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평양성 고구려 성벽 머릿돌 이두문
己丑年五月二十八日始役西向十一里小兄相夫若侔利造作
중국식 문장이라면 ...向西十一里 始役 小兄相夫若侔利...라 했어야 하나 이는 한자를 우리식
으로 표현한 이두식이다.
相(상) - 서로, 짝, 보다, 자세히, 도울, 모습 상, 중 짝, 쌍둥이.
夫(부) -사내, 지아비, 장정, 시중드는 사람, 일하는 사내, 어조사 부 중 사내.
若(약) -같다, 너, 만일, 어조사 등.
侔(모) -가지런하다. 힘쓰다, 취하다, 꾀하다 중 꾀하다, 꾀 약은 놈.
利 - 이롭다, 편하다, 날카롭다, 화하다, 이기다, 통할 리 중 날카롭다.
相夫若侔利(상부약모리) - 쌍둥이 젊은이가 꾀 있고 날카롭다. 꾀보 쌍둥이
己丑年五月二十八日始役西向十一里小兄相夫若侔利造作 - 기축년 5월 28일 서쪽 11리 공사를
젊은 꾀보 쌍둥이가 쌓았다.(1호돌)
己丑年五月二十一日自此以下向東十二里物省小兄俳口百頭口 節矣
(口는 알 수 없이 마모된 글자)
物省 - 물성, 물가를 살피는 사람.
俳 - 광대, 장난, 스러지다, 쇠퇴하다 중 광대.
百頭 - 백 사람의 우두머리, 백부장.
節 - 마디, 초목의 마디, 음절의 마디. 음악의 곡조, 문장의 한 단락, 사물의 한 단락, 뼈마디,
절개, 규칙, 제도 중 한 단락.
小兄俳口百頭 - 젊은 광대口백부장.
己丑年五月二十一日自此以下向東十二里物省小兄俳口百頭口 節矣 - 기축년 5월 21일 여기로
부터 아래 동쪽 12리는 물가를 살피는, 젊은 광대 口백부장口이 책임지고 쌓은 것이다.
이상을 보면 고려 초에 성 쌓는 일은 상하 귀천을 가리지 않고 광대라도 불러 쌌으며 따라서
광대는 돌아다니며 물가도 살피는 일 까지 했고 나라에 공사가 벌어지면 달게 이에도 참여
하였던 걸로 보이며 그렇다면 광대는 이조(李朝는 이씨조선으로 일제가 만든 단어가 아니라
일제 전부터 썼던 이름) 때처럼 그렇게 천한 직업도 아니었던 걸로 보인다.(2호돌)
丙戌十二月中漢城下後部小兄文達節自此西北行步之
二月中의 中은 중순으로 봐야 하며,
漢城은 역시 김수경 말 대로 큰 성 이니 평양성 일 것이고,
下後部는 아래, 뒷동네,
文達은 우리말 물에 비친달 즉 물 달로 보는데 이 물 달 로 보면 月印千江之曲이 말하듯
고구려 초기에 벌써 불교가 들어 왔음을 알 수 있다.
丙戌十二月中漢城下後部小兄文達節自此西北行步之 - 병술 12월 중순 한성(평양성?)아래 뒷
동네 젊은이 물달 이란 자가 여기서부터 서북쪽을 책임지었다. (3호돌)
卦婁盖切小兄加群自此東廻上口里四尺治
우선 괘루(卦婁) 라는 동네가 고구려 초 당시 있었을까?
卦(괘) - 걸다, 매달리다, 입다, 걸치다, 통과하다, 점괘 등
婁(루) - 별이름, 성글다, 드문드문하다. 거두다. 등.
盖(개)는 蓋의 속자 - 덮다, 덮어씌우다, 덮다, 이영 덮개, 용기 아가리 덮개, 뚜껑.
卦婁盖(괘루개) - 점(별점?) 치는 초가집
切(절) - 끊다, 갈다, 무지르다, 바로잡다, 고치다. 등.
加(가).- 더하다, 있다, 처하다, 입다, 몸에 붙이다. 미치다(及也)등.
群(군) - 羣의 속자, 무리, 떼, 떼 지어 모이다, 동아리, 동료 등.
加群 - 加는 미치다(及也)의 뜻을 미치다(狂)로 뜻을 빌리고 群은 떼 지어 다니는 무리 이니 이
역시 광대나 남사당 패거리들로 보며 당시는 이들 역시 국방 의무에는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은 것으로 본다.
自此東廻(자차동회) - 自此東廻는 우리 어순이고 중국 한문 식이라면 自此廻東(자차회동)이라
해야 한다.
卦婁盖切小兄加群自此東廻上口里四尺治 - 점치는 초가 젊은이 광대가 여기를 기점(切)으로
동쪽으로 돌아 위로 口리를 쌓았다.(4호돌)
因遺黃龍來下迎王王於忽本東崗黃龍負昇天
忽 - 문득홀 깜작놀랄 홀.
本 - 근본 본 뿌리본.
東 - 동녘동 샛파람이 동풍이므로 東의 우리말은 새 이다.
崗 - 岡과 同자로 등성이강 자 인데 그렇다면 忽本東崗은 문득 근본인 동쪽의 등성이가 되니
말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忽은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이나 그 뒤 필사가 들이 부리나케총(怱)자를 忽자로 오기 한
것으로 보아 광개토대왕 비문은 怱으로 되어 있을 것이며,
그렇다면 忽本東崗은 [벌 뿌리 새 언덕] 이었을 것이다. 이상으로 보아 고구려 초에는 한자를
들여오긴 했으나 중국식 문장이 아닌 우리식 이두 문장이었다
여기서 王於忽本東崗의 王을 보통 한문의 례대로 하나의 주어로 보아서는 아래말의 黃龍負昇天
과 전혀 연결이 안된다. 정상적인 한문에서는 <임금을 업고라면>負王으로 되어야 하며 그 아래
<昇天>과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負王而昇天>으로 되어야 할 것이다.
이 비문을 쓴 사람은 당시의 한문 대가이었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실지 집필에서는 한문 식이
아니라 고구려말 어순을 따랐다는 것은 이두식 표기법이 하나의 실천적 요구로 싹트고 있었
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