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라 (기원전 177년. 기원전 57년 ~ 기원후 936년)
신라는 배달국 단군조선 이후 세계 유래적으로 천년을 존속한 많지않은 국가중 하나입니다. 특히나 아시아의 수많은 국가들중 환국, 배달국, 부여, 신라, 가야, 왜, 백제, 고구려, 발해, 등의 제족 국가들은 평균 5백여년의 존속기간을 기록하여, 한제족의 여러국가들이 길어야 몇십년에서 수백년의 존속기간과는 대별되고 있습니다.
단군조선 이후 육국의 기술 중 신라는 유독 2국체제로 지리와 역사를 안고 있었습니다만, 현재 대부분의 기록들이 반도에만의 신라를 말하고 있어, 온전한 역사와 영토가 오랫동안 제대로 정리되지 않고 있어 이글을 쓰기가 가장 어려웠는데, 신라는 대륙의 신라가 사로국으로 먼저 개국하고 역년 중간에 반도의 신라가 개국하여, 동과 서로 병존하다가, 대륙 사로국과 반도 신라국이 통합하여 동과 서로 1국 양체제로 왕이 오고 가는 치세로 천년 동안 존속 하였습니다.
국의 명칭에 있어서도 대륙에 사로국에서 사로신라국 신라국으로, 반도는 간, 칸, 국에서 신라국으로 되었으며, 왕호 또한 대륙 서 신라 사로국은 시종 왕으로 불리우며, 반도 동 신라는 군주의 방언 거서간, 마립간의 간 과 이사금 으로 왕호로 쓰다가 왕으로 쓰게 되는데, 이는 이웃국들과의 상호 인정하는 호칭으로 내세우는데 기인합니다.
참고로 기록에 신라는 영역경계와 영역내 성이 394개 성이 있었으며, 통일 후 고구려가 176개, 백제가 200여개로, 이를 합한 성이 무려 769개의 성이 있었으므로, 대륙과 반도, 만주까지 전 영역이 신라의 영역임이 밝혀집니다.
서 대륙 사로신라 (기원전 177년. 기원전57년 ~ 9세기. 존속 천년)
대륙 서 신라 국호는 사로국이라 하였고 사로시대라 하는데, 307년에서야 복국호 신라 가 되어 명목상 국가로 보이지만 실제 자주적 국가는 그 이후 6백여년에 이루어지며, 혁거세 이전 4대왕이 있었고, 1세 혁거세 왕에서 56세 경순왕대에 이르는데, 6세기 경부터 고구려나 백제에서 서로 독립하여 왕은 동과 서를 오가며 다스렸습니다.
국의 기원은 통상 기원전 57년으로 혁거세왕으로 보고 있으나, 개국이전 4대왕력을 보태어 기원전 177년이 되지만 왕계년도는 통상기원으로 잡으며, 존속기간 천년에 가깝고, 주변 당이 907년 멸망, 송의 개국 960년과 겹치는 935년에 멸망하여 고려에 귀부하게 됩니다.
국호 사로 라는 말에 '사' 는 새롭다란 뜻이고, '로' 는 단군조선의 오가 중 마가족으로 말을 잘기르는 종족이란 뜻인데, 신라新羅는 사로斯盧의 변음이 됩니다. 그래서 사로신라의 모든 왕의 호칭을 '왕'이라 기술한 최치원이 제왕연대력을 후대에서 사대모화주의라 비판 받았으나, 이는 서신라의 실체를 알지 못하는 하나의 헤프닝이 불과하게 되었습니다.
설화에는 대륙 강소성 남경에 소재한 계명산, 계명사, 영곡사, 월아산, 용은동 등은 신라 시조 혁거세왕과 왕비 알영의 탄강 출생지가 거의 똑 같게 나옵니다.
일설에는 초나라(기원전8세기~기원전223년)는 단국을 구성하고 있었던 곤오족의 한 분파가 세운 나라이며, 이들이 신라를 세웠다 하였는데, 곤오족은 원래 환국의 풍이족에서 출발하여 풍성, 사성, 기성, 희성으로 분파해 나간 성들 중에서 기성족으로, 기성족 출신의 곤오는 한인천제의 61대 손으로, 초나라를 세운 곤오족은 환국을 세운 한인천제의 후예이며, 역사의 정통성을 계승한 풍이족의 후예이고, 풍이족의 역사를 계승한 동이족에 속하는 인종인데, 초나라의 방사 한종이 이끌고 온 '나' 성과 '노' 성은 유망의 성인 '강' 성의 후예이며, 이들은 모두 단군조선을 구성했던 마가의 후예들이라는 설인데,
말하자면 기마민족의 조상이 되고, 사로 라는 국명과도 관련있는 사로신라 역사의 정통성을 계승한 사람들이라 보고 있으며, 초나라의 굴원(기원전343~기원전290년)이 쓴 초사의 9가 가운데에 황동태일이란 용어가 단군왕검을 지칭하고, 내용은 단군왕검에게 바치는 축문이어서 신빙성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한제족문학의 배태이자 요람인 굴원의 이소는 정치적인 자신의 불운을 전통적인 동이족 국가인 초나라의 제사문화 속에 버무려 넣은 시가로 초사에 등장하는데, 굴원은 초 회왕을 모신 삼려대부로, 진 소왕이 장의를 보내 회왕을 속이고 제나라와 국교를 끊게 한 뒤 초를 유인해 회동할 것을 요구했을 때 만류한 충신이며, 본래 제족 국가인 초나라는 굴원의 초사에 보면 동이족 전욱고양의 후예로 단군성조인 동황태일을 모신다고 하는 대목이 나오고, 이 동황태일은 만주족 거란족도 동황태일을 신앙했으며, 산동성 동이족 제나라와 연합해 진나라를 칠 것을 회왕에게 간했지만, 간신들로 둘러싸인 대부분의 중신은 진나라와 연합해 제나라를 칠 것을 주장하자,
굴원은 이를 고민해 '이소'를 쓰고 '천문'이라는 글을 통해 하늘에 호소했지만 결국 귀양중 동정호 멱라수에서 자살하고 마는데, 제족의 송편은 굴원이 물고기에 뜯어먹히지 말라고 동정호의 어부들이 호수에 넣기 시작하면서라고 전하고, 제족의 4대 명절은 바로 추석, 설날, 한식, 단오인데 굴원이 죽은 날인 음력 5월 5일 단오는 바로 우리가 쇠고 있는 4대 명절 중의 하나로 굴원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 합니다.
단군조선 진한(기원전 2세기 말~기원전 4세기)은 모두 12개 국가가 있었는데, 그 중에 사로국이 바로 신라의 전신이며, 기록에 진한은 옛 진국이다. 진한의 노인들은 스스로를 진나라에서 망명해 왔다고 하였으며, 고역을 피하기 위해 한국을 택했는데, 마한이 동쪽의 땅을 떼여주니 그 군의 이름을 옛 나라 이름으로 하였다. 하고, 신라는 원래 진한인들이다. 하였으며,
진한은 여기서 만여리인데, 진나라에서 고역을 피해 마한땅에 왔는데, 마한이 그 동쪽 변계를 떼여주어 살게하였다. 하고, 진나라에서 왔기에 이름을 진한이라고 하였다. ... ...진한은 원래 6국이였는데 후에 12개로 나뉘였고, 신라가 그 중의 하나였다. 위 때에는 신려라 불렀고 송 때에는 신라, 또는 사라라 불렀다. 하였고, 위나라 장군 관구검이 고구려를 쳐 이기자 고구려가 옥저로 도망쳤다가 나중에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는데 남은 자들이 점차 신라가 되였다. 고 기록에 나옵니다.
참고로 기록에 자주 나오는 진번, 진국, 진한, 의 '진' 은 황금을 뜻하는 '김' 의 만주어 발음으로, '친'으로 불리우며, 가야 왕가에서도 금을 친이라 하였습니다.
사로신라는 초대왕으로부터 왕이 승계되지만 혈통에 관해서는 옛 마고의 유습인 모계사회의 전통을 가지며, 당시 신라만이 세명의 여왕이 있었으며, 모계가 매개된 사위나 외손 까지도 승계가 가능하였으며, 아무리 왕손이라도 그 모계에의 혈통에 따라 위계가 결정 되는 왕가 혈통제도인 골품제가 있었으며, 박, 석, 김, 씨가 번갈아 가며 왕위를 잇게 되었습니다.
초대왕 박혁거세에 대해서는 여러설이 있는데, 성씨 박씨의 출전이 복희, 포석, 박호, 박혁거세, 로 일련의 계보로 보기도 하며, 진나라 시절 김추설화 내지 방이설화의 김추가 박씨로 되었다는 설이 있고, 하늘이 내려준 자주빛 알에서 탄강한 설, 소호금천, 전욱고양, 여수, 진시황, 진한, 신라, 라는 계보로 보고, 황강산, 무이산, 어름 선도산 선도성모 탄생설, 등이 있으며, 사후 초대 혁거세왕의 묘지는 강소성 오현의 호구산에 있습니다.
2세 남해왕(5~24년) 박씨로 6년에 시조묘를 세우고, 8년 탈해가 어질다 하여 맏딸로 아내를 삼게 하였으며, 또 대보의 벼슬을 주어 나라의 일을 맡겼고, 14년 왜와 낙랑의 침입을 막았으며, 4세 탈해왕(57~80년) 석씨, 일설에는 고구려 태자로 뜻을 펼치고자 가야와 신라 중에 신라를 선택하는데, 왕에 오르자 포부대로 오로 군사와 네개 번국을 두게 되는데, 다섯군사란 대륙 서북 비단길목 서로, 운남 하노이 남로, 만주 옥저 북로, 반도 경주 일본구주의 해로군사를 설치하고, 절강 주변엔 네개의 번국을 두었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일설은 조상이 가야 신라인으로 인도 교포였고, 인도 고어 타밀어로 석, 석가 성은 대장장이라고 하는 것과 본인의 주장과 같아, 인도에 금속문화를 전한 배달국 사람의 귀환으로 보기도 하며, 또다른 일설은 신라본기에 탈해왕이 다파니국 사람으로 '위'의 난민이 세운 왜국에서 동북 1천여리라 하여, 호북 무한이나 강서 구강즈음 백제 속국인 다파니국 사람이거나, 왜의 서단 인도 남부 촐라왕국의 다파니국일 것으로 보인다 했습니다.
여담으로 제족 말에는 인도 드라비다 언어가 우리 말에 깊게 투영되어 있는데, 얼은 드라비다 언어로 역시 '얼'이라 하고, 또 아버지를 드라비다 언어로 '아파치'라하고, 엄마를 '암마', 남을 역시 '남' 우리말의 님을 역시 '님'이라고 하고, 심지어 곡할 때 '아이고' 라고 말하는 것도 드라비다 어인 것이며, 조선조 초기에도 '왜'어라는 것은 바로 드라비다 어를 뜻하였습니다.
이 드라비다 언어를 쓰는 사람들은 놀라운 해양인으로써 아시아는 물론 아메리카대륙에 삼한인들과 함께 까마득한 고대에서부터 왕래하고 있었던 것으로, 우리 말에 드라비다 어가 스며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며, 한자의 왜(倭)라는 말의 본 뜻은 빙~ 멀리 돌아가다라는 의미인데, 실제로 드라비다 어인 왜어를 쓰는 인도인들은 인도양과 태평양을 빙 멀리 돌아다니는 항해력을 갖춘 왜인의 주류였던 것이라서, 지나치게 왜가 곧 일본열도에 있었던 나라와 사람들이다. 라는 잘못된 선입관에선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2세 남해왕부터 탈해왕 석씨 외에 8세 아달라(154~184년) 까지 박씨로 이어오다가, 왕의 자손이 없어 9대 벌휴왕(184~)부터 석씨가 재위를 잇는데, 어머니가 김씨로 석씨와의 제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탈해왕조계가 전투 능력 등 문화 수준에서 기존의 박씨왕조계 보다 우위에 있던 세력 집단으로 보입니다.
이어 12세 첨해왕(247~262년)석씨가 13세 미추왕(262~283년)김씨로 바뀌면서 이전의 친 백제 노선이 친 고구려 노선으로 바뀌는데, 이 미추왕이 위나라 관구검이 고구려를 칠때 남하한 고구려 세력의 일원이 아니겠느냐 하는 설도 있습니다.
또 다른 일설은 사로국 김씨왕에 대한 것으로 한나라의 왕망은 본래 김일제의 증손자 김당의 이모부로, 나중 신나라를 세우게 되는데, 왕망이 죽고 신나라가 망하자, 외척인 김일제 집안은 걸인집단으로 위장하여 대륙을 떠돌다가 그나마 안정적인 요동 임분시 사로국 지역으로 흘러 들어와 정착하며, 가세가 커져 석씨왕 후임으로 김알지가 거론 되었으나 이를 5세 파사왕(80~112년)에게 양보하고, 13세 미추왕 대에 왕에 오른 첫번째 김씨가 되었다는 설입니다.
신라 김씨의 조상이 되는 김일제(기원전134년~86년)는 흉노족 휴도왕의 태자였는데, 부왕이 한무제 때 곽거병과의 전투에서 패하면서 중국으로 끌려와 처음엔 말을 키우는 노비로 살다 한무제의 눈에 띄어 마감이 되며, 한무제를 암살하려는 자를 무제 앞에서 격투 끝에 체포한 공으로 제후인 투후라는 벼슬까지 받고, 한 무제로부터 김씨 성을 하사받는데, 본시 휴도왕이 금인을 만들어 제천한 까닭으로 김씨 성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무제는 죽을 때 김일제 등 3명의 고명대신에게 어린 소제를 잘 보필해달라는 유지를 내리는데, 즉 김씨가 한나라 조정의 권력핵심에 들어간 것이었고, 죽어서는 곽거병과 함께 한무제의 묘역에 안장되기도 하여, 김일제의 투후 벼슬은 자손들에게 세습되어 7세를 전한다 하였습니다.
