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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병영성마을에는 네덜란드가 숨어 있다. 돌담을 보러 가지만 네덜란드 사람 하멜 일행이 쌓았다는 하멜식 돌담이 전시되어 있고, 그 흔한 튤립이랑 풍차까지 시골마을에 전시되어 있다. 돌담길 끝자락에 위치한 하멜기념관에는 네덜란드와 수교라도 맺은 마을인 듯 착각을 할 정도다. 아이들 유모차를 지팡이 삼은 이 마을 할머니를 붙잡고 하멜이라는 이름을 아는지 실없이 묻고싶었지만 할머니 한 분 저만치서 골목을 꺾어 들어가버리고 아무도 없다. 마을은 누군가를 받아들이기에 지나치게 고요했지만, 돌담길은 묵묵히 제 역할을 하는 듯 보였다. 누구나에게 알려진 유적지나 관광지에서 살짝 비껴선 느낌의 시골마을 흔한 골목길. 그 마을 옛담장을 거닐어 보는 것이다.
하멜기념관을 알리는 팻말 한번 멋스럽다. 요즘 말로 빈티지라는 것, 아무나 하는 것 아니라는 듯 실제로 낡아빠진 원판을 선보이고 서있다. 그 누가 빈티지를 아름답게 알렸을까, 여기 와서 갑자기 궁금해진다. 낡은 스타일을 지칭하는 빈티지는 구식의 남루함과 초라한 개성을 아우르면서도 빈곤과 여유를 상징한다. 나이듦에서 우러나는 아름다운 빈티지가 있을 것이다. 가난하지 않은 내면에서 우러나는 선택적 빈티지는 초라함을 이기듯 고급스러움을 넘어선다. 빈티지풍이 아닌 진정한 빈티지 안내판 앞에서 복구할 일손이 부족한 시골마을의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함도 만나지만, 적당히 낡은 그것이 왠지 아름답기만 하다.
돌담길은 한골목길이라 불렀다. 하나의 길이 길게 이어져 길이대로 걷다 보면 큰길이 나오는 식이었다.
"한골목은 835번 지방도와 동쪽 도로의 병영천 사이에 위치한다. 성남리 118번지 앞에서 지로리 회관 앞까지 약 1.5km의 골목을 가리키며, 골목이 크고 길다 하여 ‘한골목’이라 불렀다. 한골목은 병영성이 설영된 후 촌락이 형성되면서 만들어졌다. 특히 한골목은 병마절도사가 수인산성을 순시할 때 통행하던 길이었는데, 이 길의 담장이 높이 쌓아졌던 것은 병사들이 주로 말을 타고 이 길을 다니므로 집안이 다 보여 이를 가리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골목의 담장은 황토와 돌을 이용하여 빗살무늬 방식으로 쌓아 다른 지역과 비교되는 이색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마을 사람들은 일명 ‘하멜식 돌담’이라 하여 하멜 관련 유적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농촌 개발이 확산됨에 따라 돌담이 훼손되고 점차 한골목의 원형이 파괴되는 것을 우려하여, 한골목은 2006년에 등록문화재 264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곡선을 이루며 길게 펼쳐진 한골목 길을 산책하다보면 고즈넉한 옛 정취에 흠뻑 젖을 수 있을 것이다." <출처: 강진문화관광홈페이지>
하멜식 담장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빗살무늬식 쌓기. 이것이 하멜의 나라 네덜란드식이라는 것이 신기하게 여겨진다. 이 오래된 구수함의 멋을 나는 늘 고파했다. 남들에겐 하잘 것 없는 돌담길일지 모르나 나는 우리나라 돌담길이란 돌담길을 모조리 둘러보고 싶은 바람을 가지고 있다. 가까이에는 내 고장의 돌담길부터 인근의 남사마을 돌담길, 남편을 졸라 고향의 돌담마을이라는 화전마을 돌담까지 굳이 둘러보고 와야 했다. 뿐이랴,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산다는 부여 반교리 돌담길을 문학기행 답사를 빙자하여 굳이 찾아가서는 휴휴당까지 기어이 담아온 적 있었다. 그러나 설마 그 뿐이겠나. 나는 집중력이라기엔 과도하고, 암튼 해석할 수 없는 기행에 가깝게 직접 돌담을 쌓은 적 있는데, 밤 깊은 12시를 넘길 때까지 혼자 그 일(돌담 쌓기)을 했던, 돌담쌓기 유경험자이다. 어머니 말씀처럼 참으로 청승맞을 정도로 돌에 미쳤던 것 같다.
