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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엘 재상. 마차 안의 그는 시시각각 제멋대로 찾아와 방해하는 마차의 덜컹거림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은 잠깐조차 책을 놓치지 않았다. 천장에 혼자 걸린 채, 그의 불꽃보다 더욱 불꽃같은 주홍빛 머리칼을 시샘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던 등불은 그가 흔들리기만을 바라는 지, '끼익끼익' 불길한 소리를 내며 시시각각 그를 도발했지만,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가는 길을 방해하려는지, 그가 타고 있는 마차는 길을 따라 달리면서도 몇 번이나 흔들임을 일으켰다. 그 때마다 등불의 흔들림은 불규칙적으로 커져갔고, 그를 방해하는 흔들림 역시 커져갔다. 그럼에도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인지 책 모서리를 잡는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덜컹'
이번의 흔들림은 너무나 컸다. 그 재상조차 이번에는 책을 놓칠 만큼이나 말이다.
"죄송합니다. 밤길이 어두운지라 말들이 실수를..."
그의 등 뒤, 벽 너머의 마부석에서 들려오는 늙은 마부의 죄송스런 목소리에 재상은 그에게 보일 리가 없을 미소를 지어보이며 부드럽게 받았다.
"아니요. 오히려 제가 죄송합니다. 이런 험한 오밤중에 어려운 부탁을 드린 제 잘못입니다."
젊은 재상의 겸손에 말에 마부석의 늙은 마부는 눌러쓴 모자를 고쳐 쓰며 어색함을 추스르고는 죄지은 말들에게 채찍질을 가하였다. 마차가 잠깐 실수했다고는 하지만, 달빛도, 별빛도 흐릿한 이런 밤중에도 제 속도를 내며 달릴 수 있을 만큼, 드레마 수도의 도로는 비교적 포장이 잘 되어 있다는 것은 마차 내부에서 책을 읽어나가던 재상의 모습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떨어뜨린 책을 집어드니 보던 페이지가 사고로 덮어져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재상은 책의 한 면에 묻은 먼지를 손으로 쓸어냈다. 표지에 적힌 '점성술' 이란 표지를 손가락 끝으로 살며시 훑고는 이쯤이라 생각되는 책의 중간 부분을 대강 넘겼다. 넘겨진 페이지에 적혀 있는 내용은 지난달의 사랑점이었다.
「당신의 주변. 그저 가까인 사람 정도로 여기던 누군가가 특별하게 보일 것입니다.」
'정확했다, 라고... 해야하나...'
재상은 책의 내용을 읽던 중, 그 부분을 속으로 되새기고는 다시 손끝으로 페이지를 차라락 넘겼다. 지금의 자신에게 해당하는 내용을 찾아 계속 페이지를 넘기던 그는 우연히 눈에 들어온 다른 이의 사랑점의 대목에서 자동으로 손이 멈췄다.
「당신을 바라는 누군가, 꿈속에서도 당신만을 생각합니다.」
'그 대상이 나라는 말일까?'
전에도 비슷한 내용을 꽃점으로 말해주기는 했지만, 여기서 말하는 '바라는 누군가'가 자신에 해당하는 이야기이라 보기에는 너무나 모호했다. 아니, 원래 점이라는 것 자체가 '귀에 달면 귀걸이, 코에 달면 코걸이'인지라, 애매하기 짝이 없는 내용만이 가득하기만 하였다. 재상은 책을 읽던 눈을 올려, 맞은 편 자리서 콧노래를 부르며 앉아있는 소녀를 슬쩍 훔쳐보았다.
어디서나 흔히 볼법한 흔한 외모의 소녀. 아름다운 붉은 머리칼이지만, 너무나 흔한 색이기에 그만큼 퇴색되어 보이는 색. 호기심으로 가득한 얼굴이지만, 딱히 귀엽다고 하기도, 예쁘다고 하기에도 약간씩 부족한 평범한 외모였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소녀이지만, 이 모두를 부정하기 위해 존재하듯 그녀의 오른쪽 뺨에 손바닥 절반 크기의 화상 자국이 그녀의 특별함을 표현해 주고 있었다. 안 좋은 쪽으로...
디자엘 재상은 가슴 안쪽에서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에, 책을 쥔 손에 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자 그는 책의 펼쳐진 페이지로 시선을 내렸다.
'나에 대한 점을 찾아보면 알 수 있을까?'
재상은 자신에게 해당하는 내용을 찾아 페이지를 팔락팔락 조급히 넘겨갔다. 그녀의 얼굴에 남은 흉터를 볼 때마다, 가슴 속에 고통을 느끼는 일이 이제는 늘상 겪는 일이 되었지만, 그는 이를 치료할 생각도 없었고... 치료받을 방법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내 죄니까...'
