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은미 선교사 묵상 최고의 날 ~ "용서받은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깊으신 배려!" 역대상 3장
어제는 가평에서 "제직자 수양회" 세미나가 있었다. 내가 한국을 떠나기 전 어제가 마지막 설교를 하는 날이었다. 나는 내일이면 케냐로 떠난다. 모든 설교에 최선을 다해 설교해야 하지만 어제는 더더욱 최선을 다해 설교를 했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설교 사역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전임 사역으로 설교를 한 지 35년은 되는 것 같다. 35년 꾸준하게 설교를 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하나님이 나에게 바라는 것은 "최고의 사역"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사역" 이라는 것이다.
각 사람을 향한 평가는 모든 사람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이 하실 일이지 내가 할 일은 아닌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을 평가 하면서 매사에 하나님 일을 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월권"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내가 혼자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하고 그저 좋아하고 내가 못했다고 이 일을 앞으로 내가 계속 할 것이냐 말것이냐 까지 혼자 생각하고!!
하나님이 부르신 종이라고 스스로 확신하고 있다면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 라는 말씀처럼 맡은 사역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주님 보시기에 기쁘신 일인 것이다.
성경은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성공이라! 든가 사람들이 놀라고 감동하는 사역의 성과이니라! 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하는 종이 되고 싶어요!" 라고 기도한다.
평가로 인한 "최고" 라는 말을 과연 언제 어떻게 써야 할는지 아직 나는 잘 모르지만
내가 선교사 사역을 하면서 "최고" 라고 스스로를 표현한 적은 있다.
현지인 동역자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은 있다. "나는 내가 최고로 훌륭한 선교사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럴 리가 없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내가 아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내가 선교사의 일을 하면서 현지인 그대들에게 "최고의 사랑을 받는 선교사임에는 분명합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기에 그러한 말을 한 기억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했던 이전 날들의 생각이 좀 바뀌었다.
"아!! 내가 얼마나 사랑 받으면서 사역했나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구나! 내가 얼마나 사랑하면서 사역했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구나!! 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나는 아직도 내가 "사랑 받는 것" 보다 "더 사랑하면서 사역한 사역자" 같지는 않다.
"사랑의 빚"을 갚으려면 아직도 갈 길은 한참 멀다. 하나님께 받는 사랑은 내 죽는 날까지 갚지 못할 것이고 내가 사람들에게 받는 사랑 역시 다 갚으려면 이 땅에 사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사역을 해야만 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제는 그래서 또 한 번의 "최선을 다하는 설교 사역"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기차를 타고 갔다가 기차를 타고 돌아왔는데 세상에나 어떻게 하루 만에 기온이 뚝 떨어졌는지.. 영하 7도의 밤 날씨가 되었다.
집에 돌아오니 밤 12시가 거의 되었다.
화장도 못 지우고 그냥 쓰러져서 잠이 들었다. 일어나니 새벽 세시가 좀 넘었다.
여전히 언제 어디서 얼마나 피곤하게 잠이 들어도 큐티 하러 일어나는 새벽 시간은 4시 근처이다. 이것도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개역개정 역대상 3장
5. 예루살렘에서 그가 낳은 아들들은 이러하니 시므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 네 사람은 다 암미엘의 딸 밧수아의 소생이요
"암미엘의 딸 밧수아"라는 말씀에 마음이 머문다. 성경 전체를 읽어가다 보면 "하나님" 이라는 분을 엄하기만 하고 벌주기를 기다리는 하나님 이라는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성경 전체를 많이 읽으면서 알아가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성경의 한 부분만 읽으면서 하나님의 속성 (attribute)을 자기 편하게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 오늘 성경 구절에 하나님은 밧수아라는 이름을 밧세바라는 이름 대신 사용하셨을까?
왜 성경에는 이 밧세바가 우리아의 아내였다는 것을 기록하지 않는 것일까?
