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예찬 - 조선지도 500년, 공간ㆍ시간ㆍ인간의 이야기
김정호와 《대동여지도》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그의 생애나 《대동여지도》의 내용과 쓰임새를 잘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현대지도와 전통지도를 비교하면서, 혹은 서양지도와 동양지도를 견주면서 우리 전통지도의 가치를 폄하하는 경향마저 있지만, 정작 지도라는 매체의 본질을 살피면서 우리 전통지도의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보려는 노력은 충분하지 않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래 천 오백년 이상 지도를 만들어 쓴 자랑스러운 전통을 가지고 있다. 지도는 공간에 대해 한 공동체가 갖는 관점과 지식, 그리고 지향을 담는 그릇이다.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공간은 시간의 산물이기에, 자연스레 지도는 시간을 담는다. 그리고 사람을 담는다. 지도는 한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기대와 바람, 걱정과 한숨을 담는다. 전통지도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 《대동여지도》가 그러한 지도였고, 19세기의 위대한 지리학자이자 지도 제작자인 김정호가 바로 그런 지도를 만든 사람이었다.
[해좌전도], 조선, 19세기 중반
종이에 목판 인쇄 후 채색, 97.8×55.4cm, 낱장,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공간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은 인간 모두의 바람이다. 모든 문명이 나름의 세계관을 구축하고 구성원들에게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지도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에도 당시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활발하게 세계지도를 만들었고, 사람들은 다시 이를 바탕으로 세상을 이해했다.
[천하대총일람지도], 조선, 18세기 초
종이에 먹과 색, 128.5×155.0cm, 낱장,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또한 수많은 나라와 민족이 경쟁하는 드넓은 세상 속에서 사람들의 안전과 행복을 지켜주는 나라의 영역을 파악하고 자기 나라에 대한 자부심을 고취하는 데 지도만한 것이 없다. 국토의 방방곡곡을 묘사한 지도는 국가의 통치를 위해 모든 지역을 파악하는 데 유용하게 쓰였다. 아울러 덕치(德治)를 강조한 유교 정치 철학이 조화롭게 실현되는 이상적인 나라로 조선을 드러내는 데도 효과적이었다.
[조선방역지도], 조선, 1557년(명종 12)
비단에 먹과 색, 61.0×132.0cm, 족자,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국보 제248호
한편 나라의 경계와 그 너머의 사정을 상세하게 담은 지도는 나라를 온전히 지키고 경계 바깥의 나라나 민족들의 사정을 파악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특히 청나라와의 경계와 그 너머를 상세하게 그린 지도는 나라의 안위를 좌우할 중요한 정보가 되었다. 이 밖에도 1592년의 임진왜란과 1597년의 정유재란으로 조선에 막대한 피해를 끼친 일본의 지도를 만들어 그들의 사정을 파악하는 일도 중요했다. 아울러 동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서 조선에 조공을 바쳤던 유구국(琉球國, 현재의 오키나와)의 존재도 중요하게 여겨서 이 나라의 지도도 많이 제작했다.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조선 18세기 중반
종이에 채색, 143.0×203.0cm, 낱장,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보물 제1537-1호
시간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 속에는 과거로부터 축적된 많은 흔적이 남아 있다. 이 때문에 공간은 시간의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공간의 다양한 모습을 기록하는 매체인 지도에 시간의 흐름과 인간의 역사가 기록되었다. 동아시아의 지리학에는 역사를 기록하는 전통이 면면히 이어졌고, 그중에서도 조선의 지도에서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진다.
