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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송축하라
시편 103:1~14
이 시편은 표제에 있는 대로 다윗의 시입니다. 그러나 어느 때에 저술이 되었는지는 확실히 알기 어렵습니다. 이 시편의 저자인 다윗은 첫째로 자기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은총을 감사하고,(1-6절) 그 다음으로 모든 성도들이 공통적으로 받은 사죄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합니다.(7-18절)
다윗은 자기의 심령과 서로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시를 시작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그 영혼이 주인이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을 송축함에 있어서 그 영혼을 불러 깨웁니다. ‘내 속에 있는 것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참여할 수 없다면 참된 찬양이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는 전인적(全人的)인 찬양이 필요합니다.
에베소서 5장 16절에도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영혼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송축해야 합니다. 서양말 중에 “소울 음악은 음악의 혼이다”(Soul music is soul of music.)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 어느 성악가가 노래를 부릅니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연마된 기술을 동원해서 정확한 음정과 감정을 표현하며 노래합니다. 그러나 그가 부르는 노래가 영으로부터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면 훌륭한 예술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을 학문에서는 감정의 표현이라고 하지만, 올바른 감정의 표현은 그 영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흑인들이 부르는 영가를 들을 때 듣는 이의 가슴에 무엇이 와 닿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 하면 그것은 그들이 당하는 억울함과 분함, 그리고 억눌림과 소외당함 속에서 부르는 노래이기 때문에 마음에와 부딪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목소리로 하는 노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오르간을 쳐도 손가락으로 오르간의 건반을 누르고, 눈으로 곡을 보며 박자나 강약을 지켜 연주를 한다고 훌륭한 음악이 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음 자체가 정확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훌륭한 연주자는 자신의 영혼에서 만들어지는 음을 오르간을 통해서 연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다윗은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고 했습니다. ‘내 속에 있는 것’은 내장 부분을 가리키는데 전 내장을 동원하여 송축하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송축의 방법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렇게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통하여 전 심령으로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을 원하시고 또한 기뻐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전심으로 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신명기 10장 12절에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도 전심으로 섬기라고 하였습니다.
신명기 13장 3절에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도 전심으로 사랑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신명기 30장 2-3절에 보면 “너희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순종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서 네 포로를 돌이키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전심으로 순종하는 것을 바라십니다.
신명기 30장 9-10절에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여 이 율법 책에 기록된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여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육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도 온전한 마음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열왕기상 2장 4절에 “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이 그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도 전심으로 행하라고 했습니다.
열왕기상 14장 8절에 “너는 내 종 다윗이 나의 명령을 지켜 전심으로 나를 좇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도 전심으로 따라야 합니다.
잠언 3장 5절에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주님을 전심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송축해야 합니까?
2절 하반절에 보십시오.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아야 하나님을 송축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왜 찬송이 없습니까? 왜 우리 마음 속이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고 늘 기억하는 사람은 그 마음에서 찬송이 떠나지 아니합니다. 사람의 약점 중의 하나는 은혜를 잊기 쉬운 것입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 중에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섭섭했던 일, 가슴 아팠던 일은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잊어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고마왔던 일은 얼마 안 가서 다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을 불러 깨워서 감사하려고 하면 은혜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무슨 은혜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까? 은혜 중의 은혜는 사죄의 은혜입니다. 3절에 보면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죄는 사하시고 어떤 죄는 사하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죄를 사하십니다. 죄가 크든지 작든지 그 값은 사망입니다. 큰 바위도 물에 가라앉고 작은 돌도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야고보서 2장 10절에 “누구든지 온 율법을 다 지키다가도 그 하나에 거치면 모든 것을 범한 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을 때 몇 가지 죄만 사함 받고 나중에 또 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죄를 다 사함 받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죄가 얼마나 많은가요?
시편 40편 12절에 보세요.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머리털의 수를 셀 수 없음같이 죄를 셀 수 없이 많이 범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죄를 무관심하게 지낸다면 사실 이것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병이 들어 있어도 고칠 생각을 하지 아니하면 이것은 심각한 일입니다.
잠언 14장 9절에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이 많은 죄, 더러운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완전히 사해 주셨습니다. 주홍같이 붉은 죄를 흰 눈같이 희게 씻어 주셨습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완전히 옮기셨습니다. 아무리 무서운 죄를 범한 사람이라도 십자가 밑에 나아가기만 하면 무조건 용서하여 주십니다. 따라서 죄악 벗은 우리 영혼이 기뻐 뛰며 주를 찬송하게 됩니다.