그녀에게 새겨진 흉터는 '자신의 무능함 때문에 생긴 것이다.' 라는 자격지심 때문에 겪는 고통. 그 고통을 겪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단지, 그녀의 얼굴이 아닌 자신이 대신 그 상처를 입었으면... 그 흉을 대신 짊어졌으면 하는 소망뿐이었다.
그렇지만, 흉터라는 건 '죄'와 같아. 비석에 새겨진 글귀처럼 한 번 새겨지면 결코 사라지질 않는다. 숨길 수는 있어도 지울 수는 없고, 부술 수는 있어도 없앨 수는 없다.
'속죄할 수도 없겠지...'
아니, 속죄한다 해도... 사제들을 찾아가 자신의 죄를 고하고, 신의 이름으로 용서를 받는다고 죄가 사라질까? 비석에 새겨진 글귀가 사라질까? 이런 '속죄'라는 것은 결국 '쇼'. 남들 앞에서 자신이 마치, 죄를 반성하는 것처럼 보이고 용서를 구하려 하는 것처럼 보이려는 거만한 '겉치레'일 뿐이다.
그딴 '쇼'를 부리며 신의 이름이든, 법과 정의의 이름이든... 죄를 속죄받는다 하여도, 이미 자신이 상처입힌 자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채찍질 당하며 집채만 한 바위를 산꼭대기를 향해 굴리고, 교수대에서 목이 졸라진다 해도, 죄는 사라질지언정 '속죄' 할 수는 없다.
'평생 안고 살아야 하겠지...'
페이지를 넘기는 와중에도 그런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하였다. '죄는 영원히 안고 살아야 한다. 죽을 때까지... 죽은 이후에도...' 라는 생각만이...
'응...?'
자신에게 해당하는 내용을 발견하자 그의 머릿속 생각들이 멈춰버렸다. 재상은 손가락을 들어 자신이 읽고 있는 내용의 한 글자, 한 글자 틀리지 않고 읽고자 노력했다.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입힌 당신. 그 상처는 치유될 수 없습니다...」
질식할 것만 같았다. 사람들이 장난 반, 불신 반으로 우스갯소리 마냥 읽는 책이라고는 하지만, 그런 사소한 것이라도 이미 마음에 균열이 가있는 그에게는 상처 사이에 손가락을 끼워넣고 벌리는 것만치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재상은 자신의 손바닥에 맺히는 땀으로 책이 축축이 젖어갔지만, 글자를 따라가던 손가락이 책의 우하 끝에서 끊기자, 글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아보았다.
그렇지만, 페이지를 넘길 자신은 없었다. 이 뒷면에는 과연 어떤 내용이 적혀 있을까? 전에는 가슴에 칼을 꽂았다면 이번에는 손잡이를 잡고 비트는 내용일까? 아니면 죽어가는 이의 입속에 돌을 집어넣는 내용일까? 재상은 페이지 끝자락을 손끝으로 잡고서 넘길지 말지 머뭇거렸다. 한낱 얇은 종이일 뿐인데... 쇳덩이처럼 무거웠다.
"재상, 무슨 책 읽어?"
맞은 편 자리, 붉은 소녀의 목소리에 그의 얼굴은 번개같이 올라갔다. 그의 놀랄 만큼 갑작스러운 반응에 놀랐는지 그녀의 눈은 살짝 커지는가 싶더니, 곧 양 볼이 다람쥐처럼 부풀어올라서는 항의적인 얼굴로 바뀌었다.
"뭐야, 사람 놀라게 해 죽일 일 있어? 왜 이렇게 과민반응이야?"
그녀의 목소리는 비록 불만으로 가득하였지만, 그럼에도 그의 마음속을 짓누르던 바위를 가볍게 만드는 마법의 힘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평소처럼 대답했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냐? 얼굴이 땀으로 범벅인데... 무서운 책이라도 읽어?"
땀이라는 말 때문이었을까? 그제야 윗입술을 타고 입속에 스며들어오는 땀방울에서 느껴지는 짠맛에 재상은 그녀의 '무서운 책'이라는 말을 그것과 함께 혓바닥 안에 굴렸다.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말이죠...'
그녀는 재상의 달싹거리는 입술에 무언가 의심이 드는지 이번에는 인상에 힘을 주고는 고압적으로 말해왔다.
"뭐야? 그 책이 무슨 비밀일기라도 돼? 왜 이렇게 긴장해?"
"아뇨, 평범한 점에 관한 책입니다."
"점?"
