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22일, 설레는 마음으로 날씨를 살폈다. 온 세상이 꽃가루와 미세먼지로 뿌옇게 뒤덮여 희미하게 보였다. 창문을 열 수가 없어 그대로 한참을 서있다 창가에 둔 스파트필름에게 눈길을 돌렸다. 초록의 잎과 꾸밈없이 순수한 흰 꽃이 흐릿한 세상을 정화시킬 것을 다짐하듯 싱그럽다. 고마운 마음에 잎이 윤기가 흐르게 닦으며, 갈증을 느끼기 전에 듬뿍 물을 주고 외출 준비를 했다.
입을 옷이 없다. 작년에 벗고 다닌 것도 아니고 나름 멋을 내며 다녔는데 입을 만한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조금 우아하게 원피스를 입었다가, 캐주얼한 차림의 셔츠에 통 넓은 팬츠로 갈아입기를 반복한다. 만나는 사람과 장소에 맞게 옷을 챙겨 입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떻게 하다 보면 내 몸에 맞지 않아 어색하고, 또 편하게 입고 나가면 격에 떨어져 초라하다.
30여 분을 거울 앞에서 서성이다 결국 편한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시동을 켜고 트로트 뮤지컬 시간에 배운 최진희 노래 <사랑에 빠졌어>를 틀었다. 경쾌한 리듬에 맞춰 따라 부르면서 약속 장소에 20분이나 빠르게 도착했다. 먼저 가서 그들을 맞아주고 싶은 마음에 서두른 것이다. 그런데 나와 같은 마음으로 더 일찍 도착한 이들이 있었다. 웃는 얼굴로 나를 향해 먼저 손을 흔들며 반겨 주었다.
회장을 맡은 외가 큰 오빠와 총무인 셋째 오빠다. 모임을 주최하고, 이끌어가는 그들의 배려는 따라갈 수가 없다. 작년에 막내 외숙모의 상가에서 보고 거의 1년 만이다. 오느라 고생했다며 등을 다독이는 오빠의 다정함에 난 어리광쟁이가 되어 겅중거리며 인사를 했다. 3년여 만에 외가 사촌들이 모이는 날이다. 외사촌과 이종사촌, 반갑고 그리운 이들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엄마는 남양 홍 씨로 형제가 다섯이다. 외삼촌 두 분과 이모 두 분이다. 지금은 막내 이모와 외삼촌, 큰외숙모와 이모부 한 분이 생존해 계신다. 이모는 요양병원에 계시고, 다른 분들은 거동이 조금 불편하지만 그래도 괜찮은 편이란다. 코로나19로 묶여버린 3여 년의 세월만큼 어른들도 많이 쇠약해졌다. 아무리 힘없고 쇠약해도 그들의 그늘은 시원하고 푸근하다.
다섯 뿌리의 나무에서 스물셋의 가지가 뻗어 풍성한 한 그루의 나무가 됐다. 가지에 열린 열매들이 우리 그늘에서 편히 쉬며, 보고 배우길 바랄 뿐 조바심을 가지고 재촉하진 않는다. 엄마 손에 이끌려 갔던 종친회에서 내가 느낀 어색함을 그들이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 어색해하던 내가 지금은 적극적으로 활동하듯, 우리 역할을 잘하다 보면 열매도 자연히 그 길을 따르기 마련이라 여긴다.
첫 모임은 2019년 5월의 화창한 봄날, 시골 큰 외가에서 있었다. 얼굴을 보지 않으면 남처럼 된다며 큰오빠가 제안했다. 마당에 자리를 깔고 왁자지껄하게, 서로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헤쳤다. 큰외숙모도 흐뭇한 얼굴로 우리와 함께했다. 엄마의 유일한 쉴 곳이던 외가는 아직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더 편안하고 정겹다.
그곳에서 나는 아직 아이다. 나이 차가 고작 다섯 살 터울인 외가 큰 언니는 육십을 바라보는 내게 우리 아가란다. 아가가 언제 커서 운전해서 언니들을 데리고 다니냐며 뿌듯해한다. 어리광을 받아 주는 곳, 마음껏 뛰어놀아도 흉이 되지 않는 곳, 어린 시절 한밤중이면 바깥에 있는 화장실만 찾는 내 고약한 버릇을 닭에게 팔아버린 곳이다. 그래서 외가는 마음의 휴식처다.
20여 명이 모였다. 내 첫 수필집 내용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 책을 읽으며 잠시나마 잊고 있던 그때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마디씩 한다. 불쑥 내게 인사말을 하란다. 외가는 엄마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작가가 아닌 그저 외가를 많이 사랑하는 나로 봐달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짧게 인사했다. 즐거운 만남을 위한 분위기가 흐려질까 봐 얼른 앉아버렸다.
옆에 앉은 이종 동생이 덩달아 눈시울을 붉히며 내 손을 잡았다. “누나, 나도 엄마 산소에 가면 많이 울어. 잘못한 게 많아서.”라고 한다. 아차, 하는 생각에 얼른 목청을 가다듬으며 그곳에 가서까지 자식 걱정하게 하면 안 된다며 절대 울지 못하도록 따끔하게 말했다. 우울한 분위기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에 동갑인 이종사촌더러 생일 빠른 나에게 누나 대접 잘하라며 괜스레 시비를 걸었다.
사촌들이 모이면 서열에 민감하다. 서로 대우를 받으려고 옥신각신이다. 수년을 그렇게 하고도 만나기만 하면 또 그런다. 지겹지도 않고 기분 나쁘지도 않은 쟁탈전이다. 회장인 큰오빠가 서열 정리를 한참 동안 했다. 55년생 큰 오빠부터 77년생 막내까지, 우리는 22년을 뛰어넘는 모임이다. 오빠가 모임의 가장 큰 자랑거리가 우리의 건강한 모습이라고 했다. 뿌리가 튼튼해서 가지들도 별 탈 없이 건강한 것에 감사하며 건배했다.
건배사가 멋지다. 55, 66, 77 파이팅이다. 11년 단위로 내가 속한 66년생이 가운데다. 아래위로 보조를 잘해야 한다는 의미로 사이에 넣어 준 것이다. 분위기를 잘 맞춰야 한다는 회장님의 의도에 맞게 66년생 우리는 그곳을 휘어잡아버렸다. 누구도 겉돌지 않고 뭉쳐 있는 모습에 다 함께 다시 55, 66, 77(오오,육육,칠칠)을 외치며 시월에는 큰 외가에서 모이기로 약속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 고소하게 잘 살자며 나눠 가진 참기름의 향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