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풀을 베다 가끔 손가락을 베곤 했다.
그래도 풀 베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 ‘네가 굶어도 소를 굶겨서는 안 된다’는 아버지의 지엄한 명령 때문이었다. 한번은 누나와 함께 냇가에서 풀을 베다 또 일을 저질렀다.
오른손으로 왼손 검지 손가락을 감쌌지만 뚝뚝 피가 떨어졌다. 깜짝 놀란 누나가 냇가에서 하얀 뼈를 주워 돌에 갈아 가루를 뿌려 주었다.
보통 쑥을 찧어 상처에 동여매는데 이날은 달랐다. 놀랍게 흐르던 피가 멈추기 시작했다.
하얀 뼈의 주인공을 살아 있는 채로 본 것은 십여 년이 흐른 뒤였다.
‘자산어보’에 ‘오적어’(烏賊魚), 갑오징어)의 뼈는 ‘상처를 아물게 하는 효능이 있다’라고 기록했다.
지구상에 오징어는 460여 종에 이른다. 우리바다에 서식하는 오징어는 80여 종 중에서 식탁에 자주 오르는 것은 살오징어, 화살오징어, 참오징어 등이 있다.
살오징어는 동해에서 나는 일반 오징어를, 화살오징어는 동해와 제주에서 잡히는 한치를, 참오징어는 서해에서 잡히는 갑오징어를 말한다. ‘참’은 참돔, 참숭어, 참꼬막, 참굴, 참바지락 등 생선 중에서 으뜸에 붙이는 명예로운 접미사다. 갑오징어의 ‘갑’은 몸통에 들어 있는 뼈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원추형 몸에 세모꼴 지느러미와 열 개의 다리를 가졌다.
다리 중 긴 두 개이 다리는 짝짓기와 먹이활동에 사용한다. 발에는 두 줄로 흡반이 있고
위험할 때 적을 혼란에 빠뜨리고 도망가기 위해 항문으로 내뿜는 먹물주머니를 가지고 있다.
* 왜 오징어라 했을까
동의보감, 물명고, 전어지, 규합총서, 물보 등 문헌에는 오중어, 오즉(烏鰂), 남어(纜魚), 묵어(墨魚), 흑어(黑魚)라 했다. 물론 이것이 모두 갑오징어를 칭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많이 언급되는 오적어의 유래는 ‘자산어보’에 소개되어 있다. 그 책에 이청은 ‘남월지’를 인용해 ‘오적어는 까마귀를 즐겨 먹는다. 항상 스스로 물 위에 떠 있다가 날아가던 까마귀가 이를 보고 죽은 줄 알고 쪼려 할 때 발로 휘감아 물속으로 끌어들인 다음에 잡아먹는다. 그래서 오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오적은 까마귀를 해치는 도적이라는 뜻이다’고 했다. 갑오징어 모양을 두고서도 ‘진나라 왕이 동쪽으로 행차할 때 산대(算帒, 벼루를 넣는 주머니)를 바다에 버렸는데, 그것이 변하여 오적어가 되었다’고 했다. ‘본초강목’에는 ‘즉(鰂)은 뱃속에 검은 묵이 있어 오즉(烏鰂)이라고 한 것이다’고 했고, ‘자산어보’는 ‘즉(鰂은 흑어(黑魚) 를 의미한다’고 했다. 이청은 단순하게 오적은 ‘먹을 품고 있기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다산시문집’ 제6권 송파수작(松坡酬酢)에 ‘老約恐成題鰂誓(노약공성제즉서)’라는 싯구가 있다. ‘늙은이 언약은 오적묵의 서약이 될까 걱정이요’라고 풀이한다. 이 오적묵(烏賊墨)이란 오징어 뱃속에 든 먹통을 이른다. ‘옛날 중국 강동사람들은 먹물 대신 이것으로 계약서를 작성해주고 다른 사람과 재물을 거래했다. 그리고 해가 지나면 이 먹물이 바래서 없어지고 빈 종이만 남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여기서 나온 말이 오적어묵계(烏賊魚墨契)다. 근거를 없애 사람을 속이는 행위를 말한다. 탐관오리들이 장부를 오징어 먹물로 쓰고 재산을 빼 돌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자산어보’에 소개된 오징어 먹물 이야기이다.
