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Ⅰ. 서 론
1. 연구의 동기
현재 사용되고 있는 우리의 찬송가는 고대에서 현대까지, 지역적으로는 기독교가 전파된 거의 모든 지역의 노래를 수록하고 있다. 또한 교파적으로도 프로테스탄트 각파의 것을 중심하여 로마 가톨릭교회 및 희랍 정교회의 노래를 수록하고 있어 세계에서도 보기 드물게 광범위한 노래를 수록하고 있다.
더불어 역사적으로 성경과 찬송가는 뗄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상관관계를 지속해왔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말씀이지만 찬송은 영감에 의해 가사와 곡이 붙은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찬송은 자기의 환경이나 처지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교파가 형성된 이유이고, 나름대로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이유이다. 교회사와 더불어 나름대로 형성된 찬송의 고백을 살펴보고, 나아가 신앙의 토착화를 위한 방안과 찬송가의 건전한 발전을 위한 방향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2. 연구의 방법
이 논문은 교회사로 본 찬송가의 변천사를 알아보고자 함이다.
Ⅱ장에서는 종교 개혁기를 중심으로 찬송가의 변천과 특색을 살펴보고자 한다. Ⅲ장에서는 종교개혁이후 형성된 각 교파들의 찬송가에 나타난 특징을 설펴보고자 한다. Ⅳ장에서는 해방기를 중심으로 한국교회의 찬송가를 살펴보고자 한다.Ⅴ장에서는 더불어 찬송가의 한국화운동을 생각해봄으로써 찬송가가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 성숙에 얼마나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시대적 고증과 역사적 상황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Ⅱ. 종교개혁 기를 중심으로 본 찬송가의 변천
1. 히브리 종교와 음악 (고대)
히브리인들에 대한 음악은 구약 성서의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제일 먼저 창세기 4장 21절에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들의 조상이 되었다는 유발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하나님께 노래로 찬양하였다는 것을 잘 알 수는 없다.
하나님께 노래로 찬양한 기록은 출애굽기 15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홍해를 건너와 애굽의 노예생활로 부터 해방되었음을 감격해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 드렸음을 알 수 있다.
히브리 음악은 예술적인 용도 보다는 기능적인 용도로 사용하였으며, 작곡되어진 것이 아니고 자연스럽게 즉흥적으로 만들어졌다. 출애굽기 15장 20절을 보면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기악과 성악을 함께 사용하였으며 춤추는 것도 예배의 형태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다윗왕 때에 처음으로 큰 규모의 관현악단이 조직되었으며, 전문적으로 이 분야를 담당하면서 가르치도록 레위 족에게 임무를 주었다.1)
솔로몬 시대에 와서 성전예배의 음악은 확실하게 자리 잡혀 갔으며, 성전에 봉사하던 자들 중에 예배를 위하여 38,000명의 레위 인이 선발되었고, 그들 중 4,000명이 성가대를 하였다 (역대상 23 : 3 - 5절).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왕이 되자 성전을 건축하였으며, 이 웅대한 성전에서의 예배는 웅장한 예배 음악이 당연히 필요 하게 되었다. 요세퍼스(Josephus)는 이 예배를 위하여 20만 명의 트럼펫 주자와 20만 명의 합창단이 동원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2)
이러한 찬양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질되어져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게 되었다.(암 5 : 22 - 23).
다시 히스기야 시대에는 관현악단과 성가대를 만들었다. (대하 29 : 25 - 30).
바벨론 포로시대 회당예배에 와서는 기악 반주가 없는, 순수한 노래만을 불렀다. 이 사람들은 연주자인 동시에 또한 작곡가였으며 다수의 시편이 저들의 저작으로 되어있다. 다윗의 시는 솔로몬 시대의 성전예배에 까지 계속 되었다. 그리고 그 합창 음악은 일찍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사용된 것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었을 것이다. 이 때로부터 성가는 유대인의 학교에서 정규적으로 가르쳤으며, 여기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거의 대가가 되었다. 얼마 후에 저들이 바벨론으로 잡혀갔을 때에 저들의 음악에 대한 평판이 바벨론 사람들의 흥미를 일으키게 되어 바벨론 사람들은 유대인들에게 시온의 노래를 부르라고 재촉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는 거부되었는데, 저들의 불우한 환경과 외국인뿐인 청중과 그리고 저들의 가련한 상태가 이스라엘의 거문고를 고요하게 했으며 오랫동안 저들의 거문고는 줄이 풀려 있었고 저들의 노래는 불리지 않았다. 그러나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자 저들은 성가를 다시 작곡하고 연습하였다.3)
2. 종교 개혁기 이전
최초의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었는데 그들의 종교적 의식 가운데서 음악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었는가? 를 성경이 입증해 준다. 따라서 그들 유대교의 예배 속에서 친숙해 오던 음악이 초기 기독교에 들어 왔으리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4)
초대 기독교의 음악은 이러한 유대교적인 것을 바탕으로 해서 당시 문화세계의 음악인 그리스 로마적인 음악과 마음껏 접촉하면서 형성되어 갔을 것이다. 기독교 발생 당시의 그리스 로마적 음악의 특징은 운문의 가사를 지닌 단성의 성악이 중심이라는 것과 음계와 선법이 합리적인 기초위에 서 있으며, 고전예술이 공유하고 있는 조화된 미의 이상에 의해서 형식이 갖추어져 있다.5) 또한 초대 기독교도가 시편 송, 즉 낭송을 기독교의 예배에 채용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유대교의 예배 의식에서는 시편이 응송과 교송의 두 형식에 의해서 가창되었는데 이는 모두 기독교의 예배에 채택되었고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다.6)
초대 교회 예배에서 유감스러웠던 것은 예배에 참석한 회중이 다함께 찬송을 부르지 못했던 점이다. 노래한다는 것은 행동을 통일하여 묶어 바치는 것이므로 함께 찬송을 불렀어야 했다. 따라서 교회 음악은 점점 수준이 저하될 수밖에 없었다.
주로 고대 중세의 찬송가는 시편에 바탕을 둔 찬송가이다. 그러나 히브리어로 쓰여진 구약성경의 시편이 어떻게 불렸는지 알 수는 없다. 그 시 자체는 오늘날 기독교 문학과 시가의 근원인 동시에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거기에 적당한 곡을 붙여 노래 불렀다. 그 뒤 일반적인 찬송가 형태를 갖춘 것은 3세기 초 알렉산드리아 신학자 클레멘스 (Titus Flaius Clemens,150-216)로 부터였다. 그의 시에 바탕을 둔 "참 목자 우리 주" (한국찬송가 103장)는 최초로 찬송가 형태를 갖춘 것이다.7) 또한 4세기 이탈리아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 (Ambrosius 339-397)와 대교황이라 일컫는 그레고리우스 (Greorius, 540-604) 1세 등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8) 특히 그레고리우스 1세는 서방교회의 성가를 교회 선법에 의해서 만들고 이런 종류의 성가를 그레고리오 성가라 했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 교회 음악의 모범이 되었다. 7세기 말경에는 영국으로, 8세기 초엔 독일로 전달되었다. 샬레만뉴(Charlemagne) 대제의 통치하에서 로마 교회가 번성함에 따라 그레고리 성가의 영향도 커졌다.
초기 중세 (8세기-10세기)는 음악사적으로 그레고리 성가의 발전기이며, 11세기,12세기는 일반 예술사에 있어서 로마네스크시대로 불리어지는데, 이 시대에 뛰어난 이론가까지 나타나서 그레고리 성가가 전성기를 맞았다.9)
13세기 노틀담 (Notre Dame) 학파 같은 사원학교에 있는 종교 다성 음악 작곡가들은 음유시인, 서사시인에 의하여 세속 음악과는 현저하게 다른 스타일로 작곡을 하였다. 따라서 현대 연구가들은 13세기 이후의 교회용 즉 종교용 음악과 다른 형태의 음악을 비교해 볼 수 있게 되었다.
