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헛수고.
저는 헛수고를 정말 싫어합니다.
물론 저만 그런 것이 아닐 겁니다.
제가 자주 듣는 얘기 중의 하나가 포르치운쿨라 행진과
전에 산청 성심원에서 했던 포르치운쿨라 축제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인상이 많이 남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 얘기를 하면서 그것이 없어진 것이 아쉽다고,
지금 새로 프란치스칸이 된 분들에겐 그런 체험이 없어서 안 됐다고 합니다.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수천 명이 모여서 그런 축제를 할 수 있었던 것이,
그리고 그것이 많은 사람에게 좋은 기억과 감명으로 남았다는 것이 한편
저의 보람으로 남지만 그것이 없어진 것은 다른 한편 헛수고로 남습니다.
그래도 이런 것은 하나의 일이랄까 행사일 뿐이고,
전국적인 축제는 없어져도 어쨌거나 여기저기서 축제를 지내니
이 프란치스칸 운동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헛수고로 끝난 것은 아닙니다.
제가 더 헛수고로 느끼는 것은 사람 농사입니다.
수도원 안팎에서 인재를 양성하려고 한 저의 노력이 열매 맺지 못하거나
그런 노력이, 비록 일부에게서지만, 인정받지 못하거나
오히려 비난받을 경우, 무척 마음이 아프고 헛수고 느낌이 들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헛수고 느낌은 정말 제가 세속적이라는 표시이고,
그런 면에서 이런 헛수고 체험은 많을수록 좋을지도 모릅니다.
분명하지요.
이런 헛수고 느낌은 저의 노력과 수고가 세속적으로 인정받고
보상받고 싶은 욕망과 욕심이 아직도 있다는 표시가 아닙니까?
그러니 오늘 이사야가 얘기하는 헛수고 느낌은 제게 필요하고,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세례자 요한이나 다른 성인들과 비교하면
헛수고 체험을 오히려 더 많이 하고 더 크게 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그의 수도회 개혁 노력이 반대와 박해로 보상받고,
성 프란치스코도 자기가 시작한 운동이 제자들에게서 반대를 받았지요.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세례자 요한은 어땠습니까?
자기의 제자들은 다 자기를 떠나 주님의 제자가 되고
자기의 목숨은 한낱 계집의 앙심 때문에 날아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제 생각에 성인과 범인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범인은 이 헛수고가 헛수고 체험으로만 남지만
성인은 이 헛수고 체험이 하느님의 보상 체험으로 넘어갑니다.
그렇습니다.
보상이 없는 수고가 헛수고입니다.
그런데 진짜 헛수고는
이 세상에서의 수고가 헛수고 체험으로만 남고,
그 이상의 하느님 보상 체험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헛수고 안에서 발생하는 하느님과 하느님 체험이 없다면 진정 가련합니다.
어쨌거나 우리의 노력이 하느님에게서 보상받지 않고,
세상에서 보상받으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
세례자 요한이라는 거울을 통해 성찰하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