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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염화실 원문보기 글쓴이: 연두
월간 『법회와 설법』은 수행과 교화의 本分事에 정진하시는 善知識의 修道와 傳法 이야기를 인터뷰하여 소개합니다. 이 선지식의 치열한 구도 교화기가 제방 스님들의 精進에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편집자 주> 무여 스님은 문수산 축서사에 주석하십니다. 문수산은 경상북도 봉화 땅에 있지요. 봉화는 우리 나라에 가장 오지 중에 한 곳입니다. 어떤 자료를 보니 봉화군은 재정 자립도 10% 미만으로 꼴지 군에 속하더군요. 그런데 봉화는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에 둘러싸인 흔히 양간 지역으로 불리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춘 명당으로 통합니다. 그래서 도 닦기가 좋은 곳으로 알려져 마음 공부하는 이들이 많이 찾아 들고 있답니다. 또한 송이가 가장 많이 나는 곳으로도 유명하지요. 그런 봉화에 문수산 축서사가 있고 무여스님이 주석합니다. 무여스님은 경북 금릉에서 태어나 오대산 상원사로 입산한 후 20여 년간 선 수행의 길로 매진하시어 칠불사, 망월사 등의 선원장을 지냈고, 1980년대 후반에 문수산 축서사에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 계십니다. 후학 양성에도 뜻을 두어 종립 동화사 기본선원 초대 운영위원장을 지내셨습니다. 봉화 읍내에서 축서사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는데 봉화에서 25년째 택시를 몰고 있다는 기사님의 말씀이 “축서사는 큰스님이 오시고 엄청나게 변했습니다. 절에 차가 없을 때 가끔 스님을 모셔다 드린 적이 있는데 참 자상하시고 편안하게 해주셨어요. 스님은 정월 초하루 생각이 섣달 그믐날까지 변함없는 그런 분입니다.” “1월 1일 생각이 12월 31일까지 변함이 없는 분” 이 한 마디에 봉화 사람들이 스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드러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님께서도 여늬 선지식과 같이 “나는 이런 데에 나갈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하시며 이 인터뷰를 여러 번 사양하셨습니다. 세 번이나 찾아가니 겨우 말씀을 주셨습니다.
- 먼저 축서사에는 언제부터 주석하셨는지요. 그리고 엄청난 불사를 하셨는데 그 인연도 좀 들려주시죠.
처음 왔을 때 절 살림은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혼자서 정리하는 데는 좋았습니다. 특히 축서사는 산중 깊이 있으면서 터가 좋아요. 오대산 중대 적멸보궁에 있어 봤는데, 보궁터와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러다 한 2년 후에 가려고 하니 주변에서 말려요. 불사나 좀 하고 가라고 합디다. 그래서 몇 사람이 사는데 불편하지는 않게 해놓고 내려가자 생각하던 차에 마침 아래 동네에 흙이 좀 있다고 해서 올린 것이 불사의 시작입니다. 불사 이전 축서사는 도량이 좁았어요. 해발 700미터가 넘는 곳에 위치한 법당 터는 양명하고 정진하기 좋은 터였지만, 좁았어요. 그래서 이 좋은 터를 잘 활용하는 가람 불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항공 촬영도 하고 측량도 해서 컴퓨터로 터의 지형도를 분석하고 그래픽으로 지금과 같은 설계를 해서 흙을 실어 올렸습니다. 덤프트럭으로 한 6천대분의 흙으로 기초 공사를 해서 지금의 터를 조성하였습니다. 쉽게 말하면 예전에 축서사는 뒷산이나 안대는 좋지만, 먹고 살기가 어려운 도량이었습니다. 지금은 성형수술을 해서 후덕한 터, 정진하기 좋은 터로 만들었다고나 할까요. 원래 경사가 가파르고 좁은 터를 널찍하게 하려니 축대를 잘 쌓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축대를 여러 번 쌓고 허물기를 거듭하여 지금의 축대가 조성되었습니다. 