14세기에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음악 작품의 소재를 다룬 새로운 음악, 신예술 (Ars Nova) 이 등장했다. 이는 이제까지 인간 영혼의 구원이외의 소재를 다루지 못했던 것과는 달리 자연적미와 생의 단순한 쾌락을 다루었다.10) 특히 14세기의 신예술은 인간의 쾌락을 주로 하는 음악이 되어 교회 음악엔 방해요소가 되었다.
중세 찬송가에 관해서 잊어서는 안 될 것은 그 찬송가들이 교회의 전례(예배 의식 문)와 밀접하게 맺어져 있어 그 한 부분을 이룬 것이 많다는 점이다.
3. 종교 개혁기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은 루터 (Martin Luther,1483-1546)를 중심한 스위스와 영국 등 세 군데를 중심으로 행해졌다. 이 종교 개혁은 아울러 예배의 개혁을 단행하였고, 새로운 찬송가의 형태를 만들게 되었다. 전체를 통하여 공통적으로 성가대가 라틴어로 노래했던 성가를 충분한 음악 훈련을 받지 못한 일반교인들도 부를 수 있는 쉬운 곡이 되었다는 점과 또한 자기 나라말로 부를 수 있게 했다는 점이다.
1517년 10월 31일 『면죄부와 효력을 밝히기 위한 논리』라는 95개조의 의제를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루터가 게시하면서 시작된 종교 개혁은 교회 음악에도 큰 영향을 가져왔다. 1517년 종교 개혁을 한 이후 교회는 로마 가톨릭과의 분리로 새로운 교회의 찬송가가 필요했다. 이에 루터는 교회에서 모이는 신자들이 직접 신에게 기도하며 찬미한다는 목적에서 그때까지 쓰였던 라틴어 대신 독일어의 가사와 단순한 -노래 부르기 쉬운- 멜로디의 찬송을 만들어 냈다. 그의 신학은 믿음으로서 의롭게 된다는 것, 성도는 다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이라는 것, 신앙생활의 최고 권위는 성서라는 것 등을 세 가지 기둥으로 진전되어 왔다.11) 따라서 독일의 초기 찬송가는 이 신학을 직접, 간접으로 강조하고 부연한 것이다. 문학이나 음악의 소양이 많았던 루터 자신도 당시의 우수한 작곡가들의 협력을 얻어 새로운 개신교의 코랄 (Chorale)을 탄생시켰다. 이 때에 만든 찬송 중 'Gin Feste Burg (내 주는 강한 성이요)'는 유명하다.
스위스의 제네바를 중심한 칼빈은 성서 존중으로 인해서 예배에 창작 찬송가의 사용을 금하였다. 반면 그는 시편 가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성서 중심적이었는가에 대한 다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12) 그 사실은 칼빈이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시편을 존중하고, 시편이 교회 음악에 빠뜨릴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을 뜻한다. 그는 신학이 중심을 하나님의 주권에다 두고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적으로 생각하였다. 거기에서 인생의 목적은 예배에 있고, 올바른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행해져야 한다는 그의 독특한 예배관이 생긴 것이다.13)
초기에는 칼빈 자신이 루터파의 코랄 영향을 받아 직접 시편을 번역하였으나, 훗날에는 시인이나 제자 등에게 시편 전체의 번역을 의뢰해서 시편 가를 완성하였다. 이것을 '제네바 시편 가'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칼빈의 시편 가는 루터의 찬송이나 종교시보다 회중 찬송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었다.
영국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은 헨리 8세 (Henry Ⅷ. 1495-1547)의 이혼 문제이기 때문이었고 정치적인 요소가 강했기 때문에 종교개혁의 결과로 생겨난 독자적인 신학이 별로 없었다. 오히려 초기에는 루터파, 뒤에는 칼빈파의 영향이 컸다.14) 16세기 영국 개신교의 가장 의의가 깊은 공헌은 라틴어의 모테트에서 시작된 것으로 영어권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의 모테트라 할 수 있다. 영국 교회음악 전체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비중을 볼 때 로마의 미사보다는 그 비중이 훨씬 적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로마 가톨릭에서는 1564년에서 1565년에 북이탈리아의 트렌트에서 회의를 열어 예배 의식 악용을 모의하였다. 그 회의에서는 하나님의 집이 기도의 집이 되기 위해서는 유혹적인 멜로디, 세상적인 가사 혹은 울부짖음을 금지키로 결의하였으며, 결정적인 공로자는 팔레스트리나 (Palestrina)였다. 그 뒤 팔레스트리나 양식은 의식적으로 보존되고 구분되는 새 모델로서 모방하게 하는 서양 음악사의 첫 경위가 되었다. 그래서 종교 개혁기의 가톨릭 음악은 팔레스트리나에 의해서 다시금 명맥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종교 개혁시대의 산물은 무엇보다도 코랄로, 이 코랄은 신자들에게도 생동감을 주어 찬송에 등장하는 일을 하게 한 것이다. 그러면서 음악이 유혹적인 멜로디로 변한 것은 유감이나 팔레스트리나의 음악 같은 것이 그것을 막는데 큰 공헌을 한 것이다.
4. 종교개혁기 이후
종교개혁으로 17세기에는 유럽의 음악이 독일로 옮겨졌다. 특히 바흐 (Johann Sebastian Bach.1685-1750)의 창작 작품 중에서 절정을 이루게 된 음악의 성장은 루터의 종교개혁과 그 전철을 밟은 여러 가지 종교의 결과이다. 그러기에 음악의 성장은 독일인의 정치적 역사나 또는 그들이 철학으로 설명될 수 없다. 바흐는 칸타타와 코랄로서 교회음악에 크게 공헌하였는데 그 후의 어떤 종교음악에서도 볼 수 없는 정열과 설득력, 투철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으로써 성서와 기독교 신조를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바흐의 음악은 위대한 설교자의 설교와 매우 닮았다고 많은 사람들이 평가한다.15)
헨델(George Fridercick Handel,1685-1759)오라토리오로써 교회에 공헌하였는데, 오라토리오는 칸타타와 같은 내용의 것이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예배 때 보다는 교회 밖에서 주로 연주되었다. 이러한 발전은 특출한 찬송 작가들이 나올 수 있는 기틀도 마련하였다.
특히 18세기에 들어서자 오랫동안 시의 시편 가에 독점되어온 영국의 찬송가에도 창작의 기운이 움트기 시작했다. 영국찬송가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왓츠는 영국 교회음악이 시편 가에서 찬송가로 전환하는데 중대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는 시편을 문자 그대로 부르는 것은 그 당시의 환경이나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현시대의 상황에서 표현된 노래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모든 기독교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경험과 감정에 기초한 찬송으로 전환함을 말한다.
영국의 찬송가에 나타난 신학은 국교회(Anglican Church)보다 구교회에 반항한 청교도 운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종교개혁 시 국교회에서는 송영과 성가가 있었으나 좁은 의미의 시편가나 찬송가는 그때까지 없었고 찬송가를 최초로 사용한 것은 청교도였기 때문이다. 이 운동의 창시자인 존 웨슬레가 선교사의 감화로 결정적인 회심을 경험하고, 마침내 독일 경건파의 한 본부인 헤른후트까지 방문하였다.16) 18세기 영어 찬송가의 주도권은 비국교도에 의해 장학되어 있었으나 19세기에는 국교도의 손에 넘겨지게 되었다. 1830년대에는 옥스퍼드 운동이 일어나서 국교회의 각성을 촉진시켰기 때문이다. 앞 세기의 감리파 운동이 대중적이었음에 비해 이 운동은 지식층이었으나 그 영향은 감리파 등보다 한층 심각하였다.17)
감리교 창설자 존 웨슬레(John Wesley.1703-1791)의 동생인 찰스 웨슬레는 유럽 경건파의 하나인 모리비아파의 영향을 받아서 체험적이고 열렬한 신앙 부흥운동을 전개하고, 찬송가를 작사 작곡하여 형의 전도를 도왔다.