1. 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
내 죄를 정케 하신 주 날 오라 하시네
후렴 : 내가 주께로 지금 가오니
골고다의 보혈로 날 씻겨 주소서
2. 약하고 추해도 주께로 나가면
힘 주시고 내 추함을 곧 씻겨 주시네
3. 날 오라 하심은 큰 믿음 주시고
또 평안함과 사랑을 다 얻게 함이라
4. 큰 죄인 복 받아 빌 길을 얻었네
한없이 넓고 큰 은혜 늘 내려 주소서
5. 그 피가 맘 속에 큰 증거됩니다
내 기도 소리 들으사 다 허락하소서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가 죄사함 받게 되었으니 찬송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죄로 말미암아 말할 수 없는 고민을 하다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은사를 깨닫고, 로마서 8장에 가면 승리의 개가를 부른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고민할 때와 송축할 때를 비교하면 얼마나 장쾌합니까?
그리고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라고 했습니다. 시편 147편 3절에 보면 “여호와는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의 병을 고쳐 주십니다. 히스기야 왕을 죽을병에서 살려 주셨습니다. 나아만 장군의 나병을 고쳐서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베데스다 못가의 38년된 환자가 성하게 되었습니다. 반신불수 병든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그가 누워온 들것을 메고 돌아갔습니다.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육신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심령의 병도 고치십니다. 그래서 새 힘을 얻어 일하게 하십니다. 더구나 우리를 위험으로부터 구출해 주셨습니다. 인간은 우리가 범한 죄, 그리고 육신의 병 뿐만 아니라 그의 원수들에 의해서 위협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합니다. “그는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했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파괴자로부터, 지옥으로부터, 둘째 사망으로부터 구속해 주셨습니다. 영혼의 구속은 귀중한 것입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그의 은총으로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위험한 자리에 있을 때 주님께서 보이지 아니하는 손으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구출해 주신 일을 생각할 때, 만 입이 있다 해도 감사와 찬송을 다 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음과 파멸에서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영광과 기쁨과 장수로 우리에게 완전한 행복을 안겨 주십니다.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명예와 영광, 기쁨과 장수)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가 바라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소원을 채워 주십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을 보면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지각에 넘치는 것으로 채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했습니다. 독수리는 날개 있는 짐승의 왕이요, 얼른 노쇠하지 아니하고 오래 사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전에 독일의 나치 히틀러의 상징을 독수리로 했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40장에 보면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순간 순간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6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모든 자를 위하여 판단하시는도다”라고 했으며 그 말씀에 이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할 이유를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당하는 억울한 일을 판단해 주십니다. 성도들은 마귀를 대적하기 때문에 때때로 악에게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마귀 사이에 판단을 내리십니다.
하나님은 무죄한 자의 후원자이시며, 억울한 일 당하는 사람의 호소를 들으십니다. 교만한 자를 비천하게 하며, 무력한 자를 돕는 것이 그의 영광입니다.
7절은 “그 행위를 모세에게 그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마음이 깨끗하고 정직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선하십니다. 그는 그 당시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막대기 뿐 만이 아니라 오고 오는 세대에 그의 붓으로 “그 행위를 모세에게, 그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하고 쓰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그의 백성이 받는 축복 중에 가장 큰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심으로 우리를 그에게 돌아가게 하시며 우리에게 확실한 지식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그 행위와 행사를, 다시 말하면 그의 성품과 인생들을 대하는 방법을 그의 백성에게 알리셨습니다. 그의 행위에 의해서 우리는 그의 섭리와 그가 원하시는 바가 무엇임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그의 행사에 의해서, 다시 말해서 그의 계획에 의해서 그의 약속과 그가 우리와 함께 하고자 하는 목적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공정하게 대하십니다.
8-12절에서는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가 어떠한가를 말씀합니다. 8절을 보십시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출애굽기 34장 6, 7절에 보면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가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 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이렇게 하나님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반포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시는 것이 나의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십니다. 당장 화를 내지 아니하십니다. 그는 우리가 잘못한 것을 극단적으로 징책하거나 우리에게 곧장 채찍을 가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괘씸해도 오래 참으시고 벌하기를 연기하시며, 그래서 회개할 수 있는 여유를 주십니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이 풍부하신 분이 아니시고 자비의 아버지가 아니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 아니셨다면, 벌써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다 멸망 받고 말았을 것입니다.
