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16일 온고을교회 주일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주의 힘 》
시 21:1~13
〈 성경을 읽으며 〉
저의 성경 읽기는 좀 독특하고 민감한 면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나가는 중 읽고 있는 부분을 저의 현실에 비추어봅니다.
그러니, 욥기를 읽을 때는 오금이 저립니다.
행여 욥에게 일어난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 것은 아닌지’ 조마조마합니다.
창세기 22장을 읽는데 자녀에게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기면 결부시켜서 해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쏟아지는 대목에서는, 그것을 결부시키지 못합니다.
이것도 병이지요? 여러분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제가 지금 시편을 텍스트로 주일 설교를 해 나가는 중입니다.
지난 주(3/9)에는 시편 20장 설교를 했고, 오늘은 21장입니다.
20장을 설교하기 전 주간에 윤석열 대통령이 석방되었습니다.
저는 습관처럼 시편 20장의 내용을 결부시켜봤습니다. 20장은 전쟁 출정 시입니다.
전쟁에 나가는 왕은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고, 백성은 왕을 위해 중보기도를 합니다.
시 20:9 “여호와여 왕을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이 구절과 윤석열 대통령 석방과 전혀 관계가 없을까요?
저는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제가 설교하는 본문과 현실의 세상은 관계가 있습니다.
만일 제가 태극기 들고 나가는 목사였다면, 이 구절을 설교와 연관 지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윤석열 대통령을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합시다” 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주일은 당연히 시편 21장입니다. 21장은 ‘왕의 개선 시’입니다.
20장에서 왕은 군사를 이끌고 전쟁에 나갔습니다.
21장은 전쟁에서 이기고 개선하는 왕을 맞이하는 시입니다.
아마 이번 주간에 헌재가 탄핵에 대해 결정할 것입니다.
저의 설교 본문과 한국의 정치 현실이 묘하게 오버랩이 됩니다. 어떠세요?
그런데 다음주 설교할 시편 22편은 어떤 시입니까?
☞ 1절에서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가 나옵니다.
☞ 성경은 분명히 우리의 골수를 찔러쪼갭니다. 그러나 매우 신중히 적용해야 합니다.
〈 승전 기쁨의 뿌리 〉
시편 20장에서 전쟁에 나가는 왕이 등장합니다.
시편 21장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하는 왕이 나옵니다.
시편 22장은 첫 머리에서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로 시작합니다.
그러면 시편 23장은 어떨까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로 시작합니다.
20장에서 23장까지 네 개의 시편이 매우 드라마틱한 서사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전쟁에 나갑니다(20장), 승리하고 돌아옵니다(21장). 그런데 하나님의 버림을 받습니다(22장),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23장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합니다.
☞ 오늘 설교 본문은 21장입니다.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왕을 노래합니다.
20장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승전고를 울리는 개선장군이 된 왕을 바라보면 안 됩니다.
왕이 전쟁에서 이기도록 힘을 주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 주의 힘 》입니다.
사람들은 전쟁에서 승리하면 ‘영웅 만들기’에 주력합니다.
한국의 6.25전쟁은 ‘맥아더’라는 걸출한 영웅을 탄생시켰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은 윈스턴 처칠이라는 영웅을 탄생시켰습니다.
전쟁에서 승전을 이끈 지도자의 영웅 만들기는 세상의 역사가들의 몫입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고 고백하는 우리는 여기에 부화뇌동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일찌감치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선포합니다.(삼상 17:47)
전쟁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전쟁의 승패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전쟁하는 왕에게 힘을 주시는지, 시편 20장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시편 20장, 21장에 등장하는 전쟁을 이끄는 왕은 하나님의 힘으로 싸웁니다.
자기의 힘으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힘 주시는 분임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1절)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크게 즐거워하리이다”
〈 영웅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자 〉
1절에서 “주의 힘” “주의 구원” 같은 뜻입니다.
시에서는 이렇게 똑같은 말로 반복하지 않고 다르게 표현하는 기법이 있습니다.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왕이 주의 힘,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합니다.
내 힘으로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했다는, 왕의 믿음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감옥에 있는 동안 성경을 읽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를 옹호하는 기독교인들, 야단이 났습니다. “감옥에서 성경 읽었대!”
참 허탈합니다. 며칠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성경 읽은 것이 무에 그리 대수입니까?
성경책을 펼쳐 읽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연 말씀이 그의 골수를 찔러쪼갰느냐?
성경 말씀에 의해 그의 골수가 쪼개졌느냐?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제가 설교에서 좀처럼 현실 정치와 연결짓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은 심각한 중대기로에 섰습니다.
반만년 역사를 자랑하는 대한민국, 서기 2천년에 접어들면서 획기적으로 발전했습니다.
5천년 동안 한국은 세계의 변방국가였습니다. 그리고 매우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2002년 월드컵 4강에 오르고,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 되었습니다.
군사력도 세계에서 6위권을 다투고 있습니다.
K-팝을 필두로 하여 한류 문화가 세계를 정복하다시피 했습니다.
한반도, 매우 작은 영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구도 5천만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세계 모든 나라들이 주목하고 부러워하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한국이 국가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정점을 찍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더 높은 곳은 없습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을 ‘현금 지급기’라고 했습니다.
부자나라라고 입만 열면 말합니다. 미국이 부러워하는 나라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정상에 올랐습니다. 정상에 올랐으니 무엇을 해야합니까?