18세기 후반은 교회음악이 쇠퇴기에 접어드는 느낌을 주었는데 그것은 예술, 철학, 문학에 있어서 활기가 넘치는 시기에 비해 유럽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로부터 지적, 정서적, 육체적인 존재로써 인간의 내면을 철저히 연구하는 방향으로 기울어 졌기 때문이라고 볼수 있다.다시 말하면 교회음악은 교회의 일반적인 쇠퇴와 그 운명을 같이 했다는 것이다. 아플레비(David D.Appleby)는 말하기를 "예배의식의 결핍, 신학적, 철학적 신념의 확증이 있는 전통의 고수 등은 개신교 음악으로 부터 완전한 분리를 가져왔다. 나는 음악이 교회에서 없어 젔다는 소리가 아니라 개신교 교회음악에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 끊어졌다는 것과 개신교 교회 멜로디의 훌륭한 보고를 대신한 영가로써의 코랄은 기분 내키는 대로의 침울하고 질질끄는 회중가창이 되게 하였다."고 한다.18) 16세기나 17세기에는 독일 찬송가의 풍성한 산출 기였으나, 18세기 이후 계몽주의나 주지주의의 영향이 높아가면서 독일 찬송가의 창작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오늘날 독일 복음주의 교회에서 사용하는 성가집은 거의가 16,17세기의 찬송가들로 메워져 있다. 이런 현상은 독일교회에 있어서의 창작력의 고갈에 의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신작 찬송가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최근의 찬송가관에 그 원인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신학적, 음악적으로 혜택 받고 있는 독일 사람들인지라 아쉬운 노릇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19) 오히려 영국은 18세기의 비 국교파의 영국 찬송가가 개인적인 구원을 주제로 한 것이 많은 반면, 19세기의 국교파에서 만들어진 찬송가에는 예전적인 것과 교회적인 것이 많았고, 또한 시대를 반성하여 미개지에의 전도를 고취하는 것도 적지 않을 정도로 우수한 찬송가가 많이 제작 되었다.20) 또한 20세기에는 민요적인 곡의 발굴과 작곡등으로 참신한곡을 작곡한 본 윌리암즈(Ralph Vaughan Williams,1875-1957), 마틴 쇼우(Martin shaw,1875-1958)등의 활약으로 19세기의 표준적 영어 찬송가에 새 바람을 불어 넣었다.21)
1800년 이후 교회음악에 있어서 전통적인 찬양이 답보상태에 머물렀지만 대중성이 큰 복음 찬송이 환영을 받게 되었다. 전통적인 찬미를 고수하는 루터파나 영국교회, 화란교회 등에 의해 미국에 건너간 청교도들은 대중의 호흡에 맞는 자유로운 표현의 찬송가를 많이 짓게 되었다. 특히 서민층의 평신도들이 주도적이었으며 거기에는 영광의 찬양, 복음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22) 미국교회는 영국교회의 예배의식을 모방하여 처음에는 시편을 노래했는데 찰스 웨슬레의 음악과 부흥운동은 시편을 노래하던 이전 전통을 바꾸게 되었다.23) 미국에서의 창작찬송가의 초기에는 역시 영국의 18세기 찬송가와 마찬가지로 개인적이며 체험적인 내용이 많았다.
19세기 초기에 일어난 부흥운동의 영향으로 미국교회에서는 교파적인 활동이 활발해졌고, 교파적 사업에 못지않게 교파별 찬송가도 출판하게 되었다. 이는 미국이 신앙의 자유를 존중하여 모든 교파의 공존을 허용했기 때문에 각 교파의 독득한 노래집이 무수히 출판되어 영국보다는 한층 더 변화 있는 다채로운 편집이 되기에 이른 것이다. 무디 목사의 공헌으로 복음 찬송이 널리 불리게 되었으며, 미국의 찬송가는 사용 언어가 같은 영어이기 때문에 영국찬송가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그 연장의 구실밖에 해오지 못했으나 19세기 이후 서서히 독자적인 성격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 독자성이 큰 교파의 노래보다는 오히려 작은 교파의 노래에 두드러진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겠다.24) 특히 복음송은 20세기에 들어서자 주춤해졌으나, 주로 그 근본주의적인 주장을 지니는 이중적인 교파사이에 완전히 정착하여 그 뒤에도 계속 이런 종류의 노래가 발표되었다.25) 20세기에는 미국에서 크게 발전하였는데 로우틀리(Erik Routley)는 이때를 가리켜 "교회음악에서 우리의 시대만큼 경탄과 약속으로 가득찬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라고 말한다.
한편, 제 2차 세계대전 전후부터 1960년대에 미국의 주요한 큰 교파에서는 찬송가의 복고조가 붐을 이루고 있으며, 현대 미국의 찬송가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현상은 예배에 대한 개념의 변화가 반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신자의 공동예배(Corporate Worship)의 의미가 점차 새롭게 인식되고 강조되었다. 따라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 임박한 심판을 강조하는 찬송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와 적극적인 봉사와 인류복지를 위한 생동감 있는 생활을 강조하는 찬송이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26) 이처럼 종교개혁 이후,17세기에는 많은 찬송가가 나와서 널리 보급되었으나,18세기에는 팽배한 인본주의적 영향으로 세상 음악이 교회음악보다 앞서가게 되었다. 전통음악은 답보 상태였고, 코랄은 기분대로 부르는 찬송이 되었다. 19세기에는 교파별 찬송가가 출판되었고, 음악 유성협회가 발족하였다. 그리고 20세기에는 신자의 공동예배의 의미가 점차 새롭게 인식되면서 하나님에 대한 감사 찬송이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27) 그러므로 앞에서 살펴본바 와같이 예배와 찬송가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고,찬송을 통하여 회심을 경험한 사람도 있으며, 감사외 찬송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28)
초기 히브리인들의 예배에서는 기악이 성악과 중요하게 사용되었던 기록을 볼 수 있으나,신약 시대에는 기악보다 성악이 특색을 이루고 있다. 그 후 교부시대에 와서 회중찬송에 역점을 두어 점차적으로 찬송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29) 종교개혁자의 공헌으로 평신도가 예배 때에 찬송가를 부를 수 있게 됨과 동시에 대부분의 찬송가집이 평신도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는 각 교파들의 교세확장 방법으로 경쟁적인 찬송가를 출판하여 예배의 존엄성을 건드리기도 했다.
Ⅲ. 각 교파별로 본 찬송가
1. 가톨릭
로마 카톨릭 교회의 찬송가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는 점에서는 그리이스 전교회의 노래와 같으며, 오히려 한층더 진보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라틴의 성가는 대체로 삼일신에 대한 송영으로써 끝나 있으며, 그것이 하나의 정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30)
그리스도의 부활도 로마 교회 찬송가의 중요한 주제로써 다루어지고 있으나, 그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수난이 이 교회에서는 한층 더 많이 찬송되고 있는 듯하다.31) 성체의 비적도 로마교회 음악가들이 즐겨 부른 주제로써 우수한 작품들을 많이 남기고 있다.32) 특히 로마 가톨릭교회의 예전 성가(Liturgical Chant) 그레고리 성가는 7세기경부터 수집 정리되어 10세기경에는 완성된 형태로 법전화 되었다. 이렇게 수집 정리된 성가는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이름을 따서 그레고리 성가라 불린다.
카톨릭 교회의 예배의식의 표준화는 종교음악사상 종교적 의의가 깊은 일이었다. 어떤 신교도들은 이러한 발전을 진정한 종교적 경험에 대한 예술과 의식의 점차적인 발전이라고 한다.