밧세바의 또 다른 이름은 밧수아이다. 역대상에는 밧수아의 아버지 암미엘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역대상 3장에는 다윗과 밧세바를 통하여 이 땅에 태어난 아들들의 이름이 나열 되어 있다.
간음을 한 다윗 왕이 우리아의 아내였던 밧세바를 통하여 이 땅에 태어나게 된 아들들인 것이다. 솔로몬 왕은 세상에서 하나님 안 믿는 사람들도 "지혜로운 왕"으로 알고 있다.
솔로몬은 다윗이 간음했던 여인 밧세바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그분이 우리를 용서하지 않고 끝까지 우리가 지은 죄를 잊지 않으신다면 다윗이 자기가 간음한 여인 그리고 그녀의 남편을 죽여버리게 한 이 천하에 씻을 수 없는 살인과 간음을 한 왕 다윗에게 솔로몬 같은 아들을 허락해 주실 수 있었을까?
다윗은 자기가 지은 죄를 철저하게 가슴 아파하고 회개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시편에 자신의 허물이 가리움을 입고 그 죄가 기억나지 않는 사람의 기쁨과 감사를 글로 표현했던 것이다.
개역개정 시편 32편
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오늘 묵상 성경 구절에 하나님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라는 말 대신에 암미엘의 딸 밧수아라고 기록되게끔 하신 그분의 용서받은 죄인을 사랑해 주시는 마음이 짚어지지 않는가?
나는 설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 하나님으로부터 자주 듣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이 나 설교 잘 하도록 도와 주셨음에 내가 감사의 기도를 드리면 주님은 나에게
"유니스야 고맙구나!"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면 내가 말씀 드린다. "주님이 왜 저에게 고맙다고 하세요? 제가 고맙다고 해야지요?" 그러면 주님이 이렇게 대답해 주신다.
"너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있을 때 중간에서 그 사람들을 화해 시켜 주는 사람이 고마운 사람 아니니? 너는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갖고 있는 오해를 너가 설교하면서 풀어 주잖니! 나와 사람들을 화목케 하는 일을 너가 감당해 주었으니 나는 너가 고맙지!"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알기를" 진정으로 원하시는 분이신 것이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이해하는 "회개"를 성경적으로 정말 잘 이해했으면 좋겠다.
나는 이전에도 한번 내 묵상에 "밀양" 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죄인의 회개하는 장면"이 얼마나 성경에서 왜곡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말한 적이 있다.
"밀양"이라는 영화는 예수님 안 믿는 사람들도 많이 본 영화인 것 같다. 나는 그 영화를 보면서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한 영화를 만들었을까 생각을 해 보았다.
그 영화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노라 하면서도 잘 못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여지없이 고발해 준 영화라고도 하겠다.
영화의 줄거리를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런데 그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살인범이 있는 감옥에 살해당한 아들의 엄마가 찾아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님을 믿게 된 엄마인지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살인범을 용서해 주러 감옥까지 찾아간 것이었다.
자기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면회하여 자기는 이제 자기 아들을 살해한 그대를 용서한다는 말을 한다. 그때 그 여자의 아들을 살해한 살인범이 어떻게 말하는가? 자기는 감옥 안에서 예수님을 믿게 되어서 자기 죄가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자유하다는 그런 말을 한다.
내가 그 대사를 정확하게 외우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러한 맥락의 답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 답을 들은 죽은 아이의 엄마는 오열을 한다. 그리고 그 감옥을 떠나게 되고 이렇게 쉽게 용서받은 자신의 모습을 의기양양하게 자기가 죽인 아들의 엄마 앞에 보이는 그 모습에 이 여인은 자기가 믿던 하나님을 떠나게 된다.
하도 오래 전 본 영화라서 모든 대화의 내용들을 정확하게 기억하여 쓸 수는 없다.
여기서.. 문제점이 무엇일까? 왜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이러한 부분을 영화에 넣었을까? 그 영화감독이 누군지 나는 찾아 보았다.
