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마련하고 보니
나는 장차 내가 살 집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내 능력으로 마련한 집은 아닙니다. 그럭저럭 조상의 음덕(蔭德)으로 얻은 집입니다. 지금 사는 곳으로부터는 약 삼백여 미터 떨어졌고 ‘방학재’라고 부르는 칠봉산 말봉(末峰) 산자락에 있습니다. 앞쪽은 서울로 향하는 평화로 곁에 우뚝 선 도락산이 마주 보입니다. 경원선 전철이 지나는 그 곁으로는 신천이 한탄강으로 흘러갑니다.
내 집이 풍수지리상 어떤 위치에 있는지는 모릅니다. 멀리 산이 우뚝하고 내가 시원스레 흐르니 종일토록 바라보아도 답답하거나 옹색하지 않아 좋은 곳입니다. 집으로 가는 길에는 나이를 알 수 없는 참나무, 소나무, 밤나무가 들어차 있고-추측하건대 수백 년은 되어 보입니다-위로는 제법 숨을 고르며 올라야 할 만큼 가파른 산이 시작됩니다. 젊었을 때는 방학재에 오르느라 그곳을 지나갔고, 성묘며 벌초하느라 우정 들르기도 했고, 종종 칠봉산 등산을 하느라 지나기도 했습니다.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그런 곳에 집을 장만했으니 그것만 해도 어디입니까.
내가 열댓 살 무렵까지는 조부모님, 부모님, 고모, 우리 다섯 남매를 비롯해 집안일을 거들던 머슴까지 열하나나 되는 대가족이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출가한 두 고모님도 모두 돌아가시고 형제들도 출가해 여기저기 흩어져 삽니다. 이 마을은 수성(隋城) 최씨 집성촌입니다. 네 분의 종조부와 다섯 분의 조부 자손이 모여 살던 곳이어서 지금도 우리 집안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바로 마을 뒷산이 종산입니다. 나를 기준으로 삼아 위로는 10대 위 조부가 종산에 계시고 아래로는 항렬로만 따지자면 4대나 아래로 내려갔으니 자그마치 우리가 이 마을에 산 지 500년을 족히 넘습니다.
철이 날 무렵부터 종산을 드나들며 집안 대소사를 지켜보았습니다. 함께 숨을 쉬고, 일을 거들고, 겸상하고, 고락을 같이했던 재‧삼종형제들은 물론이고 당숙․재당숙이 유택(幽宅)을 마련한 곳입니다. 얼굴은 말할 것도 없고 그분들의 하찮던 버릇까지도-기침(起寢)을 알리던 목소리, 갈지자로 걷던 술버릇, 고의적삼을 입고 갓을 쓴 모습 등이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 마치 어제 일 같습니다. 눈을 감으면 산이 시작하는 곳부터 9대 윗대 할아버지가 계신 곳까지 광경이 펼쳐지는데 풀 한 포기까지 기억해 낼 수 있습니다. 때로는 봄 이른 아침나절 솔잎이나 어린 참나무 잎에 매달려 있던 이슬방울까지도 기억해냅니다.
나의 할아버지는 16대 할아버지-나로부터는 9대 윗대 할아버지 곁에 모셔져 있습니다. 할아버지 발치에 부모님이 계시고 부모님 아래 우리 사형제의 집을 나란히 장만해두었습니다. 집 앞에 앉아서 앞을 내려다보면 전망이 부챗살처럼 퍼져서 시야가 탁 트여 거침이 없습니다.
원래 이곳은 둘째 할아버지 댁 큰 당숙이 당신의 몫으로 정해두었던 곳인데 당신의 다섯째 숙부(叔父)인 내 할아버지가 돌아가자 흔쾌히 양보해 그곳에 모신 것입니다. 바로 그 아래 큰 당숙의 묘가 있습니다. 할아버지를 뵈러 갈 때면 당숙 묘도 둘러보고 혹시 잡풀이라도 눈에 띄면 뽑아버립니다. 서(庶) 할머니가 돌아가자 할아버지와 할머니 곁에 삼자(三者) 합장(合葬)을 논의할 때 제일 어른이던 큰 당숙이 마지막에 “합장하세”, 라고 선언해 좌중을 압도하던 근엄하고도 단호한 모습이 떠오릅니다.
봄가을로 산새가 울어 마을은 물론이고 그곳에 계신 조상들도 영혼을 달래기도 할 것입니다. 노부모를 모시고 있는 친구들이 훗날 부모님을 모실 장소를 찾느라고 노심초사할 때 그런 걱정에서 벗어난 나는 다행으로 여긴 적이 있었는데 돌이켜보니 큰 축복이었습니다. 그야말로 현실에서나 죽어서나 집이 없는 설움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시사철 숲이 우거져 꽃이 피고, 산새가 드나들며 노래하고, 이슬이 맺혔다 마르기를 반복하는 곳. 도토리 밤이 아람 벌고, 벌이 꽃을 찾아 잉잉거리며 날며, 화사(花蛇)가 스르르 지나는 그런 곳에서 편안하게 쉴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행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칸칸이 나뉜 아파트 같은 공원묘지가 아니라 이쯤 되면 내 땅에 지은 호화 주택인 셈입니다. 게다가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할아버지 내외와 부모님이 계시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같은 탯줄을 자르고 나와 평생을 같이 한 형제와 나란히 머물 수 있다는 것이 가슴을 뛰게 합니다. 나는 별이 뜨는 저녁이거나 햇살 밝은 아침이면 할아버지와 어머니 내외가 나란히 나와 앉아 도란도란 옛이야기며 자손을 걱정하신다고 확신합니다. 시간이 나는 대로 호미 한 자루 들고 가 당신들 앉을 자리를 고르고 내려오는 까닭입니다.
누구는 재종(再從)은 무엇이고, 삼종(三從)은 또 무엇이냐며 고려적 이야기 듣듯 심드렁해하지만 같은 수저로 밥을 나누어 먹던 사이를 모를 수 없는 것이 우리네 같은 집성촌의 삶입니다. 고향을 지키며 고향의 품에서 사는 행운! 평생을 같이 살다가 죽어서도 그 곁에 종래 살 집까지 마련해 둔 처지고 보면 세상 부럽지 않습니다.
며칠 후면 한식입니다. 옛날처럼 한식을 맞지는 않아도 형제와 조카들이 어울려 부모님을 찾아뵙고 우리가 들 집을 돌봅니다. 가끔 불청객인 산돼지가 내려와 봉분 없는 활개를 개개기도 하지만 그도 함께 사는 즐거움이려니 하고 아무 소리 안 하고 내려옵니다. 그렇게 어울려 사는 것이 세상살이려니 하면 그만입니다. 조카들에게 조상 섬기는 법을 알려줄 의도는 없으며 모두 제 살 집을 가꾸는 법을 일러두고 싶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봉분을 없애고 묘를 재정비해-말하자면 리모델링(remodeling)을 했습니다. 집이 오래되고 헐면 유지하는데도 품이 많이 듭니다. 이참에 고쳐서 한동안 손대지 않고도 살 수 있도록 자식들을 배려했습니다. 종중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일인데 지금은 내 집이 좋아 보이는지 따라서 고치는 집안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조상들이 사는 마을이 점차 신식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종중에서도 관심을 두고 주변을 가꾸기도 합니다만, 사람 드나드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이곳 전체가 누구나 와 즐기는 공원처럼 활기차면 좋겠습니다. 한 세상 살면서 집 걱정 안 해보기는 처음입니다. 걱정은커녕 아예 잊고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