점이란 말에 무언가 호기심이 들었는지 그녀는 앉아있던 자리를 벽접이식 침대에서 그의 옆으로 옮겼다. 옮긴 자리라고 해봐야 두꺼운 나무판 하나 달아놓은 벽접이식 좌석인지라, 그녀는 딱딱한 판 위에 엉덩이를 갖다 붙였다가 불편한지 몇 번이나 몸을 들썩거리며 자리를 고쳐앉았다.
"그래서? 그래서? 지금 누구 꺼 점 보는 중이야?"
"아... 그게..."
재상은 그녀가 갑자기 몸을 가까이 해오자 숨이 멈출 것 같았다. 평소의 그녀는 그저 어린 여동생 정도로 여겨졌었는데... 이상하리만치 이번의 그녀는 소녀가 아닌 여성으로 보였다. 그녀의 호기심 어린 눈은 책에 꽂혀 있었지만, 그의 눈은 그녀의 하얀 목줄기에만 고정되어 갔다.
자신의 눈빛이 점차 음흉해진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할 만큼 그의 정신은 그녀의 매혹적인 체취로 아득해져 갔다. 평소에는 자신이 장난을 거는 대상이었는데... 이번에는 역으로 그녀에게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흡혈귀가 왜 여성의 목을 무는지 알 것 같군...'
쓸데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녀가 자신을 다시 올려다보는 것에 그의 눈은 다시 평소의 눈빛을 되찾았지만, 그의 쿵쾅거리는 심장만큼은 도저히 진정되질 않았다.
"우우, 땀 냄새..."
손으로 코를 막고서 팔을 내젓는 그녀의 과장스런 액션에 재상은 생각 없이 웃었다. 그의 웃음에 그녀도 따라 웃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호기심은 다시 책으로 돌아갔고, 그의 욕망은 다시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런 그의 심경의 변화를 모르는 소녀는 재상이 읽던 책의 글귀를 따라 찬찬히 읽어나갔다.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입힌 당신. 그 상처는 치유될 수 없습니다..."
더이상 참기가 힘들었다.
"꺅! 뭐, 뭐야! 재상? 재상"
재상의 평소답지 않은 과격한 행동에 놀란 소녀는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왜... 벽에다가 머리를 박고 있어?"
"...벽에 벌레가 있어서요."
"그럼 손으로라도 잡지... 왜 머릴 박아?"
"그렇군요... 그걸 생각 못했습니다..."
그의 말도 안 되는 횡설수설에 소녀는 피식 웃었다. 평소의 인자하고, 지적인 그의 모습이 아닌, 이런 황당한 모습이 너무나도 우스웠기에 그녀는 진심으로 웃었다.
"꺄하하하, 재상 완전 바보 같아..."
"네, 저는 바보입니다. 정말로 바보입니다..."
"크흐흐흑, 그만... 그만... 정말로 재상 맞아... 크흐흨, 진짜 바보가 됬어..."
소녀의 숨이 넘어갈 듯한 웃음소리에 재상은 전신의 피가 순간 치솟았다가, 찬찬히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별이 반짝반짝 보이는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니 이제야, 여성이 아닌 어린 소녀로 보였다.
'나란 놈은... 바보인지도...'
재상은 이마에 한 가닥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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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린은 정말정말 보기 힘든 재상의 바보짓에 터져 나오던 웃음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나서야 점성술 책에 집중할 수 있었다. 끝에서 내용이 끝나지 않고 뒷페이지에서 이어지는지라, 그녀는 거리낌 없이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그렇지만, 새로운 사랑이 그 상처를 덮어줄 것입니...다?"
책의 내용을 따라 읽은 카린은 의미가 이해되지 않는지라 재상에게 묻고자 고개를 들었다. 그때 그녀의 눈에 재상은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착각이었는지 그의 얼굴은 언제나의 미소 띤 얼굴을 하고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재상, 이게 무슨 의미야? 새로운 사랑이라는게... 내가 누군가한테 반한다는 거야? 아니면 누가 나한테 반한다는 거야?"
"그렇군요... 새로운 사랑이란... 말이군요."
디자엘 재상은 유려한 턱선을 따라 손가락으로 찬찬히 반복적으로 훑어내리고는 생각에 잠기었다. 허나, 그녀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그는 다른 의미를 놓고서 의미를 해석하고자 하였다.
'내가 전하를 사랑하게 된다는 말일까? 아니면,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 가버린다는 것일까...?"
턱선을 쓰다듬던 손은 재상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의 입을 가린 채 톡톡 두들기는 나쁜 습관으로 변해있었다. 그가 재상일을 하는 동안에는 일 때문에 이러한 습관이 나온 적이 거의 없었다. 오직 여왕과 관련된 일에서만 이런 습관이 불쑥 튀어나와버린다는 것을 그는 자기 자신도 모른 채로 한참 동안 말없이 고심할 뿐이었다.
