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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6일 현재 상태에 대한 코멘트이며, 위키의 특성상 향후 상기 항목 내용은 수정될 수도 있음.
이번 글에서는 리그베다 위키(엔하위키)의 "한니발 바르카" 항목 내 "비판" 부분에서 특히 "추격전의 부재" 문제와 P.스키피오가 론강에서 먼저 이탈리아로 돌아왔다는 지적 부분, 그리고 그에 대한 반론자분의 "반론"을 다룰 것이다.
어째서 비판 가운데 하필 저 두가지 사항인가? 알아보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저 두가지는 바로 리델 하트의 여러 가지 의미에서 유명한 저서,『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서 제시한 한니발에 대한 주요 비판점들 가운데 들어 있었다. 별로 좋은 분석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어쨌건 유명한 군사학자가 저런 견해를 제시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국내에서 접근하기 쉬운 몇 안되는 한니발의 "단점" 분석이기도 하다. 하지만 방금 언급했다시피 별로 좋은 분석은 아니므로, 이 지적들을 소개할 때에는 재검토를 붙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리그베다 위키의 현재 버젼에서는, 반론자분이 추격전의 부재 문제에 있어서는 반론의 포인트를 잘못 잡았고 P.스키피오의 귀환 문제에 있어서는 아예 잘못된 서술을 하고 있다. 이것은 내가 반론자분이 비판의 맥락을 잘 모르고 있고 연대기적인 정밀성도 별로 추구하지 않는것 같다고 생각한 이유의 일부다.(물론, 전자를 꼭 알아야 하고 후자를 반드시 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추격전의 부재에 관해서부터 이야기해 보자. 리델 하트가 비판했던 한니발의 "추격전의 부재"는, 원래 전술적인 추격과 전략적인 추격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특히 트레비아와 칸나이에서는 전략적인 차원의 추격이 없었다고 지적했으며, 이를 일리파 전투와 대평원 전투 이후에 스키피오가 보여준 바와 대비시켰다. 현재 버젼의 "비판"에서는, 첫째로 트레비아 전투에서 1만명의 로마군이 빠져나간 것, 둘째로 트라수멘누스 호반 전투에서 1만명이 또 빠져나간 것, 셋째로 칸나이 전투에서 1만 4천명이 빠져나가 카누시움으로 간 것을 한니발의 "추격전 부재" 문제의 예시로 제시하고 있다. 작성자분이 리델 하트를 어느 정도로 참고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마지막 칸나이 이후 카누시움에 모여있던 군대에 대한 언급은 여기서 분명히 "전략적 차원의 추격"까지 문제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이에 대해 반론자분은 트레비아 전투에 대해서는 '로마군이 잘 싸웠기에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간 것', 트라수멘누스 호반 전투에 대해서는 '현실적으로 적군을 완전히 파괴할 수는 없음'을 들어 반론하였다. 이는 전술적인 추격 부재 문제에 대한 답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전략적 추격 부재 문제에 대한 답까지는 되지 못한다. 더욱이, 내가 보기에는 전술적인 문제에 대한 답으로도 썩 좋지 않다. 이 점은 하단에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제 위의 비판점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먼저, 한니발에게서 전술적인 추격전의 개념을 찾아볼 수 없다는 리델 하트의 주장은 내가 보기에는 철저한 오류다. 트레비아 전투의 막바지 단계에서 추격이 발생했다는 것은 Polyb.3.74.9에서 분명히 지적되고 있다. 카르타고군은 강(*트레비아)에 이르기까지는 퇴각하는 로마군을 추격했지만, 폭풍때문에 더 나아가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강물이나 폭풍 따위 아랑곳하지 말고 더욱 철저히 추격했어야 한다는 말 정도는 할 수도 있겠지만(그러나, 이런식으로 추격을 했더라면 카르타고군은 십중팔구 역공을 받아 큰 손실을 입었을 것이다) 추격이 없었다는 관측은 어쨌건 틀렸다. 트라수멘누스 호반 전투가 끝난 뒤에도,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카르타고군은 로마 패잔병들이 도망쳐 들어간 마을을 포위하여 항복을 받아내었다고 하며(Polyb.3.84.14), 로마군이 대기하거나 피신한 진지 등에 대한 소탕은 칸나이 전투의 마무리에서도 역시 찾아볼 수 있다.(Poluyb.3.117)
반론자분은 바로 이런 점들을 지적했어야 했다. 사실 내가 기억하기로 이전 히스토리에는 비슷한 말이 한두줄 있었는데 지금은 왜 사라졌는지 잘 모르겠다. 또한 트레비아 전투는 보다시피 포위망을 한번 조여버리고 그대로 끝난 싸움이 아니라 엄연히 카르타고군의 추격이 존재했기 때문에, "1만명"의 로마군이 빠져나간 것을 단지 그들이 포위망을 뚫었기 때문으로 돌리고 마무리하는 것은 그다지 훌륭한 설명 같지 않다.
