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12월15일(월)맑음
일진선사가 글을 보내와 수정해주기를 청하다.
<무시간의 포스트모던 선>
아는 것이 알려지니 깨달음이다.
지금을 느껴라, 시간은 없다.
과거도 지금, 미래도 지금일 뿐
곧바로 깨달으라. K-Zen은 돈오이다.
당당하여라, 원효와 진묵대사의 후예여!
두루 가득한 평온
모든 게 고마운 조화
다만 감사합니다
Timeless Post-modern Zen
Knowing is known, it is Enlightenment.
Feel the Now, time is nowhere.
Past is now, future is now too.
Awaken immediately, K-Zen is a sudden enlightening.
Be confident, descendants of Wonhyo & Jin-mook Master!
All around Peace & grateful harmony
Just thanks a million
2021년12월16일(화)맑음
<아잔 붓다다사 스님의 다르마적 사회주의 Ajhan Buddhadasa Dhammic Socialism>
Buddhadasa에게 모든 것은 담마dhamma이다. 담마는 자연을 의미하며 그것은 네 가지 영역으로 나누어진다. 자연 그 자체 sabhava dhamma, 자연법칙 sacca dhamma, 자연법칙에 따르는 의무 patipatti dhamma, 자연법칙에 따라 의무를 행함으로써 나타나는 결과 pativedhamma이다. ‘자연’을 뜻하는 팔리어는 담마자티 dhammajati이다. 담마자티는 ‘자연의 순리대로 발생한 것’을 의미한다. 모든 것은 ‘자연들(조건이 모여서 일어난 사건들)이며 담마dhamma(이런 의미에서 paticcasamupanna dhamma 緣起所生法이라 한다)임을 의미한다. 담마는 모든 것을 지배하는 자연법칙, 자연법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의무, 그리고 옳고 그른 행동에 따르는 결과를 말한다. 자연은 실재의 총체이고, 거기에 자연이 아닌 것은 없으며, 그것을 어떻게 부르던 절대적이거나 궁극적인 실재는 없다(무자성). 일체는 자연의 법칙을 따라 자연으로부터 만들어진다. 자연과 인간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인간은 곤충이나 나무, 강, 별들처럼 자연의 일부이다. 소위 인간의 주체성이라는 것은 정신적 자연(心法)이라 할 수 있고, 그에 반해 객체성은 물질적 자연으로 색법(色法)이라 할 수 있다. 모든 현상은 능(能, 주관성)과 소(所, 객관성)의 연생연멸이다. 스피노자의 말을 빌리면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의 상호작용이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자연과 대립하거나, 자연 위에 군림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당연한 역할과 의무(dharma)를 수행하는 자연의 일부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아상(’나‘라는 관념), 인상(사람이라는 관념), 중생(생명이라는 관념), 수자상(수명이 있다는 관념)에서 벗어나서 마음을 널리 쓰라고 했다.
2021년12월17일(금)맑음
아침 9:00 통도사를 향해 출발. 11:00 통도사 자장암에서 명섭스님 만나 통도사 주지 현문스님, 유나 항조스님, 열중 지원스님과 함께 점심 공양하고 차를 마시다. 보살님들은 공양한 다음 진여실에서 앉아서 쉬다. 큰절로 내려와 보광선원에 안거중인 명섭스님과 보설스님을 만나다. 오후 2시에 스님과 작별하고 조계암으로 출발하다. 오후 3:30에 조계암에 도착하여 동진스님을 만나다. 함께 차담을 나누며 환담을 나누다. 진주로 돌아오니 오후6시. 바람이 차다.
2021년12월18일(토)맑음
태백산맥을 읽기 시작하다.
2021년12월22일(수)맑음
동지를 맞이하여 독경기도 올리다. 아림보살 참석하다. 지월거사 오다. 저녁에 옥종에서 공양주보살 송년회를 겸한 부부모임 갖다.
2021년12월23일(목)맑음
부산 반송 길상사에서 일진선사를 만나 선 강의 듣다.
참석자: 원담, 지월거사
1. 일진선사 강의: 보고 들을 때 보고 들음을 아는 것이 바로 그!것!임을 자각한다. 여기에서 그!것!은 이름하여 본성, 불성, 자각당처, 혹은 편의상 ‘참나’라 한다. 초기불교 가르침에서는 ’보되 볼 뿐 보는 자는 없다. 들을 때 들을 뿐 듣는 자는 없다. 느끼되 느낌만 있을 뿐 느끼는 자는 없다, 생각할 때 생각만 있을 뿐 생각하는 자는 없다.’라고 한다. 보는 자, 듣는 자, 느끼는 자, 생각하는 자가 없다는 사실을 교리적 용어로 無我라고 한다. 여기에 덧붙여 말하면 ‘나는 나를 볼 수 없다. 마치 눈이 눈을 보지 못 하는 것처럼. 그러나 눈이 눈을 볼 수 없지만 ‘봄(seeing)’은 생생하듯 자각 자리는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지만 분명하다.