그리고 대다수의 가톨릭교도들은 이 발전의 문제에 대해 무질서한 예배에 대한 질서의 슬리라고 말한다. 이는 중세 초기의 죄악에 대한 것에서 예술적이며 의미 깊은 상징으로 또는 초기의 단순함으로부터 후기에는 좀 더 복잡한 의식으로 발전했다는 뜻이다.33) 그것에 현대의 음악과 노래를 가톨릭 예배로부터 완전히 제외할 수 없다. 다만 현대 문화의 혼미함과 갈등 속에서도 카톨ㄱ릭 음악은 그레고리 성가를 이상으로 하여 구원의 음악으로 발판을 다지고 있다. 기독교 전반에 걸쳐 퍼져있던 예전운동은 가톨릭교회 내에서 부터 시작하여 개신교 교회에도 널리 파급된 부흥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운동의 영향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예배에 있어서 성서낭독과 설교의 재인식과 미사에 일반 성도의 참여 등이 고조되었다.34)
2. 동방 정교회
동방정교회는 정치적으로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분리되었는데 고대 말 정치적 중심이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겨진 이후, 콘스탄티노플은 종교의 중심지로 부각되었다.
그리스 가톨릭 동방정교 정교회라고 하는 분파가 오늘날 그리스 교회, 러시아교회 세루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의 국민교회를 포함하고 있다.35) 동방정교회의 음악은 라오디게아 종교회의 결정에 의하여 비잔틴의 단선율 성가(Plian song)의 쇠멸을 피하기 위하여 회중은 예배 시에 젼혀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반면에 훈련된 성가대만이 노래를 부르게 했으며 악기는 사용하지 않았다. 신학 저술가 이기도한 다메섹의 요한(Joannes,Damascenus 676-756)이 교회음악에 끼친 공헌은 서방교회에 그레고리가 끼친 것과 견줄 수 있다.
그레고리안 찬트를 '로만 찬트'라고 칭하듯, 동방교회의 음악을 '비잔틴 찬트'라고 칭한다. 그 이유는 비잔티움 즉 콘스탄티노플이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고 동방교회의 중심지였기 때문이었다.36) 14세기 이후에는 아라비아와 기타 지역의 영향이 동방교회 음악에 현저히 나타났다. 러시아 교회에서는 음악이 독자적으로 현저한 발전을 보였고 11세기 이래 동로마적인 선율의 러시아적 방언이 형성되었다. 이것은 데보아 기법(Krjuki)의 존재가 암시된다.37) 러시아 근대 음악의 거장으로 미사를 쓴 최초의 사람으로 차이코프스키(Tschaikousky,1840-1899)를 들 수 있다. 도방교회에서는 유럽적인 음악을 채택하는 경향이 있으며 옛 동방교회 음악과 비잔틴 음악의 연구는 20세기 이후 매우 진보적인 현상을 보였다.
동방교회는 비잔틴의 쇠멸을 염려하여 예배 시에 회중이 노래를 부르지 않은 결과, 음악의 진보와 발전에 큰 손실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 교회의 신학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과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 및 주일 예배인 성체 의례의 존중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니케아 공회의를 시초로 하여 이른바 삼위일체 논쟁 속에서 형성된 교회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이 교회의 주요한 신학이 되었다는 점도 수긍이 간다.38)
3. 장로교
장로교의 찬송가는 칼빈의 종교 교회들로 칼빈의 영향을 크게 힘입어 회중찬송가 중심이다. 칼빈에 의하면 음악예배의 범위는 예배에 기여할 수 있는 가사와의 관계에서만 가능한데 그 가사만 곧 성서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칼빈으로 하여금 예배 시에 성서의 노래 즉 시편과 몇 개의 캔티클만을 허용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39)
스코틀랜드에서는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교회에 오르간이 없을 정도로 오르간 사용의 금지가 철저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계 미국인 카네기(Canegie,Andrew)가 영국과 미국 장로교회에 오르간을 기증하게 되면서부터 오르간이 보급되고 사용되었다.40) 약 2세기 반에 걸쳐 장로교회의 음악은 운율이 붙은 시편의 노래였다. 일정한 예배에 시편 이외에 성서의 말씀을 운율적으로 바꿔 쓴 것을 사용하게 되었지만 스코틀랜드의 독립 교회가 그것을 공인한 것은 1873년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스코틀랜드의 엄격한 소수 장로교회 단체는 오늘에 와서는 그러한 찬미가를 허용하지 않는다.41)
캔터키와 테네시의 장로교인들은 19세기 초엽에 캠프 미팅(Camp metting)의 집회를 가지게 되면서 찬송 시와 음악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부흥 운동은 언제나 새로운 찬송을 탄생시키듯이 서부의 부흥운동은 캠프 집회찬송을 낳았다. 당시는 찬송가가 부족했으므로 대부분 책 없이 외어서 불러야 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왗츠나 웨슬레의 찬송 중에도 복잡한 가사는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식하였기 때문에 가사나 곡조가 빨리 배울 수 있고 기억할 수 있는 간단한 것이어야 했다. 찬송의 내용은 죄인의 구원에 대한 것이 많았으며 찬송의 구조는 가장 흔한 형태인 "발라드(Ballud)"스타일을 주로 사용하였다. 곡조는 단순하며 민요조로써 후렴이나 합창이 반드시 붙여졌다.42) 캠프 집회의 결과로 연결되는 19세기 미국교회의 부흥운동으로 복음성가의 물결이 파도처럼 일게 되었다. 따라서 미국 내에는 수천 개의 교회가 세워지고 해외 선교사를 파견하여 오늘의 미국 장로교회로 크게 부흥 발전하게 되었다. 현제 미국 내의 장로교회는 다른 신교와 큰 차이가 없는 예배의식을 갖는다. 다만,'미국 개혁파 주오 장로교회(American Reformed Presbyterian Church)'등은 오르간 합창 찬미가의 금지 사항을 현제도 지키고 있다.43) 이상에서 보듯, 장로교의 찬송은 시편 이외의 성서의 말씀에 운율을 붙여 교리를 튼튼히 하고 확고한 신앙을 다지면서 발전해왔다.
4. 감리교
18세기의 메스디스트(Methodist)운동은 음악 문화에 있어서 특히 영국의 조합파적 종교 단체에 대해 영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 운동이 낳은 찬미가의 몇 곡은 전 세계에 있는 영어 관의 신교 안에서는 가장 애호를 받고 있다. 감리교회의 창립자인 존 웨슬레는 교회 이론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동생 찰스는 유명한 찬송 작가로써 6,500편 이상의 찬송을 만들었다. 특히 종교적인 체험을 서정적인 형태로 표현하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다. 웨슬레는 슈베르트가 그랬던 것처럼 선율 본능을 가지고 체험되는 신앙을 시적 형태로 바꾸어 찬송을 만들었다.44) 웨슬레 운동의 기본적인 교리는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속죄는 무한정 이어서 아무나 값없이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웨슬레 찬송어도 '모두','누구나'라는 단어가 자주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복암적 메세지는 당시 칼빈주의적인 선택 사상을 믿고있던 사람들에게 새롭고 도전적인 것이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웨슬레 찬송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45) 요한 웨슬레도 찬송에 흔미가 대단했다. 그는 모라비아 교도들이 부르는 찬송에 크게 감화를 입고서 여러 편의 독일어 찬송가를 영어로 번역했다. 그리고 웨슬레 자신도 몇 편의 찬송가를 작사했다. 따라서 웨슬레 형제를 복음 찬송의 창시자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쓴 찬송가 가운데에는 특히 찰스가 쓴 것이 그러한데 믿지 않는 형제들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는 내용의 찬송가가 퍽 많다. 가령 삶을 그리스도에게로 초대하는 초대의 노래가 그렇고 회개를 권유하는 권유의 노래가 그렇다. 그리고 어떤 찬송은 하나님의 자비를 몸소 체험한 사실을 증거하고있다. 위에서 말한 모든 것은 복음 찬송가에 나타난 특징들이다. 그러나 웨슬레가 쓴 전도 찬송은 그 질에 있어서 보통 복음 찬송보다 훨씬 높다고 할 것이다. 챨스 웨슬레가 작사한 찬송가중 500여 편이 지금도 불리어지고 있으며 20여 편 가량이 한국어로 번역되어있다. 벤슨 박사는 미래까지의 찬송보다 웨슬레가 쓴 찬송가를 부르면 노래의 색다른 분위기, 정서의 고양, 그리고 주제의 새로운 표현법에 눈을 뜨게 된다고 말했다.46) 실로 챨스의 찬송은 자신의 영적인 체험을 단순하고도 직접적인 방법으로 묘사한다. 그의 영적인 체험은 죄에 묶여 있는 영혼의 불안이나 회심을 통한 죄에서의 즉각적인 해방구원에 대한 확신이 찬송가에 그대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의 찬송은 크리스천의 시험과 승리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바라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웨슬레 찬송의 현저한 특색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도 왕으로써의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을 바라는 것이 그 특색이다.47) 존 웨슬레가 신앙적인 체험을 조직신앙으로 정리한 공로만큼 찰스 웨슬레는 교회음악에서 이룩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실로 감리교회는 존의 설교와 찰스의 찬송으로 이룩되었다고 보겠다. 그런데 이 찰스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찰스 2세는 당시 영국의 유명한 오르간 연주자였으며 사무엘은 작곡자겸 반주자였다. 이들은 바하를 좋아했고 또한 바하의 음악을 영국에 소개한 최초의 인물이다.
