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당벌이 안나가니 심심해서 뒷동산으로 군불땔 나무하러 갑니다
하우스를 지나 언덕으로 올라가면 뒷동산으로 이어집니다
언덕위에 어느날부터 고사리가 몇개씩 올라오더니 해가 거듭 될수록 숫자가 늘어나네요
예초기로 더 넓게 잡목과 억새등을 제거해서 고사리밭을 넓혀봐야 겠어요
저의집 아래에서 가게를 하고있는ㅈ동생이 산가의 묵어있는 밭을 개간해서 더덕을 심고 고라니가 못들어 가도록 그믈을 쳐놨네유
언덕 너머에 오랫동안 밭농사를 짓지 않아서 나무가 자란곳의 참나무 아카시아 굴피나무등을 자릅니다
자른 나무는 리어카로 운동삼아서 실어 날라봅니다
내리막 길이라서 내려올때 뒤로 버팅기면서 따라와도 점점 가속도가 붙어서 달리기를 해야 된답니다
이렇게 겨우내 나무하면 달리기 선수를 해도 될것 같습니다 ㅋㅋㅋ
몇번 나르니 화목 나뭇간에 장작이 가득 해졌습니다
언덕 아래로 내려가면서 예전에 밭이었던곳의 나무를 신나게 벌목합니다
길가에 꺼내 놓았더니 제법 많습니다
경사가 너무 심해서 리어카로는 못올라갈것 같아서 동생한테 전화 했더니 바로 4륜 트럭을 끌고와서 두번에 걸쳐서 실어 날라줍니다
두번째 마지막 날라주는 아우입니다
밖의 마당에 퍼놓고 갔네요
동생들 이야기 입니다
세살 아래 아우는 저의집 바로 아래 가게에서 호박고구마와 배낚시 연결하는 가게를 하다가 3년전 부터는 GS25편의점도 겸업하고 있답니다
오른쪽 귀퉁이에 어렴풋이 보이는 주황색 집이 우리 형제들이 살던 오두막집 입니다
어린시절에 엄마를 일찌감치 여윈 동생들이 열심히 살아서 지금은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어서 형으로서 흐믓해 하고 있답니다^^
(안면도 삼거리)
편의점과 함께 사용하는 너른 주차장 옆에는 해비알꽃게 일번지란 120여평의 식당건물도 동생네가 지어서 세를 준곳입니다
제가 현재 살고있는 오두막집터 포함 이곳 건물의 땅 천여평 밭이 부모님의 유일한 농토였는데 이전없이 돌아가시니 형제들에게 분배되어 있어서 협의하에 둘째 동생에게 모두 양도해주고 저를 포함 다른3형제들은 한평도 소유하지 않았답니다
제가 1999년도에 이곳 첫째 동생에게 제가 현재 살고있는 오두막집 아래 도로가에 사진에 보이는 60평 민박집겸 점포있는 가게를 두어달 무료봉사로 지어 주어서 시작한 가게가 잘되어서 사진에 보이는 집은 8년전에. 철거하고 위사진의 식당을 지어 월450만원 세를 받고 있습니다
저의 집사람이 하는말
장남으로서 조상들 제사 지내며 동생들 뒷바라지 까지 해주고 땅을 한평도 안받은 우리같은 사람은 드믈거라고 하더군요
하긴 맞는 말입니다
결혼 후에도 둘째동생 데리고 있으면서 현 부경대 (당시 국립 부산공업 전문대학에) 입학시켜 가르칠때 장모님께서 걱정이 되시는지 그러시더라구요
형제들 도와주는건 좋지만
우선 본인의 앞길부터 닦은후에 하는게 어떻겠느냐구요
밥상앞에 아이들이 하나둘 늘기전에 전셋방 이라도 마련하라시던 말씀이셨죠
그당시 저도 사글세를 살고 있었거든요
딸을 시집 보낸 부모님으로서 당연하신 말씀입니다
허나 배움은 시기가 있는지라 당시의 학비 200만원 들이면 평생 먹고 살길을 닦아 주지만 훗날 2,000만원 주는것 보다 낫다고 했더니 더이상 말씀은 안하시더라구요