트라수멘누스 전투는 관련 상황이 다소 복잡하다. 이 전투는 트라수멘누스 호반을 따라 약 25,000명의 로마군이 긴 행군 대열로 지나가던 도중에, 40,000명쯤 되는 카르타고군이 이를 거의 완전히 감싸고 덮쳐버리면서 발생한 일종의 기습 포위 섬멸전이었다. 실제 전투에서는 적군을 완전히 궤멸시키는 일은 드물다는 반론자의 주장은 원론적으로는 분명 옳은 것이다. 그런데 트라수멘누스 호반 전투는 발생한 지형과 포위 상황, 양군의 규모로 볼 때 로마군이 1만명이나 정말 도망쳐 나갔다면 실제로 상당히 이상하기는 하다.
이 문제를 설명하려면 문헌에 나타나는 전승 자체에 대한 분석이 다소 필요하다. 즉, 로마군 1만명이 도망쳤다는 이야기는 원래 리비우스가 인용한 파비우스 픽토르의 정보이다.(Liv.22.7) 그런데 픽토르가 말한 "도망자"는 실은 한니발이 놓아준 비로마계 포로들도 포함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따라서 실제로는 정말 전투중에 포위망을 빠져나와 도망친 사람이 1만명보다는 훨씬 적었으리라고 볼 수 있다.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http://cafe.daum.net/shogun/9xm/7557 를 참조하시라. 리그베다 위키의 "트라시메누스 호수의 전투"에서는 여러가지 부정교합되는 정보들을 억지로 이어붙여놓았다. 참고하지 말기를 권한다. 하지만 그것은 해당 항목 작성자의 책임은 아니다. 문제는 영문 위키에서 비롯되었다. 사실 이것도 정말 읽는것 자체가 괴로워지는 "Battle of the Trebia" 항목보다는 훨씬 낫지만 말이다.
그러면 다음으로, 한니발에게 정말 전략적인 추격 개념이 없었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볼 것이다. 이 부분은 사실 충분히 논란이 될 만 하며, 내가 제시하는 답을 결코 인정할 수 없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 굉장히 까다로운 문제임을 드러내는 것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례 1>트레비아 전투 이후, 로마군은 플라켄티아와 크레모나로 나누어 들어갔다. 한니발은 왜 이 나약한 패잔병의 집합을 쓸어버리지 않았는가?
-내가 제시하는 답은 이것이다: 트레비아 전투 이후 퇴각한 로마군은 10,000+ 가 아니라, 25,000~30,000명이었다. 한니발과 그의 군대라 해도 쉽게 소탕해 버릴 수 있는 정도의 '패잔병'이 전혀 아니었으며, 플라켄티아에 대해 한니발은 나중에 공격을 시도해 보았으나, 격파에 실패했다.
여기서는 개인사적인 이야기를 좀 해야 하겠다. 사실 로마사 좀 씹어 먹었다(...)는 동호인이라면 누구나 트레비아 전투에서 빠져나간 로마군? 그야 1만명이지! 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도 그랬다. 당시 로마군의 본래 총병력이 4만 이상이므로, 그렇다면 손실은 3만이 넘는 것이 된다.