최초의 감리교 성가집은 1742년에 존 웨슬레에 의해 발행되었다. 화성 없는 선율만을 쓴 악보로 예술적인 기술이 결핍되어 있었다.48) 그 당시에 헨델은 감리교회의 음악을 위해서 3곡을 썼다. 그러나 감리교회의 찬송은 찰스 웨슬레에 의하여 신앙 체험을 서정적으로 고백하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5. 침례교
영국 침례교회에서 회중찬송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일반 침례교(General Baptist 또는 American Baptist)에서는 시편 가를 부를 것이냐 찬송가를 부를 것이냐 라는 무제로 회중 찬송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 특수 침례교(Particular Baptist 또는 Calvinistic Baptist)에서는 일반 침례교보다 회중 찬송을 더 많이 사용 하였다.49) 한편으로 영국의 침례교회 창립자인 존 스이스 (John Smith)는 침례교의 엄격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시편이 영적 예배의 일부이므로 시편을 오래할 때 책을 문 앞에 두는 것이 적당치 못하다고 했다. 노래하는 것을 허용하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것을 운율적 시편에서 그쳐야 하는지 찬미까지 확대할 것인지 악기의 허용 정도와 부인들의 참가 여부가 어떠한 것인지에 관하여 논쟁이 계속되었다. ' 천로역정의 존 번연 (John Bunyan)은 침례교회 목사였다. 번연의 저서에서는 일반 음악이나 무도에 반대는 하지 않았으나 그의 교회에서는 그의 생존 기간동안 어떠한 노래도 불리어지지 않았다.50) 얼마 후 감리교 운동에 자극을 받아 침례교회는 찬송을 많이 지어 출판하기에 이르렀다. 북부에서는 오케스트라까지 동원되는 합창 음악으로 발전하였고 헨델의 음악이 즐겨 연주 되었으며 마침내는 교회의 예배에서 기악과 합창이 같이 연주되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1638년 윌리암스 (Williams Roger)에 의해서 최초의 교화가 창립되었다. 1927년 미국의 총신자수는 8 ~ 900만이었다. 17세기 중엽 영국의 침례교회의 찬미가를 도입하였던 사람 중의 한사람인 자민키치의 아들 일거어스키치 (Elias Keach)가 펜실바니아에 있었을 때 그곳에 교회를 세우고 찬송을 보급 시켰다.51) 침례교회에서도 회중찬송에 대한 논쟁으로 찬송가의 도입은 서서히 이루어졌다. 뉴잉글랜드 지방의 초기 침례교회에서는 '베이시편가' (Baypsalm Book)를 사용하였다. 18세기 초에는 델라웨어 (Delaware)주에 정착한 웨일즈계 침례교도 (Welsh Baptist)들이 회중 찬송을 보급하기 시작했으나 1771년까지도 로드 아일랜드 (Rhode Island), 프로비덴스 (Providence)의 침례교회에서는 회중찬송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침례교회에서는 대각성 운동의 영향으로 왓츠의 찬송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많은 신자의 수를 갖고 있는 침례교회는 거의 대성당의 예배와 같은 예배를 드리고 음악은 대규모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침례교회에서는 여러 찬송가가 사용되었는데 가장 우수한 찬송가는 1843년 보스턴에서 출판된 "찬송가 작자"(The Psalmist)이다. 그런데 이 찬송가집에는 남부 지역에서 유행하던 많은 찬송이 빠져 있으므로 심한 반대에 부딪히자 1850년에 부록을 출판하였다.52)
가톨릭교회와 동방 교회를 제외한 기독교의 여러 파는 프로테스탄드라고 부르는 것이 보편적이다. 이 가운데에도 전례 예배에 있어서 음악의 도입방식이 가톨릭교회와 유사한 교파도 있고 그렇지 않은 교파도 있다. 영국 국교회 즉, 성공회 그리고 루터 교회 등은 전자에 속하지만 장로교, 감리교회, 침례교회, 성결교회, 등은 후자에 속한다. 후자에 속하는 이들 교파의 예배 형식은 서 유럽에서 중세에 완성하여 가톨릭교회 등에 의해서 보수된 전례를 극도로 간소화 시킨 것이다. 예배의 중심은 설교에 있으며 전례는 제 2차적인 의미를 차지하고 있다.53) 이들 교파의 찬송은 설교를 촉진시키거나 그 효과를 강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관념이 있고, 전례에 유기적으로 잘 연결되어 있지 않다.54)
개신교는 초기의 찬송과 악기가 금지된 때가 있었으나 운율적 시편에서 찬미가 확대되고 기악과 합창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특히 감리교회에서는 찬송을 많이 지었고 성가집을 발행하고 음악협회를 조직하여 연구와 보급에 힘썼다. 그 결과 설교의 분위기를 촉진시키고 예배의 정취를 향상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찬양은 설교의 분위기를 고조 시키는 역할로써의 찬양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이상에서 고찰한바 와같이 로마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내에서 일어난 복음주의 부흥과 그 뒤에 일어난 낭만주의 운동에서 종교적 감정은 주로 찬송가의 형태로 표현되었다. 찬송에 못지않게 예배 시에 오케스트라를 동원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교파도 많아지고 있었다. 악기를 사용하지 않는 교파는 전 교파의 1%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제 많은 사람들은 교회 공동체의 범위 내에서 - 그것이 로마 가톨릭이든, 동방 정교회든, 프로테스탄트 종교단체든 간에-- 보편주의와 복음주의의 진수 및 핵심을 포괄할 수 있는 보다 보편적인 예배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예배에서 찬송이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하게 되었다. 복음적인 순수한 예배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생활과 인격에 있어서의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는 찬양과 감사를 드리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각 교파의 찬송가는 그것을 창작한 사람과 그 사람이 속해있는 교단의 신학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반영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찬송가 통일은 작업에 어려움이 있다. 개신교 찬송가집의 특징은 한 교파나 한 교단에 치우치지 않고 넓고 다방면의 곡을 채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 가사의 바탕에 있는 신학 사상 또한 각양각색이다. 즉, 한 권의 찬송가 집에는 기독교 신학의 온갖 경향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55)
Ⅳ. 한국 교회의 찬송가 변천 (해방기를 중심으로)
한국교회의 찬송가는 한국교회안의 여러 신학적 문제들을 표면에 부각시키는 묘한 역사의 구실을 해 왔다. 가령 토착화의 실현 여부나 그 깊이, 토착 신앙 표현의 언어 문제, 선교사들의 영향 범위와 그 성격, 교파간의 협력관계나 교파간의 여러 상극된 문제들이 그런 것들이다. 더구나 1935년 교회 분열의 위기속에서 이 찬송가가 차지하였던 위치는 실로 막중하였다. 여기에서는 해방을 중심으로 찬송가의 변천을 살펴보고, 문제를 점검해 보는데 중점을 두고자 한다.