그렇게 내 돌담사랑은 유별날 정도였는데, 내가 하고도 기인처럼 보여서 쉬이 말을 하진 않았지만 이젠 뭐 괜찮다고 생각해 버린다. 아직도 어느 마을의 돌담길을 찾아가볼 욕심에 들뜰 때 있다. 그 시골길의 아늑함을 단란하게 걸어가는 일은 얼마나 작은 행복감을 줄까. 돌담이나 흙담이나 옛날식 담장을 보면 언제나 눈길 한번 더 가는 별난 취향이다. 옛것이라면 무조건 좋아라 하는 내게 강진 병영마을 돌담길은 특이한 구조의 하멜식이라는 이유로 다시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널리 알려진 곳보다 조금 덜 알려진 곳에서 발견할 어떤 신선함을 위하여 이 마을을 꼭 남도기행에 넣었던 것이다.
빼톨빼톨 어슷어슷, 눕히거나 세우거나, 돌과 흙이 번갈아 빚어내는 무늬들의 향연에 햇살도 덤으로 기웃거린다.
딱딱한 돌이 이루는 곡선의 물결, 아름답지 않은가. 어쩌면 소박한 풍경이겠지만 이런 풍경에 언제나 끌리며 산다. 전생에 시골을 벗어나지 못했을 너무도 뚜렷한 증거.
담 안에는 감나무가 푸르러 가고 가을이면 담쟁이도 빨갛게 줄을 타겠다. 어쩌면 시골마을 빈집이야말로 돌담의 가장 흔한 풍경일지도 모르겠다.
이 마을에서 웬만한 건 나이라 할 수 없을 것 같다. 골목 끝자락엔 100년이 넘은 병영교회가 자리하고 있었다. 교회 옆 돌담건물도, 오래됨을 기억하는 종탑도 어딘지 애처롭게 보였다.
넉넉치 않은 시간에 쫓겨 그토록 거닐고 싶던 골목길을 서둘러 걸어나오니 높다란 은행나무가 창공을 향해 솟아있다.
"은행나무는 수령이 800여 년으로 추정되며 높이 30m, 둘레 6,75m 크기로 나무의 모양이 곧고 아름다워 천연기념물 제385호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은행나무로부터 약 500m 거리에는 조선 500년 역사의 산물인 전라병영성이 있으며, 병영성 동문 밖 은행나무 근처에서 하멜이 강진에 유배되어 7년간(1656~1663)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어 그 역사적 의미가 크다. 하멜은 병영에서 사는 동안 이 나무 아래에서 떠나온 고국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리고 은행나무 주변 마을에는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이 곳곳에 있어, 이 일대의 유구한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은행나무는 수령이 오래되고 신령스러운 면모를 지니고 있어 신이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병마절도사가 폭풍으로 부러진 은행나무 가지를 목침으로 만들어 사용하다가 병이 들어 치료했지만 소용없었다 한다. 어떤 노인이 은행나무에 목침을 붙여주고 제사지내면 병을 고칠 수 있다 하여 그렇게 하였더니 완전히 치유되었다고 한다. 이후로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2월 15일 자정에 마을의 안정과 평안을 위해 제사지내는 풍습이 생겨 지금까지 행해지고 있다." <은행나무 안내문구>
내가 가보고 싶어 이곳을 가자 했지만, 내 돌담사랑을 알 리 없는 버스 기사님은 하필 나를 붙잡고 말았다. 속으로 애가 탔지만, 저녁식사 장소를 변경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이야기는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상황이 코믹스러웠지만 흘러가는 시간 앞에선 울 것만 같았다. 뒤늦게야 이야기가 끝날 기미가 보이자 나는 그야말로 내달렸다. 제대로 체감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셔터만 누르며 따라 가니 땀도 나고 그만큼 소중함이 더했던 것도 있었다. 먼저 간 일행들은 여유있게 돌담을 둘러보았을까, 사진은 잘 담았을까, 혼자 궁리가 많았지만 뜻대로 누릴 수는 없었다. 골목길을 차례대로 다 누비며 제대로 된 구도로 좀 더 정교하게 찍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어 아쉬움 가득했다. 이번 병영마을 사진은 내가 달려온 그야말로 겉핥기식 답사가 되고 말았지만, 하루에 강진의 네 곳을 답사한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했다.
