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漢詩 한 수] 시인의 아린 마음
麥死春不雨(맥사춘불우),
봄엔 비가 오지 않아 보리가 죽고,
禾損秋早霜(화손추조상).
가을 이른 서리에 벼가 망가졌네.
*禾損(화손) ; 벼가 시듦. 소출이 감소함
歲晏無口食(세안무구식),
세밑인데 먹을거리가 없어,
*歲晏(세안) ; 歲底(세저). 세밑. 연말.
*口食(구식) ; 口糧(구량). 먹을 식량.
田中采地黃(전중채지황).
밭에서 지황(地黃)을 캔다.
采地將何用(채지장하용),
그걸 캐서 무엇에 쓰나.
持以易餱糧(지이역후량).
들고 가서 마른 양식과 맞바꾸지.
*易(역) ; 換取(환취). 바꾸어 가지다.
*餱糧(후량) ; 乾糧(건량). 말린 양식. 장시간 보관을 위해 건조한 식품
凌晨荷鋤去(능신하서거),
이른 새벽 호미 메고 나섰지만,
*荷鋤(하서) ; 호미·괭이를 들러 맴
薄暮不盈筐(박모부영광).
어스름한 저녁에도 광주리가 차질 않네.
*不盈筐(부영광) ; 한 광주리도 채우지 못함
携來朱門家(휴래주문가),
붉은 대문 부잣집에 들고 가,
*朱門家(주문가) ; 부자 집. 부자집 저택의 大門(대문)은 붉은 색을 칠했음
賣與白面郞(매여백면랑).
얼굴 희멀끔한 도령에게 판다.
*白面郞(백면낭) ; 부자집 철 없는 子弟(자제). 빈둥거리며 즐길 줄만 아는 부자 집 도령
與君啖肥馬(여군담비마),
“댁의 살찐 말에게 먹이시면,
*啖(담) ; 씹어 먹다. 심키다. 먹이다.
可使照地光(가사조지광).
털의 윤기에 땅마저 번쩍번쩍할 겁니다.
*可使(가사) ; 가령(假令). 이를테면. 쓸 만하다.
*照地光(조지광) ; 지황 먹인 말이 튼실하고 빛이남. (膘長有力 毛色光亮 可以光彩照地(표장유력 모색광량 가이광채조지)
願易馬殘粟(원이마잔속),
말 먹이고 남은 곡식과 바꾸어,
*馬残粟(마잔속) ; 말이 먹다 남긴 곡식
救此苦飢腸(구차고기장).
이 주리고 쓰린 창자를 채우고 싶어요.”
―‘지황 캐는 사람(채지황자·采地黃者)’ 백거이(白居易·772∼846)
*地黃(지황) : 학명은 Rehmannia glutinosa이다. 현삼과의 다년생초본식물이고 꽃말은 '순결'이다. 불로(不老)의 명약, 경옥고(瓊玉膏)의 주원료로 '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 수명을 연장하는 처방 중 가장 먼저 나오는 약이다. 조선 제22대 왕 정조가 죽기 전에 꺼져가는 생명의 불씨를 살리고자 먹었고, 허준이 그의 평생 후원자인 유희춘에게 선물했던 약으로도 유명하다. 경옥고는 생지황(生地黃), 인삼(人蔘), 백복령(白茯苓), 백밀(白蜜·벌꿀)을 넣어서 달여 만든다.
*瓊玉膏(경옥고) : 뜻은 붉은 구슬 같은 고약(膏藥)이다. 즉, 옥구슬처럼 소중한 생명의 물을 뜻한다. 이름은 도교(道敎) 전통의 신화와 맞닿아 있다. 옛날 황제가 곤륜산(崑崙山)에서 나오는 꿀 같은 옥액을 먹으며 영생을 얻었다는 얘기는 전형적이다. 곤륜산은 전설상의 산으로 본래 굉장히 높은 산이었다. ‘회남자(淮南子)’에 적혀 있는 산의 높이를 보면 산기슭부터 꼭대기까지가 1만 천리이다. 신화 속에서 하늘과 지상을 잇는 사다리 역할을 하는 거대한 산이다.