1. 해방 이전
이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화가 이루어진 역사와 함꼐 찬송가도 그 역사를 함께 하였다. 한국 선교와 찬송가가 필수적으로 함께해야 했는데 서양의 음악을 모르는 우리 민족에게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를 드리는데 필요한 음악을 어떻게 가르치느냐 하는 문제는 실로 큰 것이었다.
1885년 4월 5일 미국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 (UnderWood)가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 (Henry Gerhart Appenzella)부처가 인천에 상륙하여 선교활동과 교육 사업을 펼쳤을 뿐 아니라 최초로 찬송가를 발행했던 사실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한국교회 최초의 찬송가는 감리교의 존스 (G.H.Jones)와 로스 와일러 (L.C.Roth Weiler)가 펴낸 『찬미가』로 1892년 수형본 (手形本)으로 보급되었다. 이 찬미가는 악보가 없고 가사로만 된 찬송가였고, 당시의 번역 찬송 27편이 수록되어 있었다.56) 한국말 번역찬송이 나오기 전의 초창기 교인들은 중국 찬송을 우리말 발음으로 불렀음을 찾아 볼 수 있다.
당시에는 교회에서만 아니라 기독교계학교에는 창가라고 하여 찬송가를 가르쳤는데 주로 찬미가를 번역하여 가르쳤다. 이처럼 찬송가는 한국 개화기에 등장한 서양 음악인 동시에 한국의 신문화에 기여한 바가 크다고 하겠다.
그 뒤 언더우드가 1894년에 규모를 갖춘 한국 최초의 찬송가인 『찬양가』(전 117장)를 펴냈다. 찬양 가에는 18-19세기 영국 및 미국의 찬송과 특기하게 한국인 찬송 (창작) 7편이 수록되었다.
이 찬양가가 남긴 특수한 공헌을 보면,
첫째, 그리스도의 대속을 가능케 하신 하나님 사랑에 대한 기쁨으로 찬양의 뜻을 상기하는 점이다. 둘째, 이 찬양 가에서는 언더우드의 장로교의 교회론을 은연중에 표현하고 있다. 셋째, 그의 찬양 가는 117장중에서 7장의 한국인의 작사 노래를 편입하고 있다. 이러한 한국인 작사자들의 이름이 나타나 있지 않아서 유감이다. 찬양 가에 수록된 한국인의 찬송이 비록 시적인 구성의 세련미는 없어도, 초기 교인들의 토착 신앙의 고백이어서 그들의 신앙 유형을 아는데 많은 참고가 되고 있다.57)
뒤이어 감리교에서는 언더우드의 『찬양가』사용을 거부하고 존스와 로스와일러 공동 편집으로 1895년 1892년의 한미 간의 수정 보완하여 81편의 『찬미가』를 발간하였다. 이는 복음의 주제를 망라해서 표현했고 또 성탄과 같은 절기에 쓰일 노래를 충당해 주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찬송가의 국조에 대한 시사를 하되 미국 감리교회나 기타 알려진 찬송가의 곡조 번호를 알려서 거기 따라 선택해서 부를 수 있도록 편찬한 점이다.58) 찬미가 역시 번역과 그 한국말 표현에 고민한 흔적이 있으며 초창기 교회의 찬송가는 영어보다 대개 중국어에서 번역되었다.
그러다가,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가 찬송가 통합을 원하여 찬송가 위원회가 발행한 1908년의 『찬송가』는 1권으로 되었다. 이 책의 1908년 출판부수는 6만부였고, 2년 후에는 225,000부로 되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59) 찬송가의 곡수는 무려 262곡으로 증가 되었고 이 찬송가의 중판은 물론 신도수의 증가를 뜻하는 것이다.60)
우리나라에 있어서 서양음악의 시작인 찬송가가 서구의 경우처럼 작곡 인에 의해서 창작된 것으로 시작하지는 못했지만 한국 사람의 생활의 한 과정을 형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에 있어서의 찬송가는 교회 내에서의 예배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서양 음악도입과 신문화의 모체임으로 그 역사적 의의는 참으로 크다고 하겠다. 그러나 한국에 있어서 개신교의 찬송가는 한국의 서양음악을 가능케 했음뿐 아니라 『애국가 운동』과 『창가운동』의 전개로 이 나라 내셔널리즘의 기치가 되었고 신문학 운동, 나아가서는 예술 가곡과 대중음악 (유행가)에 이르기까지 실로 한국 근대 문화의 모체가 되었던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찬송가는 점점 민족의 심령 속에 파고 들어갔다. 찬송을 통하여 울분을 터뜨리기도 하고 찬송으로 민족의 마음을 표현하기도 하고, 달개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교회 내에서 예배용으로 쓰이던 찬송가는 일종의 사회 참여 형식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더불어 신학문, 신시운동의 모체가 되기도 하므로 역사적 의의는 자못 크다.61)
19세기 말 "한국 교회의 특징은 황제에 대한 충성과 애국의 열정"이었는데 이러한 것은 신자들의 노래를 통해서 잘 표현되었다.62)
쇠퇴해가는 국문과 외세의 압력을 받던 당시 한민족에게 황제는 나라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였으며 충군과 애국의 정신이 신앙적인 표현으로 나타난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민비가 시해되었을 때 백성들은 모여서 통국하며 울부짖으니 그것이 합동 추도 예배이었다. 이와 같이 국가적인 기쁨과 슬픔이 찬송가로 승화 되었다. 초창기 한국 신자들은 기울어져가는 나라의 국운을 바라보며 애국 애족하는 민족정신과 독립정신이 기독교의 신앙과 융화되어 찬송가를 통하여 표현됐던 것이다.
이렇듯 나라를 잃고 주체성을 상실한 이 민족은 유리방황하는 상태였으므로 복음을 잘 받아 들였다. 곳곳에서 열리는 사경회나 부흥회는 이 민족의 애환을 달래며 하늘나라의 소명을 심어주는 놀라운 일을 감당하였다.
각지의 교회에서는 신도들이 자유와 함께 피어오른 개신교의 부흥과 때를 같이하여 한국 내에서는 찬송가의 노래 소리가 교회의 종소리와 함께 도처에서 울려 퍼졌고 마침내는 골목과 거리에 까지 퍼져 나갔던 것이다.63)
또한 찬송이 교회 부흥의 원동력이 된 것은 1903년에 시작된 새벽 기도회였다. 신학생들과 열성 있는 성도들이 새벽기도에 동참하게 되었고 사람이 늘어나자 성경 읽고 찬송 부른 후에 함께 기도를 했다. 부흥의 불길은 거세게 타오르면서 온 나라를 휩쓸어 전체 한국 기독교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던 1907년의 대부흥 운동에서도 찬송의 위력을 나타냈다. 은혜로운 성도들은 수 개월간 함께 모였는데 사람마다 기뻐 찬미하며 춤을 추는 자도 있었다. 그리고 교우 중에 초상이 나면 교인들이 상여를 메고 길에서 찬미를 부르며 갔다.64)
이러한 장례식을 통해서도 찬미는 복음 전파의 길잡이가 되었다.