그의 말을 기다리며 한참 동안을 빤히 올려다보던 카린은 그가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버린 것 같자, 답을 듣는 것을 포기하고는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성에서 쓰던 침대에 비하면에 딱딱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아니, 도리어 성에서 쓰던 침대보다 마음에 들었다. 움직이는 마차에서 누운 신기한 감각 때문일 수도 있고, 늘 쓰던 침대가 아닌 다른 침대에 누워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푹신한 침대에서만 자다 보니 허리가 아팠던 탓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카린은 마차에 누운 채로 천장만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천장의 한가운데에 매달려 있는 네모난 등불이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위태위태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만약, 저 등이 떨어진다면 마차 안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겠지만, 그런 위험이 있는 만큼 튼튼하게 달려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생각을 한 그녀는 졸려오는 눈을 끔벅거렸다.
천장에 가죽을 씌우는 대신 평평한 판으로 막은 탓에 높이는 낮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키가 작은 그녀에게는 아슬아슬하게나마 서서 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의 높이는 되었다. 전에 쓰던 좁기만 한 마차가 아닌, 이 넓은 마차가 그녀에게는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뭐, 외견상으로는 미적으로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장기적인 마차생활을 해야 할 때는 차라리 외견을 포기하고, 편의를 추구하는 쪽이 나았으니까.
《끼익... 끼익...》
마차가 흔들거릴 때마다 등이 흔들린다. 그리고 시야도 흔들린다. 그렇지만, 저 작고 아늑한 빛을 내는 등을 보자니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예전에 자주 꿈꾸던 그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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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린..."
누군가 자신을 부른다. 누굴까? 매우 졸리지만, 그 목소리는 졸린 눈을 뜨려고 만들게 할 만큼의 그리움이 담겨 있다.
"...카린..."
눈을 떠야 한다. 졸리지만 지금만큼은 괜찮다. 졸리지만 참을 수 있다. 왜냐면 지금 눈을 뜨지 않으면 언제 이런 행복이 다시 또 찾아와줄지 모르니까...
"...카린... 내 딸아... 너는 아빠가 올 때면 늘 잠들어 있구나..."
"...아빠?"
눈을 떴음에도 아직 시야가 어둡다. 눈이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깬 것이 아니라서일까? 소리 내 부르려고 해도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너무 오랫동안 잔 것 같다.
"아빠가 널 위해 특별한 선물을 가지고 왔어요."
"...선물?"
얼굴로 보이는 흐릿한 형체가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잘 보이지 않지만... 제대로 깍지도 않은 지저분한 턱수염, 피로로 인해 마른 얼굴... 그리고 기름으로 떡 진 금발 머리... 그리고, 그리고 절대로 속일 수 없는 저 자상한 눈빛! 아빠가 틀림없다.
"...아빠."
하지만, 입은 제대로 움직이질 않는다. 꿈이라 그런 걸까? 목소리를 내어도 어차피 꿈이 아닌, 현실로 퍼져 나갈 목소리인지라 불러선 안 되는 게 아닌 걸까...
"짠, 이게 뭐~게?"
화려한 분홍빛의 상자를 들고 와 내 눈앞에 내민다. 뭘까? 어떤 선물일까? 인형일까? 과자일까? 아니면 전부터 갖고 싶던 옷일까? 만약 맘에 안 들면, 다른 걸로 바꿔달라 하면 바꿔주실까?
"열어보렴."
허락이 내려지기 전부터 내 손은 이미 상자의 포장의 뜯고 있다. 말없이 자상한 눈매로 내려만 보는 아빠의 눈길 아래서 움직이던 나의 두 손은 상자의 뚜껑을 여는 순간 멈춰졌다.
"마음에 드니?"
속삭이는 말이 귓가에 부드러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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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드십니까?"
"...응?"
카린은 생각지 못한 목소리에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재상의 목소리라는 것이야 금방 알았지만, 꿈속에서 들었던 아빠의 목소리와 섞인 탓에 그녀의 머리는 여전히 현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뱅뱅 돌기만 하였다.
"뭐라고 했어? 재상?"
"예? 아... 잠드신 겁니까?"
이해불가인 그의 말에 카린은 상반신을 침대에서 일으켰다. 잠이 든 건 잠깐 같았지만, 등의 옷 틈새로 열기가 후끈후끈 한 것이 약간 불쾌했다. 그렇지만, 디자엘 재상은 그녀가 잠들었었다는 것을 몰랐었는지 아마 전부터 계속 무언가를 말했던 것처럼 보였다.
