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불자를위한 수행지침
3)간경의 필요성
이와같이 간경수행을 통해 본성을 찾는 길이 분명하니 간경의 필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경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은 선가에서 불립문자라 하여 교를 배우는 것을 꺼리고 경전마저 멀리하니 그것은 눈뜬 장님을 만드는 결과로써 눈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두운 밤길을 등불도 없이 가는 것처럼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불립문자란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 즉 문자에 갖히지 말라는 것이지 문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부처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경전을 읽는다는 것은 현재 부처님과 만나서 부처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고 있는 것이니 부처님을 뵙고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어찌 허물이 되겠는가. 허물이 있다면 보는 자가 지혜로써 궁구하지 아니하고 생각으로 분별하고 지식을 쌓는 데만 급급한 것이니, 같은 물을 먹어도 소는 젖을 만들고 뱀은 독을 만드는 것과 같다. 모든 이치가 그러하겠거니와 더구나 경전은 부처님의 현신일진데 어찌 그길을 통하지 않고 도에 이를 수 있겠는가.
간경의 필요성과 바른 태도를 간명하게 밝히신 죽창수필의 내용을 인용해 보겠다. 이 글은 계율의 부흥과 선정일치를 강조하신 명대의 주굉스님(1535~1615)이 말년에 후학들을 위해 저술한 것으로 공부하는 자에게 아주 요긴한 말씀들이다.
나도 소시에는 선비들이 불교를 비방하는 것을 보고, 선입견과 경솔한 판단으로 깨닫지 못했었다. 그 후 우연히 계단(戒壇)과 강당(講堂)에서 몇 권의 경을 구하여 읽어 보고는 비로소 크게 놀라며, '이같은 책을 읽어보지 못했던들 거의 인생을 허송할 뻔하였다'하고 생각하였다. 요즘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장성하고 늙고 병들어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눈에 스쳐본 적이 없는 자들이 무수하다. 실로 보배산을 눈앞에 두고도 찾아나서지 않는 자들이라 할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비록 읽기는 하지만 말만을 따라 이야깃거리로 삼거나, 자신의 문장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데 불과하며, 어려서부터 장성하고 늙고 병들어 죽을 때까지 잠시도 그 이치를 궁구하려 하지 않는다. 그 보배산을 찾아 나서기는 했으나, 그 보배를 찾아 취하지 않는 자라 할 것이다. 또 어떤 이는, 비록 토론하고 강연하기는 하지만, 또한 글자나 풀이하고 문장을 해석하면서 서로 아만을 내세우는데 불과하여, 어려서부터 장성하고 늙어 죽을 때까지 잠깐도 진실하게 수행하고 실천하지 않는다. 보배를 취하여 손에 가지고 놀거나 감상하며, 혹은 품 속에 넣고 옷 소매 속에 간직했다 도로 내버리는 자들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한 번 식전(識田)에 물들면 마침내 道種을 이루게 될 것이니, 그러므로 불경을 불가불 읽어야 한다.
또 다른 한 편의 글에서는
어떤 참선에 대하여 자부하는 자가
"달마는 문자를 세우지 않았다. 견성하기만 하면 그만이다"하고 말했다.
그러자 염불을 자부하는 자도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분을 만나는 것이다. 어찌 반드시 경전이 필요하랴" 하였다.
이 두 사람이 진정으로 얻은 것이 있으면서 이런 말을 했다면 굳이 더 논할 일이 아니거니와, 실제 얻은 것이 없이 이런 말을 한다면, 이런 일들은 대개 자신의 교리에 통달하지 못한 허물을 숨기려 하는 자들일 것이다.
나도 평소 염불을 숭상해 왔으나, 애써 사람들에게 경전을 읽기를 권하고 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염불의 가르침이 어찌 저절로 온 것이겠는가. 부처님의 가르침이 경전 속에 기록되지 않았다면 오늘의 중생들이 어떻게 10만억 찰 밖에 아미타불이 계신 줄 알 수 있겠는가. 또한 참선하는 이들은 교 밖에 따로 전한 것이라고 핑계하고 있으나, 교를 여의고 참구하는 것은 삿된 因이요, 교를 버리고 깨닫는 것은 삿된 견해임을 알지 못하였다. 비록 그대가 참구하여 깨달았다 하더라도 반드시 경교로써 인증해야 할 것이요, 교와 더불어 합치하지 않는다면 이는 모두 邪見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유교를 배우는 자는 반드시 육경과 사서로써 표준을 삼아야 하고, 불교를 배우는 자는 반드시 삼장 십이부로써 근본을 삼아야 한다.