혹시 노하셨다고 하더라도 그 노를 오랫동안 품지 아니하십니다. 본문 9절을 보십시오. “항상 경책치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영원한 자비로 우리를 모으십니다. 이사야서 54장 8절에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서 57장 16절에 보면 “내가 영원히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장구히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나의 지은 그 영과 혼이 내 앞에서 곤비할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보아도 이것은 실제로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희가 범죄 하면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회개하면 언제나 진노를 그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10절에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죄가 있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이 말씀이 너무나 진리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을 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왜냐 하면 로마서 2장 4절에 있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참으심은 우리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시기 위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죄악 뿐만 아니라 죄과도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어떻습니까? 11절에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하나님의 자비는 그를 경외하는 사람,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말로 다 할 수 없이 큽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선하심을 경외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완전하심과 그 자비의 풍성함을 보십시오. 12절에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니”라고 했습니다. 다시는 우리가 죄과에 놓이지 아니하고, 우리에 대한 심판이 내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죄과를 아예 멀리 옮기셨습니다. 믿는 자들의 죄는 하나님이 더 이상 기억도 하지 아니하시며, 그것에 대해서 다시 언급도 하지 아니하십니다. 찾으려 해도 다시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철저하게 죄를 버리면 하나님도 철저하게 그 죄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요한 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동정하십니까? 본문 13, 14절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불쌍히 여기십니까?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불쌍히 여기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대하실 때 아버지가 자식에게 대하듯이 부드럽게 대하신다는 말입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들이 완고하게 그럴 때도 불쌍히 여기며 참으십니다. 그들이 병에 걸리면 불쌍히 여겨 위로합니다. 저들이 넘어지면 강한 손으로 붙들어 일으킵니다. 복종하지 아니하고 대항해도 불쌍히 여겨 용서합니다. 악을 행해도 불쌍히 여겨 고쳐 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불쌍히 여기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체질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우리의 체질을 아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우리를 진토로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의 구조 뿐만 아니라, 우리의 체질을 아십니다. 그는 우리의 육체가 얼마나 약하며 우리의 심령이 얼마나 어리석고 참을성이 없는가를 너무 잘 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15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 다음절(16-18절)을 보면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 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곧 그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며 불쌍히 여기시는 것을 생각할 때 너무 감사 감격해서 이 시인은 모든 피조물에게도 찬송을 전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자신의 마음의 상태가 이만큼 중요합니다. 내 마음에 기쁨과 평화와 사랑과 감사가 없으면 세상 만사가 다 그렇게 보입니다. 반면에 우리 마음 속에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감사가 있으면 모두가 감사 감격스러워 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의 마음 속에 다윗의 감사와 감격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성경본문: 시편 103: 1-14
조금씩 나이가 들면서 하나 느끼는 것은 잘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가끔씩 잊어버리고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메모를 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메모지를 어디에 두었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아주 귀중한 물건들은 깊숙이 잘 두려고 잘 감추어 두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어디에 두었는지 몰라서 온 집안을 뒤질 때가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
뭐 저의 아내나 저나 여러분들과 비슷하니까 대게 비슷할 것입니다.
집사람이 예전에 자꾸 가스 불을 켜놓고 밖에 나갔습니다.
한번은 우리 아이가 밖에 나갔다 들어와 보니 집안에 연기가 가득하고 위험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현관문 앞에 “가스불 확인! 가스 조심!”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부터는 좀 조심하는 것 같았습니다.
또 집사람을 보면 차를 주차해 놓고는 아침에 자기가 차를 어디에 주차해 놓았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아파트 지하 1층인지, 지하 2층인지, 지상인지 구분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한참 생각하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저도 좀 비슷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커피믹스를 잘 먹는데 커피믹스를 먹기 위해서는 보통 물을 데우고, 찻잔을 놓고, 끄트머리를 가위로 자르고 찻잔에 커피를 붓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그 껍데기만 쓰레기통에 넣어야 하는데 커피를 그만 기껏 잘라서 쓰레기통에 부어버렸습니다.
‘아 이럴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아가면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보통 ‘건망증’이라고 합니다.