저의 기대에 부응하여 동생도 열심히 공부하여 졸업할때까지 토목기사,측량기사,소방설비,조경등 시험 보는것마다 기사자격증을 따고 졸업후 바로 공무원으로 특채되어 임용되어 결혼도 하고 잘 살고있어서 저의 판단이 옳았다고 저를 아는 모든 사람들한테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동생이 고등학교 1학년때 형제들이 흑별돌 빼서 지금의 오두막집을 짓고있을때 학비를 제때 못내게 되니 동생이 하는말 검정고시를 봐도 되니까 학교를 중퇴하고 집짓는 일을 도와주겠다며 한달쯤 등교를 안하던 어느날
담임 선생님께서 오셔서 공무원이 되더라도 고등학교는 졸업해야 된다며 2분기 학비는 선생님이 내줄테니 내일이 시험날이니 시험보러 오라며 가정방문 왔다간후 둘째 동생이 한달만에 가서 시험을 치루었는데 직업반인 동생반에서 1등을 했고 진학반 포함 전교2등을 한후부터는 장학생으로 선정되어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을 하게 되었답니다
전문대학졸업하고 공무원으로 잠시 근무하다 군복무 마치고 직장 복귀후 공무원 3주 연수교육을 받으러 가서 종합점수 전국 1위도 하게되어 경상도에서 고향인 서산으로 전근 오기도 했지만 그후 공무원 퇴사후
부경대에 편입하고 감리회사 기술이사등을 거쳐 본인이. 40 여명의 직원을 거느린 토목설계 회사를 개업하며 잘 나가다가 인간사 새옹지마라고 회사가 잘못되어 직윈들에게 물려주고 나왔다고 하더라구요
지금에 와서 하는말이 농업 기반공사에서 그냥 있었더라면 도 지사장은 되었을텐데 라고 아쉬워 하더군요
그넘은 설계실력은 인정👍받을정도여서 월급쟁이를 하여 먹고사는데는 지장이 없는가 본데 형님 뵙기가 죄송하다길래 괜찬타며 등을 토닥여 주었습니다
끝으로 가장 불쌍햇던 막내 여동생이 한살때 제가 국민학교 3학년 가을에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시며 제손을 꼭잡고 동생들 잘 부탁한다는 유언한마디 이때부터 우리 형제들의 고난은 시작 되었습니다
엄마찿으며 우는 막내를 달래도 그치지 않으면 바로 위 되는 동생들 까지 따라서 합창으로 울어대면 결국 4남매가 얼싸안고 실컷 울다가 지치면 그쳤답니다
한달쯤 저와 첫째동생이 학교를 안나가고 있던 어느날 담임 선생님과 6학년 선배들 몇이서 쌀자루와 학용품 그리고 얼마간의 현금을 가지고와서 전해주며 힘들지만 동생을 업고라도 학교에 나오라며
전교 학생들이 우리의 딱한 사정을 듣고 위문품을 걷어 왔다고 합니다
첫째 동생은 세살 아래였지만 생일이 빨라서 1학년을 다닐때 였습니다
동생과 의논끝에 첫째가 일곱살에 입학했으니 1년 쉬며 동생을 돌보겠다고 해서 저는 학교를 다녔고 첫째는 막내를 돌보느라 2년간 학교를 못가다가 아래 동생이 다섯살이 되던해 바로 2학년으로 월반하여 학교를 다녔답니다
기구한 팔자를 타고난 막내 여동생은 철들기 시작한 예닐곱살때부터 오빠들 한테 밥하는걸 전수 받아서 시집 걀때까지 홀아버지와 두오빠들 밥해주기 시작했는데~
당시 30년 가까이 마을 이장 하시던 분께서 막내를 잘보고 착하다고 며느리 삼겠다고 저의 아버지한테 얘기 했다고 합니다
결국은 그댁의 둘째 아들과 결혼을 하게 되어 같은 마을에서 평생 떠나보지 못하고 일만 죽도록 하고 있는데 올해가 환갑이 된다면서 큰오빠는 칠순되니 형제들 날 잡아서 전국으로 여행다녀 오자고 하네요