2. 지월거사 문: 번뇌 망상이 마음을 흐릿하게 만들 때 어떻게 하면 본래면목을 빨리 회복할 수 있을까요?
3. 일진선사 답: 빨리 회복해야 한다든지 이런 애를 쓰지 마세요. 그런 시도가 또 하나의 망상을 만듭니다. 그러지 말고 번뇌 망상인 줄 아는 그놈이 바로 그!것!이라는 걸 자각하세요. 번뇌 망상이 저절로 저 혼자 번뇌망상인 줄 알 수는 없잖아요. 번뇌망상이란 게 흘러가는 생각의 흐름이잖아요. 번뇌망상인 줄 아는 놈이 있어야만 ‘아, 번뇌망상이 일어났구나!’라고 알 거 아니겠어요? 그 번뇌망상인 줄 아는 그놈이 바로 본래면목 자각당처입니다. 자각 당처가 확 깨어나면 번뇌망상은 사라집니다. 번뇌인 줄 아는 그놈이 바로 불성의 작용 즉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번뇌 즉 보리’라고 하지요. 번뇌가 아무리 치성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다만 번뇌인 줄 아는 그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의 바탕 위에서 온갖 생각, 번뇌 망상이 반짝 반짝하는 겁니다. 번뇌망상을 겁낼 필요가 없어요. 깨달음 자리, 자각 당처, 본래면목을 <지금 여기>라고 합니다. 번뇌망상에서 지금 여기(깨달은 자리)로 관점을 확 바꾸면 본래 아무 일이 없어요. 지금 여기엔 항상 안심 안정 평정입니다.
4. 일진선사: 견문각지가 도이다. 見聞覺知是道
제자: 도가 무엇입니까?
선사: 아무개야!
제자: 예!
선사: 거기 있네.
보는 것, 듣는 것 자체가 그!것!을 드러냅니다. 見聞覺知 是 道(견문각지가 도이다).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봄, 들음, 느낌, 생각 등 모든 작용은 참나(불성, 본래면목, 자각당처)이 ‘지금 여기’에 이렇게 생생하게 작용하고 있구나!를 드러내고 있어요. 이렇게 깨닫는 겁니다. 지금 눈앞에 한 개의 물체가 보이죠? 앞에 있는 물체를 볼 줄 아는 그놈이 이렇게 생생하게 기능하고 있어요. 이렇게 ‘봄’이라는 경험은 생생하게 살아있지만 보는 놈(‘보는 자 혹은 ‘보는 의식’이라는 개념)은 없어요. 그래서 ‘봄’만 있고 ‘보는 자’는 없다고 합니다. ‘봄’은 언어문자로 표현하기 이전의 직접경험, 순수경험입니다. 그런데 ‘보는 놈’과 ‘보이는 대상’이란 개념이 등장하면 ‘보는 자(주어)가 보이는 대상(목적어)을 본다(동사)’리는 문장으로 순수경험을 해석합니다. 이것은 개념화 작용이지요. ‘봄’만 있다는 것은 순수경험이고, ‘보는 자’가 없다는 말은 주관(사람)과 객관(대상)으로 분리되기 이전임을 말합니다. 순수경험에서는 ‘나는 나를 볼 수 없고, 나는 내가 어떻게 생겨났고, 언제부터 있게 되었는지 알 수 없어요. 난 내가 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나누어지지 않고 온통 연결된 전체는 이렇게 생생하게 존재하고 있구나! 라는 일종의 경이감이 있습니다.
5. 일체가 그!것!을 드러내고 있다.
생각조차도, 번뇌 망상조차도, 괴로움조차도 이!것!을 드러낸다. 일체가 참나의 작용이다. 모든 것이 참나의 작용이다. 이때 참나란 불성을 말하며 無自性 空이다. 頭頭物物 是毘盧彿 두두물물 시비로불, 개개 사건과 물상이 모두 비로자나 법신 부처님이다. 處處佛像 事事佛供 처처불상 사사불공, 모든 곳이 부처님 형상이며, 하는 일마다 부처님께 공양드리는 일이 된다. 이미 이렇게 부처가 드러나 있어요.
6. 원담 보충: 불교 교리에서 無我라고 하면 얼핏 부정적인 늬앙스를 풍겨서 허무주의에 떨어질 염려가 있지요. 그래서 그걸 보완하려고 佛性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긍정적인 늬앙스를 주려고 하지요. 그리고 선에서는 깨닫고 나서의 用心이랄지 悟後保任行에 대한 자세한 안내는 없어요. 이런 까닭에 전통적으로 화엄의 가르침을 가져와 悟後用心과 보살행실천을 권했습니다. 그래서 옛 선사분들은 ‘선과 화엄은 상보관계’라고 하셨습니다. 華嚴禪화엄선도 이래서 나오게 된 것이지요.
