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령 시사프로 고정 출연자...
아줌마, 할머니 팬 몰고다녀
19년간 매일 아침 강연... 뭔가 공헌하고 싶어
결혼 안했을 뿐... 사랑하며 살아
여성 곁 떠나본 적 없어요... 예전에 사랑하던 사람들
이젠 많이 떠나갔지만... 가슴 속에 살아있어
사후 준비도 끝내
삶이 끝나면 그냥 가는 것... 장례식은 안할 거예요
육신은 세브란스병원에... 재산은 대학에 기증해야죠
정치 입문, 후회 안한다
대통령 나가란 말 이끌려... 시작은어리석었지, 내가
그래도 국민과 소통하는 게...
정치판 덕분이란 생각들어
통일 위해 종교가 할 일은
北 주민 쏟아져 내려오면...'얼마나 고생 많았소' 하며
각자 집으로 데리고 가...
먹여 살릴 사랑을 가꿔줘야從北도 용서? 안될 말이야...
대한민국 생존 위협하잖아
1928년생, 올해 여든여섯의 김박사는
종합편성 채널, 지상파는 물론 일반 케이블 방송을
통틀어 최고령 시사프로그램 고정 출연자다.
연세대 후문에 있는 김동길 박사의 자택을 찾았다.
김옥길-김동길 두 개의 문패가 붙어 있던
20여년전 대문은
재건축으로 변했지만항상 문이 열려 있는
모습은 그대로였다.
자세히 보니 대문 자체가 없어졌다.
―유머가 필요한 이유는 뭘까요?
"교황에 선출된 프란치스코 1세가
'나를 교황으로 선출한
추기경들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했잖아요.
거기에 넘치는 유머가 있어요.
나를 뽑은 것은 잘못이니까 하느님께 사과해야 한다는
뜻도 있고당신들 때문에 괜히 고생하게
생겼다는 뜻도 있고.
김수환 추기경이 돌아가시기 전에 누군가 물어봤대요.
'외국어를 여럿 하신다는데 어떤 말을 잘 하십니까?'
영어, 불어, 라틴어, 이런 대답을 기대했겠죠.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셨대요.
'내가 제일 잘하는 말은 거짓말이야.'
이런 유머가 감동을 주거든요.
인생의 깊이를 느끼게 하거든요."
―시(詩) 300수를 외우신다고 하셨잖아요.
지금도 그러세요?
“공자님이 ‘시삼백(詩三百)’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나도 시 삼백 수를 외워보겠다’ 그런 거지요.
어린 시절엔 시조 백 수를 외웠고.
일제시대에 살아서 그 때 외운 일본시도 남아있고.”
김동길 박사는 시마자키 도손(島崎藤村)의 ‘첫사랑’,
윤선도(尹善道)의 ‘오우가(五友歌)’,
윌리엄 워즈워스의 ‘무지개’를 차례로 암송했다.
“어느 분위기에 어울리는 절절한 시가 있거든요.
키를 누르면 원하는 시가 튀어 나와야지요.
> 눌렀는데, 안 나온다? 그럼 강연을 그만둬야지요.
그 때가 끝나는 때에요.”
―여전히 누르면 튀어 나오나요?
“강연하는데 말이 막히면 어떻게 하나,
적어도 이런 걱정은 안 해요.”
◇매일 10분 강연, 원고지 3장 작성
―어떻게 단련하세요?
“(LA의 한인방송국인)
라디오 코리아를 통해 매일 아침
강연을 해요. 그런데 방송국 친구들이 자꾸 늦어요.
‘차가 밀렸어요’, ‘깜빡 잊어버렸어요’ 하면서.
그래도 나는 늘 아침6시에 앉아서
‘안녕하십니까, 김동길입니다’ 하고
말할 준비를 하지요. 그게 19년째예요.
방송국에 문제가 생겨서 방송을
못 한 때도 있지만, 난 계속 했어요.”
―글도 매일 쓰시지요?
“인터넷 홈페이지에 ‘프리덤 워치’라는
글을 매일 써요.
200자 원고지 3장 분량. 일어나면 처음 하는 일이죠.
여행을 떠나도 써요. 일주일 동안 크루즈를 타면,
일주일분을 써놓고 타요.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했을 때
이 대통령에게 전하는 글을 매일 쓰면서 시작했는데.
대통령에게 도움이 되고, 자유민주주의로 가는 데
보탬이 되기 위해서.
그런데 아무 반응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당신한테 안 쓴다' 하고 시작한 것이
‘프리덤 워치’예요.
