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슴이 따뜻해지는 詩] 오디 먹어 푸른 입
입가에 몽고반점이 생겼네
배냇웃음이듯 푸르게 참 푸르게도 젖었네
난생처음 내가 난생(卵生)이 된 것 같네
집 뒤, 산밭에 저 혼자 열매 맺어 서 있는 나무가 건네주는
오디 한 움큼 따 입에 넣으면, 온통 잉크빛으로 물드는데
잉크빛으로 물들어, 폐허 같은 멍자국이 번져 흐르는데
그것을 보며, 어머, 아저씨 입가에 몽고반점이 생겼네! 하며 밝게 웃는
이웃집 아이의 말 한 마디, 몸 안 가득 잠실을 차렸는지
웃음이 누에처럼 스며 나와, 사각 또 사각 베어 먹은 자국
온몸에 푸른 신전(神殿)을 세우네
그렇게 말한 아이의 얼굴에도 온통 일식(日蝕)이어서
또 웃음이 저절로 즙이 되어 흘러내려
입 속이고 입술 주위고 다시 온통 폐허가 되는
흠뻑 젖은 두 손마저 즐거운, 그 즐거운 폐허가 되는
입 속의 푸른 멍자국, 몽고반점⸺.
그렇게 폐허가 되면 보이는 입, 아이 입.
오디 먹어 푸른 저 입.
―김신용(1945- )
뽕나무를 보거나 잘 익은 뽕나무 열매를 따서 먹은 지 꽤 오래되었다. 뽕나무 잎을 따 누에를 치던 옛집이 생각난다. 뽕나무 잎에 내리던 여름비의 빗소리도 참 말끔했다. 뽕나무 열매인 오디가 푸른빛에서 점차 검붉은빛으로, 그리고 마침내 까맣게 익는 것을 보면서 하루가 지나가고 계절이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시는 뽕나무에 다닥다닥 열린 오디를 따 먹는 일에 대해 썼다. 푹 익어서 보드랍게 씹히고 또 단맛이 돌던 오디를 먹노라면 혓바닥과 입언저리가 시커멓게 물들었다. 손에 한가득 쥐어 입에 털어 넣으면 손바닥과 혀와 입가는 먹물빛으로, 잉크빛으로 물드는데, 그게 정말이지 멍 자국 같고 몽고반점 같았다. 자연이 준 순연(純然)의 빛깔이요, 무늬였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아 그 빛깔과 번진 무늬를 볼 때 웃음이 툭 터지곤 했다. 요즘 내 집에 있는 수령이 많은 꾸지뽕나무에도 새들이 날아와서 검붉게 익은 열매를 쪼아 먹고 있다. 떠들썩하지만 즐겁고 맛있는 식사가 한창이다.
✵김신용(1945- ) 시인은 부산 출생. 14세의 나이에 부랑을 시작, 1987년 서울 대학로에서 보도블럭을 깔던 일용직 노동자 시절에, 우연히 인사동에서 막걸리를 마시다가 시인이 되었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어렸을 때부터 틈만 나면 책을 읽었는데, 특히 예술, 문학, 철학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두 번째로 교도소에서 출감했을 때 습작 시들이 시집 한 권 분량쯤 되었다. 서울 근교의 절에 있다가 선과 동떨어진 불교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하산하여 올림픽을 맞아 개발이 한창이던 서울에서 보도블럭 까는 일을 했다. 그러다 인사동 어느 술집에서 우연히 김선유 시인을 만났고, 자신의 시를 읽고 있던 김신용에게 김선유는 시를 청해 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최승호 시인에게 전했다. 마침 계간 《현대시사상》의 창간을 준비하던 최승호는 1988년 창간호에 김신용의 시 〈양동시편-뼉다귀집〉 외 6편을 실었다. 당시 일을 김신용은 “운명이었다. 내가 원해서 시인이 된 것이 아니었다”하고 말했다. 그 해에 첫 시집 《버려진 사람들》이 출간되면서 확실히 시단에 나왔다. 시집 <버려진 사람들>(1988. 고려원), <개같은 날들의 기록>(1990. 세계사), <몽유 속을 걷다>(1998. 실천문학) 장편소설 <고백>(1994), <기계 앵무새>(1997), <달은 어디에 있나 1·2>(천년의시작, 2003). 천상병 시상과 노작문학상 수상 하였다.
시인의 말 : “나는 모든 버려진 것들을 사랑해야 했다. 바라보면 언제나 막막했던 시멘트의 벌판, 서로의 체온으로 천막삼아 추위를 이겨야 했던 날들…. 그 황량한 삶 속에서 모든 버려진 것들을 사랑해야 했던 나의 사랑법. 그것은 내 생존 방법이었으며 내 시의 명제이자 출발점이기도 했다.”
— 《버려진 사람들》, 고려원, 1988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조선일보 2024년 11월 25일(월) 〈가슴이 따뜻해지는 詩(문태준 시인)〉, 《Daum, Naver 지식백과》/ 사진: 이영일 ∙ 고앵자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