병영마을 속 네덜란드를 말해주고 있는 강진하멜풍차. 안으로 들어가보고 싶었으나 문이 잠겨 있었다.
강진의 병영마을은 그 역사성이 생각보다 깊다. 옛 병마절도사의 영이란 명칭에서 비롯된 마을은 일찌감치 상권이 발달하여 전라도 일대 중요한 경제요충지였다고 한다. 일개 시골 면단위 마을에 마을 유지들의 강력 권고로 상고가 있었을 정도였다고 하며 개성상인이나 의주상인처럼 귀에 익지는 않지만, 전라도 일대 상권을 형성할 만큼 큰 상단을 형성한 것으로 전하였다. 마을에는 사적 제397호로 지정된 성지가 있는데, 병영성 마을의 역사를 증언한다 하겠다.
지금 병영성마을 성곽은 2020년 완공을 목료로 보수공사를 시행하며 그 옛날의 명성을 복원중이다.
시간이 늦었지만 '하멜기념관'을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일행들이 버스가 기다리는 곳으로 떠나는 걸 보면서 부랴부랴 뛰어들어간 곳. 그곳이 입장료 없이 맞아 준 고마움 덕분에 급히 사진이나마 찍어올 수 있었다.
하멜 표류기
"〈난선제주도난파기〉라고도 한다. 하멜은 포수 출신 선원으로 이 배의 서기(書記)였다. 원래는 인도총독과 평의원에게 올리는 보고서로, 1668년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되었다. 출판시 여러 장의 삽화도 곁들였으나 조선의 풍경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하멜 일행은 타이완[臺灣]에서 일본으로 가던 도중 폭풍우를 만나 36명이 제주도에 난파했는데 이후 서울로 압송되었다.
조선은 이들의 표류사실을 비밀에 붙이고 훈련도감의 포수로 임명하여 살도록 했다. 이들은 앞서 표류하여 조선에 거주하고 있던 네덜란드인 벨테브레(한국 명은 朴燕)을 만났는데, 그가 이들의 대장이 되었다. 이들은 훈련도감의 봉급으로 생활했으나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워 배에 있던 녹비[鹿皮] 일부를 환급받아 이것으로 오두막과 의복 등을 마련했다고 한다. 1655년 이들은 청나라 사신의 행렬에 뛰어들어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 구원을 호소했으나 실패했으며, 이 일로 하멜 일행은 서울에서 추방되어 전라도 병영으로 이속되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서울에서보다 더욱 고통스러웠던 것 같은데, 부임하는 병사에 따라 대우가 달라졌다. 자상하게 보살펴준 사람도 있는 반면, 가혹한 경우는 쌀만 지급하고 일체의 외출을 금지하기도 했다. 때로는 군사훈련을 받거나 풀뽑기 같은 병영의 막일에 시달리며 생활했는데, 흉년에는 구걸을 하거나 승려들의 도움을 받아 살기도 했다. 특히 승려들은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즐겼는데, 이들을 통해 민간에 서양 세계가 상당히 소개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뒤 여수의 전라좌수영과 순천·남원 등지에 분산·배치되었다.