참고로 일설에 5세 파사왕(80년) 박씨는 페르시아와 관련해 보면, 페르시아를 한자로 적으면 파사이기 때문이며, 또 8세 왕인 아달라왕(154년) 박씨는 흉노계로 보이는게, 동로마제국을 침략하여 엄청난 양의 금을 조공품으로 받아낸 훈족(흉노족)의 정복왕 아틸라와 이름이 비슷하여, '아틸라'는 '아달라'의 후손일 가능성이 클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독특한 왕가의 권력체계와 더불어 국정의 의사결정 체제인 화백제도가 있는데, 회의에 참여한 이들의 만장일치의 '가' 로 안건을 통과 시키는 제도로, 유추하자면 본래부터 유목제국들의 환국에서 배달국으로 이어진 배달화백제도의 의사결정 방식으로 부터의 유래로 보여지며, 전승된 사로신라에서 다듬어 쓰인것으로, 가야에도 비화가야가 유사한 배달화백의 소도 경당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복잡한 왕가의 체제는 왕가와 국가의 권위를 위해 세가지 국보가 있었는데, 황룡장륙상, 천사옥대, 황룡사9층탑,이 있었고, 세가지 보물인 금척(자), 옥적(옥피리), 화주(구슬),가 있었는데, 금척은 복희, 여와 그림에 나타나는 자 로 보이며, 이 금척은 왕의 징표로 이씨조선까지 나타 나는데, 고대로부터 단위를 측정하는 단위나 음 길이 등에 기준이 되는 것으로, 가장 작은 음이나 길이, 부피, 무게, 가 기준인 척도가 되는데, 예를 들어 고래의 수염이나 기장, 조, 등의 둘레 길이가 척도의 기준으로 사용 되었으며, 화주는 선덕여왕이 가졌다 하며, 불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국인들은 주로 흩어져 있었던 옛 단군조선의 국인들로 선주민이 되고, 기록에 먼저 조선유민이 산곡 사이에 나뉘어 살며 6촌을 이루었다, 고 하였는데, 배달국 멸망과 진나라가 한나라에게 멸망하면서 하북성 탁록(청구)에서 유민이 대량 발생하면서 사로국으로 이주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륙 6국을 통일한 진나라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옮아간 동이족 민족으로, 서융으로 불리우며, 진나라의 조정은 사로국과 같이 소호금천씨를 조상으로 섬기고 있었으므로, 사로국 사람들이 진나라 사람과 흡사하다는 많은 기록을 보면, 그 친연성이 있으므로, 그들의 유민이 사로국으로 이주하던 사실이 자연스럽게 됩니다.
이렇게 청구 배달국 멸망후 2천여년이 지나고, 단군조선이 진에게 기원전 239년에 멸망한 후 100여년이 지나 새나라 사로국이 탄생했는데, 살기 좋고 이상향인 나라라는 소문이 대륙 곳곳의 제족들에게 전해져, 많은 유민들이나 한족들 까지 이주하게 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당시까지 대륙이나 반도의 거주민들은 세계 여러 종족들이 무리나 마을로 곳곳이 흩어져 살고 있었으며, 나라들은 있었으나 많은 집단이나 부락 소국들도 이들이 대부분 섞여 살아가는 느슨하게 열린 사회 구조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로국인들이 유입된 청구 배달국인이 주축이라면, 어쩌면 당시 예맥들이 주축인 백제나 고구려인들과는 외모나 말씨가 달랐다고 볼 수 있으며, 차라리 선비 당나라(6백여년~9백여년)의 지도층이 서북방족인 관계로 더 친연성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사로국인이나 당나라국인 들의 출신지역이 서북편 대륙지이며, 나당 연합이 그러하고, 당나라 궁실에서 백제나 신라의 왕실 제사를 지낸 기록이 있어서 입니다.
수도는 안휘성 금성으로 토함산(안휘성 항산)과 독산이 있는데, 기록에 609년 31세 진평왕 31년 모지악(경주) 산이 타올라 10개월 동안 불탓다. 하고, 657년 태종무열왕 4년 토함산에서 화산이 폭발하여 3년 만에 꺼졌다. 하여, 안휘성에 있는 토함산에는 간혈천이 있고, 대륙 팔공산에서 7~8리에 금성있으며, 합비가 경주이며, 주변에는 오늘날 소호 라고 칭하는 호수가 있으며, 정(井)이라고 칭해지는 궁궐과 같은 수중구조물이 있었다는 설이 있고, 또한 신라 초기 일식 기록(기원전54~201년)이 양자강 유역에서 나타나는 것과 수도의 위치가 일치합니다.
사로신라의 영토는 지금의 안휘성, 절강성, 당시 제, 노,나라와 오, 월,나라 사이(당서 당영호징 신라국기)지만, 점차 영토가 커져, 가로 천리 세로 3천리(신당서)의 큰나라가 되었으며, 남쪽 복건성 천주와 장주가 신라땅이였다(연암집). 신라 천주에 가려면 절강성 영파인 사명을 거쳐야한다(만주원류고). 하였으며,
어느 제왕가의 딸이 진한 땅에 와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선도성모(혁거세모)께서 호북성 선도시 선도산에 오래 산 분의 영정이 송나라 우신관에 있었다(김부식). 소지마립간 때 영파 남쪽 임해와 장령에 진영을 설치해 왜적을 방비하게 했다(만주원류고). 신라가 '백제의 동남쪽 5천여 리'에 있다 (양서, 수서). 기록에 있고, 점차 강소성에 까지 대륙 동남방을 대부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제족집단의 시조모였던 서술성모는 신라건국신화에서는 선도성모로 바뀌어 버렸는데, 불교가 국교로 된 진흥왕 시대에 불사를 좋아하는 여산신으로 화장을 고치고, 끝내는 소중화 의식에 따라 신라건국신화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중화의 매개자로 성형한 선도성모의 얼굴로 탈바꿈하게 되었는데, 서술성모는 본래부터 신라 사량부에서 시조모로 모셔지고 있었으며, 아마도 그 사당이 서술산에 세워지면서 여산신의 전통에 따라 서술산의 산신으로도 추앙됐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참고로 선도산은 황제헌원이 선도산에 살고 있는 신도와 울루 형제에게 인간 세상의 귀신을 다스리게 하였고, 큰 복숭아나무가 있는데, 꼭대기에 금색의 닭을 계신이라하여, 신라에서는 소호금천 닭신을 믿고, 임금의 관에 닭의 깃을 꽂았고, 닭은 태양이 솟아오르는 때를 알려주고, 햇살이 몸을 비추면 찬란한 금빛을 비추고, 또한 부상수(뽕나무)에도 구슬 소리를 내는 닭이 있었는데, 선도산은 북부여 해모수의 부인이며, 신라의 시조 혁거세 성인과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성제를 낳은 유화 성모님이 오랜 세월로 머물러 계신 성지라 합니다.
참고로 추정되는 대륙에 위치한 지명으로, 하슬라주, 명주(산동성 빈주시), 월성(산동성 양주시), 신월성(가야 금관성.강소성 양주시), 대야성(안휘성 합비시), 장육존상 주조 황철 황금 도착지 하곡현(강소성 양주시 인근 포구), 자장율사 대화지, 대화사(강소성 양주 부근), 가 있습니다.
인접한 나라로는 600년 이전에 당, 백제, 왜노, 고구려, 가 있었고, 8년 이전에는 당, 일본, 발해, 가 있었으며, 6백여년 고구려 연방붕괴 이후에는 고구려, 백제에서 해방되고 실제 독자적인 사로신라와 신라가 되었고, 사로국이 생길 때에 마한과 나중에 고구려와 백제를 상국으로 두고 있었는데, 점차 강성해져 4백여년 경부터 우경이 실시되어 농업생산력이 증대하고, 내치, 군사, 외교에 독자노선의 길을 걷습니다.
기록에는 신라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의 종족이었다... 진한의 왕은 항상 마한 사람을 세워 대대로 이어 가고, 진한 스스로 왕을 세울 수 없었으니, 그들이 분명히 흘러 들어와 산 사람이기 때문으로 진한은 항상 마한의 지배를 받았다. 라 하였습니다.
8세 아달라왕(154~184년) 즉위 4년 (158년)의 기록에,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왜로 간 설화는 연오랑의 이름에서 이들이 발해만 연안에 살았던 까마귀 오이족임을 알 수 있으며, 당시 해안이나 도서에 왜의 존재를 알게하며, 일찍부터 해안에 거주하던 왜의 부족이나 왜국이 삼국과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31년까지 대륙에는 고구려, 백제, 사로신라 왜. 502년까지 고구려, 백제, 사로신라, 왜, 가라. 668년까지 고구려, 백제, 사로신라 왜. 669년 이후 9세기 까지 사로신라. 로 구분 기록하고 있습니다.
17세 내물왕(356~402년) 김씨로 이후 계속 김씨왕으로 세습되며, 국가체제나 왕권은 강화되나, 고구려 사신의 안내를 받아 전진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잦은 백제의 침략을 고구려 광개토왕의 군사적 지원으로 물리치는 등 고구려의 원조와 내정을 간섭받았으며, 19대 눌지왕(417~458년) 내물왕의 장자로 18세 실성왕이 즉위후 고구려를 이용 눌지를 죽이려 하였으나, 오히려 눌지가 고구려를 이용하여 실성왕을 죽이고 왕이 됩니다.
22세 지증왕(500~514년) 때부터 백제와 고구려의 간섭에 벗어나 신라로 국호를 쓰는 독자노선을 걸으며, 재위 중 반도에 있는 신라와 오가며 나라를 다스리는데, 언어에 대한 일설로 알티, 알치, 알지, 는 금, 김을 뜻하며, 청나라의 청은 만주족 발음으로 '칭'이라고 하는데 곧 금, 김이며, 인도 드라비다어로 친, 칭이 바로 금을 뜻하는 말인데, 인도나 네팔에 머물고 있었던 사카 스키타이족의 피가 섞인 것을 말합니다.
대륙에서는 상하이 허우저우 수저우 부근의 객가족이 사카족이며, 복건성에 사는 사람들도 대부분 이 족속이라 하는데, 수, 당 시대만 하더라도 '금'에 가깝던 발음이 5대 10국 시대를 거치며 '김'에 가까운 발음으로 변화했다는 것이며, 반도는 이미 한자 문화가 정착됐기 때문에 중국의 한자 발음 변화가 즉각적으로 영향을 줄 수는 없었으나, 원나라 시절 고려 왕실이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 자연스레 고려에서도 금의 발음이 김으로 달라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23세 법흥왕(514~540년) 때 서쪽에 위치한 금관가야(42~532년)를 병합하고 24세 진흥왕(540~576년) 대에 전성기를 이루며, 대가야 (5세기 중반 ~562년)를 정복하며, 일설에 법흥왕의 출신이 선비족 전연의 모씨여서, 당시 선비기병들이 사로신라에 가세하며, 팽창정책의 일환으로 가야를 병합하므로서, 사로신라의 국력을 배가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하였는데, 가야의 선진 철기문물과 함께 당시 세계화된 해상문화의 거점들의 확보가 장차 삼국을 일통하고 해외 해상권을 주도하는 밑거름으로 작용합니다.
독자노선을 가진 신라는 27세 선덕여왕(632~647년) 때에 황룡사9층목탑을 축조하므로서 옛 단군조선의 전통과 영광을 회복하려는 주변국들을 일통하고자 9층으로 하고, 그 각층마다 일통 할 나라들을 배정하였는데, 1층부터 일본, 당, 오월, 탁라, 응유, 말갈, 거란, 여적, 예맥, 으로 신라 주변에 있는 대다수의 소국들인데, 백제나 고구려와 같은 나라 명은 없고, 일본은 열도의 일본이 아니라, 지금의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북부의 수마트라 우타라주에 있었던 고일본이라 보이고, 선덕여왕의 묘는 절강성 낭산에 있습니다.
651년 28세 진덕여왕(647~654년) 5년에 김춘추 세력은 기존 품주를 당나라의 정치제도를 모방 개편하여, 국왕 직속 최고 관부장 중시를 국왕의 집사장을 맡도록 하여, 이전의 불교적 왕대를 당나라식 묘호를 쓰기 시작하여 전제적왕권을 강화하며, 29세 태종무열왕(654~661년)과 30세 문무왕(661~681년)에 삼국을 일통하는 일에 치중합니다.
태종무열왕 시 김유신과 함께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공략하고, 고구려 역시 정복하게 되었는데, 이때 백제와 분쟁지역이 석문, 대방, 석성, 평원, 황산, 대산(태산), 제성, 동명, 백마강(백마하), 주류성, 항성, 동성, 잠산, 독산, 덕안, 으로 김유신의 전투지역 이며, 673 (문무왕13) 7월 향년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유해는 대륙 강소성 양주 금산원에 장사지내고, 유사에게 명하여 비를 세워 공명을 기록하고, 또 민호로 정하여 묘소를 지키게 하라. 라고 삼국사기의 김유신 열전에 기록돼 있습니다.
참고로 김유신은 595년 진평왕대 17년에 태어나 673년 문무왕조 13년에 사망했으며, 신라에 투항한 가야왕족의 후손으로, 진골 귀족 출신인데, 15세에 화랑이 되어 낭도를 이끌고 고구려·백제와의 전투와 신라 귀족층의 반란 진압에서 공을 세워 중요 인물로 성장했고, 누이와 결혼한 김춘추가 태종무열왕에 즉위하면서 정치적 위상이 더 높아졌으며, 660년 정월에 귀족회의의 수뇌인 상대등이 되었고, 삼국통일 전쟁 과정에서 신라를 이끄는 중추역할을 했으며, 사후에 흥덕왕이 흥무대왕으로 추봉했습니다.
