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서울 백악 갤러리에서 두 번 째 전시회를 하고 나서.
백악 갤러리의 두 번 째 전시회는 나의 서예 인생에서 하나의 갈림길이 되었습니다. 나의 서예인생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여 한 번 더 소개합니다.
2009년이었습니다. 그 해는 이상하리만치 해외 전시의 섭외가 많이 들어왔습니다. 나는 특히 프랑스 쪽에서 들어오는 섭외에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프랑스 파리가 어떤 곳인지를 알지도 못 하면서, 막연히 예술, 그 중에도 회화가 꽃피었던 예술의 도시라는 사실이 내 머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해에 여러 번이나 프랑스에 가서 개인전도 하였고, 기획전에도 참여 하였습니다.
또 하나의 기억에 남는 일이라면, 화랑이 중심이 되어서 개최하는 아트 페어에 여러 번 참여한 일입니다. 화랑은 근본적으로 회화 작품을 팔릴 수 있는 상품의 입장으로 보는 미술시장입니다. 화랑에서 내 작품을 아트 페어에 출품하고 싶다고 하여 기꺼이 허락했습니다. 화랑에서 주관하는 아트 페어에 서예 작품을 전시장에 내거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스스로 서예인이리고 자부하고 있는데 나에게 섭외가 들어온 것은 서예인이기 때문이 아니고 내 작품의 회화성 때문이었습니다. 진한 색채로 그려진 민화풍의 그림에 서각의 문자 조형까지 곁들였으니 서예 작품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화랑도 아마 그런 점을 노렸을 것입니다.
먼저 대구 엑스코 1층에서 가진 대구 아트 패어 전에 참가하고, 전시장에 들렸을 때 화랑마다 벌려 놓은 수없이 많은 전시 공간에 놀랐습니다. 전국의 화랑이 참여하였고, 해외에서도 참여하였다고 했습니다. 내 작품도 전시되었으나 팔리지는 않았습니다. 서울 코엑스 1층에서 열린 서울 오픈 아트 패어 전에도 출품했습니다. 전시 공간의 규모가 대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넓고, 화려했습니다. 전통 서예는 물론 보이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고, 그 해에 현대미술 17개국 작가 만남 전에도 참가하면서, 나도 모르게 나의 작품은 전통 서예와 거리를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왕이면 나의 바뀐 작품 세계를 서울에서 선 보이면 어떨까. 예전에 백악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한 일이 있었으므로 다시 백악 갤러리를 전시회장으로 정하였다. 아무래도 내가 몸담고 있는 곳이 초정 서실이므로 초정 서실을 찾아가서 도록도 전하고, 전시 사실도 알렸습니다. 나와 초정 선생의 개인전도 나와 전시 일정이 일부 겹쳐셔 물파 갤러리에서 한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이번에 전시할 자품은 예전에 내 작품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나는 전통 서예 글씨를 기본으로 하였으므로 서예작품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여러 전시회나 아트 패어 등에서 출품하였던 작품을 살려서, 이번 전시 작품에 많이 표현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민화 풍 그림이 가미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서각 작품도 덧 붙였습니다. 서예글씨의 의미를 함축하는 몇 개의 한자어를 뽑아서 서각형식으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아마도 서울에서도 이런 작품은 처음이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실험 작품을 전시하다보니 잔뜩 긴장하였습니다. 관람을 하는 사람들이 어떤 평을 할까? 서울에서 연을 맺은 사람들은 초정서실의 사람들 뿐이었으므로 초정 서실의 회원님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자기네들과는 다른 작품을 만들었으니 다양한 평이 나오리라는 기대도 했습니다. 그러나 초정 서실 회원님들의 평은 들을 수 없었습니다. 전시회에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작품세계가 너무나 달라서 일까? 근원 김양동 선생도 처음에는 화려한 색상을 좋지 않게 말하였습니다. 지금도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실험작품도 괜찮지, 하는 정도로 인정해주었습니다. 간혹 민화를 하신다는 분이 들려서 민화의 기법이 미숙하다는 지적을 하면서 일일이 가르쳐주기도 했습니다.
전시작품을 내리면서, 나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것은 작품세계에 대한 문제가 아니고, 내가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살아 온 인생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대구에 내려와서 나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외롭더라도 나의 작품세계를 다듬자고 마음을 정했습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나의 작품세계를 구축할 수 있을 수 있으니 오히려 잘됐다. 실제로 그렇게 했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나만의 작품 세계를 추구하면서, 나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2009년의 백악 갤러리 전시회가 하나의 분기점이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그때는 이런저런 인간관계를 생각하면서 슬펐지만, 그때 맺은 인간관계란 것이 순수하지 않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제 와서 보니, 나의 서예인생사에 긍정적인 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고마워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