"나, 자는 동안 뭐라고 말했었어?"
"아... 그렇군요."
매끈한 턱을 쓰다듬으며 잠깐동안 주저하는 그의 모습이 아무래도 말을 다시 하기에는 꽤나 긴 내용이었던 것 같았다.
"이후의 일정에 대해 말씀드렸었습니다만... 아무래도 처음부터 간략하게 다시 말씀드려야겠군요."
"응."
딱히 잠든 자신 탓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녀였기에, 그의 말을 졸린 눈을 비비며 경청의 태도를 취했다. 그런 그녀의 풀린 눈매에 재상은 작은 웃음을 짓고는 최대한 축약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수도의 북쪽 항구에 곧 도착할 겁니다. 그곳에서 배를 갈아타고 하루 정도 북상하면은 시렌 백작님이 소개하신 휴양지에 도착할 겁니다."
"...휴양지? 재상이랑 나랑 단둘이 몰래 성을 빠져나온 이유가 거기에 가려는 것 때문이었어?"
"아니요."
"그럼, 뭔데?"
"후후... 비밀입니다."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비밀을 언급하는 그의 태도가 얄미웠다. 카린은 그런 그에게 베개를 집어던지며 항의했지만, 재상은 그 베개를 가볍게 받아 얌전히 내려놓고는 다시 그 얄미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말이지... 재상은..."
"후후."
"근데, 이렇게 몰래 나와도 되는 거야? 야반도주도 할 사람이 해야지... 여왕이랑 재상이 도망가면 성이 발칵 뒤집힐 거 아냐?"
"그렇군요."
싱글싱글 웃으며 '그렇군요.'로 변명을 얼렁뚱땅 재끼는 그의 밉상한 태도에 카린은 제자리서 방방 뛰는 걸로 불만을 표시했다. 그렇지만, 그의 눈에는 그녀의 불만스런 모습도 사랑스럽게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대공님의 허락은 받았으니깐요."
"...야반도주가 언제부터 허락받고 하는 거였어?"
기가 막힌다는 그녀의 말에 재상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을 덧붙였다.
"뭐, 대공님만 알고 계시니... 성이 뒤집히는 건 변치않는 수순이겠죠."
"...재상."
"예."
"너도 참 대책 없이 군다."
카린은 반쯤 포기한 채로 침대에 다시 누웠다. 뒤편의 바람막이 틈새로 갓 떠오른 새벽 햇살이 새어들어 오는 것이 보였다. 재상 역시 그것을 보고는 이제 등을 켜놓을 필요가 없다고 여겨졌는지, 천장에 붙어 있던 등불의 뚜껑을 열고는 입김을 불어 불을 껐다. 후에 아침공기로 환기를 시키고자 뒤편에 다가가 바람막이에 손을 대려 했지만, 카린이 제지했다.
"추우니깐, 나중에."
"예."
재상은 싱긋 웃고는 자기 자리에 돌아가 앉아서는 자신만의 생각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카린은 그런 그의 모습을 누운 채로 생각 없이 바라보다 말을 걸어볼까 했지만, 그도 그 나름대로 무언가 고심하는 것처럼 보였기에 그것을 포기하고는, 몸을 돌려 편히 누워서는 머리 뒤로 두 팔을 돌리고서 천장에서 혼자 흔들리는 등만을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하였다.
마차는 출발한 지 어언 옛날이니, 동이 막 트려는 지금에 와서 말머리를 돌려봐야 이미 늦었을 것이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천천히 놀다 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근데, 겨우 휴양지에 가는 건데 말야."
"네."
"꼭, 이렇게 몰래 갈 필요가 있어?"
"당연히 그럴 필요가 있습니다."
당연하다는 그의 말에 카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책 없이 움직인 것 같아도 다 이유가 있기에 움직인 게 뻔한 재상일 것 같기에 카린은 걱정하는 것은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여차하면 다 재상에게 뒤집어씌우고 도망치면 그만이니까...
"왠지 미안하네..."
작게 중얼거리던 침대서 중얼거리던 카린의 눈은 생각 없이 반대편의 벽을 향했다. 벽 아래로는 미리 준비해놓았는지 크고 작은 짐가방이 잔뜩 쌓여 있었다.
'이게 야반도주야, 신혼여행이야?'
그 가방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의 눈에 다른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손잡이가 달린 가방 더미 사이에 낯이 익은 상자가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저 상자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어디서였을까?
'맞다! 선물.'