또 흥무대왕 김유신을 장사지낸 양주 금산원은 양주에서 조주를 떠나 진강으로 들어가면, 강의 왼쪽 앞에 커다란 탑이있는작은 산을 보게 되고, 장강의 기슭에 높이 44미터인 작은섬이 금산에 있으며, 이곳에 후백제의 견훤도 양주 금산사로 들어갔는데, 견훤은 금산사에서 있은지 석달 만인 6월 초하룻날 막내아들 능예와 딸 애복과 애첩 고비등과 금성으로 급히 도망쳐 나와 사람을 파견하여 고려 태조에게 만나줄 것을 청원하자,
태조는 기뻐하며 장군 검필과 만세등을 파견하여 진강의 수로로 들어가 위로하고 데리고 와서 고려에 이르니 고려의 태조는 후한 예로 환대하였으며, 견훤은 태조보다 나이가 10년이 더 많아 상부로 받들어 남궁 강소성을 주어 직위를 백관들 보다 상위에 있게 하고, 강소성 양주를 식읍으로 주고 겸하여 금백과 번욕과 노비 각40명과 내구마 열 필을 하사하였다. 합니다.
이때 연합했던 신라와 당나라의 나당전쟁은, 나당연합으로 백제(기원전16년~660년) 가 멸망하고 고구려(기원전37~668년) 가 멸망한 다음 670년~676년간 7년 동안 전쟁이 일어났는데, 발단은 승전국 당나라와 신라 연합간에 패망국에 대한 지분확보로, 문제인 백제 영역을 당태종이 욕심내어 불거졌으나, 마지막 전투를 승리한 신라가 계림 요동반도를 위시하여 9주를 두었고, 9주가 관할하는 군현은 450여소가 되며, 백제땅에는 무주, 웅주, 전주, (하남 하택시 추정)를 둠으로서 마무리 되며 일부영역은 발해말갈과 나누어 갖습니다.
신라가 고대하던 삼한일통을 달성하여 통일신라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은, 당시 당나라 북쪽에 위치한 돌궐국이 당에 패퇴하지만, 그 잔존 세력들의 강력한 압박이 지속적으로 당을 견재한 데에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31세 신문왕(681~692년) 조에는 지방세력을 우대하여 관계를 강화하나, 중앙귀족들은 정리하고, 집사부 중심의 유교적 정치로 전제왕권을 구축하고, 33세 성덕왕(702~737년) 조에 극성기가 되는데, 육전조직을 당과 같이 갖추고, 관조직을 5단계로 정비하며, 전국을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수도와 지방에 9서당 10정의 군사조직을 배치하는 등, 통일 후 전제적 왕권을 강화합니다.
그러나 35세 경덕왕(742~765년) 조에 와서 진골귀족들의 반발로 그들의 폐지되었던 녹읍을 757년에 부활시켜 달래게 하며, 759년까지 관직이나 관청 심지어 전국의 모든 지명을 한자로 바꾸게 하지만, 누적되었던 불만을 없애지는 못하게 됩니다.
참고로 신라는 처음부터 여러종족으로 구성된 하나의 연합체로 골품제라는 품주제도가 있었는데, 골품과 두품으로나뉘며, 마지막 28세 진덕여왕을 끝으로 성골의 시대가 끝나고, 29세 태종무열왕대부터 진골시대 독주가 시작됩니다. 말하자면 최상위에 성골과 진골 두 골이 있고, 그 아래 귀족들은 상위 6두품에서 1두품까지 두품이 있으며, 평민과 천민의 백성들이 있는 일종의 등급이 있었는데, 계급체가 아닌 일종의 정치적 체계입니다.
36세 혜공왕(765~780년)조에 들면서 친왕파와 반왕파로 나뉘며 알력이 있었는데, 768년 대공의 반란이라는 전국 96각간들이 서로 싸우다가, 774년 반왕파 김양상이 상대등이 되고, 실권을 거머쥐고 김지정이 일으킨 반란을 김경신과 함께 평정하고, 혜공왕을 시해하여 태종무열왕계가 끊어지며, 김양상이 37세 선덕왕(780~785년)에 오르며 김경신은 상대등에 오르고, 선덕왕이 죽자 김경신이 38세 원성왕(785~799년)으로 재위에 오르며, 자신은 내물왕 12세손임을 표방하지만, 귀족들은 서로 분열하고 사병을 거느리며, 지방호족세력도 대두되는 혼란기가 태동 됩니다.
788년에 국학 출신자에 대한 관리등용제도 독서삼품과를 제정하는 등의 정치를 개혁하였으며, 40세 애장왕(800~8 09년) 조에 이르렀지만, 왕의 숙부 김언승이 섭정으로 율령의 개정과 오묘제도의 확립을 통해 전대에 형성되기 시작한 권력구조를 강화하려는 도중 김언승이 왕을 시해하고, 41세 헌덕왕(809~826년)에 오릅니다.
그러나 왕실 직계가족 중심으로 권력구조를 개편함으로써 귀족들의 불만이 커져, 822년 헌덕왕 14년에는 김주원의아들인 김헌창이 웅천주에서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하였지만 이 반란은 비록 단시간 내에 진압되었고, 그 뒤 42세 흥덕왕(826~836년) 조에 진골귀족의 사회생활 전반을 규제하는 일대 개혁정치가 단행되었지만 무위로 그치며, 사후근친왕족 사이에 왕위계승전쟁이 일어나 3년간에 걸쳐 2명의 국왕이 희생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진골귀족들이 중앙에서 정쟁에 휩쓸려 있는 동안 지방의 호족세력들은 성장해 장차 왕실을 압도할만한 역량을 갖추게 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장보고는 청해진을 근거한 거대 지방 해상세력가로 45세 신무왕(839~839)즉위에 관여하는 등 중앙 정부와 반목하다가 846년 46세 문성왕(839~857년)때 부하 염장에게 암살됩니다. 이후 48세 경문왕(861~875년)에서 52세 효공왕(897~912년)까지 왕권회복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실패하고, 전국에 군웅들이 활거하여, 896년 적고적이 왕경 서부 모량리까지 진출할 정도가 됩니다.
51세 진성여왕(887~897년) 조에 조정의 재정이 파탄나자 지방에 조세를 독촉하여, 농민의 반란이 일어나는 등, 일련의 내란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 때의 위기를 타파하고자 박씨 세력에서 53세 신덕왕(912~917년)에서 55세 경애왕(924~927년) 까지 왕을 두었으나, 지방호족들을 제어하지 못하고, 927년 그해 후백제왕 견훤이 무방비 상태인 왕경에 쳐들어와 경애왕을 죽이고, 56세 경순왕(927~935년) 김씨를 왕위에 올립니다.
사실 당시는 전국에서 백제를 부흥하려는 후백제(892~936년)견훤과 고구려를 부흥을 외치는 태봉(911~918년) 궁예의 세력이 가장 컸는데, 이 두세력의 충돌과 태봉 918년 궁예를 쓰러뜨리고 고려 태조로 즉위한 왕건이, 신라에 우호 친선정책을 폄으로 말미암아 신라가 그나마 나라가 유지될 수 있었는데, 고려가 후백제에 비해 우월한 위치에 놓이게 되자, 경순왕은 935년 11월 고려에 자진 항복해 신라는 그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왕조의 흐름을 보면, 신라가 비록 미약하게 시작 되었으나 신라국에서 발간된 부도지만 보더라도 그런데, 일관되게 옛 전통을 지키려는 나라 정신으로 통합 후 평화로운 이화세계를 이루고자 하는 지도층의 의지가 반영되었다고 봅니다. 이처럼 서 사로신라는 건국으로부터 성장하여, 7세기 초엽 동 반도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독립하여 정식국호로 신라로 정하고 발전하게 되는데,
7세기 중엽 태종무열왕조 때부터 당나라의 문물제도와 유학을 도입하여 전제적 왕권을 하면서부터 통일의 대업은 이루었으나 몇세대를 가지 못하고 자중지란에 빠지며, 이미 쇄락한 전통 정신문화의 국풍은 되돌리기는 패해가 너무나 큰탓에 멸망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정신문화의 면면을 살펴 보면, 대대로 내려오던 자연숭배사상인 신교나 삼신 선도들의 교의가 대륙 전반에 걸쳐 신앙되고 있었을 것으로 보고, 신라에선 일월 산천에 제사는 물론, 왕가와 대중의 신교 나 선도, 조상의 제의가 있었는데, 이 선가에는 영랑, 술랑, 남랑, 안상,의 4선이 있었고, 여타 한제족국에서도 이름난 김가기 선사도 있었으며, 이름난 불교 여러승들 또한 선사였고, 특히 화랑은 전통 선가의 맥을 잇는 국가 중요자산으로 후에 삼한일통의 선봉으로 국통에 기여하게 되는데, 이러한 화랑도의 교의는 고려 시대까지 교육하기에 이릅니다.
참고로 역대신선통감에는 제족국 도교는 당의 종리권에 도맥의 연원을 두고 있으며, 승자혜·명오화상·최승우·최치원·이청·승명법·권청·김고운·김시습·김가기·서경덕·홍유손·박씨·장세미·강귀천·장도관·정희량·승대주·박지화·윤군평·정치허·한무·사선·옥보고·금소이선·대세구칠·강감찬·정붕·정수곤·정희량·지리선인·전우치·한라선인·남사고·박지화·이지함·한라노승·유형진·장한웅·남해선인·장생·곽재우, 가 있으며, 단군을 도맥의 연원으로 하여 혁거세·동명왕·사선·옥보고·김겸효·소하·대세·구칠·참시 등을 거쳐 김가기와 최치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하고, 청학집에는 광성자를 도맥의 연원을 두고 있지만, 광성자는 한제족들이 후대에 생성시켜 제족보다 우위에 있도록한 것이라 봅니다.
여담으로 화랑이 처음 여화랑으로 시작하여 남화랑으로 되며, 그들이 얼굴을 희게 화장하던 전통은 신교의 모계 전통의 유습인 당시 지도층 마고 가게 최상층의 흰피부를 가진데에서 유래를 찿아 볼 수 있겠으며, 조상에 대한 제사는 일본으로 까지 전례되어 일본 궁궐 제례 때 신위 36위를 모시는데, 도래한 신라, 가야, 계 원신 조상 1좌를, 백제계 한신 조 2좌를 모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기록에 이름난 화랑으로는 위화랑·미진부공·모랑·이화랑·사다함·세종·설화랑·문노·비보랑·미생·하종·보리·용춘·호림·유신, 이 있었습니다.
신라는 주로 한자를 사용했는데, 이두와 향찰을 포함한 고대 한국어를 표기하는 현대한국어의 직계 조상격인 언어이며, 추정컨데 단군조선 때 만들어진 가림다와 함께 쓰인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이 가림다가 인도 간다라의 카로슈티 글자와 모양과 발음이 놀라울만큼 서로 닮아 있다는 점이나, 신라승 혜초가 인도 서북부에 위치한 간다라국 여행일지에 ..'카시미르국에서 산을넘어 서북쪽으로 한달쯤 가면 간다라국에 이른다. 왕과 군사들은 모두 돌궐인이고 토착민은 호족이며 바라문도 보인다.' 이라 적고 있고,
불교(기원전 6세기~) 기원 이전 기원전 1,700여년 동안 가림다의 전파가 인도 방면으로 전파된 충분한 시차가 있어 서쪽으로 퍼진 가림다의 존재가 확인되고, 일본의 국가 형성 초기에 신라가 큰 역활을 하였는데, 이시대가 바로 진무천황 시기이고 이 시기의 가림다가 신의 글자로 일본 국보로 남아있기 때문인데, 진무천왕 선조는 단군조선 사람입니다.
혹자들은 신라의 말이 백제나 고구려어와 다르다 하고, 쓰는 글이 한자라 하여 한국인으로의 정체성에 의문을 품을 수 있지만, 한자에 대한 한국음과 한족음은 조선조 세종 때 상당한 차이가 있었지만, 신라 600년 무렵의 향가 이두로 쓰인 여러글자들은 현재의 한국음과 별 차이가 없으며, 당나라의 발음도 현재의 한족음 보다 한국의 한자음에 훨씬 가깝다는 조사가 있고 보면, 한자의 발음면에서는 정체성을 가진다 할 수 있습니다.
덧붙여 신라의 한자 사용법인 이두법은 신라 멸망 한참 후에 까지 한족들도 한자보다 더 많이 사용하고 있었으며, 화랑도의 습관들 또한 고려 이후 반도에서는 사라졌으나, 지금 한족들에게는 추석절이나 99절과 함께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문화 인문분야는 신라와 서쪽에 위치한 수나라나 당나라(618~907년)는 서방의 여러 문화들을 선점할 수 있어, 신라가 일찍부터 왕가나 귀족 자녀 혹은 뛰어난 인재나 승려들을 당나라로 유학시켜 인재양성에 매진하였는데, 그들 중 최치원은 당나라 말엽 황소의 난이 나자 황소격문으로 이름난 대표적인 문필가로 유명합니다.
또 대당 외교에 공헌한 강수, 이두문을 통일한 한문학의 설총, 문장가 김인문, 김대문, 등이 있었으며, 수십편의 시가문학 장가, 향가들이 일상의 감성이나 신앙심으로 불리웠는데, 이중 토끼와 거북 이야기가 사기 열전 김유신조에 실려 있어 당시의 김춘추와 고구려왕 고장 과의 외교를 빗댄 이야기로 오늘날까지 전해지며, 참고로 최치원과 관련한 지명은 대산, 율수, 유, 연, 제, 노, 와 오월, 등이 있습니다.
이처럼 여러 문필가들의 배출에는 훌륭한 교육제도가 있기 마련으로, 당 태종 때(640)에 국자감을 확장하여 학사를 1,200칸으로 늘리고 학생수를 3,260인으로 증원하며 천하에 이름난 명유들을 초빙하여 이들을 가르치게 하니,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이 모두 자제를 보내 국학에 입학시켜 달라고 청하자, 진덕여왕 때(648)에 김춘추가 당나라에 가서 태종에게 국학에 나아가 석전대제를 지내는 것과 강론하는 모습을 보여달라 하며, 귀국한 다음 당나라 문물제도를 본뜨는 과정에 국학 설치도 서둘렀던 듯 합니다.