우유도 없던시절 엄마 젖도 제대로 못먹고 자란 막내가 300여호 되는 큰마을인 우리 동네에서 부녀회장을 연임하며 마을의 잔치며 큰일을 척척 치루어 나가고 농협 대의원등 읍생활개선 회장, 안면읍풍물패 단장등 이런 저런것들을 동에번쩍 서에번쩍 하고 다녀서 누구 오빠라고 해야 저를 빨리 알아볼정도랍니다
초,중 총동문 운동회 할때도 막내는 저희 동문들 먹을음식 도맡아서 다해가지고 가고 친구들 김장 고추장 담아서 보내주는곳도 여러곳 된다고 합니다
저희 집사람은 고모는 철인이라며 나였다면 죽었을 거라하네요
막내가 시집가서 얼마전까지 살던집
초등학교 뒷편에 주변집들에 둘러쌓여 답답하다고 새로 집을 지어달라고 해서 몇년전에 서너달 동안에 형제를 위해 마지막으로 제가 노력한곳입니다
일층엔 창고로 높게 올리고 2층에 살림집으로 지었습니다
외벽엔 단열하고 파벽으로 시공하고
뒷편엔 2층에서 뒷뜰 창고로 바로 발수있도록 데크를 연결했습니다
1층 창고에서 김장담아 형제들과 객지의 친구들에게 보내준다고 300포기 이상 담고 있습니다
이젠 옥상에 올라가면 학교 운동장과 마을 멀리까지 한눈에 보입니다
몇달후 막내가 수고 했다고 용돈이라고 생각하고 받으라며 500만원을 주어서 잘 썼습니다
첫댓글 한편의 단편소설을 읽은듯 합니다
장편처럼 쓰셔서 한눈에 그림이 잘 그려지네요
고생하신 보람이 있으시군요 고생 많으셨어요
대단하신 형제들 이십니다
잘 이끌어주신 맏형자리
잘 해내셨어요♡♡♡
지금은 지나고 보니
내가 인생을 헛 살지는 않았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형제들끼리 재산 다툼하는걸 보면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지내면 될것을~
@팔학골(안면도) 양면성도 있지요
친정땅 약 2천여평 있는데
6남매가 서로 안갖는다고 양보하니 누가 꾸려나갈사람이 없어 절반은 싼값에 세내어주고
절반은 형제같은 지인께서 50여년을 그냥 버십니다
그래도 묵히지않고 버시는것만도 고맙다고 합니다 형제들이 모두 학자여서 농사지을사람 없어도 문제네요
저보고 다 농사하라는데
옆지기가 처가집꺼라고 싫타네요ㅎ
동생들을 자식처럼 키우신 팔학골님 열심히 사신 보람있습니다~
학비 200만원이 훗날 2000만원 주는것보다 낫다는 말씀 감동입니다~
살아오신 이야기 더 듣고싶어집니다^^
그때는 그럴수 밖에 없었죠
저의 의견에 잘 따라준 아내에게 고맙게 생각하며 그 보답으로 저의 힘이 닿는데까지 처가에도 잘 했습니다
@팔학골(안면도) 사모님께서도 남편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실거 같습니다^^
여긴 계절을 착각하게 장마비처럼 내리네요~
@이드니 영천 이곳에도 봄비처럼 보슬보슬 작은 빗소리를 내며 어젯밤부터 계속내리고 있습니다
약도 지을겸 읍내에서 볼일보며다니는 중입니다
그때는 왜 형님이라고 희생만 해야 되었는지
동생들 뒷바라지 했어도 보람이 있습니다
형제간 우애가 있고 화목한가정이라 남부럽지 않군요
맞이는 생각하는 자체가 동생들과 차이가 있으며
내리 사랑이라고 나보다 약한 사람에게 마음이 더 가는건 인지상정 이잖아유 ㅎ
고운댓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참 쉽지않은일을 하셨군요 저에게도 자식같은 동생둘에 애기같은 삼대독자 오라버니가 있죠!칠남매중에 다섯째인데 어쩌다 엄마가 돼버렸네요!줘도 아깝지않은 형제들!고생하신보람있으시네요!