옛날에는 황하(黃河)도 여기서 발원했다고 믿어졌다. 이 곤륜산의 아래에는 약수라는 깊은 물이 산을 휘감아 흐르고 있고 그 둘레에는 또 불꽃이 이글거리는 큰 산이 있다. 그 불꽃 속에는 기이한 나무가 한 그루 자리 잡고 있다. 이 나무의 이름은 건목이었는데 불꽃 속에서도 타버리지 않는 나무는 바로 그곳이 속세와는 구별되는 성스러운 장소 즉 신들의 영역이라는 것을 상징한다.
곤륜산(崑崙山)에는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최고의 여신 서왕모(西王母)가 살고 있는데 이곳에서 복숭아 축제를 열면 신선세계의 온갖 신들이 몰려든다고 한다. 그는 곤륜산에 살면서 사람의 수명을 다스리는 불사약을 갖고 있고, 이 불사약이 바로 황제가 늘 복용한 경옥고의 원형이다. 이런 신화에는 상징적인 것들이 많이 표현되어 있는데, 곤륜은 하늘과 맞닿아 있는 머리를 상징하고 서왕모는 여자로 신선하고 생생한 피, 정혈(精血)을 의미하며 복숭아는 신장 중에 오른쪽에 있는 명문 단전의 타오르는 생명의 불길을 상징한다. 머리와 명문 그 속에 깃들인 생명 물질인 정혈이 삶의 근원인 것을 표현한 신화인 것이다. 이처럼 경옥고는 신이 복용한 명약으로 여겨졌다.
‘동의보감(東醫寶鑑)’의 경옥고 제법을 보면 생지황(生地黃)을 캐서 물에 가라앉는 것을 지황(地皇)이라 하고, 절반 정도 가라앉는 것을 인황(人皇)이라 하며, 물위에 뜬 것을 천황(天皇)이라고 한다. 인황과 천황, 가는 뿌리를 짓찧어 낸 즙에 지황을 담갔다가 시루에 지황을 넣고 푹 쪄서 햇볕에 말리고 또 그 즙에 하룻밤 담갔다가 또 져서 햇볕에 말리기를 아홉 번한다.[구증구포(九蒸九曝)] 찔 때는 매번 찹쌀로 만든 청주에 뿌려서 찌는데 쇳빛처럼 검게 되면 다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하였다.
실제 한약재에는 지황(地黃)의 뿌리를 쪄서 말린 약재 숙지황(熟地黃) 뿐만 아니라, 하수오(何首烏), 황정(黃精) 등 주로 보음약(補陰藥)에서 구증구포(九蒸九曝)를 하라고 하는데 이는 반드시 아홉 번을 찌고 말려야 한다는 의미로는 볼 수 없다. 구(九)는 양(陽)의 극대수이다. 그러므로 음(陰)이라는 차가운 성질을 갖고 있는 건지황을 양이라는 따뜻한 성질의 숙지황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양의 극대수인 구를 사용하라는 것이다. 이는 옛날의 명절이 양이 겹치는 1월 1일, 3월 3일, 5월 5일, 7월 7일, 9월 9일인 것이나 마찬가지 의미이다.
보리와 벼농사로 근근이 살아온 농민이 흉년을 만나자 한 해의 끝자락이 이토록 비참해졌다. 먹을거리가 없어 궁여지책으로 지황을 캐러 나선 농민. 원래 약재로 쓰는 뿌리식물이라 양식거리는 못 되지만 그래도 쓸모는 있었던 듯. 한겨울에 캐러 나선 것도 그렇고 ‘새벽부터 저녁까지 캐도 광주리가 차지 않는’ 것으로 보아 채취하기가 꽤 힘들었던 모양. 한데 이 고된 수고의 대가가 너무 빈약하다. 여북하면 ‘말 먹이고 남은 곡식’이나마 달라고 호소했을까.
시인의 언어와 의도가 이토록 적나라하게 드러난 이면에는 이 상황을 목도한 그의 아린 마음이 녹아 있다. 모친상 때문에 일시 낙향했다가 복직을 눈앞에 둔 시인은 이런 광경에 심한 자괴감을 느꼈을 것이다.
*여북 : 주로 수사 의문문에 쓰여, ‘얼마나’, ‘오죽’의 뜻으로, 안타깝거나 불쾌한 마음을 나타낼 때 쓰는 말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 〈이준식의 漢詩 한 首(이준식, 성균관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동아일보 2024년 11월 292일(금)〉, Daum∙Naver 지식백과/ 이영일 ∙ 고앵자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