28세 진덕왕 5년(651)에 박사 약간명과 조교 약간명 및 대사 2인을 두었으며, 통일 후 31세 신문왕 2년(682)에는 국학의 위상을 정비하기 위해 이를 예부에 소속시키면서 경 1인을 두어 그 책임을 맡게 하고, 주역, 상서, 모시, 예기, 춘추좌씨전, 문선, 논어, 효경, 등을 박사와 조교로 하여금 가르치게 하였는데 제생(학생)은 그 능력에 따라 3품으로 나누어 배출하였는데, 학생 신분은 제12위 관등인 대사에서 무위에 이르는 귀족 자제들로 15세에서 30세 사이의 청소년들이며, 이렇게 배출된 유학생이나 지체교육 관료들은 훗날 여러 분야에서 능력을 펼쳤지만 전해지는 유물은 기록물은 없고, 탑비에 기록된 수려한 글체나 문필로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인문분야에 걸맞게 종이 뿐만 아니라 벼루, 붓, 먹 등 문방류는 신라 때부터최고의 품질로 이름이나 송, 당이 부러워 했고 다투어 썼다는 기록도 있어, 윗대로부터의 문화 인문분야의 전통성이 확인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국가 증흥의 시대는 후대로 가면서 기강이 무너지고, 신심이 흐려질 시기에 일찍이 신교 삼신사상이 서방으로 전파되었던 방편제일의 서방의 불교가 창시되고 동진하여 신라에 들어오게 되며, 동신라(400여년경)에 비해 일찍이 13세 미추왕(263년) 때 불교가 들어오며, 선종의 도의국사와 남종선의 돈오선 혜능으로 대별하는데, 23세 법흥왕 때 527년에 공인하여, 27세 선덕여왕(632~647년) 때 9산 선문, 가지산문 조계종 도의, 실상산문 홍척, 등으로 자리잡습니다.
유명승려로 신라십성으로 아도·염촉(이차돈)·혜숙·안함·의상·표훈·사파·원효·혜공·자장, 과 화랑 세속오계의 원광, 혜초, 당 최고승 왕자 김교각, 등 많은 승려와 왕조마다 국사를 두어 왕권 강화에 이바지하였는데, 불교 공인 전까지 선도 선사들이 하였던 국정보조역을 점차 이어받게 되었으며, 특히 당과의 해상전쟁에서 명랑법사는 밀교의 문두루비의로 완승을 일구어낸 쾌거를 거둡니다.
이와 같이 신라의 불교는 동남쪽의 개인의 깨침과 열반에 초점둔 소승과는 달리 중생구제에 촛점둔 대승불교로, 대륙으로 유입되자 당시 신성을 말하지 않은 노장학파나 유학파의 반발이 가장 컷으며, 신라에서는 기존 신성을 신앙한 신교, 삼신, 선가들의 반발이 가장 심하였지만, 서로 상존하기 위한 방편으로 기존의 교당 대웅전에 모셔진 환인, 환웅, 단군, 조상을 불상으로 바꾸어 조성하고, 현판은 대웅전으로 그대로 쓰며, 교당 후당 높은곳에 단군상을 산신상으로 조성하여 현대까지 이어집니다.
참고로 불교의 대웅전은 기와집인데, 기와집은 사실 큰 새가 날개를 개고 앉아 있는 모습이고, 대웅이란 단군조선과 사로국의 상징처럼 큰새의 집이란 뜻입니다. 그리하여 이 대웅전에는 환인, 환웅, 단군,이 거하는 장소가 되었지만,불교의 교당으로 바꿔지게 됩니다.
그런데 기존에 있었던 종교들이나 불교도 단순히 종교 교세만이 들어온 것이라기 보다는, 그 이면에는 이를 운반하는 종족들의 이동이 항상 존재하였던 관계상, 당시 3~5세기경 대륙과 반도에 불어닥친 국가들의 이동과 세력의 재편이 새로운 불교의 전래와 연관됨을 추측합니다.
당시 대륙의 대승불교는 중관철학과 유식철학이 양립하고 있었는데, 신라 원측의 유식사상, 원효의 화쟁사상, 의상의 화엄사상이 철학적 사유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원측은 중국에 유식철학을 처음 전래한 현장의 제자가 되어 현장의 법통을 이은 규기와 쌍벽을 이룬 유식철학의 거장으로, 해심밀경소 등 유식에 관한 여러 저술을 하였으며, 학풍은 도증을 거쳐 태현으로 계승되면서 신라 유식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7세기 신라의 불교철학은 절정기를 이루웠고, 원효는 대승기신론을 주석하여 대승기신론소(해동류)를 저술하였는데, 여기서 일심으로 진여문과 생멸문의 2문, 곧 본체와 현상의 양면을 통합하는 대승기신론의 구조에서 중관과 유식의 대립이나 출세간(초월성)과 세간(세속성)의 대립을 극복하는 융화의 근원을 확인하며, 또한 십문화쟁론이란 저술에서 나타나는 것 처럼, 그의 철학적 중심 문제는 화쟁의 논리로, 모든 종파적 인식에 대한 긍정과 부정, 동일성과 차별성의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또한 중도에도 집착하지 않는 평등일미의 화쟁적 경지를 선명하게 제시했던 것입니다.
의상은 당나라에서 중국 화엄종의 제2조 지엄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본국에 돌아와서 신라의 화엄사상을 이끌어갔는데, 화엄사상의 본래 교리가 통합하는 성격을 지녀, 삼국통일기 이래로 신라 불교를 주도하였는데, 이 화엄사상의 방대한 체계를 가장 간결하게 압축해 전부 210자(7음30행)의 운문형식으로 화엄일승법계도를 지었으며, 이 법계도를 하나의 도인으로 표현하어 화엄세계인 해인삼매를 상징하고, 불교의식에서 다라니(축문)처럼 암송합니다.
그러나 신라 말기에는 화엄사상을 비롯한 교학사상들이 점차 형식화되고 관념화하고 있었으며, 불교교단도 왕실과 귀족에 의탁하여 사치스러워지는 폐단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이 때 선풍이 일어나 불교교단의 쇄신과 불교정신의 신선한 개혁을 추구합니다.
선사상은 이미 7세기에 법랑에 의해 당나라에서 전해졌으나, 9세기 초 도의가 6조 혜능 계통의 남종선을 도입한 이후에 더욱 활발해졌는데, 당시 선학은 지방에 구산선문을 세우는데까지 발전하며, 가지산의 도의 같은 순수선을 추구하는 순선과 실상산 홍척 같은 선의융통성과 같이 세속적 태도까지 포용하는 융선계열이 있었습니다.
도교는 삼국 초에 이미 노자의 사상이 수용되었고, 삼국 말에는 도교신앙이 전래하면서 도교사상의 기틀이 정비되어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다는 노자 도덕경 구절은 전쟁터에서 거듭 인용되었을 만큼 생활철학의 지혜로 활용되며, 무위와 불언의 자연주의사상은 정치와 처세의 원리로 활용되며 도교의 대표적 개념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최치원은 화랑 난랑의 비문에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전통사상인 풍류는 유·불·도 3 교를 포함하여 대중을 교화하는 오묘한 도리라고 밝혔으며, 화랑은 도덕과 의리를 서로 연마하고 노래와 춤으로 함께 즐기는 가운데 여러 사상을 포용하고 융화함으로써 삼국통일의 정신을 기르는 데 기여하였으며,
최치원은 진감국사 비문의 첫머리에서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고, 사람은 나라에 따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젊은이는 불교도 하고 유교도 한다. 고 하여, 진리가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 진실성을 갖는 것을 확인한 것으로, 우리 민족이 불교나 유교를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주체적 근거를 밝히고 있습니다.
통일 후 신라는 대륙과 한반도 두 곳에서 번영을 누리고 있었을뿐만 아니라, 발달된 해양문화를 바탕으로 왜, 일본, 부장품으로 큰개미핧기 토우가 사는 동단끝이 신대륙 개오지역 부상국, 동남아 인도, 페르사아 아랍 등의 남방제국가들과 실크로드를 아우르는 북방의 제국가와도 활발한 교류가 있었는데, 대륙 남쪽과 동남아시아와 일본에는 신라방, 신라소, 신라촌, 과 같은 집단 거주소를 각지에 형성되어 운영하고 있었고, 백제멸망 이후로는 신라와 유사한 담로 관할지 까지 신라방, 소 로 운영을 확대하였을 것으로 봅니다.
당시의 선박인 신라선은 해운업용 민선인 사선, 관선 사선인 막선, 관선 포경선과 군선인 난함선이 있었으며, 특히 9세기 해상왕 장보고는 강력한 무장 선원과 선단으로 당시 횡횡하던 해적들을 모두 소멸시키며, 내륙의 강이나 운하를 위시한 아시아 바닷길 해상로드를 장악하고, 우수한 첨저형 범선으로 세계무역의 한축을 담당합니다.
이렇게 선박제조와 항해술은 해상왕국이라 불리고 있었으며, 이는 대륙 내륙 깊숙히 사는 한족들과는 다르게 대륙대부분의 해안을 선점하여 살아온 사람들로 우주, 천문, 달과 별의 지식과 바다 물길과 바람을 아는 소이로 봅니다.
이를 증명하듯 당시 페르시아와도 인적 물적 교류가 활발하였는데, 고대 페르시아 세계최초 지도에는 신라가 섬으로 '알씰라' 라는 섬 이름으로 나오는데, 이것은 산동에서 요동을 잇는 선상에 발해바다의 가운데 묘도군도 장도에 단군시절부터 있었던 자유무역항을 두고 그린 것으로 보이며, 어떤 지도는 신라를 세상 중심으로 그리고 제작된 것이 있어, 신라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으며, 참고로 장보고와 관련하는 지명은 서주, 무령, 사, 연수, 완도, 장도, 가 있습니다.
또한 대륙에 위치한 신라, 가야, 백제, 고구려, 는 해안을 끼고 큰강들을 낀 대륙의 요충지를 모두 차지하고 있고, 한족의 나라들은 서쪽 깊숙히 있었던 관계를 보아, 수로를 활용하는 옛부터의 문화에 하백이란 강의 신과 벼슬이 있을만치 중요성과 함께 해왕국의 전통적인 국민성의 특성이 내재해 있습니다.
벼농사와 밀접하게 관련된 양자강의 도작문화 유적지는 9이 9리, 려 중 래이의 지역이며, 이 래이는 하,은나라를 건설한 주체제족이고, 그 지역이 배달국 복희씨로 부터 시작된 양잠과 비단생산의 요충지인데, 이를 백제로부터 이어 받은 사로신라는 양잠으로 비단을 짜서 서역과의 교역을 주도한 나라이며, 실크로드를 열어 당시 유럽에서는 오직 비단국(Serica) 신라(Sina)만이 중원 대륙에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양잠, 비단생산은 주로 왕비가 주체로 부녀자들을 이끌었고, 3세 유리왕 시절 가베, 라는 행사를 열어, 백성들의 옷감 삼베를 만드는 과정인 실을 가늘고 길게 만드는 삼기 놀이를 부녀자와 함께하여 진쪽은 한턱 내고, 희소가를 부르며 함께 즐겼다 하여 가베라는 추석명절이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매년 8월 15일 가베절 기념과 9월 9일 민속절은 신라의 행사였으나 오늘날 까지 한족의 중요 기념일이 됩니다당서 육우의 다경에는 차의 상등품은 상당에서 생산되고, 중등픔은 백제와 신라의 ‘왕가에서 전매품으로’ 생산되고, 하등품은 ‘고구리 왕가에서 전매품으로’ 생산된다.” 고 하여 당시 귀족들은 상당한 차 음용문화가 있었다 보입니다.
신라의 음악은 현금, 가야금, 비파, 관악기와 대함, 중함, 소함, 현악기와 박판과 대고와 가무로 구성되었고, 춤에는 두 사람이 있는데, 방각복두를 쓰며 자대수공란을 입고, 홍정도금과요대를 띠고, 오피화를 신는다. 하였고, 현금은 복희의 금과 진의 쟁을 중국 악부에서 모방하여 현금과 가야금을 만든 기록이 보이며, 향비파는 신라에서 시작되었고, 궁조, 칠현조, 봉황조, 로 모두 212곡이었다. 하였습니다.
기록에 신라는 매년 8월 15일이면 음악을 연주하며 술 마시고 잔치하는데, 여러 신하들은 뜰에서 활을 쏜다. 하였고, 신라금은 신라국으로부터 건너왔다. 12현이 있는데, 각현을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천·지로 이름한다. 예전에는 신라금 3장, 공후 2장이 전해져 왔는데, 지금 쓰고 있는 것은 쟁뿐, 금과 공후에 대해서는 아는 자가 없다. 살펴보건대, 신라금은 바로 우륵이 만들어 전한 가야금이다. 모두 12현인데, 그 가운데 무현이 조금 크다. 5단음에 이르러서는 점차 가늘어지며, 역시 점차 낮아진다. 하였고,
만파식적은, 신라 신문왕 때 동해 바다 가운데에 물에 떠다니는 작은 산이 있어서 파도를 따라 왔다갔다 하였다. 왕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바다를 건너서 그 산으로 올라가니, 산 위에 대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이것으로 적을 만들라고 명하였다. 이 적을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물 때에는 비가 오고 장마 때에는 비가 개며, 바람이 잔잔해지고 바다가 고요해졌다. 이에 만파식적이라고 불렀으며, 대대로 보물로 여겼다. 효소왕 때에 이르러서 만만파파식적이라고 호칭을 덧붙였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고 하였습니다.
삼죽은 당 나라의 저를 모방하여 만들고, 향삼죽은 신라에서 시작되었는데, 신문왕 때 만파식적이 있었다 하고, 회악과 신열악은 유리왕 때, 돌아악은 탈해왕, 지아악은 파사왕, 사내악은 나해왕, 가무는 나밀왕, 우식악은 눌지왕 때, 대악은 자비왕 때 사람인 백결 선생이 만들었으며, 간인은 지대로왕 때 사람인 천상 욱개자가, 미지악은 법흥왕 때, 도령가는 진흥왕 때, 날현인은 진평왕 때 사람인 담수가, 만들었으며,
사내 기물악은 원랑도가, 내지는 일상군의 음악이오, 백실은 압량군의 음악이오, 덕사내는 하서군의 음악이오, 석남사내도는 동벌군의 음악이오, 사중은 북외군의 음악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나라 사람들이 기쁘고 즐거웠을 때 만들었는데, 곡조와 악기의 수 및 가무의 형태는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춤과 연희는 하신열무, 사내무, 상신열무, 소경무, 한기무, 미지무, 대금무등이 있었으며, 하신열무 등 4편의 춤은 가야고와 노래 춤의 종합예술이었고, 한기무 등 세 편은 가야고 편성의 춤이었는데, 이밖에 화랑 관창의 가면을 쓰고 춘 검무와 원효대사가 파계하여 각 고을을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춤을 춘 무애무가 있습니다.
