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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눈물을 본 사람들의 반응
240721낮 (요11:1-16, 32-44)
<1)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3)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4)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5)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7)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8)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11)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12)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13)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14)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15)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16)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32)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아멘
오늘 본문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앞두고 예수님의 부활을 예고하실 뿐 아니라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심으로써 예수님은 산자와 죽은 자의 하나님이요, 모든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분명히 밝혀 주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가정은 예루살렘에서 오리 쯤 떨어진 베다니에 사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와 오라비 나사로가 함께 사는 가정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 드린 여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들 삼남매를 특별히 사랑하셨음을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사로가 병으로 죽게 되었고, 예수님이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 무덤에 이미 갇혀있는 나사로를 살리시는 기적을 베푸신 내용입니다. 본문 말씀을 한절씩 보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인 교훈의 말씀을 우리 각자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으로 듣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나사로의 상태
1) 2절을 봅시다.
<2)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여기 병들었다는 <아스테네오/ασθενεω> 는 ‘그는 병들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나사로는 생명을 잃게 만드는 매우 위중한 병에 걸려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3절입니다.
<3)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늘 병들어 있었던 나사로가 병이 위중한 상태가 되어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나사로의 누이들이 죽어가는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내어 다급하게 소식을 전합니다.
지금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는 요단강 서편 예루살렘 쪽이고, 예수님이 계신 곳은 요단강 동편 베다니 쪽으로 하룻길쯤 됩니다.
우리도 마르다와 마리아처럼 다급한 문제가 있을 때나, 가정에 우환이 있을 때나, 병들었을 때에 예수님을 가장 먼저 찾는 믿음을 가져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이 상한 갈대와 같은 처지에 있는 나사로를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며 살려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바로 이런 심령을 가지고 찾아오는 자들입니다. 아무리 천하다 할지라도 주님은 그런 사람이 토로하는 심정을 귀찮아하시거나 외면하거나 꾸짖지 않으시고 도리어 풍성한 은혜로 채워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는 주님의 음성에 따라 그분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는 신앙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기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에서 사랑이라는 표현은 <필레이스/φιλειζ>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친구에 대한 사랑과 애정을 뜻할 때 쓰는 사랑표현입니다. 그러나 5절의 <5)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에서 사랑은 <아가파/‘αγαπα’>로 쓰였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인데, 우리 인간이 받아들이는 사랑은 피로세로 받아들입니다. 사랑도 자기의 수준에서 밖에 수용을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최고의 사랑은 존경하고 아끼는 정도의 애정이지만,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은 자신의 목숨을 대속 제물로 내어드리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은 언제나 아가페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3) 4절입니다.
<4)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나사로의 병과 죽음은 그냥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병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들도 병을 통하여서도 심지어 죽음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질병,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죽음이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 잘 믿다가 질병이 걸리고, 어려운 환경이 되면 믿음 팔아먹고 하나님 원망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그 질병과 어려운 환경을 통해서도 내 믿음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믿음이 되고, 심지어는 그 질병으로 죽는다 해도 그 죽음의 과정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4) 6절입니다.
<6)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나사로가 있는 곳과 예수님이 계시던 곳이 거리가 요단을 건너야 되는 하룻길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소식을 급하게 전하러 왔는데...적어도 벌써 하루가 지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바로 출발해도 하루가 더 걸려야 나사로가 있는 곳까지 가야되는 다급한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틀을 그곳에 더 유하시며 사역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죽어간다는 것보다 다급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의 생각으로는 예수님이 그렇게 사랑하시는 사람이 죽게 되었는데 바로 달려가지 않으시고...이틀을 더 유하셨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죠.... 예수님이 고의적으로 그러셨을까요? 아니겠죠?... 그러면 예수님이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님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님이 영광 받으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계시다고 멀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 생각은 너희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에 철저하게 순종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길을 따르는 성도들 역시 예수님처럼, 사람들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한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도바울처럼 사나죽으나 주의 소유된 백성으로(롬14:8) 모든 일에 먼저 하나님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2. 제자들의 반응
1) 7-8절을 보겠습니다.
<7)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하시니 8)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예수님께서 베다니로 가자고 말씀하시지 않고 유대로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마음속에 계속해서 유대에서 성취해야할 일, 즉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늘 염두 해 두고 계심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8절에서 말합니다.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여기서 시제는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하는 행위를 나타냅니다. 유대인들이 지난번 (11-12월 수전절)때 예수님을 향하여 돌을 던지려했을 때(요10:31-33)를 말하고 있지만, 방금도 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은 그 한번으로 끝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해서 예수님이 눈에 보이면 돌로 쳐 죽이려고 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예수님이 ‘유대로 다시 가자’(7절)고 말씀했으니 제자들이 기겁하는 것이 당연한 반응일 것입니다. 제자들은 물론 예수님도 유대로 가는 것이 얼마나 위헌한 일인지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베다니로 가셔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표적을 행하셔서 부활에 대한 소망을 불어넣어 주셔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예수께 받은 사명 즉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는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예루살렘이나 로마를 향하여 서슴지 않고 달려갔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역시 환란과 두려움이 닥치더라도 그것을 떨쳐버리며 생명을 걸고 복음을 증거 할 뿐 아니라 주님께 죽도록 충성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계2:1)
2) 9-10절입니다.
<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낮이 12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실족치 않고 밤에 다니면 실족한다고 했습니다(10절) 12시는 정오가 아니라 낮 시간 전체를 뜻하는 것입니다. 실족한다는 뜻은 걸려 넘어진다, 부딪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계시면 항상 낮 인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요8:12, 9:5) 빛이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늘 낮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낮에 거하는 사람은 무슨 일에든지 실족하지 않습니다. 걸려 넘어지지 않습니다. 부디 끼지 않습니다.