불사는 하나를 하더라도 제대로 불사답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 동, 한 동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축대도 마찬가지고요. - 발심 출가 인연을 좀 들려주시죠. 은사 희섭 스님과의 인연도요. 나는 어려서 성격이 나약하고 내성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청년기가 되어 스스로 좀 다양한 체험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인문학을 물론 음악, 예술에도 관심을 가졌고, 『인생론』 『위인전기』 같은 것을 통해서 훌륭한 분들의 삶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영화에도 퍽 관심을 가졌더랬지요.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보람과 긍지를 가지고 사는 방법은 없는가?” 그런 생각으로 한창 고민하던 시절에 우연히 가야산 해인사로 여행을 가다가 고령쪽 가야산 기슭 양지 바른 곳에 아담한 절이 눈에 들어 왔어요. 무심코 그 절로 가니 마치 고향집에 온 것처럼 편안하고 포근한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절에서 며칠 쉬고 싶다하니 그러라고 하데요. 그래서 며칠 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흘째 되니 노스님이 “자네가 무엇인가?”하고는 한 번 생각해 보게 해요. “자네가 무엇인가?”그 물음이 가슴에 확 와서는 떠나지 않아요. 그래서 “자네가 무엇인가?”를 계속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몇 시간이 지나고, 하루, 이틀 그렇게 자연스럽게 의문 덩어리가 되어 갔습니다. 하루 일과도 법당과 마당 청소를 간단히 하고는 앉기 시작해서 밥 얻어먹으면 또 앉고 그러다가 밤을 새는 날도 있고, 용맹정진한다는 생각없이 할 때는 밥 한, 두 끼 넘기기도 하고 그렇게 열심히 했습니다. 화두는 아니지만, 거기에 빠져 한 달, 두 달이 후딱 지나고 몇 달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주 고요하고 맑은 경계를 체험하게 되었는데, 그때 “아! 이것이구나!” 하는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어요. 그런 체험을 하고는 인생에서 이 이상의 답은 없겠다. 그런 신념이 섰어요. 마냥 앉아 있어도 몸이 아프거나 싫다든가 하는 것이 전혀 없었어요. 믿기 어렵겠지만, 가까운 곳에 마을이 있었는데도 1년 동안 마을에 한 번도 내려가 보지 않았어요. 그만큼 몰두 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선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공부를 했지만, 그때가 좋은 시절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다 얼마 뒤에 노장님이 돌아가셨어요. 어느 날 한 객스님이 지나다 “어디 가서 정식으로 수계를 하십시오”하는 거예요. 그래서 노장님도 돌아가시고 귀의처가 없게 되었으니 이렇게 해서는 안되겠다 싶어 어떻게 하면 좋은지 물으니 순천 송광사로 가라 하데요. 그래서 송광사로 갔습니다. 송광사에 가니 그제사 고향 생각도 나고 집 생각, 부모 생각이 나기 시작해요. 양심에 가책도 심하게 생겨요. “아차, 내가 이래서는 안 된다. 출가하더라도 당당하고 떳떳하게 해야겠다” 그런 생각이 떠올라 고향집으로 갔습니다. 집에 가니 부모님들이 허락을 하지 않아요. 막무가내예요. 내가 장남이었거든요. 온실 안에 화초처럼 곱게 자랐습니다. 나는 중학생 때까지 집을 떠난 적이 없었어요. 내 손으로 뭘 사먹어 본 적도 없어요. 고등학생 때 하숙한 것이 처음 집을 떠난 때였어요. 그러니 허락은 어림 없었죠. 그래서 3개월 후에 뭘 써놓고 몰래 나왔어요. 집에서도 잡을 수 없다는 것은 알고 계셨어요. 그리고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깊은 도량이라는 오대산 상원사로 찾아 갔습니다. 은사 희섭스님이 계셨는데 “공부하러 왔습니다”하니 행자실로 안내해서 거기서 다시 행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 노스님이 되시는 보문스님 이야기를 좀 들려주십시오. 