7. 일진선사: 불성작용, 性起說
지금 뭘 보고 있어요? 책상입니다. 불성이 이렇게 드러나 있잖아요. 본래면목이 이렇게 존재하고 있잖아요. 하늘을 봐도, 땅을 봐도, 어디를 봐도 아! 참나(나 없는 나)가 이렇게 드러나 있지 아니한가! 종소리, 땡 땡 땡. 죽비~ 딱! 손가락 세우고 이!것! 여기에 드러나 있잖아요. 이것이 화엄경에서 말하는 性起성기, 모든 현상은 불성이 일으키는 작용이라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깃든 의심, 한 생각, 어떤 트라우마, 어떤 괴로움이 일어나도 그것은 이!것!의 드러남일 뿐 다른 물건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오히려 본래면목을 깨어나게 만드는 노크소리와 같습니다. 일어나는 생각 생각들이 마음을 톡!톡! 두드려 본래면목을 깨어나게 합니다.
8. 일진선사: 그냥 지금 이대로 존재하라. 자신이 부처임을 알라.
이!것!을 아는 데 무슨 고행이나 학습이나 특별한 노력이 필요해요? 이렇게 처음부터 여여하게 있어 왔는데, 처음부터 있었는데 ㅎㅎㅎㅎㅎ. 전체가 모두 ‘나’라면 굳이 ‘나’라고 할 필요도 없지요. 삼라만상이 ‘나’라면 ‘나’라고 말한다는 자체가 이미 분별망상이지요. 그러니까 ‘나’라고 할 게 없어요. 그래서 무아입니다. 무아인데 생각으로 생각하는 놈을 찾고 있어요. 얼마나 우스운 짓인가요? 우리가 이런 짓을 평생 하고 살아요. 본래 나라 할 것이 없는 데 괜시리 한 생각을 일으켜 없는-나를 찾고 있어요. 본래부터 자유인데 구속되어 있다고 상상하면서 자유를 찾아서 힘들게 쫓아다녀요. 참나가 있다거나 없다거나 해도 모두 망상이고 분별입니다. 이런 말을 가지고 싸우고 있어요. 그래서 공부가 아직 익지 않았다면 침묵하라고 합니다. 시간이 되어야 공부가 익어지게 됩니다.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분별망상이 됩니다. 開口卽錯 개구즉착, 입 벌리면 틀립니다. 그러나 틀린 줄 아는 순간 깨달음이죠.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생각을 알면 깨달음입니다. 번뇌 즉 보리라고 하죠.
생각이 일어난다는 것은 이 자리가 펄펄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어떤 소리가 들릴 때, 아! 각성이 이렇게 생생히 살아있구나! 생각이 일어날 때 아! 각성이 이렇게 팔팔 살아있구나!를 압니다. 그래서 이것은 잃어버릴 수도 없고 여기에서 도망칠 수도 없어, 이 자리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냥 이 자리! 지!금! 이 자리입니다.
부처 계신 곳 어딘지 알고 싶은가? 欲識佛居處 욕식불거처
다만 말하는 ‘이!것!’이니라. 只這語聲是 지자어성시-부대사(傅大士, 497~569)
9. 일진선사: 본 것과 된 것은 다르다. 환상임을 아는 것과 환상에서 벗어남은 다르다.
지월거사: 어린아이 때의 나와 지금의 나와 다른 점이 무엇이길래, 어른이 된 나는 참나를 보는 것이 어려워졌습니까?
일진선사의 답: 어린아이는 단순하고 유연해요. 그래서 비유하여 어린아이 마음으로 살라는 거지요. 예수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어린아이와 같아야 하느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했어요. 하느님의 왕국은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이미 이루어져 있습니다.
점심공양하고 척판암을 참배하러 가다.
擲板救衆傳來話, 척판구중전래화
無板無衆無曉師; 무판무중무효사
心光普照自性佛, 심광보조자성불
忽然寒山刮目呵. 홀연한산괄목가
소반을 던져 대중을 구해냈다고 전해오는 이야기여!
소반도 없고 대중도 없고 원효스님도 없구나
마음 광명 널리 비춤이여, 자성불이 아닌가?
홀연히 겨울 산이 눈을 부릅뜨고 꾸짖는구나!
첫댓글 번뇌망상인 줄 아는 놈이 있어야만 ‘아, 번뇌망상이 일어났구나!’라고 알 거 아니겠어요? 그 번뇌망상인 줄 아는 그놈이 바로 본래면목 자각당처입니다...
달리 본래면목 찾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