그런데 Brunt의 Italian manpower를 읽던 중에, 대선생이 이 전투의 로마군 손실을 1만 5천명으로 잡는다는 사실을 알고 기절초풍했다. 이를 염두에 두고서 사료를 다시 읽으며, 그동안 무엇을 잘못 생각했는지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빠져나간" 것으로 유명한 1만명의 보병은, 응당 전초전 이후에 투입된 중장보병 성분이다. 투창병들은 훨씬 전에 이미 후방으로 물러났을 것이다. 또한 폴리비오스는 대부분의 기병이 빠져나갔다는 점도 기록해 보여주었다.(Polyb.3.74.8) 이 사항들은 실제로 퇴각한 로마군이 25,000~30,000에 달했음을 시사하며, 전투이후 두 집정관이 "감히" 군대를 분리한 점, 그리고 Ti.롱구스가 후에 단독으로 플라켄티아를 방어해 내었다는 이야기(당시 한니발의 병력은 17,000. Liv.21.59)와 맥락상 합치된다. Ti.롱구스의 플라켄티아 방어전은 폴리비오스의 책에 나오지 않고, 무시해 버리고 싶은 유혹을 강하게 받는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이 에피소드를 정말 기각해버려야 할만한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즉, 이 재구성에 따르자면 트레비아 전투에서 로마군은 "섬멸"되지 않았다. 한니발은 전략적인 추격을 할 줄 몰라서 안 한 것이 아니라 적이 여전히 강했고, 그래도 시도는 해 보았으나 실패했던 것이다. 더욱 많은 병력과 시간을 쏟아 적군을 소탕해버렸어야 한다고 새로운 비판점을 세워볼 수야 있겠지만, 그것은 이미 전혀 다른 이야기다. 그렇게 했다고 쳤을 때 무엇이 더 좋아지는지 잘 알기도 어렵고 말이다.
<사례 2> 칸나이 전투 이후, 한니발은 왜 카누시움으로 들어간 14,000명 상당의 로마군을 쓸어버리지 않았는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한니발에게는 카누시움을 당장 쓸어버릴만한 힘이 없었다. 정말 공략하려고 했다면 결국 어떻게든 해내기야 했겠지만, 거기에 들인 노력을 보상받을 수 있을지는 극히 의심스럽다.
어째서 그런가? 카누시움은 나름대로, 아풀리아 중부의 대도시였다. 그리고 Polyb.3.107.1은 칸나이 전투가 초여름의 수확기 이후에 발생했음을 보여준다. 다른데서도 몇차례 이야기했듯이, 2차 포에니 전쟁 내내 확인되는 바 가운데 하나는 충분한 병력과 물자를 갖추고서 농성하는 도시나 요새를 직접 공격으로 함락시키기란 대단히 어렵다는 점이다. 한니발이 이탈리아 내에서 획득한 지역의 태반은 공격~함락~정복이 아니라 내부 이반에 의해 형성되었다. 카누시움은 이반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한니발이 그곳의 로마군을 소탕하려면 도시 성벽을 포위한채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공성전에 돌입해야만 했을 것이다.
즉, 한니발이 카누시움에 집착했다면 그동안 로마인들은 군대를 재건할 시간을 충분히 버는 한편 한니발에게 호응하여 봉기하려는 이탈리아 각지의 반란 세력들을 어렵지 않게 조기 진압해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한니발은 칸나이의 승리를 이용하여 큰 세력권을 형성할 수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이 리스크 로우 리턴인 투자를 누가 하려 하겠는가? 한니발이 카누시움을 공략하지 않은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아울러, 카누시움을 당장 함락시킬 수도 없는 군대를 가지고 로마로 진격하자는 둥의 진언을 한 마하르발을 무시해 버린 것 역시 현명했다. 리델 하트는 카누시움 공략이 "로마의 목에 칼을 들이밀 수 있었던" 기회가 되었으리라고 보았지만,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니발이 정말 카누시움을 포위공격 했더라면 반대로 로마인의 칼이 한니발의 등 뒤로 날아들었을 것이다.
이상 두가지, 즉 리델 하트가 한니발의 "전략적 추격 부재"의 예시로 든 트레비아 전투와 칸나이 전투는, 내가 생각하기에는 기회 비용이 지나치게 큰 사례들이다. 비록 소탕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실책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추격전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지나치게 장황했다. 그러면 이번에는 P.스키피오의 귀환 문제로 들어갈 것이다. 리델 하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그의 모험적인 알프스 횡단의 큰 목적은 스키피오가 리비에라선을 따라 론 강에서 한 발 앞서 이탈리아로 돌아오면서 좌절되었다."
이 주장은 한니발의 "병참술 실패"를 비판하면서 제시한 것이다. 리그베다 위키에 나오는 현재 버젼의 비판은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을 제쳐놓고 아예 그가 알프스를 넘은 이유가 뭔가? 잠시동안 충격을 준다한들 그 뿐. 딱히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무주공산인 북이탈리아 지역을 휩쑬기 위해서라고 해도 스키피오가 그보다 먼저 론 강에서 이탈리아로 돌아왔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
여기서 P.스키피오의 귀환 문제에 대해, 반론자분은 또 이렇게 언급했다.