생생히 떠올랐다. 꿈속에서 아빠가 주었던 선물상자. 예쁜 포장지로 덮여 있지는 않았지만, 알맹이인 상자는 분명히 꿈속에서 본 것과 똑같았다.
'우연일까?'
상자라는 게 뭐... 원래 흔한 물건이니까. 주변에서 보여도 이상할 게 없다, 라는 생각을 하며 그녀는 그 상자를 꺼내볼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꺼내보기에는 너무나 가지런히 차곡차곡 쌓여 있는 가방들 밑에 깔려있는지라, 저 상자만 꺼내보려면 천상 가방들을 모두 치우는 수밖에 없어 보였다. 가방들 하나하나가 묵직해 보이는 것이, 치우고자 하려면 고생 꽤나 할 것 같아 보이지만, 뭐 직접 할 것도 없이 재상에게 '저 상자 좀 꺼내줘.' 라고 부탁하면 십중팔구(재상의 장난기 때문에 완전히 장담하지는 못하고...) 군말 없이 꺼내주겠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미안했다.
그렇기에 카린은 '보는 것' 대신 '듣는 쪽'을 택했다.
"재상."
"예."
"저 상자, 뭐야"
그녀의 말에 재상은 막 읽으려던 책을 덮고는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려 그 상자를 보더니 금방 말을 못하고 주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어물거리는 모습에 무언가 수상함을 느낀 그녀가 막 캐묻기 직전에서야 얍삽하게도 재상이 먼저 선수를 쳤다.
"저 상자는 말입니다..."
"저 상자는?"
너무 긴장이 되어 침이 넘어갔다.
"나무로 만든 겁니다."
"아, 나무로 만든 거구나."
그렇구나, 하며 손바닥을 탁 치며 수긍하고는 편히 돌아누우려던 카린은 분노한 베르제바브 대공처럼 변모해 소리질렀다.
"누가 그걸 물었대!"
마차가 크게 요동쳤다. 물론, 그녀의 목소리가 마차를 흔들어 놓을 만큼 커서가 아니라는 것쯤은 당연하리라... 마부석 쪽에서 '워이 워이' 하며 말들을 진정시키는 늙은 마부의 당황한 목소리가 새어들어 왔지만, 카린은 일절 무시하고서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짜증스럽게 소리질렀다.
"귀찮음 만땅인 라미엘도 아니고, 재상이면서 그런 식으로 자꾸 넘어갈래!"
"그럼, 간단하게 지금 꺼내 보여드리겠습니다."
웃는 얼굴로 말을 정정하는 재상의 말에는 무언가 수상함이 담겨 있었다. 예를 들자면, 평소에 장난치길 좋아하는 친구가 수상한 물건을 내어 보이며 '자아, 어서 열어봐.' 라고 권유하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정 알고 싶으면 알려주겠지만, 후회할거다.' 를 빙 돌려 말하는 것 같은 재상의 말에 불길함을 느낀 카린은 전의 기세는 어디 가고 재상의 눈치만을 살살 살피는 태도로 바뀌었다.
"그거... 위험한건 아니지?"
"예."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힘주어 고개를 끄덕이자 카린의 기세는 한풀 더 꺾이고 말았다. 저 상자 안에 뭐가 들었을지 미칠 듯이 궁금했지만, 막상 열면 징그러운 벌레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과 막상막하로 불안해진 카린은 미칠 듯이 궁금한 호기심으로 고뇌했다.
그녀가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재상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그녀가 결단을 내리기도 전에 상자를 꺼내 돌아온 재상은 혼자 고민하느라 정신이 쏠린 그녀에게 불쑥 내밀었다.
"열어보시겠습니까?"
권유하는 재상의 얼굴과 목소리가 그녀에게는 꿈 속에서 보았던 아버지의 모습과 겹쳐보였다. 꿈의 연장이 아닐까, 하는 헛생각마저 든 그녀는 정신을 차리려 애쓰고서야 그 상자를 받아들었다.
두손에 받아 든 상자의 무게는 그다지 대단치 않았다. 두들겨 보았지만 속은 거의 비었는지 텅텅 빈 소리만이 들려왔다. 열어볼까, 말까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눈을 살짝 들어 재상 쪽을 살폈다. 역시나, 재상이 장난기가 섞인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것이 보이자, 카린은 뻔히 아는 함정에 빠지는 기분으로 상자를 열었다.
안은 짚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장난으로 채워놓은 것인가 싶었지만, 그저 완충을 위해 채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그 속에 손을 넣어 휘저어보았다. 예상대로, 손끝에 딱딱한 무언가가 닿았다.