뭔가에 자꾸 부디 끼고, 걸려 넘어져 실족한다면 주님과 함께 있지 않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내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셔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낮에 다니는 사람입니다. 자꾸 누군가와 부디 끼고, 걸려 넘어져 실족한다면 내 안에 주님이 계신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없으면 밤인 인생인 것입니다.
예)니고데모와 가룟유다
성도들은 어두움에 속하지 않은 빛의 아들들입니다.(살전5:5) 예전에는 성도들도 어둠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어두움에 눈이 멀어서 방탕과 술 취함과 음란과 호색과 쟁투와 시기와 우상숭배와 당 짓는 것과 같은 육신의 일들을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이제 주안에서 빛으로서 빛의 자녀답게 행해야 하며 빛의 열매 즉,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뒤따르는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3) 16절입니다.
<16)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도마와 제자들은 유대로 올라가자는 제안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예수님이 유대로 올라갔을 때, 당할 위험을 예상하고 예수님과 함께 죽기를 각오하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도마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기를 원했던 것처럼, 성도들은 부활의 기쁨과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이 선행되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삶,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자기 자신이 죽는 삶입니다. 바울도 내가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주와 함께 죽지 않으면 주와 함께 살지 못합니다. 날마다 자신을 주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는 도마와 제자들의 결단이 저와 여러분의 결단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3. 예수님이 흘리시는 눈물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서야 예수님이 베다니에 오셨습니다. 마르다나 마리아 모두 ‘예수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말하며 아쉬움을 토로합니다.
1) 32-33절입니다.
<32)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예수님이 오시자 마리아는 예수님을 맞으러 나가서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통곡합니다. 여기서 울었다는 표현은 소리 내어 방성대곡하고 울었다는 표현입니다. 마리아와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신 것은 그렇게 죽음 앞에서 방성대곡하며 울 수밖에 없도록 만든 사망권세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앞에서도 여전히 사탄의 지배를 당하여 통곡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망권세 잡은 사탄의 세력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이시오, 생명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그분을 따르는 우리 또한 사탄과 죽음의 권세를 이긴 존재들입니다.(계17:14) 그러므로 성도들은 사단의 역사에 대해 슬퍼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맞서 싸워 이겨야 합니다.
2) 35절입니다.
<35)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마리아나 유대인들 조문객들이 우는 것은 클라이오(κλαιω)로 방성대곡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고,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실 때 쓴 단어는 다크뤼오(δακρυω)로 조용히 눈물을 쏟으시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나 유대인들처럼 사탄의 세력하에 있지 않으시기에 사랑하는 형제 나사로가 죽고, 그 무덤을 바라본다 할지라도 통곡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을 보고 눈물을 흘리신 것은 여전히 사망권세가 지배하며 그 권세로 인해 신음하고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와 유대인들을 바라보면서 깊은 연민과 긍휼하심을 느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4. 예수님의 눈물을 본 사람들의 반응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1) 36절입니다.
<36)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예수님의 눈물을 보며 한편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나사로를 얼마나 사랑하였는가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눈물을 보고 예수님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이 그동안 얼마나 많이 나사로를 사랑했는가를 더욱 깨닫게 되었습니다.
2) 37절입니다.
<37)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예수님의 눈물을 보고 예수님의 사랑을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맹인의 눈을 뜨게 했던 사람이 나사로는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느냐고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예수님의 눈물을 보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무능함, 예수님의 부족함, 예수님의 위선을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 사람입니까? 어떤 삶의 캐릭터를 가지고 살아갑니까?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을 봅니까? 비난거리를 찾고, 흠이 보이고 판단하고 헐뜯는 캐릭터입니까?
아니면 양면 가면을 쓴 사람처럼, 내 맘에 들면 긍정적인 면을 보고 내 맘에 안들면 부정적인 면을 보는 양면 가면을 쓴 캐릭터입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 신이신 예수님이 인간을 향하여 사랑과 긍휼의 눈물을 흘리는 그 아름다운 광경을 보면서도 비난을 퍼붓는 일부 유대인 어떤 사람들처럼, 그런 캐릭터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모습은 아닌지요? 여러분 모습은 아닌지요?
나를 향한 예수님의 눈물을 보면서도 예수님의 사랑을 못 느끼고, 예수님을 향하여 불평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모습의 캐릭터를 보고 예수님은 비통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38절)
3) 39절입니다.
<39)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님이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사로를 살리려면 무덤을 가로막는 돌을 치워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나려면 예수님의 말씀을 가로 막는 돌을 치워야 합니다. 생명의 주관자이신 예수님 앞에서 죽었으면 어떻습니까? 썩은 냄새가 나면 어떻습니까? 주님과 나를 가로 막는 돌을 치웁시다. 마음이 부패해서 썩은 내 나는 것을 가리려고 돌로 짓눌러 놓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는 교만의 돌, 하나님께 진실하게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환경의 돌... 말씀의 능력을 빼앗아 결실치 못하게 하는 염려의 돌... 이 순간도 양심을 짓눌러 회개하게 못하는 죄악의 돌들을 치워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그래야 영혼이 다시 소성하게 됩니다. 주님 앞에 무거운 돌을 다 내려놓읍시다.
죽은 지 나흘이 되었다는 것은 완전히 죽은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이나 랍비들은 사람이 죽은 후 사흘 동안은 사람의 몸에서 나온 영혼이 다시 몸으로 들어가려고 그 주변을 배회 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 되었다는 것은 그럴 가능성도 전혀 없이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돌을 치웠을 때, 주님께서 큰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43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44절)”
완전히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나사로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어설프게 죽으니 어설프게 삽니다. 나사로처럼 완벽하게 죽고 완전하게 다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