1666년 생존자 16명 중 8명이 그동안 사귀어온 한 조선인에게서 배를 구입해 일본으로 탈출했다. 이들로부터 조선에 잔류자가 있음을 알게 된 네덜란드의 요청으로 2년 후에 남은 일행도 일본으로 송환되었다. 처음과 끝부분이 자세하다. 중간에 조선의 군사·형제(刑制)·관료제·가옥·교육·산물·상업 등에 관한 간단한 기술이 있으며, 맨 마지막에 조선으로 가는 항로가 기술되어 있다. 한국을 서방에 소개한 최초의 책으로 유명하며 유럽 각국어로 번역되었다." <백과사전 인용>
실내로 들어가서는 의외의 기록들에 놀라움을 느꼈다. 조선과 네덜란드의 공통점을 본 것 같은 놀라움도 있었고, 내가 좋아하는 베르메르의 그림과 델프트 풍경들까지.... 실로 강진은 한국과 네덜란드를 이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우선 들어가는 입구의 벽면에 적힌 내용은 역시 그들의 넋을 위로하는 추모의 글귀였다.
"1653년 8월 어느 날 이국 만리 낯선 조선 땅. 뜻하지 않은 파고를 만나 유명을 달리한 이름 모를 스페르베르호 선원 48명의 넋을 위로하며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무사히 귀향한 선원 16인의 조선에서의 삶을 기립니다."
이런 글귀도 있었다. ".....병마절도사는 우리에게 한 달에 두 번씩 군청 앞의 광장과 장터의 풀도 뽑고 청소도 하라고 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하멜표류기 속 내용인 것이다. 하멜표류기는 서양에 우리나라를 최초로 알린 책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이 무슨 대단한 기록의 정신으로 쓴 것은 아니고, 억류되었을 당시에 밀린 임금을 받아내기 위한 일종의 임금청구서 형식이었다고 한다. 이때 돌담쌓기 방식이 전수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사진으로 급하게 담아서인지 정렬되지 못할만큼 형편없게 찍히고 말았다. 지금부터의 글들은 사진 자료 속 문구를 그대로 옮겨 적은 것으로 쓰면서 배우는 마음으로 옮겨 적었다. 순서없이 그대로 옮겨 적어서 중복된 감이 없지 않지만 조금씩 다른 것도 있어 그대로 싣는다.
하멜이 표류할 무렵 조선의 국내외 정세
하멜이 제주도에 표류한 17세기 동아시아는 격동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조선과 명나라는 임진왜란으로 혼란스러웠고 만주에서는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가 세운 후금이 명나라를 위협하고 있었다. 후금과 명나라가 충돌했을 때 조선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자 했다. 이에 후금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청나라를 건국한 후 조선으로 쳐들어와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을 일으켰다. 이 전란의 와중에 북경에 볼모로 잡혀갔던 효종(봉림대군)은 청나라를 치기 위한 북벌정책을 계획했다.
한편 일본은 1609년 네덜란드와 무역통상이 이루어져 네덜란드의 서양과학과 기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청나라 역시 서양의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의 정치가들은 이러한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사실상 외국과 통상교류의 문들 닫아버리고 말았다. 서양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과 중국은 순조롭게 근대의 시기로 접어들었던 반면, 조선은 근대화의 길에 그만큼 늦게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난파선 도둑에 대한 처벌
"....도둑들에게 물건을 등에 지게 하고는 우리 앞에서 그들을 처벌했다.
