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덩이 호텔 캘리포니아/최정례
호텔 캘리포니아
한동안 그 노래에 갇혀 흥얼거렸지
콜리타꽃 향기, 희미한 불빛, 내 머리를 만져주듯
한 여자 문앞에 서 있었고
그 순간 멀리서 종소리도 울려왔고
어찌어찌 여기까지 왔는가
대전 역쯤의 플랫폼인 줄 알았는가
호텔 캘리포니아인 줄 알았는가
장마 뒤 길바닥 고인 물에 올챙이
햇빛을 총알처럼 되쏘는 그 속을
미친 듯 휘젓고 다니다가
“배추요, 무요, 양파요.”
행상의 바퀴가 고인 물 튀기며 지나갈 때
잠시 혼절한 그때
찬란한 웅덩이, 잠깐의 호텔 캘리포니아
구름 뒤에 천둥소리 아득하게 떨어지고
어떤 춤은 기억되고 어떤 춤은 잊혀지는
웅덩이 호텔 캘리포니아에서
누군가 떨구고 간 너
혼자서 듣고 있지
“어서 오세요. 당신은 이곳이 포로
언제든 떠날 수 있다지만 결코 떠나지 못할걸요“
한낮의 허공으로 솟구치는
“배추요. 무요, 양파요오.”
그 소리 잊지 못할걸요
햇빛에 웅덩이 날아가 버리도록
<시 읽기> 웅덩이 호텔 캘리포니아/최정례
회사원 시절에 세대 차이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노래방이었다. 부장이나 과장이 부르는 노래는 사원이나 대리가 모르고 신세대가 부르는 노래는 나이 든 이들이 모르는데, 말이 안 통하는 외국인이 손짓 발짓 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도 이런 때가 몹시 난감했는데, 신세대가 부르는 노래는 도무지 흥이 나지 않고 감정이 움직이지도 않았지만, 내가 노래 부를 때 따분해서 어쩔 줄 오르는 신세대 직원들이 표정도 잊을 수가 없다.
노래에는 자신이 살아온 세월이 발효되어 곰삭은 감정과 정서가 잘 배어 있다. 곡이 자극하면 그 감정과 정서는 옛 시간과 장소, 분위기와 함께 고스란히 되살아나 활동한다. 그때 노래는 우리를 잠시 현실에서 벗어나 우리가 잊고 있던 먼 시간을 경험하게 해준다. 7080 노래가 나오면 오십대 전후의 중년들은 즉시 이십대 전후의 젊은이로 돌아가 그 시간을 다시 살게 된다. 몸과 마음은 풍요로운 추억의 저장소다. 그 추억은 평소에는 잠들어 있지만 자극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깨어나 활동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 추억이 없는 이십대에게는 도대체 저렇게 느리고 촌스럽고 처량한 노래를 왜 돈 버리고 시간 버려가면서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중학교 때 나는 그림 그리는 일에 반쯤 미쳐 있었다. 매일 수업만 끝나면 미술실로 달려가 그림을 한 장씩 그렸다. 그때 미술 선생님은 우리를 지도하면서 자주 가곡을 흥얼거렸는데, 그때 가장 많이 흥얼거린 노래가 <보리밭>이었다. 지금도 그 노래를 부르기만 하면 미술 선생님과 친구들이 떠오르고, 비너스, 아리아스, 줄리앙, 아그리파 등의 석고상과 수십 장은 그린 찌그러진 주전자와 이젤이 떠오르고, 코에서는 아직도 진한 테레빈유 냄새가 난다. 미술실 옆 여고 교실에서는 방과 후 항상 악기 같은 목소리가 부르는 노래 연습 소리가 들렸다. <보리밭>을 부르면 이 모든 기억들은 평화롭고 고적한 보리밭의 풍경과 중학생의 어린 마음과 결합하여 신비롭고도 아늑한 정서를 자아낸다.
나와 비슷한 세대인 최정례 시인도 <호텔 캘리포니아>에 추억이 많이 있나보다. 사랑에 빠지면 거기에서 헤어 나오고 싶지 않듯이, 온갖 난관이 위협하고 연인과의 애증과 갈등이 괴롭혀도 나오고 싶지 않듯이, 한번 들어가면 절대로 나오고 싶지 않은 청춘을 지나왔나보다. 언제 불렀는지도 모르는 까마득한 노래 <호텔 캘리포니아>를 수십 년이 지나고 자기도 모르게 흥얼거리는 걸 보면, 춤과 노래의 포로가 되어 나올 수 없는 호텔 캘리포니아를 지나왔나보다. 중년이 되도록 그 취기에서 다 벗어나지는 못했나보다.
“배추요, 무요, 양파요오.” 그때 한낮에 골목에서 들려오는 행상 소리가 그 노래에 취해 있던 시인의 뒤통수를 갑자기 세차게 후려쳤을 것이다. 후다닥 그 취기에서 깨어나보니 머리 희끗한 중년! 주변을 돌아보니 한때 피를 끓이며 노래하고 춤추던 젊음은 올챙이 우글거리는 “찬란한 웅덩이”, 장마 뒤 길바닥에 고인 웅덩이 물은 “잠깐의 호텔 캘리포니아”. 어느 날 느닷없이 들이닥쳐 삶을 송두리째 휘저은 아이엠에프 외환 위기는 그 웅덩이를 지나간 야채 행상의 바퀴. 이 지독한 유머가 우리들이 그토록 놓지 못해 안달하고 아등바등하는 삶의 대단한 내용이라니! 그러나 삶의 웅덩이에 고인 물이 곧 햇볕에 날아가버린다 해도, 여전히 가슴 뛰는 스무 살의 노래 <호텔 캘리포니아>! 자발적으로 유혹당하고 싶은, 젊음이 탕진 되도록 포로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노래 <호텔 캘리포니아>!
―김기택, 『다시, 시로 숨 쉬고 싶은 그대에게』, 다산북스,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