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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한국소설 7월호)
소서노의 최후 (3)
황 원 갑
대방의 옛 땅은 이 글의 독자인 너희가 살고 있는 시대에는 중국 오랑캐 땅인 황하 남쪽 산동반도 지방이다. 너희도 요즘 들어서 이른바 ‘백제의 대륙경영설’이란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랬다. 나와 비류 ․ 온조 세 모자가 세운 나라는 아리수(압록강) 하류에서 배를 타고 발해를 건너간 중국 산동반도였고, 따라서 미추홀도 그 지역에 있었으며, 하남위례성도 오늘의 서울 한강 남쪽이 아니라 중국 황하 남쪽의 옛 대방 땅이었다. 이 지명들을 나중에 우리가 황해를 건너 한반도로 건너오면서 같이 가지고 왔던 것이다.
어쨌든, 우리가 수백 명의 망명 집단을 이끌고 고구려를 떠나 온갖 고초를 겪으며 13개월 동안이나 신천지를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정착한 곳은 대방의 옛 땅이었다. 재물을 풀어 주변의 소규모 부족민 수천 명을 끌어들이고 집을 짓고 목책을 세우는 등 어느 정도 도읍의 기틀을 갖추자 나 소서노는 맏아들 비류를 세워 임금으로 삼고 나라 이름을 십제라고 선포했다. 내 자랑스러운 아들 비류왕은 우리의 뿌리가 부여에서 나왔으며, 십제가 부여를 이었으므로 왕성을 해모수의 해씨도 아니고, 고추모의 고씨도 아닌 부여씨(夫餘氏)라고 창씨했다.
뒷날 <주서> 백제 조에도 ‘왕성은 부여씨인데, 임금을‘어라하(於羅瑕)’라고 부르며 백성들은 ‘건길지(鞬吉支)’라고 부르는데, 중국말로 왕이란 뜻이다. 부인은 ‘어륙(於陸)’이라고 부르며, 중국말로 왕비라는 뜻이다’라고 썼다.
우리가 주변 말갈족(靺鞨族)의 핍박에 견디지 못하고 황해를 건너 국호를 백제로 바꾸고 근거지로 삼은 곳은 그 옛날 조선의 준왕(準王)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바다로 도망쳐 남쪽으로 내려가서 세운 마한(馬韓) 땅이었다. 마한 왕에게 재물을 바치고 땅을 얻어 변방의 소국을 자처하고 지내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북쪽의 낙랑(樂浪)과 동쪽의 예(穢) 등 주변의 강적들이 신생 약소국 십제를 얕잡아보고 걸핏하면 쳐들어와 노략질을 하는 바람에 견딜 수가 없었다. 당시 우리 백제의 군사력이라고 해봐야 기껏 1천 명 안팎이었으니, 하루가 멀다 하고 강적들이 쳐들어와 재물을 약탈하고 집을 불사르고 사람들을 마구 잡아가니 어찌 견딜 수 있었겠는가.
나는 비류왕과 온조, 그리고 오간 ․ 마려 ․ 을음 ․ 해루 등 열 명의 대신과 의논 끝에 보다 안전한 남쪽으로 도읍을 옮기기로 작정했다. 그리하여 우리 백제는 건국하자마자 다시 남부여대(男負女戴)하여 배를 타고 연안을 따라 황해를 남하하기 시작했다.
나의 맏이 비류왕과 막내 온조 형제의 틈이 벌어진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 이유는 나 소서노가 형 비류에게 자신의 여생의 여력을 몽땅 쏟아 새 나라를 세우는데 온갖 힘을 기울이는 것을 본 온조가 시기를 하고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다.
또한 나라를 세우고도 10년이 가깝도록 정착을 못한 채 강적만 만나면 허겁지겁 보따리를 꾸려 남쪽으로 남쪽으로 도망만 치는 이 어미와, 비류의 소극적이며 온건한 정책에 보다 젊고 혈기 넘치는 온조가 소장 강경파의 우두머리가 되어 반기를 들고 나섰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가 대방의 옛 땅을 떠나 바다를 남하하여 배를 댄 곳은 미추홀이었다. 미추홀이 그 동안 정설처럼 굳어져왔던 지금의 인천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천은 조수간만의 차가 너무 커서 2천 년 전에는 수십 명씩 태운 비교적 큰 배들이 쉽사리 접안하지 못했다. 따라서 도읍지로서 적합한 위치도 아니었다. 너희가 <삼국사기>를 보면 ‘미추홀이 지금(고려시대) 인주(仁州)요, 위례성은 어딘지 모르겠다’고 한 반면, <삼국유사>에서는 ‘위례성은 지금의 직산’이라고 명시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미추홀은 직산과 가장 가까운 안성천 하류 지금의 충남 아산시 인주면 밀두리 지역이다.