차문을 잠갔는지 안 잠갔는지 다시 확인해 볼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 잊어버려도 진짜 잊어버리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은혜를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다른 건 다 잊어버려도 은혜를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은혜의 건망증은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은혜를 잊어버리면 심각해집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나누시면서 하신 말씀이 “너희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올 때까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이 기념하라는 말은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사실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보혈을 흘리심으로 내 죄가 용서받은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잊어버릴 것이 있고,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마지막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까지 이 은혜의 사실만은 여러분의 마음에 꼭 새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10명의 문둥병자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데 10명의 문둥병자를 만났습니다.
이 문둥병이라는 것은 천형입니다. 가족들과 같이 지낼 수가 없습니다. 동리에도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지난번에 돌아가신 원로 목사님의 사위가 고흥에 기독안과라고 개업을 해서 장로님들과 멀리 심방을 간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소록도가 가까웠습니다.
소록도 앞에 바라보이는 횟집에서 점심을 먹고 이왕 온 김에 소록도에 한번 가보기로 했습니다.
예전에는 배를 타고 갔지만 지금은 다리가 놓아져서 잠깐이면 건너 갈 수가 있었습니다.
소록도라는 곳은 한번 들어가면 평생 죽을 때가지 못하는 무서운 곳이었습니다.
한번 나병에 걸리면 가족과 영원히 결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소리칩니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너희 몸을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좋아가지고 제사장에게 갔습니다.
제사장은 그 당시 의사였습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건강 진단을 받고 병이 다 나았으면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제사장에게 가다보니 문둥병이 깨끗이 나은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들 대부분은 제사장에게 들렸다가 집으로 가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한 사람,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은 다시 예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앞에 무릎을 꿇고 감사드렸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묻습니다.
“아니, 열 명이 고침 받았는데 어찌 한 사람만 왔느냐? 다른 아홉 명은 어디에 있느냐?”
예수님 마음에도 섭섭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비난하는 한명의 사마리아인만이 주님께 돌아와서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감사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감사는 결코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먹기 나름입니다.
여러분들도 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옆에 분들에게 한번 물어보십시오.
“당신은 아홉 명 쪽입니까? 한명 쪽입니까?”
아홉 명 쪽이라면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한 명쯤은 돌아와서 감사할 줄 알았던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대에 가장 큰 비극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감사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부모님이 낳으셨으니 기르는 거지, 그걸로 크게 부모에게 감사하는 별로 많이 않을 것입니다.
효심이 자꾸 사라집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자꾸 사라집니다.
여러분! 요즘 공부하는 학생들이 스승에게 크게 감사하는 것 보셨습니까?
“선생님이 월급 받고 하는 거지, 나도 등록금 내고 배우는 건데.”
스승에 대한 감사가 자꾸 사라집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백성들은 국가에 대한 감사가 없습니다.
정말 내가 이 나라 백성이 됨으로서 내가 이렇게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내가 직장을 가지고 이렇게 행복하게 산다는 것에 대해 별로 감사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입만 열면 나라에 대해 비판을 하고, 정부에 대해서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하여 감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 우리의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03편은 다윗의 찬양시요, 감사시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송축하라는 말은 찬양하라,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시편 103편에서 7번이나 반복해서 소개됩니다.
여러분!
다윗은 정말 너무나 많은 고난의 삶을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 가운데 그는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인생의 노년에 그는 살아온 나날을 회고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의 찬양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오늘 이 다윗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오늘 우리가 이 시편을 중심으로 한 세 종류의 인간상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부류에 속하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은혜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아니 신앙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감사라는 것은 해 본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교만한 마음이고, 불신의 마음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주 돈 많은 부자가 한 해 농사를 잘 지어서 아주 수확을 많이 거두었습니다.
창고가 부족해서 창고를 더 크게 증축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창고에다가 자기가 거둔 모든 수확들을 가득 쌓아두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노래합니다.
“이제는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이제 이 모든 쌓아둔 것을 내 인생을 위해 즐기는 데 사용하자.”
그런데 그 날 밤에 하나님이 그 부자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내 영혼을 도로 찾아가리니 그러면 네가 준비한 모든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그렇습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을 쌓아놓아도 그 영혼, 그 생명을 거두어가시면 그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습니까? 자기의 것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놓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 말은 바꿔 말하면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한자. 하나님께 대하여 감사하지 못한 자의 종말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를 깨닫지 못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중국 선교사인 ‘스탠리 존슨’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교양인과 야만인의 차이는 감사할 줄 아느냐, 감사할 줄 모르느냐의 차이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인간됨의 그 됨됨이는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고, 하나님을 높여 찬양할 줄 아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또 이사야서 1장 3절에 보면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소도 주인을 알아봅니다.
