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7장 1-3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권세’ 하면, 우선 제국의 왕이나 황제 오늘날로 말하면 집권자. 정치적 권력을 잡은 세력가들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이 교회에서조차 예수를 이와 같은 지상 권세, 세상 권력과 같은 동질의 개념으로 해석함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권세’의 본질을 모르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이해하는 시각이 마치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존재로 자리매김이 되어 있고 잘 못 된 예수의 형상이 뿌리 깊이 박혀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한글 번역본의 표현대로라면 참으로 예수는 슈퍼울트라 초강력 권력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문제는 교회의 잘 못 된 권세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잘 못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가 공생애를 사시면서 그 어디 한 구석에라도 당시 로마제국의 황제의 권세와 영광과 그와 같은 세계를 지향하는 삶을 내 비치거나 진행했던 적이 없었음에도, 어찌 된 영문인지 사람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호령하며, 그들을 영적인 권세를 가진 것으로 호도하여 제압하기까지 합니다.
이는 성경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예수가 말한 하나님의 나라에는 없는 나라의 모습입니다.
이는 가르치는 자에게서 우상화된 예수 관이 교회 안에 형성되었기 때문이고, 그 형성 된 문화의 영향이 지금의 권세가로 교회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다시 살펴보는 노력이 필요하고 성령의 도움을 간구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아마도 본문은 한글 개역의 번역이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라고 하는 통에 오늘날까지 오해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7:2절을 “모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라고 해버리면 어딘가 모르게 만왕의 왕 예수가 축소되는 듯한 느낌 때문에 번역 당시의 사회적 환경이 윤리적이어서 그 관습에 따른 번역을 했는지 모르겠으나 이는 ‘우상적 예수를 끌어안고 있는 상태에서 나온 미완의 번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원문으로 직역하면,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모든 육체를 다스릴 권세를 주셨습니다.”입니다.
그렇다면 “그 모든 육체를 다스리는 권세”를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계시는 동안 어떻게 진행했는가에 기록은 신약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육체를 다스리는 권세를 어떻게 행사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복음서의 기록입니다.
육체 중에 누가 더 크냐의 세계를 자극하고 부채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시도를 뿌리 뽑고, 생명의 큰 틀에서 하나로 어울리는 새 세상을 꿈꾸었고, 그것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 육체가 되어버린 사람들과 만났으되, 그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주신 권세, 그것은 영접하는 권세요, 속이지 않는 권세이며, 헛되지 않고 공명정대한 대로를 걷는 권세인 것입니다.
(고전 1:19-21)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
모든 육체를 다스리는 권세는, 이처럼 이 세상의 지혜를 폐하고 이 세상의 총명을 멸하는 권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강함보다 하나님의 약하심을 따라 삶을 살게 하는 능력인 것입니다.
모든 육체를 다스리는 권세는 육체의 요구를 수용하고 그것을 들어주고 해결해 주는 세상 권세와 같지 않고, 도리어 그 모든 육체의 요구와 아우성(현세적 효용가치를 요구하는 부르짖음)을 폐하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권세입니다.
새로운 터전에서 살 수 있게 하는 권세, 이것이 모든 육체를 다스리는 권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방향에 초점을 두고 움직여 갔습니다.
예전에 어느 교회 간판에 이런 문구가 걸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는 모든 문제의 해결자’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요? 무슨 예수 관을 갖고 이런 예수를 선전하는지...
요술 방망이로 변해버린 예수 이름. 이런 말을 뿜어내는 사람. 그 가운데 머무는 예수상 자체가 심판의 대상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모든 육체를 다스리는 권세)란 하나님과 메시야에 대한 우상적 인식을 벗겨내고 새 인식을 열어주기 위해서 아들이 가야 했던 고난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고난의 실체를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세속적으로 가난하고 쉬지 못해서 고생한다고 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예수 고난의 실체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육신적인 메시야 관점. 그것이 야기 시키는 열화와 같은 현세적 요청을 솟구치게 하는 그 인식을 사로잡아 처단하는 기도와 능력인 것입니다.
여기에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 (모든 육체를 다스리는 권세)의 비밀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기도원에서 밤이면 밤마다 소나무 뿌리를 붙잡고 짐승의 울부짖는 소리로 절규하며 외쳐대는 그칠 줄 모르는 대행진들이여..... 무엇에 주려 그토록 애원하는가?