미추홀에 상륙해 일단 근거를 마련한 나 소서노는 두 아들과 신하들을 보내 새로운 도읍지를 찾아보라고 했다. 비류왕은 온조와 신하들을 데리고 안성천을 따라 거슬러 오르다가 상류의 위례산에 올라 사방을 살펴보았다. 위례산은 지금 충남 천안시 입장면에 있다.
그때 나는 나이든 중신들과 미추홀에 남아 있었고, 비교적 젊은 신하들이 비류왕 형제를 수행했는데 나중에 비류의 말을 들으니 젊은 신하들이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모아 비류왕에게 이렇게 아뢰었다더구나.
“대왕폐하. 살펴보건대 이 하남의 땅이 북쪽으로는 큰물을 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뫼들에 의지했고, 남쪽으로는 기름진 들판이 펼쳐졌으며, 서쪽은 바다가 막고 있으니, 이는 하늘이 내린 다시 구하기 어려운 요지인 듯하옵니다. 원컨대 여기에 도읍을 정하심이 마땅한 줄 아룁니다!”
그러니까 이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추홀은 지금의 인천이 아니고, 위례산도 오늘의 서울 북한산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누가 북한산에 올라 ‘북쪽으로 큰물을 두르고 남쪽으로는 기름진 들판이 펼쳐졌다’고 망녕된 허튼소리를 할 수 있단 말이냐. 비류왕이 한참을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처음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운 뒤 오늘까지 십 년 동안이나 강적의 핍박을 받은 것은 바다에서 먼 내륙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었소. 그래서 숱한 싸움을 치르며 여기까지 쫓겨 내려온 게 아니오? 이제 우리는 무모한 싸움을 피하고 백성들이 편히 살게 하면서 힘을 길러야 할 것이오! 따라서 이제는 바닷가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오. 바닷가에 자리 잡으면 세 가지 이로운 점이 있소. 첫째, 바다에서는 고기를 잡고 뭍에 올라와선 농사를 지어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이요. 둘째, 바다를 끼고 있으면 군사의 이동이 쉬워 해외로 뻗어나가기 쉽다는 점이요. 우리는 반드시 저 대륙의 옛 땅을 되찾아야만 하오! 셋째, 또다시 감당하기 힘든 강적의 공격을 받으면 재빨리 배를 타고 바다로 피하기 쉽다는 점이요…”
그때였다. 온조가 눈을 부라리며 이렇게 고함쳤다.
“말도 안 돼! 임금이란 사람이 도망칠 생각부터 하다니! 짐승도 힘이 없으면 다른 짐승에게 잡아먹히고, 사람도 힘이 약하면 더 강한 자에게 굴복하고, 나라도 힘이 없으면 다른 나라에게 먹히는 법이오! 자꾸만 싸워서 백전연마의 강병을 길러야만 살아남는 법이오! 험한 산에 의지해 성책을 두르고, 들판에는 백성들이 살게 하여 적이 오면 싸워 물리치면 될 게 아니오? 형님은 어찌 지친 백성들을 이끌고 또다시 도망칠 궁리부터 먼저 한단 말이오?”
두 형제는 대판 싸우고 위례산에서 내려왔다. 신하들이 입을 다물고 그 뒤를 따랐는데 대부분 온조와 같은 생각을 지닌 소장 강경파였으므로 비류왕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그런 까닭에 싸움은 미추홀로 돌아온 다음에도 재개되었다.
나 소서노는 비록 아직까지 예전의 패기를 잃지 않은 일세의 여걸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60고개에 올라 선 노파였다. 나는 이번에도 맏이 비류의 편을 들었다. 마침내 나와 비류왕을 중심으로 한 온건 노장파와 온조를 축으로 삼은 강경 소장파의 틈은 점점 벌어져갔다. 그리하여 태어난 지 10년밖에 안 된 나라, 그나마 작고 힘 약한 백제는 결국 두 쪽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온조가 자신의 추종세력을 이끌고 내륙 위례산으로 들어가 버렸던 것이다.
나는 바닷가 미추홀과 내륙의 위례성을 오가며 꾸짖고 타이르고 눈물로 설득해보았지만 이미 틈새가 벌어질 대로 벌어진 양 진영은 어느 쪽도 고집을 꺾기는커녕 나중에는 타협조차 하려고 들지 않았다. 추종하는 무리를 이끌고 위례성에 분립해 스스로 임금을 자처한 온조는 다시는 나와 형의 밑으로 돌아가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다.
