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백종원 씨에 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음식 관련 사업을 하고, 부인이 소유진 씨이고, 충청도 방언을 사용하고, 요즘 들어 언론 매체에 자주 나온다는 정도... 그런데 한 가지 강렬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가 친일파의 후손이더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어디선가 그 이야기를 듣고 다른 사람에게 그렇다더라는 이야기를 몇 번 했고, 백종원 씨에게 별로 두지 않았던 관심마저 아예 거두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길거리 구석구석에 자리 잡은 백종원 씨의 프랜차이즈 식당들을 보면서 ‘친일파 후손이 사업 수완이 좋구나. 안타깝다’고 몇 번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 이외에도 (많은 분이 자료를 올려주신 대로) 백종원 씨와 관련한 다양한 논란이 있다는 사실은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백종원 씨에 대해 제가 판단하고 있는 부분, 즉 그가 친일파의 후손인지의 문제를 한 번 조사해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1. 백종원 씨가 대중에게 얼굴을 알리기 시작할 무렵, 한 네티즌이 백종원 씨가 친일파의 후손이라는 의혹을 제기합니다. [그 글은 작성자가 내렸습니다만 흔적은 남아 있습니다. 관련 기사는 여기]
2. 백종원 씨는 즉각 나서서 허위 사실을 유포하는 사람은 고소하겠다고 대응합니다. 그 후로 백종원 씨가 친일파 후손이라는 이야기는 쏙 들어간 것 같습니다. (실제로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단 사람은 50만 원 벌금형을 받았습니다. “백씨가 TV에 나올 때마다 조부의 엄청난 부를 바탕으로 생겨난 자신감에 역겨울 따름이다. 과연 일제강점기에 친일하지 않고도 자신의 부를 유지할 수 있었는가?” 관련 기사는 여기)
3. 그렇다면 이런 논란은 왜 일어났을까요? 그것은 백종원 씨의 집안 내력 때문입니다.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면 백종원 씨의 증조부 백영기 씨는 충남 예산의 만석꾼이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백창현 씨는 예덕학원의 설립자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충남 교육감을 지낸 교육가입니다.(관련 기사는 여기)
그중 조부 고 백창현 씨(1917-2009)의 행적이 문제인 듯합니다. 백종원 씨 측은 친일파 논란을 해명하면서 할아버지가 “사립학교재단을 만들기는 했지만 친일파는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관련 기사는 여기) 그런데 이 말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보통은 사립학교재단과 친일파를 연결해서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해명을 하기 위해서는 할아버지가 “1950년대에 경찰서장을 지냈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초대의원-2대의원)을 역임했지만 친일파는 아니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4. 백창현 씨의 행적은 합리적 의심을 사기에 충분합니다. 나무위키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인용되어 있습니다(“예산문화원 홈페이지는” 이제 접속이 안 됩니다).
“백창현(白昌鉉)(1917. 6. 4~2009. 2. 11)의 본관은 수원(水原)으로 1917년 예산군 오가면 역탑리에서 부(父) 백영기(아명:백원길)와 모(母) 오계순의 사이에서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58년 11월 고등전형고시에 합격했고 예산경찰서장, 내무부 치안국 과장, 예산능금협동조합장,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초대의원-2대의원)을 역임했다. 백창현은 무엇보다도 학교법인 예덕학원(1967년 예산고. 1978년 예산동중(현 예화여고)을 설립해 지역사회 발전은 물론 우리나라 교육 발전에 큰 기여를 했으며 평생을 심혈을 기울이면서 육영사업에 전념했다. 지난 1974년에는 향토발전과 지역의 교육 사업에 이바지한 공로로 사학육성 특별공로상과 국민훈장모란장을 수여 받기도 했다." 인용출처 : 예산문화원 발간도서 "예산의 인물", 예산문화원 홈페이지에서 pdf파일을 다운받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예산경찰서 홈페이지에서도 백창현 씨가 1958-59년의 경찰서장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지만, 그가 어떤 경로를 통해 경찰서장이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위에 인용된 예산문화원 발간도서는 그가 “고등전형고시”에 합격해 경찰서장이 된 듯한 뉘앙스를 풍기지만, 여기서 “고등전형고시”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며, 그냥 “고등고시”를 말하는 것이라면 고등고시를 통해 곧바로 경찰서장이 되는 경우가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게다가 58년 당시 백창현 씨의 나이는 42살, 고등고시의 연령제한은 2009년에나 없어졌습니다. (참고. 고등고시에 관해서는 여기)
5. 즉 의혹의 핵심은 백창현 씨가 일제 강점기에 이미 경찰이었고, 해방 후에 미군정의 정책에 의해 경찰직을 유지하다가 경찰서장의 자리에까지 오른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원 4776명 중, 경찰은 880명입니다. 그중에는 노덕술 같은 악질 경찰로서 역사에 기록된 사람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친일인명사전은 철저하게 사료(당시 공문서나 기사 등. 관련 기사는 여기)에 의존해서 작성하다 보니 모든 일제 경찰을 다 기록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1942년 일제 치하 조선의 경찰 병력은 정규직만 2만 명이 넘었다고 하는데, 그중 상당수가 일본인이라고 해도 880명은 너무 적은 숫자입니다. 따라서 29세 때인 1945년에 광복을 맞고, 42세인 1958년에 경찰서장이 된 백창현 씨가 일제 아래서 경찰 생활을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터무니없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친일인명사전의 경찰 명부에 등재된 다른 인물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순사는 20대 초반, 대학교를 졸업하고 고등고시에 합격해서 경찰 관련 보직에 앉으려면 20대 중반이 되어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유력한 집안의 자제들이 일찌감치 경찰이 되려고 한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예. 친일인명사전 중 서기영, 박승관, 계광순, 곽두금, 하판락 등).
6.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창현 씨가 일제 강점기에 경찰이었다는 명백한 증거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백창현 씨는 1958-59년에 예산 경찰서장으로 복무했고, 박정희의 유신 체제 아래서 들러리 행세를 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지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 자료에서 1959년 이전의 행적은 잘 다루지 않습니다. (관련 기사는 여기) 그 결과 어떤 사람들은 백종원 씨의 조상들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근거로 백종원 씨가 친일파의 후손이 아니라고 판단합니다. (관련 기사는 여기)
7. 이런 상황에서 백종원 씨가 친일파의 후손인가, 아닌가가 중요한 문제인지 생각해봅니다. 다른 논란도 많이 있으니 말이죠. 또 일제 강점기에 경찰이나 공무원으로 복무한 모든 사람을 민족반역자로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도 생각하게 됩니다. 이번에 조사하면서 백창현 씨의 친일 부역에 대해서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지만, 확신하게 된 것은 백종원 씨 집안이 시대의 흐름을 잘 타면서 성공 가도를 달려왔다는 사실입니다.
8. 글을 쓰면서 백종원 씨가 친일파 후손임이 명백하다면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앞선 시간에 그런 섣부른 판단이 누군가를 억울하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어 계속해서 답답한 채로 판단을 유보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궁금해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본인이 아니라고 했고, 법원 판결도 하나 있었으며, 많은 언론이 관련 기사도 냈기 때문입니다(이래도 결론을 못 내린 제가 이상한 건가요?;;). 하지만 제가 궁금해하는 부분, 즉 고 백창현 씨의 일제 강점기 당시 행적이 소명되면 좀 더 확실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백종원 씨 할아버지가 일제 강점기에 민족 반역 행위를 했느냐 안 했느냐가 중요하냐고요? 네. 저한테는 어느 정도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