[경주읍내전도], 조선, 19세기 말
종이에 먹과 색, 70.5×56.0cm, 첩,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17세기의 유학자이자 관리였던 김수홍(金壽弘, 1601~1681)이 제작한 지도들은 이러한 흐름을 대표한다. 당시의 세계관을 담은 세계지도인 [천하고금대총편람도(天下古今大摠便覽圖)](1666)나 전국지도인 [조선팔도고금총람도(朝鮮八道古今摠覽圖)](1673)의 제목이 보여주듯이, 이 지도들은 과거와 현재를 함께 담고 있다. 오늘날의 역사부도에 비견될 수 있는 이 지도들은 당시의 유교적 세계관 속에서 의미 있는 인물과 사건들을 지역별로 상세히 소개한다. 이와 같이 지도에 수록된 지리 공간 위에 역사 정보를 덧붙이거나 역대 왕조의 변천을 정리하여 싣는 것은 조선지도의 중요한 특성이 되었다.
김수홍(1601~1981), [조선팔도고금총람도], 조선, 1673년(현종 14)
종이에 목판 인쇄, 107.0×141.8cm, 낱장,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인간
중앙집권국가를 지향했던 조선왕조는 통치 공간 곳곳에 대해 상세하고 정확한 지식을 구축하는 것을 중요한 과제 중 하나로 삼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왕조 초기부터 대대적으로 추진한 지도 제작과 지리지 편찬 사업은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중앙정부가 만든 많은 지도들은 국가를 효율적으로 경영하고 또한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이처럼 실측 자료를 바탕으로 공간의 모습을 충실하게 전달하면서, 한편으로는 회화 기법을 활용하여 지도 속에 태평성대에 대한 꿈을 담기도 했다. 절제되어 있지만 아름답고 당당한 모습으로 관청과 학교 등을 그리고 또한 정연하게 펼쳐진 민가들과 시장의 모습을 담아 백성들의 살림이 넉넉함을 자랑했다. 바로 이곳에 덕치(德治)가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전라도 무장현 지도], 조선, 19세기
종이에 먹과 색, 154.0×112.0cm, 낱장,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공간과 시간에 대한 주요 정보를 담고 있는 지도는 사람들이 세계관을 형성하고 세상과 자신의 관계를 인식하는 것을 비롯해서, 국토의 세세한 실상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였다.
따라서 세계 지도와 중국 지도, 조선 전도, 조선의 8도를 각각 그린 지도, 일본과 유구 지도를 차례로 실은 지도책을 비롯하여 교통 노선과 거리 정보가 상세히 표시된 지도, 산줄기의 형세를 살펴 명당에 정성스럽게 모신 조상의 무덤을 그린 산도(山圖) 등이 크게 유행했다. 이처럼 지도 한 장 한 장에는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기대와 소망, 바람과 욕망이 담겨 있다.
[수진본 지도], 조선, 18~19세기
종이에 먹과 색 또는 종이에 목판으로 인쇄, 11.5×177.2cm, 절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연대기
고려의 지도학 성과를 계승한 조선은 건국 10년만인 1402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1402)라는 기념비적인 세계지도를 제작했다. 이어서 세종대에 적극적으로 추진된 전국 단위의 지리 조사 사업을 바탕으로 [동국지도(東國地圖)](1463)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1481) 같은 표준 전국지도와 지리지가 편찬되었다. 비록 [동국지도]는 전하지 않지만, 16세기에 제작된 [조선방역지도(朝鮮方域之圖)](1557, 국보 제248호)가 그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다.
18세기부터는 조선지도가 획기적으로 발전했다. 조선 국가가 왜란과 호란의 피해를 극복하고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다양하고 많은 지도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조선의 지도 제작자들이 사용자의 열람 편의를 한층 더 의식하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18세기 전반의 위대한 지도 제작자 정상기(鄭尙驥, 1678~1752)는 북부지방의 지도를 획기적으로 개선했을 뿐만 아니라, 백리척(百里尺)을 지도에 표기해서 사용자가 직접 거리를 계산할 수 있도록 했고 다양한 기호와 색상을 이용해서 공간 정보를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정상기(鄭尙驥, 1678~1752) 원작, [동국대지도], 조선, 1755~1767
비단에 채색, 272.0×147.0cm, 족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 1538호
지리학에 밝은 관리였던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은 정상기와 그의 아들 정항령의 지도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조선지도를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전국 단위로 표준화된 경선과 위선 좌표 체계를 완성해서 대축척 전국지도가 발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770년 영조의 명을 받은 그는 전국지도 족자, 팔도의 개별 지도, 전국 모든 고을의 개별 지도를 모은 국가 표준 지도집인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를 완성하는 위대한 성과를 달성했다.