그리하여 나는 최후의 비장한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작은아들 온조를 강제로 끌고서라도 미추홀로 데려와 두 형제를 화해시켜야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싸울아비들을 이끌고 위례성으로 쳐들어갈까. 하지만 정면대결을 벌인다면 쌍방의 희생자만 늘어날 것이고, 또한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렇다면 기습을 하는 수밖에 없겠구나! 야음을 틈타 소리 없이 재빨리 침입하여 온조를 감싸고도는 강경파 가운데 심복 몇 놈만 죽여 없앤다면 나머지는 모두 항복을 하고 온조도 어쩔 수 없이 따라오리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몇 차례 왕래하며 위례성 안팎의 지형은 눈에 익혀두었으니 내 몸소 역전의 장수들을 뽑아서 이끌고 가리라.
<삼국사기>에서 가리킨 비극의 해 온조왕 13년(서기 6년)이란 실은 비류왕의 재위 연대인 동시에 온조가 분립한 첫해를 가리킨다. 뒷날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도 <조선상고사>에서 ‘온조왕 13년은 곧 소서노 여왕의 치세 마지막 해요, 그 이듬해가 온조왕의 원년’이라고 주장하지 않더냐.
그렇게 나 백제의 국모 소서노가 비극적 최후를 맞은 이후, 며칠 동안 불안한 긴장감 속에서 양측은 대치를 계속했다. 하지만 무슨 까닭인지 미추홀의 비류왕은 위례성의 온조를 공격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나의 시신을 찾으러 사람을 보내지도 않았다. 아마도 골육상쟁으로 어미까지 희생당했는데 형제간에 더는 무모한 살육전으로 피를 흘릴 수는 없었다는 뜻이었을까.
온조도 굳이 반격하려 하지 않았다. 온조는 나의 시신을 성 밑에 가매장한 뒤 자신의 신민들에게 이 사건에 관해 엄한 함구령을 내렸다. 그리고 3개월 뒤인 그해 5월에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 동쪽에는 사나운 예족이 있고 북쪽에는 낙랑과 말갈이 있어 자주 침범하므로 하루도 편한 날이 없소. 더군다나 요즘에는 요상한 일이 자꾸 일어나고 국모까지 돌아가시니 형세 자못 불안하여 장차 도읍을 옮기고자 하오. 내가 전에 보아두었던 아리수(한수 : 한강) 이남은 땅이 기름지니 그리로 옮겨 길이 태평을 도모함이 마땅하리라.”
그리하여 7월에 한산(남한산) 밑에 성책을 세우고 사람들을 이주시킨 뒤, 9월에는 성곽을 쌓기 시작하여 이듬해 정월에 정식으로 천도를 단행했다. 그러니까 직산 위례성에서 하남 위례성, 곧 한성으로 천도하는데 거의 1년이 걸린 셈이었다.
온조가 위례성을 북쪽 한수 이남으로 옮겨갈 때 미추홀의 비류는 다시 배를 타고 남하하여 곰나루(熊津:공주)의 마한을 공략하여 근거지로 삼았다. 이러한 비류와 온조의 분립 사실은 400년 뒤인 근초고대왕(近肖古大王) 30년에 박사 고흥(高興)이 최초의 백제사인 <고기(古記)>를 편찬할 때에 양 백제사를 뒤섞어놓는 바람에 오늘날과 같은 혼란이 빚어진 것이다.
그래서 있지도 낳았던 ‘하북 위례성’이 느닷없이 나오는가 하면, 온조가 충남 직산(하남 위례성)에서 ‘북쪽의 강적 말갈’의 침범으로 하루도 편한 날이 없어 보다 더 북쪽의 하남인 한성(서울)으로 천도했다는 앞뒤가 안 맞는 주장도 나온 것이다.
어쨌거나 모두가 나의 후손인 그대들은 백제의 국모요 고대의 둘도 없는 여걸이었던 나 소서노를 잊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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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원갑 : 1945년 강원도 평창 출생, 1966년 서라벌예대 문창과 졸업,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당선, 1983년 신동아복간기념 논픽션 당선, 한국일보 기자, 서울경제신문 문화부장, 장편역사소설 <연수영> <불패>, 중편소설집 <비인간시대>, 역사교양서 <인물로 읽는 한국풍류사> <고승과 명찰> <한국사 제왕열전> <한국사 여걸열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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