오대산의 대표적인 선승이라고 들었고, ’47년 봉암사 결사에도 초기 멤버로 같이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후 대구에서 교화하시다 입적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보문(普門)스님은 서른 살에 출가하여 쉰에 입적하셨습니다. 저는 직접 뵙지는 못했지요. 그런데 선방을 다니면서 그 연배의 스님들 말씀을 들어보니 청풍납자(淸風衲子)의 표상이라 해요. 또 노스님이 50년대 말에 대구 보현사에 1년 6개월 정도 사셨는데 그때 신도님들이 노스님 제사가 되면 탁발해서 모실 정도로 존경심이 대단했어요. 사람이 잘 살았느냐, 못살았느냐는 죽고 난 다음 평이 정확하다고 하지요. 보문스님은 선지(禪旨)가 밝았고, 계행(戒行)이 청정했답니다. “털어도 먼지 하나 나오지 않을 스님이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으니 누가 감히 뭐라 하질 못했답니다. 저의 은사스님 말씀으로는 한암스님 회상에서 행자 때 한 철 용맹정진을 하다가 겨울에 변소를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견처가 열렸다고 하더군요. 한암스님께서 “선지가 열렸다”고 칭찬하며 좋아하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또 스님은 두타행을 하셨답니다. 일년 내내 누더기 한 벌로 지내셨고, 꼭 탁발해서 먹을 것을 조달했습니다. 대구에서 탁발을 나가실 때면 주로 시장을 도셨는데, 가사 장삼을 수하시고 왼 손에 발우, 오른 손에 요령을 잡으시고 반야심경을 염송하고 지나가면 가게 상인들이 나와 발우에 돈을 넣어 주었답니다. 그러다 바람이 불어 발우에 담긴 종이돈이 날리면 거지들이 쫓아와 주워갔답니다. 그렇게 몇 골목을 돌아 돈이 모이면 쌀을 사서 절로 돌아 왔는데 여유가 있으면 거지들에게 고루 나눠줬고요. 입적하실 때는 초파일 무렵이었는데 상좌를 불러서 “사흘 뒤에 갈 터이니 아홉 구멍을 막고 시신을 윗목에 덮어 놓았다가 초파일을 마치고 다비를 하거라”고 하시어 사월 육일 입적하시고 초파일을 마치고 사월 구일날 동화사에서 다비를 하였답니다. - 보문스님 일대기를 정리하셨다고요. 그게 쉬운 일이 아닌데 노스님에 대한 간절한 마음 때문에 그러신 모양이죠? 많은 분들이 노스님을 청풍납자의 표상이라는 말을 하시어 후학들에게 귀감이 될 분이라는 생각에 일대기를 한 번 정리해보려고 인연있는 분들을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자료는 꽤 모았는데 결정적으로 오도송이나 법문, 법거량 자료가 없어요. 선사이셨는데 이런 게 아무리 찾아도 구할 수 없어서 마무리를 못하고 있습니다. - 도봉산 망월사 선원, 지리산 칠불사 운상선원에서 선원장을 맡기도 하시는 등 출가하시어 스무 해가 넘게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상원사, 묘관음사 등 전국 선방에서 정진하신 걸로 압니다. 이처럼 출가하시어 선에만 뜻을 두고 정진하신 인연을 좀 들려주시죠. 첫 안거를 향곡스님이 계시던 월래 묘관음사 선원에서 났습니다. 그때 입적하신 휴암스님이 같이 한 철 살았어요. 아주 열심히 하셨어요. 다음 철에 도견스님, 근일스님을 모시고 살았죠. 그런데 나는 정작 결제 중에는 별 이익이 없었어요. 오히려 산철에 혼자 공부하는 게 훨씬 잘되었습니다. 산철에도 어디 가지 않고 계속 정진했어요. 그리고 수원 용주사, 상원사, 망월사, 해인사, 통도사, 극락암, 송광사, 칠불사, 봉암사 등등 웬만한 선원은 다 살아봤죠. 나는 도봉산 망월사가 정진하기에 좋았습니다. 특히 칠성각이 양명하고 힘이 나오데요. 땅이 마사토라 그런지 아주 좋았어요. 칠불사도 좋았습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대중 선원에서 공부할 때는 결제 중에 대중이 많으니 규칙을 지키고 대중 분위기도 살피면서 공부해야 하지요. 이것이 정진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방해가 될 때도 있습니다. 한, 두 끼 굶어도 공부를 밀어붙이고 싶은 때나 좀 쉬고 싶은 때는 대중 선원에서는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대중 선원은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있습니다.