신경준(申景濬, 1712~1781) 원작, [팔도도 중 경상도 지도], 조선, 1770(영조 46)
종이에 먹과 색, 146.0×111.7cm, 낱장, 개인 소장, 보물 제1599호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등장한 김정호(金正浩, 1804?~1866?)는 1834년 《청구도(靑邱圖)》를 만들어 지도 사용자의 편의를 극대화했다. 대축척의 전국지도를 효과적으로 편집하고 또한 색인지도를 고안함으로써 상세한 지리 정보를 손쉽게 찾아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호를 더욱 발전시켜 지도의 가독성을 한층 더 높였고, 역사지도와 서울 지도, 전국의 행정 · 경제 · 국방 통계를 덧붙여서, 자신의 지도를 국토의 어제와 오늘을 담은 종합 지리 정보 매체로 승화시켰다.
김정호의 평생에 걸친 노력의 산물인 《대동여지도》(1861)는 조선 지리학과 지도학의 성과를 집대성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오랜 연구를 통해 거리 정보를 가다듬었고, 국토의 윤곽을 세부적으로 다시 그렸다. 무엇보다도 지도의 체재를 완전히 다시 기획했다. 22책 위에 펼친 대축척의 상세한 전국지도를 한눈에 살필 수 있도록 했고, 도로망 위에 10리마다 표시를 해서 거리를 직접 계산할 수 있도록 했다. 더욱 정교해진 기호 체계와 이러한 기호들을 한데 정리한 지도표(地圖標)는 김정호가 독자들의 편의를 얼마나 고려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가 이러한 성취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18세기 이래 비약적으로 발전한 조선 지도학의 성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서세동점의 긴박한 정세에 비추어 민생을 편안히 하고 국방을 튼튼히 하려는 신헌(申櫶, 1810~1888) 등 관료와 최한기(崔漢綺, 1803~1877) 등 여러 지식인들의 공감과 지원 덕분에 그는 전통 지도학의 거인이 되었다.
김정호(金正浩, 1804?~1866?), [대동여지도], 조선, 1861(철종 12)
종이에 목판 인쇄 후 채색, 30.5×20.0cm, 절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에필로그
조선지도 500년의 발자취 속에는 조선이라는 특정 지역과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지도 속에 펼치고자 한 뜻과 의지, 기대와 바람이 서려 있다. 제한된 여건과 환경, 나름의 희망 속에서 일정한 이념과 가치로 나라를 잘 운영하고 지키려는 바람은 다른 시공에서 지도를 만들어 쓴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른 것이 아니었다.
조선지도 속에는 동서고금의 보편적 가치가 녹아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 국가와 사회의 다채로운 개성을 보여주는 특장들이 오롯이 담겨 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공간, 시간, 인간에 대한 공동체의 이해와 지향을 공유하기 위한 매체로서 지도를 만들어 썼다. 그들은 지도 속에 그들의 성리학적 이상과 국토 수호의 의지를 담고 실천을 다짐했다. 이로써 조선지도는 조선시대의 사람들과 그 시대를 생생하게 바라볼 수 있는 창이 되었다.
김정호(金正浩, 1804?~1866?), [대동여지도 목판], 조선, 1861(철종 12)
나무, 32.0×43.0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1581호
[네이버 지식백과] 지도예찬 - 조선지도 500년, 공간 · 시간 · 인간의 이야기 -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 (전시회 산책, 장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