각각의 몸에는 두꺼운 널빤지가 씌워지고 한 손에는 칼에 연결된 수갑이 채워지고 목에는 사슬이 둘러졌다...." <하멜표류기 중에서>
17세기 제주도의 사회상
조선시대 제주도는 군사, 경제, 정치상 중요한 지역이었다.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데다가 일본과 중국을 오가는 뱃길에 표류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곳이었다. 국가에 말, 해산물, 약재 등의 특산물을 진상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제주도는 국가의 죄인을 유배시키는 유배지였다. 하멜일행이 표류한 조선 중기 무렵 제주도에서는 식량부족으로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었다. 하멜 일행이 서울로 이송된 것도 당시 제주도의 기근이 매우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난파 경위와 제주도 생활기
1653년 7월 타이완을 떠나 일본 나가사키로 떠나던 하멜 일행은 태풍을 만나 8월에 선원 중 36명이 제주도에 표착하였다. 당시 제주목사인 이원진의 주재로 조선 조정에서 보낸 네덜란드 출산 얀 얀스 벨테브레(우리나라 이름은 박연)를 만날 수 있었다. 하멜 일행은 외출 금지 같은 힘든 생활로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탈출은 곧 발각되었고, 밤낮으로 병사들의 삼엄한 감시를 받아야 했다. 1654년 6월 서울로 이송될 때까지 약 10개월동안 제주도에 머물렀다.
벨테브레(박연)와 하멜의 만남
제주도에 표착한 하멜 일행은 조정에서 보낸 네덜란드인 벨테브레(박연)을 만나게 되었다. 벨테브레는 하멜 일행이 표착되기 26년 전 조선에 정착한 사람이었다. 그는 1627년 우베르케르크호를 타고 일본으로 가다가 역풍 때문에 배가 조선 해안으로 밀리게 되자, 식수를 얻기 위해 해안에 상륙했다가 동료 2명과 함께 주민에 붙잡혔다. 그뒤 이들은 조선에 정착했고, 그중 벨테브레는 효종의 북벌정책에 따라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무기를 개발, 제작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다. 하멜 일행은 조정에서 온 벨테브레와 함께 마침내 서울로 이송되었다.
하멜기념관에서 만난 베르메르라니.... 물론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화가들을 수록할 것이고, 특히 델프트 풍경이라는 세계 최고의 풍경화로 알려진 화가인 만큼 그의 그림속을 여행하는 것이 당연하기도 할 것이다. 이어서 자료 속 글들을 그대로 옮겨 본다.
뛰어난 미술 거장들의 탄생
17세기 네덜란드는 경제의 발달로 인해 문화와 예술 분야에서도 크게 융성하였다. 특히 미술분야에서 렘브란트 반 레인, 프란츠 할스, 오하네스 얀 베르메르, 얀 반 호이엔, 야콥 반 로이스달 같은 거장들이 활약했다. 네덜란드의 화가들은 당시 독립을 이끈 시민들의 자랑스러운 모습과 일상생활, 고난 속에서 확보한 대지의 풍경, 그리고 생활 속의 아름다운 꽃과 식탁 등 새로운 주제의 그림을 그렸다. 이러한 새로운 네덜란드의 풍경화, 정물화, 풍속화는 서양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고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불멸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와 현대미술의 거장 피트 몬드리안도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이다.
델프트 도자기의 발전과 영향
델프트는 로테르담과 헤이그 사이에 위치한 작은 도시로, 16세기 말 이탈리아 도공들이 이주해 오면서 도자기 산업이 융성하였다. 델프트 도공들은 동인도회사가 들여온 중국의 징더전 도자기와 일본의 아리타 도자기에 매료된 유럽인들을 위해 흰색 바탕에 푸르고 섬세한 선, 모란 무늬나 넝쿨무늬(당초문) 같은 동양적인 문양, 그리고 다채로운 색채 등을 모방한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점차 왕실의 후원을 받으면서 델프트는 특유의 유럽풍 도자기를 생산하여 대규모 도자기 산업단지로 발전하였다. 오늘날 델프트 도자기는 네덜란드의 대표적 특산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일본의 아리타 지방은 동인도회사의 거점이 있던 나가사키 근처의 도시이다. 아리타는 임진왜란 때 잡혀간 조선의도공들이 정착한 곳이기도 하다. 그떄 잡혀간 이삼평은 일본식 청화백자인 아리타 도자기를 생산하여 일본 도자기의 시조로 모셔지고 있다. 이처럼 17세기 네덜란드 델프트 도자기의 발전에는 조선 도자기와 연관이 있다.