그 임자를 압니다.
나귀도 구유를 압니다.
그런데 그들이 태어난 하나님의 존재를 모른다면 이것은 짐승보다 못한 존재입니다.
여러분! 사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해를 주시고 비를 주시는 겁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건강을 주시고, 가족을 주시고, 재물을 주시고, 사업을 주십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은혜를 깨닫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이 은혜를 깨닫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두 번째 부류는 은혜를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처음은 은혜를 깨닫지 못한 사람, 두 번째는 은혜를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은혜를 알기는 아는데, 은혜를 깨닫긴 깨달았는데 은혜를 망각해 버린 사람.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 같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하다가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시고……. ”
정말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미리암은 소고를 치면서 우리를 홍해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그 감사와 찬양이 오래 가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은 곧 망각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에서 조금만 어려운 일을 당하면, 물이 좀 부족하면, 음식이 좀 부족하면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을 쏟아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원망하다가 광야에서 어린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다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은혜를 잊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그런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은 감격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은혜가 희미해져 버렸습니다.
감격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저 나오는 것은 불평이요 원망이요,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마음밖에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역대하 32장에 보면 히스기야왕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그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리게 되었더니”
히스기야 왕이 참 훌륭한 왕입니다.
은혜를 아는 왕입니다.
그가 죽을병에 걸렸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망각해버렸습니다.
마음이 교만해졌기 때문에 결국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떨 때 은혜를 잊어버립니까?
교만한 마음이 찾아올 때입니다.
은혜를 잊어버리면 마음이 교만해집니다.
은혜를 잊어버리면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기 시작합니다.
그 입술에 찬양과 감사가 없습니다.
원망과 불평뿐입니다.
은혜를 잊어버리면 자기 자신을 내세우게 됩니다.
자기를 뽐냅니다.
“내가 잘 된 것은 내가 잘나서 그런 거지. 내가 머리가 좋아서 그렇고, 내가 사업을 잘해서 돈 버는 거지.”
하나님의 은혜가 없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자기 자랑만 늘어놓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해야 하는데, 하나님을 자랑해야 하는데 자기만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패망의 길이고, 멸망에 이르는 길입니다.
제가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연못가에 개구리들이 모여서 개굴개굴 놀고 있는데 하늘을 날아가는 독수리나 황새를 보니 너무 부러웠습니다.
개구리 한 마리가 “야! 나도 저렇게 하늘을 훨훨 날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더니 어떻게 그 소원을 황새가 들었나 봅니다.
황새가 와서 “개구리야! 내가 너를 하늘을 날게 해 줄게!”
“방법이 있어?”
“방법이 있지. 자! 내가 내 입에 작대기 하나를 물을 테니 너도 그 작대기를 입으로 꼭 물고 있으면 네가 하늘을 나와 같이 날거야.”
정말 황새가 입에다 작대기를 물고 와서 개구리도 같이 작대기를 물고 하늘을 날게 되었습니다.
너무 신나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연못가 위를 지나가는데 동료 개구리들이 놀랐습니다.
“야! 쟤가 하늘을 난다. 야! 너 어떻게 그렇게 기발한 생각을 했니?”
개구리가 입이 간질간질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친구들에게 한 마디 했습니다.
“ 야! 이 멍청이들아, 내 생각이지 누구 생각이야.” 하고 입을 여는 순간 땅으로 떨어져 즉사하고 말았답니다.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뽐내다가 결국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를 잊어버린 사람들은 자기를 내세웁니다.
자기를 뽐내고 자기를 자랑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챕니다. 그리고 교만에 빠집니다.
그리고 입에서는 원망과 불평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내 가족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내 가족들은 거추장스러운 것이고, 내 가족들 때문에 내가 불행해.’
늘 이런 생각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문제가 있습니다.
은혜를 잊어버린 경우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 기자는 뭐라고 강조합니까?
103편 2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를 따라해 보십시오.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은택이라는 것은 은덕, 은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선행과 그 사랑을 결코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번역으로 보면 “주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다른 모든 것을 다 잊어버려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잊어서는 안 됩니다.