혼수상태가 될 때까지 글은 써야지요.”
―컴퓨터로 쓰세요?
“요새 애들, 손이 아주 빠르잖아요.
중학교 3학년인 조그만 조카 아이가 (입력해서)
자기 컴퓨터에 올려줘요. 한 달에 30만원씩 주지요.
그 친구, 그걸로 십일조도 내요.”
“제가 결혼을 안 했잖아요.
어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네가 사는 인생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
옛날 고향 친구를 만나 들은 이야기도 전해 주셨어요.
‘아들 장가갔느냐’고 해서 ‘안 갔다’고 했더니,
‘참 효자다’라고 했데요.
‘며느리한테 엄청 당한다’면서.
‘장가 못 갔다고 걱정할 거 없어’
이런 말을 해주시던 어머니였어요.
삼복 더위에 삯바느질을 하면서 어머니가 부르던
찬송가 소리가 지금도 내 귀에 쟁쟁해요.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
◇큰 민족이 되려면 용서를
―어머니를 닮으셨군요?
“한글만 겨우 깨친 어머니였어요.
시골(평안남도 맹산) 면장을 하시던 아버지가
‘노다지를 찾겠다’며 나갔어요.
집 팔고, 논 팔고, 밭 팔고,
늘 밖을 돌면서 돈을 벌어다 주지 못했어요.
어머니가 가족을 돌봤죠.
남의 집 빨래하고 삯바느질하고.
그러면서 누님(金玉吉 선생)을 공장에 보내지 않고
여학교에 보냈어요.
‘못살면서 계집애 공부시킨다’고 빈정거리는 사람이
왜 없었겠어요. 하지만 어머니는 절대 화를 안 내요.
‘뉘 집에선 돈을 쌓아놓고 공부 시키나요?’
이렇게 대꾸하셨지요. 그 딸이 이화여대를 나오고,
총장이 되고, 문교부 장관이 되고.
이런 꿈은 한 여성(어머니)의 가슴에서 나온 겁니다.”
―‘누님 같은 여자가 없어 결혼 안 한다’고 하셨지요?
“누님은 굉장한 리더십이 있었어요.
욕심이 없기 때문이에요.
김활란, 김마리아, 서은숙 선생을 그렇게 철저하게
모실 수가 없었어요.
누구라도 그런 제자를 갖고 있으면 좋을 거예요.
누님이 이화여대 총장이 됐을 때 혁명정부 시절
(1961년)이었어요. 그 때 문교부가 배정한 학생보다
더 많이 뽑아서 잠시 물러난 일이 있어요.
성적이 좀 모자라도 교직원 딸을
합격시켰기 때문이에요.
본인 모르게 해요. 그 사람들, 지금도 모를 거예요.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자기 딸이 떨어진 학교의
강의실에 들어가 강의하고 싶겠어’라고 말해요.
이런 일을 ‘쫄짜’들은 못해요.
학생 데모 맨 앞에 서서 학생들 건드리지 못하게 하고,
정보부에 쫓기는 학생을 집에 숨겨주고.
집에서 냉면 파티를 하면 학교 수위까지 불러요.
퇴임 후 문경새재 고사리에
내가 땅을 사고 집까지 지어
드렸는데, 환갑이 되시자 이화여대에
몽땅 기부하셨어요."
―형님은 태평양전쟁 때 돌아가셨지요?
“일본군에 끌려가 소만(蘇滿) 국경에서 숨졌어요.
아버지 목에 걸려 있던 유골함이 기억나요.
평생 상처를 안고 사셨지요.”
◇여성을 떠나본 적이 없다
―냉면 파티를 지금도 하시지요?
“누님 생일인 양력4월 17일에 누님과
친했던 200분 정도
초대해서 냉면을 대접해요.”
―레시피는 예전과 같나요?
“메밀에 녹말을 넣는데, 절묘한 배합이 중요해요.
동치밋국에 면이 전부예요. 모윤숙 선생이 우리 집
냉면을 보고 ‘나체(裸體)냉면이구먼’ 하시더라고요.”
―역대 가장 많이 드신 손님은?
“여덟 사리를 드신 국회의원 김의준씨.”
―결혼을 안 하셨다고 사랑까지 안 한 건 아니시죠?
“한 번도 사랑하지 않고 살아본 적은 없어요.
여성을 떠나본 적도 없어요.
이렇게 사는 사람은 늘 동경 속에 살잖아요.
동경도 있고, 젊었을 때는
뭔가 많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렇지만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노력으로 살았어요.