경전이 아니라면 어떻게 불법을 만날 수 있으며 부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겠는가. 경전을 멀리하는 것은 아직 걷지도 못하는 어린 아이가 부모 곁을 떠나 멀리 가고자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낱 미망을 벗어버리지 못한 범부중생으로써 부처님 곁을 떠나고자 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 늘 경전을 보고 마음에서 잊지 않아야 몸과 마음에 허물이 생기지 않고 불법을 향해 올곧게 나아갈 수 있다.
2.간경의 대상
1)경전의 의미
경전은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경을 비롯하여 수행자들이 지켜야할 계율을 담은 율장과 경과 율에 대한 해석이나 교리에 대한 연구 성과를 모은 논장의 삼장으로 나눌 수 있다. 경율론 삼장을 통털어 일컫는 말로 일체경, 또는 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부처님의 말씀은 처음에는 암송하여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으나, 이러한 방법으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후대에 전하는데 어려움이 있으므로 함께 모여 합송함으로써 경전을 결집하였다. 4차에 걸친 결집이 있었으며, 3차 결집 때 비로소 문자로 기록되었다. 인도에서 산스크리트어로 결집된 이후에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팔리어 경전과 한역 경전이다. 특히 한역 경전은 아함경 및 그에 대한 주석서를 비롯하여 대승경론을 막라하고 있으므로 그 중요성을 말로 다 할 수 없다. 우리나라도 고려 때 몽고의 침입으로 인한 위기상황에서 국란극복의 의지를 대장경 편찬사업으로 발휘하여 오늘날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고구려 팔만대장경을 소장하게 되었다. 고구려 팔만대장경은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문화유산 중의 하나로 선정되면서 국내외적으로 더욱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문화재로써가 아닌 살아있는 부처님의 말씀으로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곁에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전이 없다면 우리는 어디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겠는가.
경전은 부처님과 보살님들이 당시의 중생들과 그 뒤의 중생들을 깨침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베풀어놓으신 은혜로움인 바, 우리가 보게 되는 경전은 단순한 글이 아니라 불보살님의 현신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경전은 부처님께서 자신의 삶을 또 다른 모습으로 남기신 것을 말하는 바, 곧 부처님께서 영원한 모습으로 살아 계시는 또 하나의 여래세계인 것이다.
2)경전의 갈래
부처님의 말씀은 정해져 있는 바가 없다. 중생의 근기에 따라 진리로 가는 길을 제시하였기 때문에 그만큼 방편도 다양하다. 따라서 경전에도 다양한 형식과 내용을 갖추고 있는데 이에 따라 12부로 구분하였다.
보살마하살은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12부경인 수다라, 기야, 수기경, 가타, 우타나, 인연경, 아파타나, 여시어경, 본생경, 광경, 미증유경, 논의경을 듣고 또 모든 성문들이 들었거나 듣지 않은 것을 듣고자 하며, 그를 모두 다 외고 받아 지니고자 하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대지도론 33권>, 이하 인용함)
1)수다라(Sutra
契經) 또는 법본(法本)이라 하며 경전 가운데 법의를 직설한 장행문(長行文)이다. 계경은 이치에 계합하고 근기에 계합한 경전을 말한다.
모든 경 가운데 사실 그대로 직설하는 것을 수다라라 하나니, 이른바 4아함과 모든 마하연경과 2백5십계경이다. 삼장에서 나오는 그 외에도 역시 모든 경이 있나니 모두를 수다라(修多羅)라 한다.
2)기야(Geya
또는 중송(重頌)이라 하며 앞의 장행문에 응하여 거듭 그 뜻을 운문으로 편 것, 곧 송을 말한다.
모든 경전 안에서의 게송을 기야라 한다.
3)화가라(Vyakarana)
수기라 하며 보살에게 주는 성불한다는 기록의 경문으로 경에 말한 것을 문답으로 해석하고 또 제자의 다음 세상에 태어날 곳을 예언한 것이다.
"이 사람은 그만큼의 아승지 겁을 지나면 부처님이 될 것이다"라고 수기하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 법에서 중생에게 수기를 하시려면 먼저 모두 빙그레 웃으시면서 한량없는 광명을 네개의 어금니에서 내시나니에서 내시나니, 이른바 청색 황색 적색 백색 옥색 자색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