디모데후서 3장 2절에 보면 “부모를 거역하며 부모에게 감사치 아니하며”라고 나옵니다.
요즘 시대를 종말의 시대라고 하는데 그 종말의 특징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이 감사를 잃어버립니다.
여러분! 하루하루 감사하며 살아가십니까?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백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그는 겸손히 고백합니다.
시편의 시인은 “여호와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까.”라고 고백합니다.
한 끼의 식사를 앞에 두고도 우리가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마르티 바덴’이라는 독일의 재무장관을 지낸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젊은 시절에 아주 가난했습니다.
한번은 돈도 얼마 없이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어느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니 자기가 신고 왔던 새 신발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 당시에는 신발이 귀하니까 새 신발이라 누군가 훔쳐갔는가 생각했습니다.
불평을 합니다.
“세상에,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이럴 수가 있는가!”
여인숙 주인이 그 말을 듣고 안 되었던지 “오늘 주일이니 나와 교회를 가십시다.”하고 헌 신발 하나를 내 주었습니다.
그 신발을 신고 터덜터덜 교회를 갔습니다.
무슨 그 마음에 은혜가 되겠습니까?
오늘도 억지로 끌려온 분들은 별로 은혜가 안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을 유심히 봤더니 양쪽 다리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배를 드리는데 구구절절 감사의 찬양을 올리는 것입니다.
기도를 들어보니 “하나님 내 생명을 구원하시니 감사합니다. 내 죄를 씻어주시니 감사합니다.”
계속 감사와 찬양 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저 사람은 뭐가 그리 감사한가?’ 생각하다보니 마음의 감동이 왔습니다.
‘저 사람은 신발은커녕 양 발이 없어도, 다리가 없어도 감사하는데, 나는 멀쩡한 두 다리를 가지고 신발을 잃어버렸다고 불평하다니.’
그는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때부터 인생관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있든 없던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었고 후에 독일의 재무장관이 되어서 나라를 위해 크게 공헌하게 됩니다.
감사란 늘 풍족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족한 가운데서도 감사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감사입니다.
욥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신 분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분도 여호와시니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실 지어다.”
사랑하는 여러분! 은혜를 기억하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다윗이 쓴 시편에는 구구절절이 감사의 말씀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3절~5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봅니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 도다”
다윗의 많은 감사의 고백이 있는데 그 중에 몇 가지를 살펴보면 내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의 문제는 죄의 문제입니다.
죄의 정결함을 입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 죄는 정말 누구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보내주셔서 그로 하여금 고통을 받고 고난의 피를 흘림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제일 행복한 사람은 죄가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시편 32편에 보니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범했든지 오늘 하나님 앞에 나아와 자신을 내어놓고 주님 앞에 회개하는 자는 그 영혼이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더더욱 하나님은 그 죄를 따라 처벌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죄악에 따라 처벌하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죄악을 갚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그 죄가 생각나지 않도록,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멀리 옮겨버리셨습니다.
바다 깊은 곳에 그 죄악을 던져버렸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도 그도 한때는 죄를 범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눈물로 침상을 적셨습니다.
그 죄가 용서받은 그 감격, 그 기쁨, 그 감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그는 그 모든 병을 고침 받은 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내 모든 병을 고치시며.”
여호와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질병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벙어리의 입을 열게 하시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이것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병을 치료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파피니’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 가지만 있으면 여러분은 감사하십시오.
오늘 먹을 양식이 있다면 감사하고, 오늘 건강하며 감사하고,
미래의 소망이 있으면 감사하십시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늘 감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다윗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4절에 보니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라고 나옵니다.
우리를 파멸에서 건져내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 파멸이라는 건 죽음의 자리입니다.
죽음의 위기에서 우리를 건져내셨습니다.
여러분! 우
리가 개인적으로 보면 위험한 때가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정말 위험한 때, 운전하다보면 큰일 날뻔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통해서, 천사들을 통해서 지켜주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우리가 민족적으로 보면 감사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지난주일 환영의 주일로 보냈지만 지난 주일은 6.25 기념 주일이었습니다.