‘남들이 만들어 놓은 것에 훼방을
놓는 일은 안 한다’는.
그런데 일흔이 넘으니 문제가 되지 않아.
공자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칠십이 되니 하고 싶은대로 해도
법도를 어기지 않았다).’
형이상학적인 면에서 사랑은 언제나
있을 수 있는 거예요.
예전에 사랑하던 사람들도 많이 가고.
이들이 내 가슴 속에 살아 있는 거지.”
―자녀가 없으신데...
“죽음에 대한 준비가 돼 있어요.
시체는 세브란스병원에 기증하기로 서약했어요.
나는 고별 예배를 보고 장례식 하는 걸 용납 안 해요.
끝나면 그냥 가는 거예요.
재산은 아직 분명히 얘기할 수
없지만 두 학교(연세대, 이화여대) 중
한 곳에 기증할 건데,
아마 연세대에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지요.
그 대학에 신세를 많이 졌으니까.”
◇큰 민족이 되려면 용서를
―연세대 학생회장을 하시면서 좌익과 싸움도 하셨지요?
“좌익이 늘 스트라이크를 일으켰어요.
‘등록금이 비싸다,
뭐가 틀렸다’ 하면서. (좌익과 싸우는 쪽에선)
고대엔 이철승이 힘깨나 썼고,
연대엔 박갑득이 있었고.
박갑득은 싸움을 아주 잘 했어요. 부하도 많았고.
박갑득은 북에서 부모님이 당한 일이 있어서 좌익을
절대 용서 못했지요.”
김동길 박사는 최근 문제가 된 다큐멘터리
‘백년전쟁’ 이야기를 꺼냈다.
“(백년전쟁을 제작한) 민족문제연구소니
하는 친구들은
도대체 민족에 대한 애정이 없어요.
물론 지독하게 (친일)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얼마나 힘들면 그랬겠어요.
매일신문 평양지국장 하던 이가 있어요.
조만식 선생에게
학도병 권고 글을 받아내라는 지시를 받았대요.
그 어른한테 어떻게 그런 걸 써달라고 얘기했겠어요.
난감하니까, 어쩔 수 없으니까 자기가 써서
조만식 선생 이름으로 신문에 냈어요.
선생을 아는 사람들은 아니라는 걸 알아요.
그 지국장, 해방되고 자살했어요.
얼마나 불쌍해요. 민족을 그런 각도에서 봐야죠.
큰 민족이 되려면 용서를 해야지요.”
―서로 용서해야겠지요.
“백년전쟁을 만든 기금이 인혁당 사건 피해자에게
나왔다잖아요. 그들이 받은 보상금으로.
원한이 사무쳐 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걸 풀어줘야지요.
박 대통령이 대화합을 주장하는데요.
그러려면 ‘사실 그런 일이 있었다, 6·25 때
당신 조상이 당한 일을 잊지 않는다, 가슴 아프다.’
이러면서 끝내야지요. 마음이 없으면요,
보상금을 암만 줘도 소용 없어요.”
―세월이 지나도 응어리가 남아있다는 것이지요?
“(6·25 때) 이 근처 무허가 집에 살던
화가가 있었어요.
이북에서 온 사람들인데, 미처 피란을 못 갔어요.
살기 위해서, 밥 먹기 위해서 인민군을 도왔다고 해요.
그럼 돌아온 사람들이 ‘우리끼리 피란 가서 미안하다’
하고 껴안아 줘야지. 부역을 했다고 쏴죽였어요.
할 수 없이 그렇게 한 건데.
대통령이 ‘서울 포기 안 하니까 안심하고 계십시오’
해놓고. 그걸 믿고 피란 못 갔다가 고생했으면
돌아와 ‘미안하다’고 해야지.
그걸 부역자라고...민족이 이래선 안 되지요.
링컨이 왜 위대해요.
남부 반란 때문에 지독히 고생하고도
‘악의를 품지 말고,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라고 말했잖아요. 이게 뭔가 있는 문명 아닌가요.”
―박정희 대통령을 인정하시지요?
“(유신 때) 많이 당했어요.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이 뭡니까.
쿠데타가 지금 일어나면 또 반대해야지요.
하지만 우리를 감옥에 넣었다고 해도,
조국의 경제를 이만큼 만든 것은 인정해야지요.”
―스승이신 함석헌 선생이 살아계셨어도
인정하셨을까요?
“모르지요. 하지만 그런 큰 인물의
가슴 속엔 용서가 있어요.
작은 마음을 가진 분이 아닙니다.
누굴 미워하거나 원수를 갚아야 한다거나,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