기록에 팔관회가 열였는데 하늘과 명산, 큰 강이나 용신 등 토속신에게 제사하고 국가와 왕실의 태평 행복을 기원하며, 화랑에 의해 노래와 춤 놀이를 하였다. 흔히 제사는 11월에 거행하고 이 날에 모든 백성들이 함께 즐기는 행사였다라 나옵니다.
연희는 최치원(837년 ~ 876년)이 쓴 시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향악잡영 5수로서 이 시를 통해 다섯가지 놀음과 이에 따르는 음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다섯 가지 놀음은 금환, 월전, 대면, 속독, 산예인데, 금환은 백제의 농주와 우륵의 12곡 중 보기와 유사한 공놀이 또는 오자미의 일종이고, 월전은 재담, 대면은 탈춤, 속독은 춤, 그리고 산예는 우륵의 12곡 중 사자기와 같은 사자춤입니다.
또 금환, 대면은 중국계통의 놀이이고, 월전, 속독, 산예는 서역 계통의 놀이지만 음악은 알 수 없습니다. 최치원의 시는 서역악이 신라에 들어왔다는 증거가 되는데,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돌아온 헌강왕 11년(885년) 이후에 시를 썼고 향악이라고 말한 점에서 중국 음악과 서역악이 9세기말에 향악화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교음악은 절에서 재를 올릴때 부르는 범패와 포교를 위해 우리말로된 화청과 회심곡이 있으며, 기록에 의하면 경덕왕 19년(760년) 국선에 속한 월명사가 향가는 알지만 범패는 부를 줄 모른다. 는 기록에서 8세기 중엽 범패가 신라에서 가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범패를 부르는 범패승과는 달리 원효대사가 무애가를 부르며 춤을 춘 것은 포교를 위한 거사 소리가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범패의 기록은 옥천사에 세운 진감선사의 대공탑비문에 범패의 오묘함을 배우려는 사람이 많다는 내용이 처음인데,
진감선사는 애장왕 5년(804년) 당나라에서 불도를 닦고 27년만인 홍덕왕 5년(830년)에 귀국하여 옥천사에서 불법과 범패를 가르쳤으므로 범패는 늦어도 9세기 신라 사찰에서 널리 가창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적산원에는 대중이 석가를 칭송하는 회중가의 신라풍과 당나라에서 부르던 당풍, 그리고 당나라의 범패보다 더 오랜 고풍의 세 범패가 있었는데, 신라의 범패는 신라풍과 고풍의 두 양식의 음악이 가창되었다고 보며, 범패 자료는 동음집과 1,931년 출간된 석문의범이 있습니다.
문무왕 4년(664년) 성천과 구일 등 28명이 부성에 가서 당악을 배웠다. 고 하여, 신라가 통일한 것은 668년이고 부성에 당나라 군대가 주둔했던 점으로 보아 이때 배운 당악은 고취(궁중 의식이나 군대 행진에 연주되는 일종의 취주악) 형식의 음악일 것으로, 삼현삼죽 음악에 사용된 궁조, 월조, 반섭조 등 당악의 조이름을 사용하고, 여러 유적에서 나타난 악기들을 보면 당악이 많이 들어와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동고, 요고, 횡적, 당비파와 퉁소, 쟁, 소, 생, 당피리, 적(笛), 박판, 공후 등의 그림이 새겨져 있습니다.
국가가 안정되고 문화가 팽창됨에 따라 신라의 궁정은 의식을 제정하여 집행하게 되고, 의식에는 음악 연주를 수반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궁중의 의식 음악은 예고됨이 없이 항상 열리는 것도 있으므로 음악인을 궁중에 상주시켜 연주, 행정, 교육,을 담당할 음악 기관이 필요하게 되어, 이 음악 기관인 음성서를 만드며, 음성서가 설치된 연도는 확실하지 않으나 진덕왕 5년(651년)에 음성서의 관리를 임명했는데, 음성서는 늦어도 진덕여왕 이전 7세기 중엽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활제작에는 물소뿔과 아교가 필수 제료로 사로지역에 자생하는 물소가 많고, 비밀병기 쇠뇌(노)가 있었는데, 이 쇠뇌는 기계장치가 있어 여러발을 한번에 쏠 수 있는 신무기로, 기록에 558년 신득이 노와 포를 만들어 바치므로 성위에 설치하였다. 하고, 731년 9월 백관에게 명하여 적문에 모이게 하고 차노 쏘는 것을 구경하였다. 하여 당나라의 무기가 100 여보를 가는데 비해 천여보가 나가 성능이 월등하여, 이 노병 천여명이면 있으면 어떠한 외적의 침입도 방지 할 수 있을만큼 위력적인 비밀병기로 쓰였으며, 또 안휘성 섭 에는 이때부터 나전칠기가 생산되고, 나침반 비단 면직물이 특산품으로 교역의 주종목이였습니다.
참고로 선비전 기록에 주호에서 키우는 야마(야생마), 완양(야생 산양), 단우(端牛)이다. 단우의 뿔로 활을 만드는데 세간에서 이를 각단이라 일컫는다. 하고, 이를 위지 동이전을 쓸 당시에는 각단궁이라고도 칭했음이 들어나는데, 이 물소뿔을 흔히들 각궁인데, 이 물소를 뜻하는 단우가 결국 음력 5월 5일에 지내는 단오(端午)와 완전이 그 글자가 일치하고 있어, 여기서 이야기하는 사육지 난하나 제주도 같은 곳에서 음력 5월 5일 단오절에는 물소와 활의 축제가 있었다고 유추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특산품들도 있지만 페르시아 기록에 나오는대로 신라는 황금의 왕국이였는데, 이기록이 대륙신라인지 반도신라인지 명확치 않지만, 단군조선부터 있어 온 장도에 국제무역항이 존재한 걸로보아 이곳에서 보여진 기록으로 보이며, 당시 지도에도 섬으로 나오는 걸로 보아도 몇몇섬들이 무역항으로 신라가운영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모든 문화가 세련되며, 그중 금속 제련 세공분야가 뛰어났다고 보이지만, 특히 일상 그릇이나 제기 등이 단군조선 시절부터 있었던 유기 종류는 한층 발달 (구리78,납22 배율) 하여 그릇과 생활용구로 쓰였다 보입니다.
신라가 해상왕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단군조에서 유습된 항해술에서 더욱 개발하고 발달하여, 일찍부터 한제국과 해상교류를 시작했던 3세기 무렵부터 당나라 시대에 이르면 당나라 시대에는 항해술의 전성기를 이루는데, 신라와 당나라 건국 때부터 멸망 때까지(618년∼907년) 무역을 중심으로 경제교류, 문화교류, 군사교류, 사신교류 등으로 긴밀한 관계를 이어와서 항해술·조선기술·선단운영술을 발전시키는데 서로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는 장보고가 소년 시절에 당으로 들어가 청년이 된 뒤 당나라 장군이 되기까지 당에서 오래 살았는데, 이때 발달된 항해술을 배웠던 것으로 보이며, 기록에 당은 정확한 해류의 파악과 이를 이용한 항해술이 매우 발달했으며, 해마다 4월에서 7월까지 대륙 동해안 서남 계절풍을 타고 일본을 오갔으며, 신라의 배는 이미 6세기 초부터 강이나 연안 해로에서 돛을 이용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동 신라와 당이 돛 달린 해선으로 본격적인 항해를 한 것을 8세기 초로 보고 있는데, 기록에 조병이라는 무역거상 이야기가 나오는데, 돛을 펴고 배 중앙에 앉아 큰 고함으로 바림을 불러 유유히 바다를 건넜다고 전합니다.
신라의 기록은 없으나 당나라는 실용적인 항해도를 일찍부터 만들어 썼고, 군부 내에 직방랑중이라는 항해도 전문 작성 부서까지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당대의 재상 매탐이 만든 항해도인 ‘등주해행입고려발해도' 에 당에서 반도 서해로 가는 해내화이라는 뱃길이 그려져 있어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며, 신라 또한 유사한 해도를 활용하였으리라 보입니다.
신라침반을 줄여서 나침반이라 부릅니다. 문무왕 9년 자석을 당에 보냈고, 12년에는 래주사마와 바늘을 당에 보냈는데, 당으로 전해진 나침반은 지남철 침을 이용한 것으로, 이 침반에 대한 신라 기록은 없고, 기록에 기원전 2세기 한나라 까지 쓰던 별관찰 관측성술인 기술이 있었다 하지만, 용품에 대한 한나라 원류에 관한 기록들은 믿을 수 없으며, 용어 자체로 보아 신라침반이 기원하여 나침반이 되어, 당시 대륙이나 서방으로 퍼져 현대에 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대륙과 오래 교류하면서 신라에는 항해도, 즉 뱃길을 잘 알고 나침반을 능숙하게 다루는 항해사인 암해자가 많았는데, 그 증거로 당에 들어갔던 일본 사람 엔닌이 일본으로 돌아갈 때 귀국선단의 배 아홉 척에 신라인 암해자 60명을 분승시켰다는 기록이 나오는걸로 보면, 신라는 항해 기술의 기본을 당과 서로 배워 발달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신라는 개국 초기부터 일본의 침략을 자주 받아 이를 막느라 수군과 배가 꼭 필요하여 군선인 전투용 배를 만드는 기술도 함께 발달하는데, 기록에 14대 유례왕 6년(289)과 22대 자비왕 10년에 군선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고, 일본에 배 만드는 기술자를 파견한 기록도 있는데, 4세기 무렵 일본의 배는 기둥과 대들보를 줄로 엮어 만든 원시적인 떼배여서 신라왕이 조선기술자를 파견했다고 합니다.
이때 신라에서는 목판을 붙일 때에 나무못이나 쇠못을 쓰지 않고 요철로 파내어 결합시키는 기술이 이미 발달해 있었으며, 기록에 무코(무고)의 수문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배 500척이 모여 있는데, 신라의 사신이 타고 온 배에서 불이 크게 번져 많은 배를 불태웠다. 이 소식을 들은 신라왕은 유능한 조선기술자를 보내어 배를 만들었다. 이 사람이 곧 이나베 가문의 시조인 저명부다. 하였는데, 기록상으로는 저명부가 일본에 건너간 신라의 첫 조선기술자인 셈입니다.
오사카만 무코강 입구에서 불에 탄 신라사신의 배를 다시 만들어주고 저명부는 그대로 무코강 입구에 눌러 앉아 그곳에 조선소를 세워 일본에서 배를 만들면서 조선기술을 전하고, 뒤에 이나베라는 일본 이름으로 바꾼 저명부의 자손들은 이세만 연안의 나고야로 옮겨 조선 기지를 건설하며, 일본인들에게 신라의 배 건조기술을 가르치는 한편, 일본사신들이 당나라로 갈 때 타던 견당선도 만들었다. 고 하였습니다.
이 이나베 가문이 일본에서 만든 배는 신라 배와 구조나 크기가 같았다는 것이 증명된 일이 있는데, 이세만 연안지방의 미야자키현 사이토바루 고분에서 하나와 라는 일본 배가 출토된 것으로, 100명쯤 태울 수 있는 이 배는 5세기 무렵의 대형 구조선으로서 노를 꽂는 구멍이 12개가 있었으며, 하나와 배와 매우 닮은 배 모양 토기가 경주에서 발굴되기도 해서 이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으며, 6세기에 등장한 일본의 견당선도 하나와 배에서 발전된 모습으로서, 신라조선기술로 만든 배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문무왕 18년에 중국·일본과 해상교류가 늘면서 당 거주 신라 해상민 조선기술이 특히 뛰어난 사례의 기록은, 제22대 지증왕 6년(505)에는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군선을 제도화시켜 수군을 강화했으며, 23대 법흥왕 4년(517)에는 이 군선단을 지금의 국방부 격인 병부에 소속시켰다. 고 나옵니다.
26세 진평왕 5년(583)에는 병부에 군선과 일반 무역선을 관리하는 선부를 설치해 수군과 일반 백성들의 해상교통을 보호하고 통제하는 데에 힘썼으며, 29세 무열왕 7년(660)에는 왕자 법민이 군선 100척을 이끌고 덕적도까지 출항하여 당의 수군을 환영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통일신라 초기 30세 문무왕 18년(678)에는 중국·일본과 해상교류가 급증하여 선박이 많아져, 병부에 속했던 선부를 독립시켜 병부와 같은 자격을 주고 수군과 군선, 그리고 해상 무역 제도를 더욱 강화, 발전시킨 것은, 문무왕이 당나라와 동맹한 연합 수군을 이용하여 676년 통일신라를 이룩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신라의 조선기술이 발달한 동기 가운데 하나는 황해와 동지나해 연안으로 이주했던 신라 유민들의 힘도 켰는데, 일본 승려 엔닌의 기행문인 입당구법승려행기(794∼864)와 속일본기를 보면 그런 기록을 살필 수 있는데,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상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대륙에는 신라 해상민들이 자리잡고 있어, 양자강과 경항 대운하 등 산동반도의 항구들 주변에 자리잡고 살던 신라 해상민들은 당나라 시대에 이르러 신라인 집단촌을 열 군데나 꾸렸습니다.
또한 그들이 운송·조선· 무역업·상업·제조업에 종사하여 대륙 경제에 큰 도움을 주자, 당나라 조정에서는 치외법권의 특혜를 누리도록 허락하며, 특히 양자강 어귀 유산포 항구에는 황해를 건너다니는 신라인들의 대형 해양선들이 모여들어 배의 수리업과 함께 조선업도 크게 번창하였습니다.