그 기도는 자기를 찢는 기도가 아닙니다. 나를 던져 버리는 기도, 나를 포기하는 기도. 마음속에 있는 귀를 기울여 그분의 말씀을 듣는 기도, 여기에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배부른 돼지가 되는 요청들이 아닌,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어 자신을 태워 올리는 마음의 등불, 그 심지에 불을 피울 때 비로소 육체의 예수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하고 생명의 길로 진행하는 여정으로 접어들 가능성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행사하는 예수인 줄 알고 아직 우상적 숭배를 보내는 신앙생활, 거기 높이 들리워져 거짓 경배를 받아 헛배만 부르신 예수를 이제 끌어내려 쉬시도록 해야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경배의 대상 이전에 <이해의 대상>입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 존재에 대한 인식의 눈을 떠 갈 때, 명철, 즉 이해의 불꽃이 점화되고 새 눈. 곧 법안(法眼)에 눈떠 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된 예배를 받고자 하시는 게 하나님의 바람입니다.
어깨에 힘주고 세력을 과시하며 호령하고 강요된 경배를 받고자 하는 것이 예수님의 원함이 아닙니다.
그러한 세계는 전혀 원치도 않고 의도하지도 않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생명의 세계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그 같은 노예적 굴종을 뭐가 아쉬워서 받으시겠습니까?
(요일 5:18-21)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 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해 있다고 합니다.
이 선언이 지금 나의 현실인가에 대해 엄정한 자기 진단과 검열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하는 상태가 아직 미완(未完)의 사건으로 있는 자기를 보면 어떻게 살 것인가? 타인의 권위적인 발언 아래 숨어서 핵우산을 쓰고 거짓 안식에 안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한 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바입니다. 그 후에 심판을 넘어 낳아지는 자기가 참 나인 것입니다.
아직 나는 악한 자 안에 처해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고 나타나 지각을 주시기를 기다리는 몸일 수 있습니다.
무슨 세속적인 학문적 성취를 했든 아니면 학위 몇 개를 가지고 있든지 간에 거룩이 앞서 인도해 가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심판의 불로 태워져야 할 육체일 뿐입니다.
육체의 잿더미를 뚫고 솟아오르는 자기 그 자기가 불멸의 자기요. 죽지 않는 불사(不死)의 몸입니다.
예수로부터 흘러나오는 모든 육체를 다스리는 권세. 그 능력과 태우는 불꽃에 잠기는 사건이 지난 후에야 그 아들 안에 있는 것을 인식하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야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우상(왜곡된 메시야관)을 멀리하고 경계하며 생명이 인도해 가는 영생에 동참하게 되고, 뒤따르는 또 다른 이에게 육체를 다스리는 권세를 통해 주어진 기름 부음을 힘입어 그의 죄업을 여의게 하고, 영생이 되시는 신랑과의 혼인 잔치에 쓰일 거룩의 침소를 준비케 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영생을 주게 하시기 위해 주신다는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 이 흐름을 타면 천연색 각종 과일처럼 진하고 시원한 맛을 보며 사는 삶을 누리게 됩니다.
바다 속에서 마음껏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시원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창공을 날아오르는 새처럼 갇혀 지내지 않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자연스럽게 살 수 있게 됩니다.
불필요한 힘을 주지 않지만 바위처럼 강한 의지로 굳게 서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광야를 지나면서 만나로 연명하던 삶에서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그곳에서 나는 소산의 혜택을 누리며 살아가기에 이같은 삶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육체를 다스리는 권세는 시간과 공간 안에 갇혀 겉 사람의 문명을 일구는 이 세상을 이긴 자들에게 주어지는 신비로운 권세인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능력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인기 없는 하등가치로 치부될 뿐입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않고 공의로운 기름 부음으로부터 흘러나와 비취는 신성한 불빛으로 판단하고 살아가는 그 길은 기뻐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권세요. 자기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권세인 것입니다.
자기를 치장하고 자기 안으로 만물을 끌어들이는 권세가 아니요. 도리어 자기를 비우고 내어주는 권세를 말함입니다.
육신 적인 만민을 다스리는 한계를 인식하고, 그 대신 모든 육체를 다스리느라 피 흘리며, 자기를 비워 섬기는 권세를 택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이 곧 하나님 나라요, 애굽을 나온 백성에게 주어지는 저 가나안 약속의 땅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