강릉 토굴의 노스님을 친견한 이야기 입산한 지 한 5년 정도가 되니 공부가 정체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 대중 선원에서는 별이익이 없는 것 같아서 “잘 사는 노장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강릉 대관령 부근 토굴로 찾아 갔습니다. 그 노장님은 60대 중반으로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분이었습니다. 한글로 겨우 이름 석자나 쓸 정도였고, 경전이나 어록을 볼 줄은 몰랐어요. 그런데 어쩌다 한 마디 던지는 말씀은 정곡을 찔렀습니다. 하루 종일 하시는 일이라고는 밭에 나가 농사짓고, 나무하셨어요. 나는 공양짓고 빨래하고 청소하였고, 저녁에 앉아서 정진을 같이 했습니다. 잠은 3~4 시간 정도밖에 자지 않았어요. 그런데 하루는 저녁에 정진하시다가 무릎을 탁 치시며, “아이쿠 큰일났네, 다 타내 다 타!”그러시면서 혀를 차셔요. 왜 그러시냐고 물으니 40리 아래 마을에 노스님을 잘 모시는 40대 부부가 살고 있는데 그 집에 불이나 타고 있다는 거예요.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그 집으로 쏜살같이 달려갔어요. 가니까 1시간 전에 불이 나서 거의 다 탔어요. 그때가 12시쯤 되었어요. 돌아오니 노장님이 “어서 오게” 어디 어디에 불이 났지, 하시며 현장을 중계라도 하듯이 구체적으로 말씀하셔요. 나는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은 기분이었어요. 다음 날 노장님을 모시고 가서 불난 집을 둘러 봤어요. 그 노장님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더군요. 얼마 뒤에는 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손님이 좀 많이 올 걸세. 한 열다섯 명분 밥을 하게” 하셔요. 그 전날 밥을 좀 많이 해놓았어요. 그래도 몰라 새로 여유있게 해놓았더니 열 세 분이 와서 열 다섯 명이 딱 맞게 밥을 먹었습니다. 그런 일 이후로는 노장님이 대단한 분으로 보이데요. 신심이 더 났어요. 그 후 6개월 정도 더 살다가 충청도에 볼 일 보러 가신다고 나가시더니 오시지 않았어요. 2개월 정도 기다려도 오지 않아 마침 오대산 북대가 비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오대산으로 갔습니다. 오대산 북대로 가서 1년 6개월 정도 혼자서 정진을 했습니다. 그때 혼자지만, 좀 잘 살았던 것 같아요. 노장님을 모시고 살면서 그런 광경을 보고 신심도 났고요. 북대에는 나무로 지은 집이었는데 방에 부엌이 달린 집이었어요. 그래서 가능하면 토굴을 나가지 말자. 세수나 삭발, 옷갈아 입는 것도 신경 쓰지 말고 공부를 해보자 해서 앉아서 하다가 졸음이 오면 방 안에 나무 의자 하나 두고, 천장에 로프를 만들어 졸음이 오면 의자에 앉아서 정진하다가 다시 또 졸음이 오면 일어서서 로프를 목에 걸고 정진했습니다. 나중에 힘이 들면 다시 앉아서 로프를 목에 걸고 하고, 밥은 매일하는 게 아니라 겨울 같은 때는 10일에서 15일치를 한꺼번에 해서 뒷방에 놓아두면 얼어요. 그것을 추운 곳이라 하루에도 몇 번 불을 지피니 데워서 김치하고 해서 먹었어요. 나중에 쌀과 보리쌀이 떨어져서 강냉이만 먹었고, 김치가 떨어져서 된장, 간장만 먹고 그것도 떨어져 소금에 찍어 먹었습니다. 세수는 물론이고 삭발, 방 청소도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식기도 한 번도 안 씻었어요. 북대에서 내려 올 때는 거지 중에 상거지였어요. 북대에 거지중이 산다고 했답니다. 강릉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는데 주인이 “나는 스님처럼 때가 많은 사람은 못보았다”고 할 정도였어요. 일체의 가식, 형식을 따지지 말고 정진만 하자. 그렇게 해서 혼자이지만, 잘 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출가하시어 일념으로 화두 참구를 하셨는데 화두는 누구에게 무엇을 받으셨는지요? 화두는 수계 전에 노장님께 받은 “자네가 무엇인가?”가 자연스럽게 “이뭣꼬?” 화두가 되어 그걸 계속 참구했어요.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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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