오적어 먹물을 가져다가 글씨를 쓰면 색이 지극히 번들번들해서 윤기가 난다. 다만 오래 지나면 글씨가 떨어져 흔적이 없어진다. 그러나 종이를 바닷물에 적시면 먹 흔적이 다시 나타난다
* 오적어의 뼈는 조선시대 구급약이었다
갑오징어는 먹을거리보다는 약재로 이용한 기록이 더 많다. 이때 사용한 부위가 뼈 부분이다. 갑오징어라는 명칭의 갑도 뼈에서 비롯되었다. 갑오징어뼈를 해표초(海螵蛸)라 하고. 다른 이름으로 오즉골(烏鯽骨), 오적어골(烏賊魚骨), 묵어개(墨魚蓋)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다양한 의약서에 기록된 갑오징어의 효능을 아래와 같다. 동의보감에는 거한습(祛寒濕), 제산(制酸), 지혈(止血), 염창(斂瘡), 선통혈맥(宣通血脈), 살소충(殺小蟲), 익정(益精), 영인유자(令人有子), 통경락(通經絡) 등의 효능이 소개되었다. ‘산림경제’ 제4권 치약(治藥)편에도 오적어골(烏賊魚骨)은 해표초(海螵蛸)라고 했는데, ‘동해와 서해에서 산다. 무시(無時)로 잡는다. 오징어는 뼈가 하나뿐인데 두께가 3~4푼이며 작은 배 같고 가볍다. 부인의 누혈(漏血)에 주치약이다’이라 했다. 갑오징어뼈는 뼈가 아니라 단단한 고체구조물이다. 내부는 미세한 틈이 가득하다. 이를 이용해 뜨고 가라앉는 부력을 조절하고 수압을 견디는 것이다. 보통 뼈는 물에 삶아 껍질을 벗겨 갈아서 물에 넣어 잡물을 제거한 후 사용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이미 언급했듯이 손가락에 상처를 입으면 갑오징어 뼈를 갈아서 뿌리곤 했다. ‘자산어보’에는 ‘해표초는 곧잘 상처를 아물게 하면서 새살을 만들어내는 데 효과가 있다. 뼈는 또한 말이나 당나귀 등의 등창을 고치는데, 이 뼈 가루가 아니면 치료하지 못한다’고 했다. 연산군 때 만들어진 ‘구급이해방’(救急易解方에는 ‘부스럼을 아물게 하는데 갑오징어 뼈를 다른 약재와 함께 곱게 가루를 내어 환부에 뿌리면 주효하다’고 했다. ‘동의보감’에는 부인이 ‘하혈, 혈붕(血崩, 월경기간이 아닌 때 많은 양의 피가 나오는 것), 충심통(蟲心痛, 기생충 등 장위에 있는 벌레가 요동하면서 발생하는 통증과 구토)에 좋다’고 한다. 또 ‘본초강목’에는 ‘오래 복용하면 남자의 정을 더해줘서 자식을 낳게 한다’고 했다. 그리고 ‘식료본초’는 ‘해표초는 소아와 어른의 설사에 사용한다’고도 했다. 이런 의학서를 근거로 조선시 대에 갑오징어 뼈를 민간은 물론 국가에서 치료제로 사용하였다. ‘향약제생집성방’에 소개된 당나라 의학서 ‘천금방(千金方)’에 눈병의 하나인 ‘예막’에 ’오적골을 곱게 갈아서 꿀과 섞어 점안한다‘고 했다. 지금도 해표초는 한약재로 유통판매되고 있다.
