌가보다
박새들의 노래가 이미 낯선 곳
눈꽃들의 푸른 눈동자, 하얀 심장은
처음 부르는 노래로
세상의 어두운 눈을 밝힌다
던져 놓고 온 내 생애의 누더기들
등 뒤 저 머나먼 곳, 사막을 간다
모래 한 줌으로, 시간은 증발하고
-「눈꽃」전문
안경원 시의 풍경은 황폐한 겨울이다. 그러나 눈이 내리고 하염없이 눈이 내리고 그리고 그 눈들이 꽃으로 피어 있다. 수백 개의 눈들이 수 겹의 꽃잎들로 만개한 겨울 산에 서 있다.
“죽음의 기미”가 감도는 겨울 숲에서도 나무는 겨울을 ‘식물성’으로 이겨낸다. 식물에서만 볼 수 있는 고유한 힘이 식물성이다. ‘말없음’이 그것이다. “숨소리도 아우성도” 가만히 내려놓자. 그 고통이 더 크고 세밀하게 드러난다. 상처위에 핀 눈꽃에 뜨겁게 닿는다. 두려움을 넘어서자 자신이 내면에 있던 강력한 힘과 만나게 된다. 내면의 강력한 힘으로 “세상의 어두운 눈을 밝히”는 것, 세상을 구원해 내는 힘으로 서술되고 있다.
초록이 초록을 밀어 올려
수많은 잎새들 장엄하다
초록이 초록을 생겨나게 하여
축축한 땅을 덮고 하늘을 가리니
비 내리는 숲에 든 자들
초록에 절르 몰아넣고
몸 속인 듯 걷고 있다
비에 젖어 쩔쩔매는 벌 두 마리
날려다 자빠지기를 반복한다
오동나무에 두둑두둑 비 떨어진다
소리 내서 말하고 싶은 게 있나보다
능선에 선 굴참나무들 몇이
반쯤 갈색이다
병 들었나보다
초록이 갈색이 되는 가을엔
여럿이 적막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비에 젖은 산이 묵묵부답이다
-「빗속에 숲을 걷다」전문
우리가 진정 해야 할 일은 ‘침묵’하는 일이라는 명제를「빗속에 숲을 걷다」를 통해 보여준다. 침묵의 중요성에 대해 고요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떨구어야 할 낙엽들/흩어야 할 둥지/머리에 이고 담고 있다면/가을 찬비에 젖어보아라”(「입동 무렵」부분)을 읽으며 삶 속에서 죽음을 바라보게 된다. 삶은 죽음을 생각할 때 더 귀하고 극진하게 살아낼 수 있다. 생성과 소멸이 반복되는 사이 우리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런 고요 언제 였던가/이런 말없음 언제 였던가”(「눈동자 호수」부분)는 비로소 고요의 눈을 뜨는 자의 사유가 가득 차 있다.
5.
이제는 그치고 싶다
입을 다물고
어디서든 나를 제외시키고
먼 나라 일인양
바라만 볼 수 있다면
그것도 미진하여
그대로 내딛을 수밖에 없다면
그렇게 하리라
주황빛으로 물들던 가슴 언저리
고요에 적셔
한 점씩 터뜨리는 능소화가 고운
세상의 저녁에
감춰둔 슬픔을 꺼내본다
-「능소화」전문
세계의 불안으로부터 시인은 단호하게 작별인사를 한다.
「능소화」로 숨어든 시인은 내면에 집중함으로써 스스로 자기 치유를 감행하고 있다.
누군가의 위로로 허전함 사라지거나
누군가의 말을 듣고 쓸쓸함 사라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시 몇 편 읽고 삶이 달라 보이지 않고
누군가의 험담을 듣고 가슴이 쓰리지도 않는다
말은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말이요
밖으로 나온 말은 속엣 말과 사뭇 다르니
말로 어찌해 보리요
그렇다 해도, 시 몇십 년 쓰면
말이 이끌어 내는 것, 이끌고 가는 것은
잘 부릴 줄 알아야 할 텐데
생애의 벼랑에서 정면을 바라보게 한다거나
말을 닫고 기다리게 한다면
말의 고삐를 쥔 것이라 하겠지?
詩歷 반세기면
오동나무가 우람해지고 실개천이 먼 바다로
흘러가는 세월, 시로 지은 집 오두막 하나
에필로그가 되면 좋겠네
-「말의 고삐」전문
「말의 고삐」는 여섯 번째 시집을 닫는 창문이다. 절망의 끝에 닿았던 시인의 고백이 세밀하게 드러난다. 그 절박한 삶의 터널을 지나오면서 주운 꽃잎 하나, 삶의 의지라는 이름이다.