그것을 조심해서 꺼내보니, 나무로 만들어진 네모난 틀 같은 겉이 손가락에 걸린 채로 모습을 드러냈다. 표면은 섬세한 세공을 들였는지 덩굴을 연상시키는 울퉁불퉁한 무늬가 상하좌우 네 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가운데는 네모낳게 뻥 뚤려 있기에 주먹을 넣으면 쑥 통과할 수 있어 보였다.
이게 무슨 용도로 쓰이는 물건인지 알 수 없기에 그녀는 전부터 쭉 지켜보고 있던 재상에게 물었다.
"이거 뭐에 쓰는 물건이야?"
"액자입니다."
재상이 말해주고나니 손 안의 물건이 액자처럼 보이기는 하였다. 그렇지만, 액자만 덩그란히 있을 뿐, 그 안을 채울 그림은 상자 안을 뒤져봐도 보이지 않았다.
"그림은?"
"글쎄요..."
재상도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대답하자, 카린은 혹시나 싶어 다시 물었다.
"이거 재상이 준비한 거 아냐?"
"짐은 제가 준비했습니다만... 이 상자는 베르제바브 대공님께서 전하께 드리라고 챙겨주신 겁니다."
"뭔지도 모르면서 받았다는 거야?"
"주시면은 그냥 잠자코 받아야지... 대공님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긴..."
카린은 고개를 끄덕끄덕 하면서, 침대에 도로 누웠다. 손 안의 액자를 요밀조밀 뜯어보며 시간을 보내던 카린은 얼마 못가 수마가 덮쳐오기 시작했다. 밤을 꼬박 샌 탓이라는 생각을 하며 그녀는 새벽해가 고개를 막 내미려는 때에 잠에 빠져들었다.
"도착했습니다."
잠깐 눈 감았다 뜬 것 같은데, 그 사이에 꽤 오랫동안 잤는지 머리가 무거웠다. 재상이 곁에 와서 말하는 소리를 잠결에 들은 그녀는 일어나기 귀찮기에 잠자는 척 몸을 돌려 누었다.
곧, 마부가 마차를 세우는 듯한 미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마차를 뱅 돌아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뒤편에서 재상과 무언가 말을 주고받는 소리도 들렸다. 칼잠이라도 자고자 했던 카린은 도착한 것 같은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막 잠이 들었던 몸을 일으키기가 귀찮고 졸린지라 침대서 뭉그적거리기만 하였다.
"배 안에서 계속 주무시면 됩니다. 그쪽에는 좋은 침대도 있으니까요."
짐가방을 뒤편의 마부에게 하나씩 넘겨주던 재상이 그녀의 게으름을 보다못해 옆에서 재촉했지만, 그래도 카린은 자리서 일어날 기분이 나질 않았다.
"조금만 더 잤다가 타면 안 돼?"
"안됩니다."
재상이 딱 잘라 거절했다. 이에 카린은 누운 채로 두 손을 내밀어서는 모아 빌며 다시 물었다.
"이렇게 빌어도?"
"...그래도 안됩니다."
재상의 고집 센 거부에 카린은 슬슬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여왕의 지엄한 말에도 불구하고 반대한다? 좋아 그렇다면...
"그럼 난 좀 더 누워 있다 일어날 거니깐, 재상 혼자 마음대로 해봐."
아니꼬우면 배 째라는 태도로 돌아선 카린은 당당히 선언하고는 획 돌아누웠다. 등만을 보이고서 이불까지 덮고 숙면에 들어서는 그녀의 태도에 재상은 그녀의 어깨를 잡고서는 '권유'가 아닌 '확인'을 해왔다.
"정말 마음대로 해도 괜찮습니까?"
"..."
뭔가 불안했다. 마음대로 뭘 어쩌겠다는 걸까? 설마 침대째 들어서 나르지는 않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그녀는 재상의 말에 확실히 못을 박았다.
"응. 맘대로 해."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전.하."
왠지 말끝에 힘이 들어간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을 하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대로 잠을 청하는 동안에도 마차의 안팎으로는 끊임없이 들리는 인기척이 그녀의 잠을 방해했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아 재상이 내리는 듯한 기척을 끝으로 조용해지자 그제서야 편히 잘 수 있게 됐다는 편안함을 느꼈다.
'결국, 혼자 내릴거면서...'
뭔가를 은근히 기대했는데 재상의 반응은 영 썰렁했다. 그대로 눈을 감고 있으니 마부석에서 마부가 말들에게 채찍질을 가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흔들리는 미동과 함께 마차가 움직이는 감각이 느껴지더니, 이제는 경사를 오르는지 무게가 머리 쪽으로 쏠렸다.
'뭐야, 어차피 마차도 배에 실을 거면서...'