당나라 거주 신라 해상민들의 조선기술은 뛰어났는데, 목판 한쪽을 가늘게 깎은 ‘장부’를 다른 목판에 뚫은 구멍에 끼워 맞추는 기술, 쇠못을 깎아 만드는 기술, 방수기술이 남달랐으며, 당시 물에서 잘 썩지 않는 녹나무 같은 특수목재로 배를 만드는 조선기술까지 선보였습니다.
신라인들은 이런 조선기술로 원양 항해선뿐만 아니라, 하천이나 강에서 운행하는 수운선, 전투함, 경주용 용선 등 다양한 배를 만들었으며, 기록을 보면 신라인이 건조한 배들이 양자강의 나루터들을 장악하고, 수만 척의 배들이 주야로 왕래하여 교역을 했는데, 특히 원양 항해용 해선은 선체가 웅장하고 안정성이 뛰어나 아라비아와 일본인들이 타기를 좋아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신라인들의 조선기술은 당나라에도 큰 영향을 끼쳐 한제족 배들은 당나라시대에 비로소 크게 발전한 듯합니다. 당나라의 동래·강주·양주·상주·항주·복건 등 주요 항구에는 신라와 당나라 사람이 만든 수많은 조선소가 있었는건, 이곳에서 많은 배를 만들어 군사·운수·교역에 쓰였음이 기록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당의 태종인 이예는 양자강변에 있는 유남도의 관찰사(도지사) 유안을 시켜 양자강 연안 양주 일대에 조선소를 열 곳이나 세웠는데, 한 척에 100만 전짜리 큰 배 2천 척을 건조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1,960년 양자강변에서 당나라시대의 배와 선창이 발견되어, 길이 24m, 높이 1.4m, 너비 4.3m의 이 대형 당나라 선박은 녹나무로 만들었는데 장부 맞춤과 못박이 기술로 짜 맞춘 완벽한 방수선이었습니다.
또 1,973년에 양자강변의 마항에서 출토된 길이 17m, 너비 2.6m의 삼나무로 만든 목선은 선실이 9개에다 돛이 하나 있는 범선이었는데, 이 두 배는 신라의 조선기법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며, 이 배들이 출토된 양자강변은 신라의 유민들이 살던 곳으로, 당나라·일본·신라인들의 출입이 잦던 항구들이 집중해 있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신라방의 신라인들이 만든 배의 모양은 엔닌의 일기나 기록에 잘 설명되어 있는데, 범선은 갑판이 없으며 중앙에 돛과 노와 키가 있는 배로, 관선은 갑판이 있으며 문과 창이 달린 방 하나에 주위에는 난간이 설치되었고 갑판과 선창을 오르내릴 수 있도록 사다리가 있었으며, 방인 누각 말고는 갑판에 천막을 쳤으며, 배의 조립은 나무판재를 구부려 못으로 결합했고, 또 무거운 닻을 끌어올리고 내리는 승하강장치가 달려 있고 스무 폭쯤 되는 천으로 만든 큰 돛을 쓰는 대형 해선이었습니다.
이러한 신라방의 선박들은 일본 배보다 안전해서 일본사신들이나 무역상들이 즐겨 탔는데, 그 증거가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담겨 있습니다. 이 여행기의 저자인 일본승려 엔닌이 당에서 일본으로 귀국할 때 신라 선박 9척을 신라방에서 빌려 신라 선원 60명을 태운 이야기는 앞에서도 했지만, 이때 이 배를 수리하느라 양주의 신라촌에서 기사장, 목공, 선공, 철공 등 신라인 조선기술자 36명을 데려갔는데, 장보고의 도움으로 그토록 많은 배와 선원을 빌릴 수 있었으며,
820년대 말부터 삼국의 바다를 장악했던 장보고 선박들의 규모를 추정하면, 대형 군선인 누선과 쌀 1천 석쯤을 나를 수 있는 튼튼한 화물선인 조운선을 이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고려가 신라 말기에 쓰던 배의 구조나 크기를 그대로 이어 받았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바다를 건너다니는 해양선은 밑바닥이 칼날처럼 생긴 첨저선이고, 연안을 주로 다니는 해안선은 서해안의 얕은 수심에 편하게 드나들 수 있도록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을 이용했을 것으로 보는데, 배의 속도를 좌우하는 돛의 숫자를 늘여, 두 개가 넘는 독립적 기능을 가진 대형 돛을 설치했을 것이라 추정하고, 1,984년 전남 완도 앞바다에서 발굴된 배 한척이 선미와 선수부, 상부는 없고, 배의 남은 길이는 9m, 너비가 3.5m, 높이가 1.7m로 3만여점의 고려청자 등이 실렸던 이 배가 장보고의 청해진 중형배 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동 반도 신라 (503 ~ 936년. 존속 4백여년)는 56세 경순왕(~936년) 고려에 항복 멸망
동신라는 한반도에 있었던 나라로 지금의 평양 일대를 경계로 고구려와 옥저 아래에 단군조선 유민들이 세운 요서의 한사군의 한낙랑왕국(기원전 108~ 기원후 37년, 44~219)과는 다른 남만주와 반도에 있었던 조선낙랑국(기원전 195~기원후 32년)의 영토중 일부의 군소 지방국들 중 하나로 독립적인 간, 칸, 국(~503년)이 있었습니다.
간 국의 최씨 낙랑국은 마한전 낙랑군 수성현 지역에서 배달국시절부터 낙랑군으로 이어오다가, 번조선 출신의 대부호 최승이 바다를 건너 남으로 내려와 평양에 기원전 195년에 낙랑국을 세우게 되며, 옥저를 순행하던 낙랑국 국왕 최리 가 32 년에 고구려에 병합된 후 고구려의 지방정부의 하나로 간 국은 시조로부터 21세 까지 470년간 고구려가 한성(평양)에 별도를 두고 남부에 여러 간을 둔 고구려 지방정부 형태로 군주를 두었는데, 이 군주의 방언이 거서간, 마립간의 간 과 이사금 으로 군 내지 왕호로 썻습니다.
신라본기에는 지중 마립간 서중에서 신라왕 중에 거서한 이라는 이가 한분, 차차웅 이라 일컫는 이가 한분, 이사금 이라 일컫는 이가 열여섯, 마립간이라 일컫는 이가 넷이 있다고 했으며,
기록에 예는 북쪽은 고구려, 옥저와 접해 있고, 남쪽은 진한과 접해 있으며, 동쪽은 큰 바다와 맞닿아 있고, 서쪽은 낙랑에까지 이른다. 하였으며,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개마는 현의 이름으로 현도군에 속하며, 그 산은 평양성의 서쪽에 있다.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접하였고, 북쪽은 읍루, 부여와, 남쪽은 예, 맥과 연접하였다. 그 땅이 동서는 좁고 남북은 긴데, 긴 것을 짤라 짧은 데 보태면 땅이 사방 1천 리 가량 된다.라 하였고,
토질이 비옥하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어서 오곡이 잘 자라며 농사를 잘 지으며, 읍락에는 장수가 있는데, 호
수가 5천 호이며, 대군왕이 없으며, 읍락에는 각각 장수가 있는데, 대대로 세습한다. 하였고, 사람들의 성품은 진실하고 정직하며 강인하고 용맹스러워 창을 가지고 보전을 잘하며, 언어와 음식, 거처, 의복은 모두 구려와 비슷하다. 라 하였습니다.
참고로 503년 고구려의 한성(평양)은 반도에 있고, 평양성(장안성)은 고구려 장성 해주 서남쪽에 있었는데, 5세기 즈음 고구려 연방이 느슨해지고, 국력이 반도 남방까지 미치지 못하자, 그해 한성(평양)은 신라가 차지합니다.
22세 지증 마립간 (500~514년)이 지증왕(503~513년)으로 왕호를 쓰게 되었으며, ‘왕의 덕업이 날로 새로워져서 사방을 망라한다.’ 라는 의미의 신라로 국호를 확정하여 이전의 서벌, 서라벌 등의 국호를 고쳐 공식적인 동신라의 초대왕으로 등극하며, 여기서 서라벌 국호를 도읍 명칭으로 쓰는데, 이 서라벌 이란 말은 신시를 셔울로 훈독하듯이 신시 보올로 셔울 서울로 해석합니다.
재위 중 순장을 금하고(502년), 나을신궁에 직접 제사를 지내고, 국가 내부 체제 개편, 농사 권장 상복법 제정 (504년), 나라내 12성 축성, 상업 무역을 관리하는 관청 '동시'를 설립, 처음으로 지방에 군주를 두었고, 실직주 군주 이사부에게 명하여 우산국 복속(512년) 등의 치적을 쌓았습니다. 삼국유사에는 이 때를 상고 중고 라 하여 신라 천년중 반즈음의 기간임을 나타내며, 참고로 아마 이때부터 순장을 금하고 부터 흙으로 빗어 구운 토우가 만들어져 대용 순장시켰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한편 지금의 경주, 김해, 일본, 에는 400여년~500여년 사이에 조성된 돌무지목곽 적석목곽분이 발견되어, 일설에서 제기된 신라 왕실에 황새가 날아들었다는 기록과 법흥왕의 이름이 모진에서 김원종으로 성과 이름을 개명한 사례로 북방에 있던 흉노세력을 패퇴시킨 선비족 연나라 전연 모용씨의 강력한 기마군단의 한반도에서 일본까지 남하한 사례 등이 당시 동신라의 지배층과의 지배구조내에 습합하는 모종의 밀약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며, 나아가 신라왕관이나 동복, 일본무사의 일부만 남긴 삭발머리 모습 등은 선비족유습과 닮았다 보여집니다.
오늘날 경주와 남부 가야지역일대에 북방제족 흉노식 무덤만이 존재하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가지 뿐인데, 그것은 북방제족 흉노가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였으며, 고구려의 전신인 구려국의 형제였고, 그들이 흩어졌을 때 동으로는 우리나라 최남단까지 서로는 유럽까지 진출했던 대칸나라의 유목민족이었기 때문이라고 말 할 수 있으며, 적석목곽분이라는 형식은 유라시아 북방민족, 특히 스텝 루트 지방으로부터 남러시아에 정착한 스키타이인과 그 후예들인 선비의 묘제로서 신라에 도입된 것입니다.
또한 4세기 이후 북부 중국을 제패하고 있었던 선비족의 왕조 북위는 수도를 대동에 두고서 로마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1,970년에 발굴된 일련의 비잔틴(동 로마제국) 은기 및 인물부조 무늬의 컵 등은 그런 관계를 나타내며, 북위의 고관 무덤들에서도 전형적인 로만 글라스류가 나와 신라의 출토품과 공통적인 요소가 인정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위가 화북을 통일하고 수도를 낙양으로 옮긴 후에는 로마계 유물의 수용을 끊었던 듯합니다.
이렇게 초원의 길로 동전해 온 로마문화는 오늘날의 바이칼호반의 이르쿠츠크로부터 울란우데를 돌아서 몽골사막을 거쳐 대동에 이르고 거기서 동향하여 용성을 거쳐 신라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마립간 시대 동신라는 고구려와 대체로 우호관계를 유지한 것 같아 문화 유입은 원활하였을 것으로 보이어, 고구려나 백제와는 다르게 광범위한 문화교류가 신라로 하여금 통일을 이루게 하였을 것으로 봅니다.
한편 아랍권 11세기 서사시인 쿠시나메가 발굴되었는데, 고대 페르시아 왕조(기원전550~기원전330년)가 멸망후 왕조 유민들이 신라로 이주하고, 그 지도자가 신라 공주와 결혼했다는 이야기가 서사에 실려있어, 신라 고분묘에서 발굴된 유리병이나 그릇, 목걸이 등의 발굴품과 연관 짓기도 합니다.
이 때 인접국으로 북쪽의 고구려와 남쪽의 제주도, 대마도와 열도의 왜가 있었으며, 제주도는 석기시대부터 재래말 사육으로 유명한 곳인데, 고, 양, 부, 씨 삼성의 개벽으로 '주호' 라는 나라로 독자노선을 걷다가, 고을나 의 15대손이 백제를 멸한 신라로 귀부하여 탐라국이란 국호를 받고 썻는데, 고려 (1,211년) 때부터 제주나 여타의 명칭이였으나 1,374년 원이 침공으로 말사육 전반에 기술이 쌓이고, 1,374년 원이 물러가고부터 계속 제주로 불립니다.
또한 동신라 있던 반도남쪽이나 해안 강가에는 늦어도 3세기에는 부여나 가야 왜인이 이미 살고 있었으며, 당시부터 남해안 지역에서 나오는 철 원료 획득을 둘러싸고 진한인들과의 교섭도 활발했을 것으로 보며, 6세기에는 대륙에 있었던 백제나 가야세력이 한반도로 이주하여 반도 서남쪽이나 낙동강을 중심으로 신라의 지방호족으로 자리 잡은것은 이 시기 합천에 존재하였던 가야세력으로 추정되는 황금의 칼 철기 등의 '다라국' 의 유물이 대량발굴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이 당시 김해지역에는 다수의 전방후원분이 나타나고 일본은 되려 전방후원분이 사라지는데, 이는 선비족의 남하 부여유민들의 대거 이주와 선비의 남방 정착과 관련지어 봅니다.
부여유민은 대체적으로 고구려 건국기에 일부 부여세력과, 백제 고이왕(234~286년)때 요동지역의 국가 위기시, 4세기 초 선비족의 남하로 인한 부여유민 이주로 볼 수 있으며, 4세기 후반 김해 대성동 13호분과 2호분의 것은 상대적으로 그 규모가 크고 수준이 가장 높은 것이며, 여기에서 출토된 왜계 유물들은 왜와의 교류를 보여주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668년 고구려 연방붕괴 후 만주일대까지 영역이 확장되었으나, 698년 발해 건국으로 남북국시대를 열고, 인접국 왜와 병존하다가 1년 후 왜가 일본으로 바뀌게 되고, 800년 이전까지 발해와 함께 병존하게 되며, 9세기에 이르러 신라국은 멸망하고 마지막 56세 경순왕은 고려 태조로부터 신라를 경주로 개칭하고 이곳을 식읍으로 받습니다.