“시 몇십 년 쓰면” 말을 “잘 부릴 줄 알아야 할 텐데” 그렇지 못했다는 자기 고백이다. 삶도 한 번 넘어져 봤으니 잘 살 줄 알았는데 매번 다른 세계가 다시 발목을 잡는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생애의 벼랑에서 정면을 바라보게 한다거나/말을 닫고 기다리게 한다면/말의 고삐를 쥔 것이라 하겠지?”라는 문장을 통해 이제는 예전과 다른 시인의 면모를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시인의 의지는 이번 시집의 화두 “고요한 힘”의 입장을 결연하게 드러내고 있다. 세상의 온갖 어둠을 온 몸으로 받아내고 정화시켜 다시 “시로 지은 오두막 하나”로 태어난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인생의 길 위에 놓여 있는 돌멩이 같은 존재들이다. 시인이 그려내는 그 만의 사유의 언어는 심연의 깊이에서 전해오는 적막한 아프디 아픈 울림이 내포되어 있다. 안경원의 시는 온통, 삶에서 두꺼운 외투처럼 죽음을 껴안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생성과 소멸사이에서 삶과 시에 갖고 있는 진한 애정이 스며 있다. 길가의 돌은 어디로 갈 것인가?
현실에 깊은 사유를 밀어 넣어 본질을 선명하게 물들여내는 일을 시의 길이라고 규정해본다. “그러나 그들 중 아무도 돌아온 이 없으니/끝까지 가보는 수밖에”(「경험담」부분) 없다는 통찰로 수렴된다. “시라는 모래더미, 진흙 밭/시라는 구름, 구름 찢어져 내리는 비/시라는 낡고 낡은 사원, 사원의 빗물받이”(「시가 부질없는 날엔」부분) 시의 개념이 자유로워지고 깊어진다. “불로 된 꽃은 누구의 무엇일까?/어두운 하늘로 솟아오르는/불씨는 뜨거워 견딜 수 없어/극한에서 최선을 택한다”(「불꽃축제」부분)를 읽으면 시인의 조용한 세계가 불꽃에 의해 환해진다. ‘극한’에서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을 시인의 시가 믿음직하고 정직하다.
존재로서의 인간의 삶을 세계와의 상호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 속에서 인간은 세계와의 관계를 갖게 되고 세계에 대한 대응방식이 사람마다 다르게 드러나게 된다. 시인의 세계인식은 순례의 길에 존재가 존재의 집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인식된다. 시인은 시적 구현 방식을 통해 허무를 극복하고자 시도한다. 안경원은 그 극복의 자리에 고요의 자세를 놓고 있다. 분주하고 목청 높은 세상 속에서 ‘고요가 지닌 힘’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있다. 시를 통해 예술적 진실의 구원에 도달하려고 한다. 삶은 죽음이다. 삶의 긴장을 이완시키기를 원하고, 갈증을 해소시키기를 원하며, 스스로에 대해 명상하기를 시인은 원한다. 따라서 조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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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시가 삶아 되고, 삶이 시가 되는 것은 어떠한 경지일까. 과연 얼마큼이나 오랫동안 시를 써야, 또 얼마큼이나 살아야 이런 경지가 될까. 이런 경지에 이르면, 읽는 시가 편안하고, 또 그 삶도 편안해지리라 생각이 된다.
안경원 시인이 5년 만에『고요의 힘』이라는 제목의 시집을 펴냈다. 오랜 기간 시를 쓰며, 또 오랜 기간 시라는 것과 함께 하며 살아온 모습을 시에서 읽을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읽는 사람을 시들은 편안하게 해주고, 평안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시가 담고 있는 삶으로 사람들을 이끌어가곤 한다.
아옹다옹 시를 통해 시민을 위한 시만의 세계가 펼쳐지는 시대. 시를 위항 시가 아닌, 한 소중한 삶을 드러내는 시를 읽는 기쁨. 안경원 시인의 시를 읽으며 만나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때로는 치열하게, 때로는 아프게, 때로는 덤덤하게 삶의 구간을 지나며 겪었던 여러 경험들이 배어나는 시들을 만날 수가 있다.
안경원 시인의 시집을 통해, 잔잔한 어조로 노래되는 삶의 다양한 변주를, 그래서 더욱 공감이 가는 세상을 만나는, 그런 시간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 尹錫山 시인. 한양대 명예교수
모든 시들의 탄생이 사랑과 위로를 위한 것이라면 이 시는 인간 존재의 숙명에 대한 위로에 닿아 있다. 그것은 뿌리가 깊은 절대적인 슬픔이다. “모든 것은 흘러감”을 노래하면서 그 흘러감 속에 실존적 체험에 기인한 깊은 수긍이 짙게 배어나온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도 이 삶을 멈출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안경원은 깊은 자아성찰을 통해 주변의 자잘한 사물을 통해 정화된 정서의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제시한다. 아픔은 그렇게 멀리 있으면서도 가까이 있다. 그것이 비록 허무한 일들로 이루어질지라도 각각의 몸을 극진하게 살아내자는 고요한 성찰이 드러난다.
- 최서진 해설「구름이나 코스모스가 되는 순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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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경원 시인∥
∙ 1951년 인천에서 태어나
∙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동대학원에서 공부하여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 1977년《현대문학》에「상봉」「향연」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하였으며,
∙ 시집으로『盆地』『오늘 부는 바람』 『검은 풍선 속에 도시가 들어있다』『팔월』『진흙이 말하는 것』『고요의 힘』등이 있다.
∙ 한국시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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