귀찮게 내릴 필요까지 없었지 않았나, 라는 생각을 하며 그녀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는 자던 잠을 계속 청했다.
.
.
.
"아으... 벌써 밤이야?"
눈을 뜨니 주변이 컴컴한 것에 당혹해함 카린은 몸을 일으켰다. 익숙지 않은 침대서 잠을 잤더니 허리가 쑤셔오는 것이, 기분이 영 좋지가 않았다. 잠을 잔 것 같지도 않은 몸 상태에 카린은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내고는 몸을 일으켰다.
"하나도 안보이잖아... 짜증나게..."
칠흑같이 어두운 것이 자신의 손발마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침대 밑으로 다리를 내리던 그녀는 바닥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탓에, 발을 헛디뎌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아씨... 나는 내버려두고 혼자 어딜 간거야..."
고집을 부린 사람이 자신이었다는 것은 쏙 빼먹었는지, 카린은 죄 없는 재상에게 화를 쏟으며 두 다리로 바닥을 딛고 섰다. 그렇지만, 뭐가 보여야 발을 옮기든지 하지... 한 발짝이라도 잘못 디뎠다간 마차에서 땅바닥으로 수직낙하를 하게 되는지라 쉽사리 발을 뗄 수가 없었다.
"근데, 벌써 밤일리가 없잖아..."
분명, 항구에 도착했을 때, 여명이 밝아오던 것이 분명히 기억나기에 그녀는 중얼거리며 어둠 속으로 손을 더듬으며 길을 찾고자 노력했다. 허나, 눈곱 낀 두 눈은 빛 한 조각조차 흡수하질 못했는지 질리도록 어두운 어둠 속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익숙해지질 않았다.
"재상! 진짜 이러기야!"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자, 카린은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장난도 정도껏 쳐야지, 이런 무서운 곳에 혼자 버려두고 가는 게 어디 있단 말인가!
"나, 진짜로 무섭단 말야! 재상!"
진짜로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너무 무서워서 더 이상 한 발짝도 떼지 못할 것 같았다. 카린은 어둠 속에서 멋대로 선이 그려지며 무서운 형체가 완성될 때마다 놀라 작은 비명을 지르며 몸이 위축됐다. 그것은 괴물처럼 보이기도 하였고, 사악한 광대의 얼굴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때로는 바로 뒤에서 누군가 목줄기에 대고 숨소리를 내는 것같은 환각에 소름이 끼쳐오기까지도 하였다. 카린은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질렀다.
"재상!"
벽이 갈라지기라도 하는지 어디선가 돌을 끄는 듯한 소리가 새어들어 왔다. 동시에 마차 안과 밖이 점차 밝아져 갔다. 그곳에서부터 사람들의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려오자 카린은 눈물이 쏙 빠진 얼굴로 그 빛의 근원을 향해 돌아보았다. 선원의 복장을 두 사람이 커다란 문을 좌우로 끌어 여는 것이 보였고, 곧 그 뒤로는 아침해를 배경으로 열 명 정도의 인영들이 보이는가 싶더니, 호기심이 섞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후에야 간신히 알아보았다.
"...진짜, 무서웠단 말야.."
카린은 그 말을 중얼거리며 마차에서 뛰쳐 내렸다. 주위를 돌아보니 온통 빈 마차들뿐, 말들은 다른 곳으로 옮겼는지... 아니면 마차만 싣고서 내렸는지 살아있는 것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차 적재창고에서 미아처럼 혼자 울어 재꼈다는 것을 뒤늦게야 자각한 카린은 붉어진 얼굴로 출구 쪽을 돌아보았다. 그 방향으로는 언제 모였는지 구경꾼들로 가득해서는 그녀를 손가락질하며 수군수군 거리고 있었다.
「뭐야, 울음소리가 새어나와서 미아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다 큰 애잖아.」
「아직도 눈을 글썽거리는 거 봐. 진짜로 울었나 본데...」
「저 여자애, 여왕님이랑 닮지 않았어?」
「설마, 고귀하고 지엄하신 여왕님이 잠깐 갇혔다고 배 전체가 들썩일 만큼 우실 분이겠어? 그냥 닮은 사람이겠지...」
창피해 죽을 것만 같았다. 한심하다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 허탈하다는 시선에 웃음거리도 안 된다는 듯한 시선에 카린은 무안한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서 그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빠져나오고는 그대로 도망쳤다. 뒤편으로 꽂히는 무자비한 시선에 엄청난 쪽팔림을 뒷통수에 이고서 말이다.
"여왕님! 여왕님!"
몇몇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고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그 눈치 없는 것들에게 속으로만, 자신을 '여왕님'이라고 부르지 말아 주기만을 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