신라역사서는 진흥왕조에 이사부의 건의로 파진찬(541) 상대등(576) 을 역임한 장수인 거칠부가 국서 국사(545년)를 편찬하고, 김대문이 계림잡전, 고승전, 화랑세기를 편찬하며, 동신라가 서기503년 공식적으로 독립하여 433년 간의 존립하게 됩니다.
이 때를 기점으로 기록에 신라왕은 동과 서로 번갈아 가며 나라를 다스렸다고 나오고, 일설에 23세 법흥왕(514~540년)의 성씨가 모씨로 나오고, 진흥왕과 함께 일본 왕가에도 선비족 연나라(3~4세기)의 왕성 후예 모용씨 모씨의 천왕가 습합기록을 미루어 왕가의 변동을 말하기도 하는 설도 있습니다.
24세 진흥왕(眞興王, 534~576)은 7세에 왕에 오른 정복군주로 낙동강 서편 편입, 한강유역 점령, 함경도 진출, 등으로 전성기를 맞습니다. 이때 수고로운 장졸을 위한 일명 권번이라는 유희문화가 생깁니다.
기록에는 631년의 경계는 고구려 장성 동쪽으로 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 와 창령,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진흥대왕비 순수비에 나오는데, 고구려 호태왕 이전부터 고구려땅에 있었던 지방정부 간 국에서 마립간에서 왕으로 바뀐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요사 에서는 해주 옥저 땅 고구려 장성상의 동쪽에 신라가 있다고 하고 있으며, 서 신라와는 다르게 후대의 일식기록(787~911년)이 서라벌 경주로 나와 이와 같은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진흥대왕비의 내용에는 상대등 이하 지배층의 성의 기록이 없고 이름만 나오므로, 적어도 6세기 전까지는 대륙 사로신라는 성을 일반적으로 사용하였고, 그때까지 반도 동신라의 상대등 까지만 성을 사용하였으며, 그 이하는 사용치 않고 이름만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존속 중간즈음에 신라수도 동천은 동과 서로 번갈아 가며 다스리는 왕들과 함께 고대 동북아시아에서는 중요한 사건이 되며, 동천도 시기는 여러 왕조에서 긴기간 동안 준비하여 진행된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 연구에 의하면 19세 눌지왕( ~ 458년, 재위 417년 ~ 458년) 때 수도를 이동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는 8세 아달라 왕 (154년~184년) 시대 후기부터의 기록에 원수 구(仇)자가 많이 나와 대륙 사로국 외부의 친입이 많아졌다는 등주변국과의 끊임없는 전쟁도 있겠지만, 가장 큰 요인은 대륙의 잦은 기후변화 위기의 자연재해와 함께 왕가가 신봉하는 불교의 이상향인 불국토 건설의 목표가 그 원인으로 봅니다.
또한 신라의 수도이전은 19세 눌지왕(417~458년)에서 22세 지증마립간 왕(500~514년)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유추해 보는데, 이유는 그 기간에 걸쳐 금관이 발굴된다는 점입니다.
아시다시피 이러한 금관은 세계적으로도 10여점이 나오는 휘귀한 것인데, 동신라에서만 8점이나 되고, 북방유목민을 상징하는 금문화로, 백제나 고구려와 다른 스키타이의 사슴뿔이나 수목형의 교잡, 영락이나 곡옥 등의 톡특하고
아름다운 모습인데, 곡옥은 배달국 천왕 고분에서나 알타이 피라자크 고분에도 나오며, 대체적으로 흑해 북쪽 해안지방 사르마트에서 발견된 금관과 형상은 유사하다고 합니다.
일설로 이러한 금관은 왕이 사용한 것이 아니라, 왕의 권한밖의 신교 제의를 관장하던 여제사장이 실제 사용하던 것이며, 여기에 달린 곡옥은 누천여년 동안 전 대륙에 걸쳐 사용하던 일종의 신의 정신이 깃든 것으로, 사용자는 이를 기르는 사명을 되새기기 위하여 신수 내지 사슴뿔에 걸어 두었다 하는데, 세계 유일한 최고 종교의 상징물입니다.
불교 유입은 우선 과거칠불의 신라칠처 가람과 구산선문이 전개 되었고, 나라에 불교가 들어와 공인하고부터 국가주요사업으로 대대적인 불교문화사업을 들 수 있는데, 서신라 보다는 늦게 눌지 마립간 대 (417~458년)에 처음들어온 불교는 8세기 성덕왕 경덕왕 대엔 극성기에 이를 뿐만아니라 일본으로도 전래되어 사찰들과 불보살상 등 여러 문화재들을 만들게 됩니다.
이러한 것들로 서라벌 내 분황사와 모전석탑(선덕여왕 3년 634년) 이 불교유입 초기 목탑에서 석물로 조성하는 중간단계인 석기를 모방한 구운벽돌로 조성한 탑으로 건립되며, 서라벌 남산에 조성된 마애여래좌상과 탑곡 마애불상군들과 동쪽 토함산에 불국사(발해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35세 경덕왕 10년 751년 ~ 36세 혜공왕 774년)를 만들었는데, 김대성의 발원으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국가가 주도한 것으로 보며, 백제 석공 장인 아사달과 아사녀의 설화를 미루어 볼 때, 백제에서 뛰어난 장인들이 와서 건립한 것이 사실로 보여집니다.
또 토함산 중턱에는 불국사 소속 호국암자 석불사에서 석굴암으로 불린 인공 동굴암자를 조성하였으며, 낭산 기슭에 사천왕사와 탑을 조성하였는데, 이 사천왕사탑사의 녹유사천왕전돌 팔부신장 조소는 당시 조소와 필찰에 뛰어난 승려 양지 스님의 작품으로, 여러 조소상과 전탑 기와, 사찰들의 편액이 있으며, 연기법송 명탑상문전이 가장 유명합니다. 또한 수많은 사찰에 속한 종 중 이름난 신라대종으로 34세 성덕왕을 기리는 성덕대왕신종이 있습니다.
당시 기록으로는 유일하게 자장법사가 신라에 왔을 때 신라왕이 선덕여왕과 정신대왕으로 각각 다르게 기록되어 있어 동,서신라를 오고간 정황을 알게 하며, 신, 구당서나 25사 기록에는 고구려 동쪽 신라와 고구려 남쪽 백제의 동쪽 신라로 각각 기록되고 있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 왜, 가 대륙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고대 국가들이 세워지고 태평성대하면 군주는 먼저 도량형을 통일하게 되는데, 부도지 창세의 율려와 같은 음율 우주의 율동의 처음인 일음이 내딛는 자월의 음인 황종을 으뜸음으로 삼아 음의 기준으로 삼으며, 이 첫소리를 담아내는 것이 만파식적이란 피리와 에밀레종인 성덕대왕신종의 비의를 담았다 할 수 있습니다.
이외 수도시설로 왕궁 반월과 동궁 월지 남궁과 첨성대가 있었는데, 일설에는 해맞이 달맞이 행사를 남궁에서 출발하여 여궁 반월성으로 오가는 행차를 첨성대에서 관찰하고 백성에게 전하기도 하였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대륙신라와 같이 수십편의 시가문학 향가들이 일상의 감성이나 신앙심으로 불리웠지만 특히 처용가는 신라의 수도를 동경이라 하면서 널리 불리웠는데, 고려시대에 윤색 첨가되어 이씨조선대 궁중음악으로 쓰이게 되며, 그림에 솔거와 글씨에 김생(711년~미상)은 남북국 시대의 화가 명필로서, 솔거의 황룡사 벽의 소나무 그림에 새가 날아와 앉으려다 부딪친 설화가 있고, 김생은 자는 지서이고 신품사현의 한 사람인데, 어려서부터 글씨에 매우 뛰어났으며, 일생 동안 필법을 닦아 예서, 행서, 초서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습니다.
고려 사신 홍관이 송에 가서 김생의 글씨를 내보이자 송에서는 왕희지에 비할 만큼 천하의 명필이라고 극찬하였다. 하고, 그 후부터 중국 사신은 김생의 필적을 보배로 알고 구해 갔다 하며, 해동서성으로 불렸으며, 그가 직접 쓴 글씨는 남아 있지 않고 이차돈 비, 백련사액 등의 비문과 액자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사로신라의 화랑도는 동신라에서는 풍류도라 부르며 통일신라 시대를 열어가는데, 일찍이 해동공자 최치원이 사용한 풍류라는 개념은 풍류도라고 하여 전승된 선가에 공자의 충효, 윤리 실천주의, 노자의 무위자연, 석가의 권선징악, 교화주의가 바로 유․불․선 삼교로 종교, 술, 놀이 속성 에서도 종교인 부분이 강조되었으며, 개체의 자유로운 개성의 발휘가 공동체의 발전과 화합으로 이끌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접화군생이 핵심 사상입니다.
이때 제족인의 의식을 지배했던 철학이자 신앙의 바탕이 풍류도는 음악의 철학과 뿌리 역시 풍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는데, 풍류라는 용어가 지금음악계에서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는 점과, 역사적 유래에서 볼 때 화랑의 정신적 교육적 이념이나 화랑들이 주로 향유하고 곡을 만들기도 하였던 향가의 사상적 배경으로 풍류도가 거론되고 있다는 점과 옥보고 이후 풍류도와 동일한 개념으로 간주되는 금도 역시 통일신라 이후 줄론 신라궁중에서 중시되였고 그 이후 보편화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풍류란 화랑이라는 무리, 혹은 그 무리가 지녔던 현묘한 도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수장이 무리를 이끌고 승경지를 찾아 수양하고 가무하는 행위 역시 풍류로 볼 수 있으며, 향가 또한 단순히 고유한 시가 장르로서의 한 형식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처용가와 처용무의 관계에서 드러나듯, 그것은 대개 어떤 춤사위에 곁들여지는 노랫말이나 주문이었습니다.
또한 향가가 화랑들을 통해 만들어져 왔다는 점에서도 그러할 것이며, 제족의 고대문화에서는 문학과 예술, 사상 등이 모두 하나로 어우러져 영위되고 있었으며, 이미 예술적 행위 자체에 인문학적 소양이 묻어 있고, 문학이나 사상은 노래와 춤을 통해 밖으로 표출되었던 것으로 일종의 종합예술 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므로 풍류도와 신라시대 향가와의 관계에서 국문학적으로만 연구되었던 향가가 우리 전통음악의 한 갈래임을 분명히하고, 제족 음악학의 한 원류인 중세음악에 대한 연구는 고려 이전인 신라의 향가에 두어야 할 것이며, 제족의 고대 음악의 원류란 자연 발생적인 제천의식상의 구성원 모두가 참가 하였던 축제적 음악으로 이해 하여야 할 것이며, 당시의 향가는 불교에 윤색되어 있었지만 신교나 선가의 해양문화 용신앙이나 선도성모신앙이 녹아난 시가로볼 수 있습니다.
신라의 악기는 현금, 가야금, 비파, 현악기. 대함, 중함, 소함, 관악기. 박판과 대고와 가무로 구성되어 있으며, 음악인으로는 옥보고 의 30곡, 귀금선생, 극종, 등의 평조, 우조, 로 187곡으로 경덕왕 대 이후 하대입니다.
본래 동신라가 위치한 반도는 60만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는데, 고조선시대 이전부터의 생활이 넉넉하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는 평양시 남경 유적에서 5,000년경의 탄화미가 한 구덩이 안에서 대량 발견었는데, 이 벼는 현재 우리가 먹는 쌀과 같은 단립종이고 야생벼가 아니라 재배종이며,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사적 제426호)에서 고랑과 두둑이 일정치 않은 초기 농경방식을 띠는 밭이 나와 고조선시대 부터 벼농사뿐 아니라 밭농사도 지었을 것으로 보이고,
고조선 전기 마한영토내 밭 유적과 함께 기원전3,600~기원전3,000년 때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짧은 빗금무늬 토기의 토기편과 돌화살촉 등도 출토되어 한반도에서는 원시적 농경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농사를 짓는 본격적 영농과다양한 농작물 심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4세기 이전에는 국가 존재의 유적은 없어, 부족중심의 소국들이 있었다고 보이며, 함북 웅기, 평북 강계, 자성, 영변들의 유적지에서 구들 형태의 온돌도 고조선 후기 유적에서 발견됩니다.
신라는 농업국가로서 일찍부터 철기문화가 농업이 발달했고 아울러 목축업도 성행했는데, 특히 소와 말을 많이 사육해 농경과 수레 견인용으로 썼으며, 기록에 쟁기인 보습과 얼음창고, 수레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같은 기구를 사용하기 위해 말을 많이 길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직조와 철제도구를 만드는 수공업도 발달했는데, 경주의 조양동 38호 무덤에서 출토된 철검과 쇠도끼 그리고 이 같은 철제도구의 소재인 철정(쇠덩이)이 4∼6세기의 신라무덤에서 많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으며, 철정은 초기에서 중기까지 보호를 받고 있던 고구려에서 교역을 통해 수입했거나 소백산맥에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는 철을 사용하여 일찍부터 발달한 주조기술로 만들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 동해를 끼고 있어 농업 못지 않게 수산업도 발달해, 기록에 동해에서 큰 물고기를 잡았는데 크기가 수레에 가득했다’는 기록이 있어, 고래, 상어 등의 큰 물고기를 낚는 것은 고기잡이 기술이 발달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또 신문왕(683)이 왕비를 맞기 위해 혼인예물로 쌀·술·기름·간장·꿀·된장·말린 물고기·젓갈 등을 135수레나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어, 말린 고기와 젓갈이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보면 수산업의 발전 수준이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4세기 경의 소빙하기나 기원후 3~4세기 경 8세기 경에는 한발과 흉년으로 많은 아사자가 발생하자 열도로 이주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이때 야요이 시대 죠몽인 아이누인들과 후에 정착하는 왜 가야 신라인들의 방언이 원 일본어로 쓰이다가, 후대에 고구려 백제어 방언에 깝게 되었으며, 야마도인에 이르러 지금의 일본어의 조상이 됩니다.