우리가 6.25를 경험한지 59년이 되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우리는 아무런 방비가 없을 때 북한의 인민군들이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밀고 내려왔습니다. 파죽지세로 밀려서 며칠 서울을 뺏기고, 낙동강까지, 부산까지 다 피난을 가게 되었습니다. 남한은 인민군에게 넘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UN을 통해서 우리를 위기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정말 기적적으로 <유엔안보리이사회>가 모이고, 우리 대한민국을 돕기로 결의해서 유엔의 16개국 나라가 전투병들을 보내주었습니다.
특히 미국이 많이 참전했습니다.
3년 동안 6.25전쟁이 지속되었는데 무려 연인원 480만 명의 미군이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5만 6천명이 죽었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나라에 와서 전쟁을 하다가 우리를 위해서 5만 6천명이 죽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툭하면 미국 욕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물론 미국도 잘못 하는 게 많습니다.
그러나 6.25를 생각하며 미국의 도움과 유엔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지금 이렇게 행복하게 살 수 없습니다.
1950년 미국육군사관학교 졸업생이 365명이었는데 그 중에 111명이 한국 전쟁에 왔다가 부상을 당했습니다. 46명이 죽었습니다.
그 젊은 초임장교들이 한국전에 나와서 다 죽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미국 장성들의 아들들이 한국에 와서 많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도 미국을 욕합니다.
뭐가 불만인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미국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480만 명의 미군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오늘의 이런 행복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똑같이 전쟁을 경험했지만 지금 북한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그곳이 사람 사는 곳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자꾸 불평합니다.
여기에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터키와 같이 잘 들어보지도 못한 나라에서 군인들을 보내어 우리를 도와주었습니다.
이번에 59년을 맞이해서 우리 한국을 돌아보고 다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싸운 보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전우들이 여기서 죽었지만 대한민국이 이렇게 번영할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 폐허의 흙더미에서 오늘의 조국을 이루었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 대한민국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다 하나님이 이 민족을 지켜주신 것입니다.
100년 전에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왔습니다.
유명한 대학교들을 다 기독교에서 세웠습니다.
유명한 병원은 다 기독교에서 세운 병원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저 교회라고 하면 싫어하고 미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우리의 행동이 모범이 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한국의 기독교가 한국의 역사 속에서 끼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국가에 대해서도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를 파멸의 위기에서 건져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감사한 일이 참 많습니다.
올해는 금융위기 때문에 너무너무 힘들겠다는 평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신문을 보니 OECD 30개국 가운데 한국이 금융위기를 제일 먼저 극복한 나라라고 나옵니다.
이 어려운 금융위기를 한국이 제일 먼저 극복했습니다.
제일 앞서서 경제회복을 이루고 있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라고 나왔습니다.
참 놀랍습니다.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안타까운 것이 있습니다.
우리 국민의 GDP(국내총생산)의 27%가 사회적 갈등으로 손실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국민들의 땀 흘리고 수출해서 벌은 돈의 27%가 사회 갈등으로 소멸되고 있습니다.
데모 때문에, 노사갈등 때문에 싸우느라고 27%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외국에서 한국에 투자하려고 해도 너무 싸움이 많으니까 투자하기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나라가 하나 되지 않으면 이 어려운 위기를 건져낼 수 없습니다.
여러분! ‘채명신’ 장군을 아십니까?
베트남 전쟁에도 다녀오시고 6.25전쟁 때에도 큰 역할을 하신 분이십니다.
이분이 장로님이신데 얼마 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현실이 6.25 전쟁과 똑같다. 여야가 치고 박고 싸우고, 서로를 용납 않고 싸운다.”
우리가 한 동족인데 어떻게 원수처럼 그럽니까?
오늘의 현실이 여와 야로,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져서 6.25전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위기입니다.
역사 속에서 우리를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보호하시는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 때문에 감사해야 합니다.
8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입니다.
만약 우리가 잘못할 때마다 우리를 징계하셨다면 여기에 남아있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잘못해도 하나님이 참고 기다리셨습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까지 참아주셨습니다.
마치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기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진토같이, 흙먼지같이 연약한 존재임을 아시기 때문에 그러시다는 것입니다.
13절, 14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아버지가 그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데 그는 우리의 체질을 아십니다.
한약방에 가면 체질을 따집니다.
우리가 어떤 체질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죄를 범하는 체질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연약한 것을 아십니다.
먼지같이 부족한 존재임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으로 우리를 용납하시고 용서하시고 우리를 인도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축복하시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 깊이 세기면서 하나님의 사랑 앞에 감사하며 찬양하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