잘 관리해서 오래오래 선진국으로, 부자나라로 존속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나라가 둘로 쪼개졌습니다. 법치주의가 무너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 현대국가는 법으로 지탱하는 것이 근간입니다. 법치가 무너지면 곤두박질칩니다.
〈 법은 허물지 않아야 〉
그럴 듯 하게 잘 나가다가 지도자 잘못 만나 곤두박질 한 나라 많습니다.
필리핀이 그랬습니다. 에디오피아가 그렇고, 베네수엘라가 그렇습니다.
아르헨티나도 있습니다. 선진국 문턱까지 갔다가 주저앉았습니다.
원인은 다양합니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이 경제정책입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은 법치주의가 위태위태합니다.
법치주의가 무너지면 경제는 한 순간에 쓰러지고 맙니다.
국가와 사회, 질서를 유지 시키는 것이 법입니다.
법이 발달한 나라가 경제도 발전하고 법과 경제가 바로 서야 선진국입니다.
법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하나님도 이스라엘 민족에게 법을 주십니다. 율법입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보수 기독교 진영, 법을 아주 우습게 여깁니다.
법원에 난입하여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매우 심각합니다.
광장에서 목에 핏대를 올리는 사람들, 법원, 헌법재판소를 능멸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여당 국회의원들까지 가세하고 있습니다. 징조가 심상치 않습니다.
자칫 이 시국에 법치가 무너지면 끝장이 납니다.
서로 싸우더라도 법은 지켜야 합니다. 법은 최후의 보루입니다.
우리 국민이 둘로 쪼개져 싸울지언정, 법과 법의 정신은 지켜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들이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법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법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셔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극히 사랑하고 자랑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도 법을 기초로 하여 이루어지고, 법으로 질서와 공동체가 지탱합니다.
우리에게 법의 소중함을 다시 일깨워주시어서 법을 어기지 않도록 도와주옵소서!
다투고 싸우더라도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도록 도와주옵소서!
비 온 뒤에 땅이 굳는 것처럼, 이 혼란한 계엄의 소용돌이가 멈추고 나면,
이 땅 대한민국이 더 튼실해지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해 주신 이 나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능히 감당케 하옵소서!
〈 주님이 섭리하시고 개입하여야 〉
시편 20편, 21편은 전쟁과 관련하여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전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찌 전쟁 뿐이겠습니까?
참새 한 마리도 주님의 허락이 없으면 떨어지지 않습니다.
한국의 정치적 위기, 여기에도 주의 힘, 주의 구원이 필요합니다.
시편 21장은 ‘주의 힘’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표현은 달라도 주님의 권능을 노래하는 시입니다.
(3절)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그를 영접하시고 순금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주의 아름다운 복’ 복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주의 복, 주의 힘, 다르지 않습니다.
(5절) “주의 구원이 그의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을 그에게 입히시나이다”
(13절)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
시편 21장은 “주의 힘”을 이렇게 다양한 수사적 표현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① 주의 힘 ② 주의 구원 ③ 주의 복 ④ 주의 능력 ⑤ 주의 권능
이렇게 다섯 가지 수사적 표현을 씁니다.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왕을 칭송하는 시이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을 높입니다.
시편 21편은 이렇게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나서 전쟁에서 승리한 왕은 어떤 인물인지를 드러냅니다.
왕은 무엇으로 기뻐하고 무엇으로 즐거워합니까?
전쟁에서 이기고, 수많은 전리품과 포로가 있어,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1절을 다시 봅니다.
(1절)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크게 즐거워하리이다”
〈 왕중 왕 〉
1절의 화자는 백성들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 온 왕을 보고 백성들이 노래합니다.
우리의 왕은 ‘주의 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크게 즐거워한다’
백성의 눈에 왕이 그렇게 보였습니다.
백성이 이렇게 봤다면 정확합니다.
(7절)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오니 지존하신 이의 인자함으로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백성이 보니, 자기네 임금님이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백성이 보니, 자기네 임금님이 하나님의 인자함으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왕입니까?
왕이 이렇게 신실한 믿음의 사람일 때, 백성이 이구동성으로 찬양을 합니다.
사실 시편에 나오는 왕은 오늘날 세상의 왕이 아닙니다.
세상의 왕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으로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여야 합니다.
자칫, 자기 마음에 든다고 어떤 지도자를 시편에 나오는 왕처럼 칭송하면 안 됩니다.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 지도자들이 이러한 잘못에 빠져있습니다. 속히 벗어나야 합니다.
역사에서 시편의 왕에 가장 근접한 왕은 ‘다윗’ 한 사람 뿐입니다.
다윗 왕도 이렇게까지 칭송받기에는 부족함이 많은 왕이지만, 그래도 가장 근접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세상의 현실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주의 힘’으로 기뻐할 줄 모르는 세상의 왕들, 그의 치하에서 허덕이는 백성들!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왕을 우리에게 보내시어 그의 다스림 받기를 바라십니다.
그리하여 보내주신 왕, 진정한 왕, 왕중의 왕!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시편에 20장, 21장에 등장하는 왕, 현실에서 찾으면 안 됩니다. 세상에는 없는 왕입니다.
주의 힘, 주의 구원, 주의 복, 주의 능력, 주의 권능으로 기뻐하는 왕이 우리의 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우리의 진정한 왕이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