또리장군님의 끊임없는 지속적인 숭고한 정신에 비할바는 못되지만
지금 이라면
그때처럼 못할것 같습니다
그때는 당연한 나의 의무고 책임이라는 생각으로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일념으로 밀어 부쳤던것 같습니다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죠
동생들을 위해 헌신하신 모습에 감동적입니다..
헌신 까지는 아니고
잠시 나의 길을 미루고
동생들 앞길을 닦아준셈이죠
결과가 좋으니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팔학골(안면도) 쉽지않은 길이셨을텐데 같이 참아주시고 응원해주신 사모님께도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김봉우(수안보, 성남)
모두가 지난 이야기를 궂은날에 심심풀이로 쓴 이야기였지만
이렇게 응원 해주시는 김봉우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어렵던 피난시절 예기 같이 굿꿋이 열심히 살아오님 님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앞으로도 계속 가족들 화목 하시고, 무탈(無頉)하고, 무병(無病)하고,
가내 평안(家內 平安)과 좋은 일만 있기를 두손모아 발원 합니다,
파이팅 !
고운 댓글로 응원 해주신 정견님께 감사드립니다.
즐거운 설 명절 연휴되세요^^
형제애 가족애가 남다르실 수 밖에 없네요
헛되지 않고 지혜로운 순간순간의 선택으로 인생의 멘토역할을 하신 팔학골님,
상식에 어긋나지 않게 지내오신 도량이 크신 팔학골님, 존경스러워요
운곡님 다녀가시면서
저희 형제들에게 좋은 평가 내려 주시고 덕담까지 남겨두셔서 고맙습니다♡
팔학골님 지나온 삶에 박수를 보냅니다. 이제부터는 사모님과 함께 건강만을 생각하시면서 즐겁고 신나게 온전한 팔학골님만의 인생을 펼쳐나가시길 응원합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아~유!
별것도 아닌데
격하게 응원해주셔서
넘 고맙습니다
네온님의 조언대로 이젠 뒤도 돌아보며 여유있는 시간을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팔학골님 대단하시네요
동생분들과 우애 있게
지내시는 모습이 너무나
멋져요 늘 건강하시고
형제분들과 행복하시길
응원합니다
응원의 댓글을 전해주시고 가신 꽃친구님 감사합니다
즐거운 명절 되세요^^
팔학골님 보람된 수고하셨네요
멋지십니다
저는 형제로서 당연히 할도리를 한것인데 여러 회원님들 께서 덕담을 남겨 주시는건 현 사회가 얼마나 각박해졌는가를 짐작하게 됩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4.02.06 11:28
팔학골님 글을 읽을 때마다 감동입니다~^^
앞으로는 좋은 일만 많으실거예요~
에구~
무슨 말씀을요
치부를 드러내는것 같아서 부끄럽습니다
대단 하십니다
남다른 형제애가 존경 스럽습니다
팔학골님 복 많이 받으셔요
어려운 시기를 함께 보내고나니 형제들의 우애는 여느집 보다는 남다르기는 합니다^^
@팔학골(안면도) 어렵게 자랐다고 다 우애가 좋은 것은 아니죠
팔학골님 가족이 대단하신거죠🩷
@아름다운
그렇기도 하지만
그래도 형편이 어려운 형제들이 넉넉한 집안의 형제들보다 단합을 더 잘하고 있는것 같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