멸치 낭장망 조업, 낭장망에 갑오징어가 많이 들어온다 |
* 오월은 갑오징어 계절이다
갑오징어는 멸치와 새우를 좋아한다. 서남해에서 갑오징어가 많이 잡히는 이유다. 이 해역에서는 낭장망을 이용해 멸치를 잡고, 안강망으로 새우를 잡는다. 특히 여수 중앙시장, 진도 서망항, 목포항, 홍원항, 대천항 등이 좋은 갑오징어를 구할 수 있는 항구들이다. 여수와 진도는 낭장망으로 멸치를 많이 잡는 곳이며, 목포와 충청도 항구들은 안강망 어업을 많이 한다.
갑오징어는 4월과 5월이 제철이다. 이 철에 서해에서 많이 잡히며, 남해에서 난다. 동해의 오징어와 달리 가장자리에 짧은 지느러미가 있고, 몸에 단단한 뼈를 품고 있다. 작은 물고기나 새우 등을 좋아한다. 남해에서 멸치 낭장망이나, 서해의 새우를 잡는 안강망 그물에 잘 걸리는 이유다. 갑오징어는 조선시대에 봄철 왕실에 진상한 품목의 하나였다. ‘연려실기술’의 ‘별집’ 제 1권의 ‘사전전고’에는 천신품목으로 4월에는 죽순과 준치와 함께 오적어가 기록되어 있다. 이 외에도 ‘종묘의궤’나 ‘진연의궤’에도 4월에 오적어를 천신한다고 했다. 또 ‘각사등록’의 ‘호남계록편’에는 고종조에 전라도에서 봉진하는 지난 7월령 약재 진상으로 ‘오적어골 8냥’을 보낸다고 했다.
‘문종실록’에 명나라 사신에게 태평관에서 음식을 대접받으면서 오적어 간을 요청하기도 했다. 성종실록에는 봉진을 할 때 경상도나 전라도 관찰사에게 명해 오적어가 제주도에서 나는 것보다 작은데 백성들에게 큰 것을 잡도록 피혜를 주지말고 생산하는 형편에 맞게 봉진하라고 하기도 했다. 명종실록에도 나주에서 진상할 오적어를 사기 위해 제주도로 가려는 과정에서 배를 징발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관리의 남형(濫刑)이 기록 되어 있다.
승정원일기 인조8년 경우(1630) 3월 20일에는 진풍정(進豊呈, 궁중 잔치로 가장 규모가 크고 의식이 장중함, 이외에 진작, 진찬, 진연 등이 있음) 때 쓸 오징어가 4월에 천신하는 물고기인데 절기가 아니라 다른 물고기로 대신해 봉해를 올려으면 한다는 계를 올리기도 했다.
* 갑오징어 물회에 도전하다
여름에 날로 먹을 수 있는 생선은 선어로 먹을 수 있는 것도 민어나 병어 정도다. 회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마음을 달래 주는 여름 생선으로는 갑오징어를 넘어설 것이 없다. 손질을 해 한 마리씩 냉동실에 보관해 둘 수 있다. 먹고 싶을 때 미리 꺼내 해동한 후, 무침, 전골 등 어떤 요리로 변신이 가능하다. 햇볕에 말려 보관해 구워 먹거나 조림으로 요리를 해도 좋다. 제철에 갑오징어를 많이 구입하는 이유다.
수산물은 단백질 구성이 많지만 갑오징어는 무려 70%에 이른다. 그리고 지방은 5%에 불과하다. 그래서 노화방지와 피부탄력에 좋다. 또 육류와 달리 혈관 벽에 쌓인 콜레스테롤을 간으로 운반해 동맥경화를 예방하는 고밀도 콜레스테롤이 많다. 그 결과 혈관질환을 예방하며 피로회복에 좋다. 무엇보다 몸짱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즐겨 먹는 닭가슴살보다 칼로리가 낮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조리가 단순하다는 점이다. 몸통의 가장자리에 있는 껍질을 손으로 잡고 칼끝으로 살을 붙들며 당기면 쉽게 벗겨진다. 물기를 제거하고 얇게 저며 썰어 회로, 삶아서 채소를 더해 무침으로, 구워서 맥주 안주로 쉽게 만들 수 있다. 날씨가 더워지면 시원한 갑오징어 물회를 추천한다.
글쓴이 김준
광주전남연구원 책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