그 영화감독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 사람이 영화에 나타낸 "회개한 자의 모습"이 성경적이었을까?
많은 사람들은 그 영화를 보고 "값싼 회개의 자유함"을 지탄했다.
나는 그 지탄이 옳다고 생각한다.
성경이 말하는 "회개"는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떠한 죄를 지었던지 하나님은 용서해 주시는 것은 맞다.
그러니 다윗도 바울도 모두 다 용서받지 않았는가 말이다!
모세도 살인자였다. 그는 그의 동포를 쳐서 죽였다. 바울 역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옥에 갇히게 했으며 스데반이 죽을 때 그 사람의 죽음이 마땅하다고 증인의 자리에 선 사람이지 않았는가?
그가 얼마나 이전에 자기가 한 일이 괴로웠으면 "이전 것은 잊어 버리고 앞의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는 고백과 함께 그의 나머지 삶은 복음의 빚을 진 사람으로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다가 순교한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밀양" 이라는 영화에 나온 살인범은 나는 이제 예수님 믿고 내 죄 다 사함 받았으니 내가 죽인 아들의 엄마 앞에서도 당당하다 이거다! 영화에서의 그의 모습은 뻔뻔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회개자의 참된 모습" 이라고 생각하는가?
"회개" 라는 것을 이렇게 영화에 만들어 놓고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게 한 사람"을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회개" 하고 나면 나는 이 세상에서 미안한 사람이 하나도 없어지게 되는가?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용서받은 자의 참된 자유함" 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성경은 왜 "복음의 빚진 자" 라는 말을 사용한 것일까?
"회개의 참된 열매"는 "감사함"에 있는 것이고 그리고 이렇게 많은 나의 죄를 형체도 모르게 짓밟아 주시고 동에서 서가 먼 것처럼 내 죄를 만나지 못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이 너무 고마워서 나머지 내 평생은 하나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이 "사랑의 빚"을 갚으면서 살겠노라 말하는 것이 바로 "참된 회개"를 한 사람의 "삶의 열매"가 아니겠는가?
"회개"에 대한 잘못된 전파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려고 나아왔던 길을 돌아가게 만들었는지.. 그 죄 값은 우리가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 보다 더 클 것이다.
성경은 개역개정 누가복음 17장
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2.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라고 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으니 말이다.
주님 오늘도 최고의 날입니다!
우리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감히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죄사함"에 대하여 이것이 죄를 마음껏 지을 수 있는 "죄의 라이센스" 라던가 우리가 잘못한 사람들 앞에서 전혀 미안해 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런 말이 아니라는 것을 주님이 성경을 통하여 알려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들의 삶에서 우리들의 언어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경의 하나님"을 잘 나타내고 가르치고 보여 줄 수 있도록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도와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오늘 저는 "만남 사역"들이 계속 있습니다. 이제는 케냐 돌아가는 짐을 싸야 합니다.
돌아갈 수 있는 집이 있어 감사하고 행복한 것처럼 언제인가 나의 본향인 하늘나라에 올라갈 그 날이 있음을 감사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 저를 보시면서 하루 종일 기쁘시면 참 좋겠습니다!
외울 말씀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32: 1)
💕 사랑하는 그대여 💕 2024. 3. 2.
사랑하는 그대여~ 사랑하는 그대여~ 출. 석. 부르고 있습니다 대답하셔야죠?
요즘은 계속 묵상이 길어요. 그죠? 내일은 좀 짧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야 미니 메시지를 할 수 있으니까
사랑하는 그대여~ 사랑하는 그대여~
오늘도 하나님께 "충성" 다하는 그대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충성"은 내가 알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충성"이라고 그렇게 탈무드에 적혀 있습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그대는 무엇을 알고 있는지요? 어떤 성경 구절을 알고 있는지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성경 구절 다 지킬 수 없지만 내가 이해하고 그리고 은혜받은 말씀들 지키려고 노력한다면 하나님이 도와주시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