고조선을 상징하는 비파형동검은 한반도 북부뿐만이 아니라, 충남부여, 전남여천 등지에서 무더기로 발견되며, 기원전 6천년 전 흥륭와문화와 같은 모양의 옥결이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유적에서 나왔으며, 요하 옥기와 비슷한 유물로 전남 여수,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 문암리유적 에서도 발굴되었습니다.
고인돌은 만주와 한반도에 많이 남아 있는데, 한반도 경우, 약 4만여기로 추정하며, 고창(전북)과 같이 100여개 이상 밀집지로 있고, 유럽의 선돌 집합적 돌무덤 형태인데 반해 한반도는 독립적인 돌무덤 형태로 북방 탁자식이며, 이곳에서 무자갑골도 만주를 포함 한반도 전역, 그리고 멀리 일본 열도의 규수 북쪽까지 분포하여 일정 종족의 이동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참고로 검은 가운데 등줄기를 중심으로 하여 그 양쪽에 날이 있는 것을 말하며, 칼은 한쪽에 날이 있는 것을 말하는데, 전투와 실생활에서 사용되는 것은 칼이었으며, 검은 오로지 제의용으로 사용되었으며, 이 당시의 것으로 반도 여러곳에서 출토되는 석검은 전 세계의 모든 검들의 원류 조형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전 세계 처음으로 검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곳이 한반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검이라는 명칭은 단군 왕검이라는 명칭에서와 같이 신적인 군장을 뜻하고 있는데, 원래의 돌검은 이러한 신성한 상징물로 의인화되어 검몸에 검눈(검안)이 새겨져 있는데, 이 검눈은 검몸에 길다랗게 두줄의 홈이 파여져 있는 것으로,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두개의 구멍이 새겨진 눈돌에서 볼 수 있듯이 매장자의 신분을 표시한 지석의 일종으로 이러한 돌검이 껴묻거리로 들어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강릉·청원·의성·대구·경산·고령·창녕·김해·부산, 등지에서 발굴되는 환두대도나 허리띠, 행업, 등의 장식으로 쓰인 신라의 삼엽문양은 아리안족의 대표되는 문양으로 고대 시리아 다마스쿠스검의 문양이나 중동,유럽에서도 나타나는 파르티아 동전 문양이나 프랑스의 왕가분장으로 쓰이던 것으로, 문화와 인적교류가 추정됩니다. 또한 이러한 삼엽문양 뿐만아니라 인류가 사용하여온 모든 문양의 기원을 영기문이라 정의한 신라 박물관장을 지낸 강우방 선생은 기와의 문양만 보더라도 그 어디에도 없던 문양을 백제에서 있었다는 것은, 이 무늬 영기화생론에 입각한 지붕미학의 완성을 뜻한다 하였습니다.
방상시 장승(장생)에서 볼 수 있는 4개의 눈은 바로 이러한 검의 양쪽 면에 새겨진 4개의 검눈을 모아놓은 것으로서, 방상시 신은 검의 또 다른 형태로 여길 수 있으며, 주대에 방상시는 벼슬 관직으로서, 주검을 매장할 때에 곰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황금으로 만든 4개의 눈을 달고, 무덤에서 꺾창으로 널과 구덩이의 네 귀퉁이를 찌르면서, 무덤 구덩이로 들어오는 염병이나 악귀를 쫓는 일을 맡아보았습니다.
영국이 만든 공상과학 영화 에이리언을 보면 영화 속 외계인은 길죽한 짐승 머리에 날카로운 앞이빨이 달려있으며, 그 안에서 다시 또 다른 머리가 들어있는데, 이 외계의 짐승 머리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달린 곰의 두개골 상부와 그 모습이 대강 일치하고 있으며, 두개골 안에 또 다른 머리가 들어있다는 점에서 곰의 머리를 뒤집어쓴 방상시의 모습과 일치합니다.
시베리아 일부 지역에서는 근대까지도 사제장이 이같은 곰의 머리 또는 두개골을 뒤집어쓰고 제의를 하였다고 알려지는데, 미국 인디언들도 이처럼 추장이 곰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제의를 하였던 종족이 있었다고 하며,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대륙에서 매우 흔한 이름인 뱅상(빈센트)은 무덤을 지키는 토지신인 방상에서 비롯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반도 남부의 지석묘 고인돌은 남방계로 타이완(파이완족)·인도네시아(자바족)·태국(타이족)·인도(군다족) 등으로 동남아 농경민족에 주로 퍼져있는 난생신화로 대별되는 지역인데, 왕들의 무덤은 적석묘 석관묘 형태로, 북쪽지역의 북방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난생 신화가 북방계 천손 신화에 의해 압도되어 있어, 천손난생신화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여, 경제적 기반은 벼농사인데 정치적 기반은 천손사상이 바탕이 된다는 말로, 한국말 속에는 특히 농사와 관련하여서는 인도나 동남아 등지의 말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는 반면, 한국어의 근본 구조는 북방계의 언어구조인 이중구조입니다.
특히 요서, 요동,을 포함한 남만주와 반도는 당시 기후가 온화하고 뭇생명이 넘처나는 곳으로 북유럽 인종을 포함한 여러 인종들에게는 일종의 성지라 할만치 고인돌이 생겼는데, 이는 이곳 여러곳에서 북유럽인 인골이 발굴되므로,
당시 선지적인 인종들에게는 이곳 반도가 지구촌에서 먼저 태양이 뜨며, 신비로운 곳으로 널리 알려졌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김치는 600년경에 익산에서 발굴된 대형 토기들은 대체로 승려들이 생활처소에서 출토되었으며, 크고 형태가 비교적 완전하게 남아 있어 의도적으로 땅을 파고 묻어 사용하였을 것으로, 겨우살이에 대비한 김장독과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으리라 추정되어, 삼국시대 김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유일한 유적이 되고 있고, 신라 성덕왕 19년(720)에 세워져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는 법주사 경내 큰 돌로 만든 독은 김칫독으로 사용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31세 신문왕(681~692년)이 683년에 왕비를 맞이하면서 내린 폐백품목 가운데 간장, 된장, 젓갈무리,가 들어 있어 발효 식품이 상용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릇은 서쪽지방은 태도의 순도가 높고 6세기 이전은 토기의 기형이 중국 남조풍의 영향이 짙은 반면 7세기에 들어
서서는 수, 당풍의 이 반영되어 있었고, 물레 성형이 매우익숙하고 태토가 정선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며, 이것은 태토 수파의 기술이 먼저 발달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며, 회색계 토기의 색조로 보아서 환원염 번조 기술이 주류였던 것 같으나, 때로는 산화염으로 번조된 적갈색계의 토기도 약간 있으며, 이례적인 것으로는 서울 가락동 백제 고분에서 출토된 윤택이 있는 흑색 도기 항아리를 들 수 있고, 이 항아리 어깨에는 점선으로 사격자문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반도 동편지역은 순도가 낮고 석기질이 많아 기공이 많은 편으로, 이들은 모두 환원염으로 구워서 회흑색을 띠는 경우가 일반적이며 그 강도가 높으며, 매우 드물게 산화염으로 구어진 자색의 거친 토기도 발견되며, 동편 토기의 장식무늬는 대개 예리한 각선으로 기하학적 무늬, 사선격자 무늬, 톱니무늬, 평행선무늬, 평행파상무늬, 권점무늬 등이 많고 때로는 치기어린 인물 무늬, 말을 비롯한 동물 무늬를 선각한 것들이 있으며, 기체에 고리를 달고 그 고리에 심엽형 또는 방종형의 수를 드리운 예들이 있습니다.
이들 신라 토기는 고구려나 백제 토기에 비해서 비현실적인 고분문화적인 성격이 매우 짙으며, 이러한 기형들을 크게 분류하면 장경감대, 두형고배, 이형토기, 토우, 도연, 등이 있습니다.
신라에서 가마를 이용했던 기록은 기록에 왕이나 귀족 여인들이 주로 탔고, 신라 31대 신문왕(681∼691년)은 즉위 3년째 되던 683년에 일길찬(정승급) 김흠운의 딸을 두 번째 왕비로 맞이하기 위해 가마와 비단을 가득 실은 수레를 처가에 보냈고, 결혼식 잔치용으로 15수레 분량의 쌀·술·기름·꿀·간장·된장·생선포와 135 수레 분량의 식혜, 150수레 분량의 벼 등 도합 300대의 수레로 물건을 운반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기록을 보면 귀족 여인들은 주로 가마를 탔음을 알 수 있고, 신문왕이 이렇게 많은 수레를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신라에서 수레사용이 보편화되어 있었던 까닭인데, 특히 신라중기(600) 이후에는 육상교통과 수레, 말, 가마 등을 관장하는 승부가 궁궐 안에 생겨 이처럼 많은 수레를 동원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신라 수레의 모양은 무덤에서 나온 수레형 토기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바퀴살이 12∼16개인 두 바퀴 수레가 주종을 이루었고 사람이 타거나 짐을 실을 수 있는 사각함이 두 바퀴 사이 차축 위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귀족용 수레는 계급에 따라 치장, 의자, 의자 깔개 등이 다르지만 모양은 2륜 수레로 통일한 듯하며, 백성들이 사용하는 화물 운반용 수레도 2륜 수레인데 승용과 화물운반용을 겸하는 간소한 수레로서 끄는 동물이 다를 뿐으로, 귀족 수레는 주로 승용이라 빠른 말 1∼2필이 끌었고, 짐수레는 힘이 센 소가 끌었습니다.
수레의 적재량은 기록 중 신라본기에 보면 문무왕(661∼668년) 2년 1월 고구려의 수도 평양을 포위하고 있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을 지원하기 위해 김유신 장군이 수레 2천 대를 동원, 쌀 4천 석과 벼 2만2천 섬을 실어 경주에서 평양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고보면, 한 대가 쌀 2석과 벼 11섬 등 13가마니를 운반할 수 있었으니 꽤나 큰 수레였습니다.
신라에서 이렇게 귀족이나 서민 할 것 없이 두루 쓰던 수레는 모양이나 크기가 달라서 수레를 만드는 기술자들은 고구려처럼 상당한 대우를 받았고 국가에서 수레기술을 적극 장려해 제조기술이 매우 발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기록에 신라 초기의 주택은 움집이나 지상주거의 초가집과 같은 주택으로부터 점차 발달하여, 건축자재가 발달하고, 계급의 분화가 뚜렸해지며, 계급간에 경제적 여건의 차이가 남에 따라 진골계급의 주택이나, 육두품과 같은 상위계급의 주택은 목조가구식의 민도리집구조의 기와집으로 지어지고, 서민계급들은 여전히 초가집이었을 것이다. 특히 통일신라 이전인 문무왕 즉위 이전 선덕여왕대, 진덕여왕대, 무열왕대의 진골계급의 주택은 극히 장대하고 화려한 것으로 보이며, 주택 바닥구조는 마루바닥과 전바닥, 흙바닥으로 이루어졌고, 이들 바닥에는 직물로 된 깔개를 깔았는데, 구들도 사용했으리라 보입니다.
신라는 김춘추가 당나라의 복식제도를 들여와 시행하였으며, 문무왕 재위 4년간에 부인의 복색을 고쳤다는 기록이 같은 책 잡지 제 2 복색조에 있는데, 이 규제가 제정되기 전까지는 각 계급간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경제적인 여유만 있으면, 규제의 금지사항에 대한 아무런 제약없이 건축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진골계급과 육두품의 규제사항 중에서 상당부분을 적용하여 건축하였던 주택은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던 진골계급과 육두품과 같은 상위계급의 주택이라 판단됩니다.
신라인들은 3세기부터 바다를 거쳐 대륙으로 내왕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가장 필요한 것이 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해선인데, 초기에는 육지 연안을 따라 내왕하는 연안 해로였기 때문에 주로 노를 젓는 배를 썼지만 다양한 통로로 바다를 건너는 해로교통이 발달하던 4세기에 들어서면서 신라의 배 만드는 기술도 점차 발달해, 통일신라시대에 접어들면 당나라의 조선기술보다 크게 앞섭니다.
차가 문화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은 행다(차를 부어 마시는 일체의 행위)와 팽다(차를 끓임)의 의식과 정신문화적 요소를 갖춘 때라고 볼 때, 신라 차문화와 관련한 보다 구체적인 기록은 삼국유사 경덕왕 23년(765) 삼짇날 차회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기록에 42세 흥덕왕 (777~836년) 3년 12월에 '당 사신 대렴이 차종자를 가지고 와 왕은 지리산에 심게 했다, 고 나오고, 차는 선덕왕(632~647년) 때부터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성하였다'. 하였는데, 이는 차종자 수입이라기 보다 품질개량사업 일환으로 보입니다.
500여년 경 동신라에선 차를 사찰 불공에 쓰였고 왕실의 예·패물로 다뤄질 정도의 차문화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또 불교서적과 더불어 차종도 직접 가져왔을 것으로 보이고, 신라의 화랑들이 차를 마시며 도의를 닦았다는 것으로 미루어 차의 정신문화적 위상도 알수 있을 것이며, 인도승 연기가 구례 화엄사를 세울 때(544년) 차씨를 지리산에 심었다는 화엄사의 전설과, 당시 차나무가 중국 양자강 이남 서신라에 널리 분포된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이처럼 반도는 대륙이나 열도에 비하여 빈번하고 전면적인 전쟁이나 기후, 지질, 등 생태적인 위기나 환란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 곳이므로, 이러한 이유가 사로신라가 동신라로 옮기게 되는 이유중 하나일 것이지만, 사로신라 시절의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 으로부터 신봉하던 신교유습이, 법흥왕조에 공인한 불교로 인하여, 서서히 전통 정신문화가 사라지고, 나라를 위하는 불교가 아니라 불교를 위하는 나라가 되었으며, 무용성과 활발한 정신문화가 사라지며, 한족화한 이웃 당나라와의 교류와 연합으로 한제족의 정신문화가 습합하여, 문약하고 허약한 개인이나 팽창적 국가체질이 나라의 멸망을 초래하기에 이르며, 이후 이 신교는 일본의 정신문화로 자리잡게 됩니다.
단락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