그동안에 발간된 찬송가를 교파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65)
1900년에 침례교회에서는 복음찬미가를 사용하였고, 성공회에서는 1903년,1904년에는 천도찬가를 발행하였다. 1908년에 장로교와 감리교에서는 연합찬송가를 발간하여 20여 년간 사용하였다. 1911년에 성결교회에서는 복음 가를 발행하여 사용하였고 1912년에 구세군은 구세군 가를 발행하였다. 성결교회에서는 1911년에 발간된 복음 가를 증보하여 1919년에 신정 복음가를 출판하였다. 1924년에 천주교에서는 조선어 성가를, 1928년에는 장로교, 감리교, 연합성공회가 개편의 필요성을 느끼고 신정찬송가를 발간하였다. 그러나 장로교회에서는 이의 사용을 거부하고 400장으로 된 신펀 찬송가를 단독 발간함으로써 합동은 깨어지고 감리교회에서만 신정찬송가를 사용하게 되었다. 1930년 성결교회에서는 신정 복음가에 40여 곡을 증보 하여, 부흥성가로 개제하여 출판, 사용하였다. 이로써 교단마다 자기 나름의 찬송가를 가지고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2. 해방이후
한국교회가 일본의 잔인한 박해를 받아 온 역사는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에서 그 절정에 올랐다. 이 무렵이 한국 교회의 수난기요, 교회음악의 암흑기였다.
그러나 벅찬 감격을 안겨준 8.15해방은 이 땅에서 참다운 교회 음악이 발전을 기약해 주는 전환점이 되었다. 해방과 함께 느낀 것이 합동 찬송가 발행의 필요성이었다.
1946년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세 교파에서는 찬송가가 하나됨을 원하여 1년간 연구한 결과 세 교파에서 사용하는 찬송가 중 각 교파의 특이한 것은 전부를, 편입하도록 하고 공동의 것은 그 가사를 적절히 선택하여 편입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1948년 각 교파 총회에서 정식 결정을 얻은 후에 총 586장을 수집하고 부록에 성경 교독문을 첨부하여 1949년 『 찬송가』의 명칭으로 편찬 출판하여 내어 놓았던 것이다.66)
이 찬송가는 한국인의 창작 찬송도 실리지 못했다. 단지 해방의 기쁨을 가지고 연구할 겨를도 없이 만들어진 것이어서 결함이 많았다. 그러나 우리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3대 교파가 동일한 찬송을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점만으로도 그 지니는바 의의는 크다고 할 수 있으며, 하나의 찬송을 부르는 교인들의 감격은 있으며 1969년 개편 찬송가가 나오기 까지 합동찬송가는 무려 20판을 거듭 출판되었다. 성장하는 청년들을 위한 청년 찬송가도 발간되었다. 이 찬송가를 가지고 신앙이 강한 분이 신앙이 약한 분들을 더 잘 이끄는데 사용했다.67) 이 청년찬송가의 특징은 젊은이들의 신앙생활과 기질에 적합한 곡으로 되어있고 또한 곡과 가사가 잘 조화된 것이라고 하겠다.
장로교의 고려 파는 옛 신편 찬송가를 (1935) 그대로 사용하여 왔으며, 1957년 부터는 찬송가 편찬 위원회를 구성하고 찬송가 편찬을 추진하던 중 1959년 장로교에서 통합과 합동파로 분열함에 따라서 찬송가로 에큐메니칼 사업적 성격을 띠었기에 거절한다는 합동파의 발언 등으로 가중 되었다.68)
그러다가 합동파와 고신파에서 1960년 두 총회기념사업의 하나로 새 찬송가를 출간 하였다. 새 찬송가는 (신편 찬송가를 기초로) 구미 각국의 우수한 찬송을 첨부하여 원작에서 직접 번역하는 원칙으로 편찬하였다.69)
보수 신앙의 보존을 다짐하면서 발간한 새 찬송가에는 한국인의 시작과 곡조가 결여 되어 있었다. 다른 한편 감리교와 장로교 및 성결교에서는 기독교 연합회와 함께 1957년 합동 찬송가 개편위원회를 결성해서 1963년부터 개편 작업에 착수하였다. 개편의 원칙은 중첩된 것의 단일화 국가(國歌)및 민요 등 형태의 곡조와 가사의 재검토, 종류별 편찬의 유의, 예배용 찬송의 보강, 특정 예배용 찬송가의 보강, 한국가사와 곡조의 보강을 통한 토착화의 지향, 교독문의 보충, 가사의 전면적 검토, 이러한 것들이었다. 이런 원칙을 갖고 한국인 작사,작곡 27편을 포함한 600장의 『찬송가』가 1967년 간행되었던 것이다.70)
이 찬송가의 장점으로는 예배와 행사를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찬송이 분류되어 있으며, 가사와 곡이 부합되도록 하여 무리한 가창을 피했다는 점이다. 개편 찬송가는 종래의 한국 찬송가가 선교사들이 전도의 목적으로 사용했던 복음가, 부흥 가들로 주축을 이루고 있었음에 비하여 예배찬송과 교회의 의식에 관계된 찬송을 많이 보강하므로, 부흥회 중심의 경향에서 예배중심의 찬송가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또한 과거 천당에 대한 타계적인 찬송이 많이 감소된 반면 현세적이고 기독교인의 자세와 윤리를 강조한 찬송으로 대치되었으며 가사가 현대어로 수정된 것을 볼 수 있다.
런데 이『찬송가』에 대한 비판이 곧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비판 속에는 가사의 변경 등이 언급되어 있었으나 중요한 것은 찬송의 "생성"의 문제였다.71)
이런 비판과 함께 1974년에 조직된 찬송가 통일을 위한 특별 위원회는 전국 교회에 설문지를 통한 여론조사 결과, 전국교회의 95%가 하나의 찬송가를 바라고 있음이 드러났다.72)
드디어 1976년 6월 15일에 제 1회 찬송가 통일 위원회가 조직되어 중요 교단 18개 교단 지도자 협의회에서는 찬송가 합동 추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여기에서 결의된 사항73)은 다음과 같다.
① 찬송가를 하나로 하는 것은 전체 한국 교회의 지상 과제이며, 전 교회 신도들의 염원이므로 교파를 초월하여 추진함을 원칙으로 한다.
② 한국 교회가 각각 쓰고 있는 찬송가(새, 합동, 개편)를 하나로 편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③ 찬송가 합동 추진 위원회는 이 일을 위하여 찬송가 위원회 측과 새 찬송가 발행처와도 협의한다.
이러한 원칙하에 이루어 졌던 통일, 찬송가작업이 마침내 빛을 보게 되었다.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1981년에 한국 찬송가 공회가 조직된 이래 3년 만에 558장으로 엮어진 찬송가가 발행되었다. 이 찬송가는 광범위하게 서로의 의견을 모아 신앙의 전통과 기독교적 삶의 실천화라는 입장에서 종합하려고 했다.
개편 찬송가와 비교해 보면
① 예배 찬송이 줄고 복음성가가 많아졌고 ② 아멘이 대폭 줄었으며 ③ 항목별 분류도 정확치 못하게 나누어 졌다. ④ 한국인이 작사 작곡한 찬송이 27곡에서 13곡으로 14곡이나 줄었다. 그렇지만 대다수의 교회가 하나의 찬송을 부르자는 데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두 가지의 귀한 책이 있는데, 하나는 말씀이 계시된 성경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 수록된 찬송가이다. 우리는 말씀과 찬양으로 경건히 예배를 드리고 더 나아가 주께서 맡겨주신 선교적인 사명을 다해야 하며 이 하나 된 찬송가의 출판이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모든 성도들에게는 큰 기쁨이 되길 바란다고 서문에서 밝힌다.74)
한국 교회가 선교 100주년을 앞두고 통일 찬송가를 발간한 것이야 말로 무엇보다도 뜻 깊은 일이었다.
Ⅴ. 찬송가의 한국화
1. 전통 음악의 위기
우리 전통 음악의 상실은 남들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안타깝게도 우리 음악 사회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1981년의 중고생 음악 참고서에는 '음악은 어떤 과목인가'에 '위대한 악성 베토벤의 음악은 철학이나 신학보다 훨씬 더 높은 하나님의 계시'라는 말을 인용하고, '예를 들어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모르는 사람은 말하자면 그만큼 정신세계가 빈약하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풀이한다. 문제는 인간과 음악을 설명하면서 베토벤은 인용되어도 그와 같은 시대의 정약용(1762-1836)은 그 정신적 영향에서 배제되어 있다.75) 이러한 점을 보더라도 얼마나 우리의 음악문화가 서양 편중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예이다.