"스키피오가 한니발보다 먼저 도착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었기 때문에 스키피오가 돌아온 것이지, 한니발이 올 줄 미리 알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왜 로마는 엉뚱한 곳에 군대를 보냈단 말인가?"
아마 독자들은, 반론자분의 주장에서 문제가 무엇인지 눈치챌 수 있으실 것이다. P.스키피오의 귀환은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론강 선에서 한니발이 빠져나갔음을 알았기 때문에 일어났다. 그 자세한 과정은 Polyb.3.41-56을 참조하시라. 반론자분은 P.스키피오가 돌아오고 로마의 대응책이 준비된 과정에 대해 심히 오인하고 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한니발은 론강을 건넌 뒤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들어오기까지 대략 1달이 더 걸렸다.(론강에서 "섬"까지 4일, "섬"에서 알프스까지 10일, 알프스를 넘는데 15일. 실제로는 중간 휴식 때문에 약간 더 걸렸을 것이다) 한편 P.스키피오가 론강 도하점에서 3일 간격으로 한니발을 놓친 후 마실리아로 돌아가서, 배를 타고 피사로 가기까지는 한 10일 정도가 걸렸을 것이다.(마실리아에서 피사까지는 배로 5일 거리였다. Polyb.3.41.4) 그리고 그는 에트루리아를 지나, 보이족과 싸우고 있던 군단들을 인수한 뒤, 포강쪽으로 갔다. 거리는 대략 500km이다. 얼마 후, 한니발측과 로마군은 서로의 접근을 알아차리게 된다.(Polyb.3.61) 아마 11월 초순이었을 것이다.(티키누스 전투가 발생하는 것은 11월 중순 무렵이다. 이 전투의 소식은 시칠리아에서 돌아온 Ti.롱구스의 군대보다 앞서 로마에 도달했다. Polyb.3.68.9. Ti.롱구스의 군대는 레기온에서 아리미니움까지 가는데 40일이 걸렸으며[*폴리비오스는 릴리바이온에서 아리미니움까지 40일이라고 썼으나, 이는 필시 오류다. Walbank commentary 1권 p403 참조] 트레비아 전투는 동지께에 발생했다. Polyb.3.72.3)
따라서 P.스키피오는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었기 때문에 돌아온 것이 아닐 뿐더러 사실 우리는 그가 한니발보다 대략 보름정도 먼저 이탈리아에 왔으리라고 볼만한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는 셈이다.(엄밀하게 따지자면 리구리아 해안에서 아마 있었을 중간 기착이 이미 이탈리아 도착이지만, 그렇게까지 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이유에선지 스키피오가 갈리아 해안에서는 지체를 하고 피사에서부터는 엄청난 강행군을 했으리라고 꼭 못 가정할 것 까지는 없지만, 솔직히 말해 그런 가정이 억지스럽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즉, 한니발에 대한 이 비판은 사실에 대한 진술로서는 필시 옳다. 그런데, 비판으로서는 과연 정당한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리델 하트의 비판은, 궁극적으로는 한니발의 "큰 목적"이 좌절되었다는 주장에 그 핵심이 있다. 좌절된 "큰 목적"이란 대체 무엇인가? 문맥상 이는 분명히 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이탈리아를 갑자기 들이쳐서 성공을 거두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니발에게 정말 그런 목적이 있었는지도 의문스러우며, 설령 다소간 있었다고 해도 과연 그것이 알프스 횡단의 유일한 본의였는지는 심히 의심스럽다. 아울러 리그베다 위키의 현재 버젼에 작성되어 있는 "비판"도 이런 점에 있어 문제의 소지를 피할 수 없다. 기습하지 못했다고 해서 한니발의 이탈리아 침공 작전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 논리 전개 과정상 비판자분은 이탈리아 육로 직공 작전에 큰 희생을 감수할만한 가치가 없었으며 기습같은 부대 효과가 발생한 것도 아니었다는 주장을 펴려고 했던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만약 그러하다면, 정리가 더 잘 되었더라면 좋았겠다.
지난 1월 말에 본 항목에서 일어나는 논란에 관해 알게 된 후, 나는 "비판" 가운데 상당부분을 쓰신 분과 연락이 닿아 잠시 이야기 나눌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위에서 이야기한 내용 가운데 제법 많은 것들은 그 때 했던 말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다. 반론자분께도 그렇지만, 접근성 높은 사이트에 수고스럽게 정보를 올려주시는 분들께 장황하게 말참견이나 하는 격이니 죄송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