서양 음악은 서양대로, 우리의 음악은 우리의 음악대로 가치가 있는 것이지 서양의 것이니까 모두 우위를 점하고 우리의 것이니까 전부 퇴영적인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운영의 말은 우리에게 큰 의미를 준다. "나는 항상 배외사상을 경계한다. 다시 말해서 외국 작품만 숭상하는 나머지 내 나라의 것을 무시하는 것도 잘못이고 내나라 작품을 존중하는 나머지 외국 것을 경시하는 것도 큰 잘못이다. 우리는 문화적으로 고립되어서는 안된다.76)
음악에는 수백 년 수천 년 흘러온 민족의 정서가 있다. 그것은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르다는 차원이 아니라 서양인의 정서에는 서양의 음악이, 우리의 정서에는 우리의 음악이 보다 더 어울리는 것이다.
2. 한국 교회와 음악
기독교의 전래는 이 한반도의 문화에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다. 미국의 남.북 감리교를 비롯한 개신교의 선교 단체들은 본국의 교회문화를 고집하여 한국에 와서 이를 고치려 하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제사문제는 가장 중요한 쟁점의 하나였고, 무속신앙 금지, 축첩 금지, 안식일 노동금지, 주초 금지 등은 우리의 전통 문화와 대단한 갈등을 일으켰다. 이러한 갈등 구조는 오늘날에도 형태와 내용에 있어서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계속되고 있다. 한국의 토속적 요소가 많은 음악은 교회 내에서 반감을 일으키기 쉽다. 그러나 서양적인 음악은 그런 반발을 받지 않는다. 왜 토속적 음악을 거부하는가 하는 면을 따지면, 주로 무당의 음악 ,기생의 음악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새로운 찬송가 편찬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었다. 우리의 음악이 무당의 음악, 기생의 음악이 아닌 오늘날에도 이러한 흐름은 끊이지 않고 있다.
선교사들의 교회가 전파한 서양식 교회 노래는 교회가 의도했건 안했건 간에 교인들에게 서양 중심적 사고, 서양 문화에의 동경, 서양의 정책과 행동에 대한 묵시적 동의를 유발 하였다.
3. 찬송가의 한국화
한국 교회에서 애창되고 있는 찬송가100장중에서 작곡자의 국적을 살펴보면 미국인의 것이 59곡이고, 영국인의 것이 21곡, 독일인의 것이 13곡, 이태리인의 것과 프랑스인의 것이 각각 한 곡이고 국적 미상이 6곡이다. 가장 오래된 것은 루터의 "내 주는 강한 성"(384)으로 1529년 작이고, 가장 신곡은 "너의 죄 흉악하나"(187장) 돈(Willian H.Doane)의 1887년 작이다. 최고령의 것은 400년 이상의 것이요 최신의 것이라 할지라도 100년 전의 것이다.77)
이 통계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문화면에 비추어볼 때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한국 교회가 복음을 받은 지 100년이 넘었는데도 한국적인 찬송가를 생활 속에 끌어들이지 못함은 우리 모두의 반성할 일이다. 우리 감정에 맞고 마음이 끌리어 쉽게 동화되고 빨리 흡수되는 음악의 토착화가 필요하다. 한국 찬송가의 토착화는 한국 고유의 가락이나 장단을 사용하여 특이한 작품을 만든다기보다는 한국 기독교인의 진정한 신앙을 가장 성실하고 아름답게 표현 할 수 있는 작품이 만들어 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67년에 나온 개편 찬송가의 편집 당시에는 한국인 찬송가를 한편이라도 더 수록하기 위하여 그 동안의 곡과 새로운 곡을 모집하여 27곡을 엄선하여 수록한 사실이 있다. 그러나 1981년에 나온 한국 찬송가는 한국 찬송가 위원회에서 매년 신작 찬송가를 공모하여 선정함에도 불구하고 전연 검토되지 않은 사실이나, 한국인 곡도 불과 16편 밖에 수록되지 않았음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하나님은 서양 음악만을 좋아하시고 한국 음악은 싫어하는 분이 아니시다. 우주적 하나님이시기에 찬송가의 한국화 작업은 어느 서양 곡조에 맞추는 소극적인 것보다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우리야말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를 써서 우리의 고유한 음악적 자산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을 만들어 불러야 한다.
한국 찬송가를 부르는 사람은 한국인이기에 오랜 기간 동안 맺혀온 신앙의 감동, 그 남긴 흔적, 그래서 저절로 솟아나 밴 가락과 토착적 언어가 시로, 곡으로, 편곡으로 된 것이어야 참다운 한국화의 자세가 아닐까 한다.
Ⅵ. 결론 및 제언
1. 결 론
교회사를 볼때 신학과 교회와 찬송가는 언제나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발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 시대의 신학적 운동이 항상 그 시대의 찬송가를 만들어 낸 것이다. 모든 위대한 종교 운동은 노래를 동반해 왔으며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권위와 종교적인 음악적 표현에 대한 오랫동안 굳혀진 평판과 규범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다.
부흥 운동의 정신은 보다 생명력 있고 열정적인 형태의 노래를 요구 헀으며 마침내 영적인 찬송을 만들어 내었다. 16세기의 종교 개혁은 교회 음악사에 획기적인 하나의 전환점 이었다. 또한 어떤 나라든 종교 개혁이 있으므로 해서 그 나라 교회음악은 민중의 언어를 사용하고, 그 언어 구조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음악이 만들어 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아가 18세기의 영어 찬송가에 의해 꽃 피었다.
외국 찬송가에 나타난 요소와 요인들이 그대로 한국 교회사 속에도 꼭 같이 작용 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아쉽다면 토착 신앙과 그 표현 가락의 현상적 결여, 개편을 위한 개편작업, 이권의 개입 등이 그런 것들 중의 하나이다.
성서 번역과 함께 찬송가 번역 보급이 진행되고 교회당의 건축과 함께 교회음악이 발전하기도 했다. 찬송가가 한국 교회의 발전과 사회의 근대적 정서 활동에 미친 영향은 실로 교회 역사의 범위를 훨씬 뛰어 넘는 위대한 것이었음은 더 불어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2. 제 언
"말은 우리들의 사상에 말하지만 음악은 우리들의 마음과 영혼에 그것도 영혼의 핵심과 근저에 말한다."고 킹슬리(Kingsley)는 말한다.78) 이렇듯 음악은 실로 중요하며 특히 찬송가는 그 역할을 재인식 하여야 한다.
앞으로 우리는 한국교회 음악의 시대적 사명, 그 사회적 위치, 종교적 발전, 문화적 차원의 연결 등을 체계적으로 논증하고 설명하는 이론 전개의 한 논단 형식이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찬송가의 역사적 위치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될 것이며, 개방적 긍정 평가를 하여 교회 전체의 발전에 영향을 끼치리라고 본다.
종교개혁 이후로 독일의 코랄, 제네바의 시편가, 영국의 English Chant 등이 생성되었음은 한국의 찬송가도 한국민의 언어를 사용해야 하며, 또 그 언어에 맞는 새로운 형태의 음악을 창출해야 한다고 본다. 독창적이고 순수한 한국 교회의 찬송은 근본적이고 중대한 과제이다. 한국적인 언어와 음악이 필요하며, 또한 예배의 갱신과 찬송의 신학적 체계화, 예배에서의 중추적 기능 확보로의 신앙의 응답이 찬송 속에서 가장 본질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며, 사회가 변할지라도 교회의 내용이며 목적이 되는 예배를 소홀이 할 수 없듯이 찬송가가 갖는 비중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찬송가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더 훌륭한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교회 부흥과 선교적 사명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