청화백자의 유행
청화백자는 순백색 바탕 위에 청색물감인 코발트 안료로 문양을 표현한 아름다운 도자기이다. 청화백자는 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 초 중국 원대의 징더전 가마에서 완성되었다. 징더전 가마는 명대, 청대에까지 계승되어 세계 최고수준의 도자기가 이후 지속적으로 이곳에서 생산되었다. 조선에서도 15세기 이후에 청화백자가 발달하기 시작하였고, 일본에서는 16~17세기에 청화백자를 제작하였다. 또한 징더전 가마의 청화백자는 17세기 이후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상선을 통해 서아시아와 서유럽으로 수출되었고, 유럽인들은 이국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청화백자에 매료되었다. 유럽에서도 이를 배워 청화백자를 제작하게 되었는데, 초기에는 동양적인 문양을 모방하여 제작하다가 18세기 이후에는 유럽화된 기형과 문양의 청화백자를 다량 생산하였다.
동인도회사의 설립과 활동
1602년 네덜란드 의회는 나라 안의 여러 회사들을 통합하여 동인도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국가로부터 1799년까지 약 200년동안 아프리카 희망봉에서 마젤란 해협에 이르는 지역에서 독점적인 무역과 화폐 주조 등의 권한을 부여받았다. 동인도회사의 본부는 인도네시아 자바 섬 서쪽 바타비아(자카르타)에 설치되었다. 당시 동인도회사는 단순히 유럽 상품을 아시아에 파는 것뿐만 아니라 아시아 안에서도 인기상품을 여러 단계를 거쳐 되파는 과정을 통해 이익을 챙겼다. 또한 유럽에는 동양의 향신료를 가져다 팔아 막대한 이익을 올렸다. 동인도회사는 이러한 무역 교류를 통해 아시아와 유럽의 문화교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중국과 일본의 청화백자를 유럽에 소개하여 유럽의 청화백자 자체생산의 계기를 마련하였고, 아시아에 유럽의 미술작품들을 전하여 서양의 원근법과 투시도법 등의 미술기법을 동양에 전하기도 하였다.
상업과 금융자본의 발달
16세기에 들어 네덜란드 상업이 크게 발달하면서 17세기 초에는 세계에서 최초로 주식회사, 주식시장, 그리고 은행이 설립되었다. 암스테르담에는 세계 최초의 주식거래소가 설립되었고, 1609년에는 최초의 은행인 암스테르담 은행이 설립되었다. 이를 배경으로 엄청난 자금을 확보한 동인도회사는 동남아시아는 물론, 중국, 일본, 나아가 뉴질랜드, 남아메리카, 브라질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의 해상무역을 독점하였다. 17세기 중엽 동인도회사의 무역 거래 금액이 세계 무역 총액의 절반을 넘을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다. 막대한 부를 축적한 17세기는 문화예술 측면에서도 네덜란드의 황금시대였다.
이미 약속된 시간인 오후 5시 30분이 넘어서고 있었지만, 나는 조급한 마음 담아 뛰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내가 걷는 길로 버스가 돌아나올 것 같았지만, 참고 뛰기로 하였다. 우선 그 지리가 애매하였고, 나머지 사람들이 천천히 걷는다면 늦지 않게 도착할 듯도 싶었다. 무엇보다 나 하나를 위해 버스를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골목길로 들지 않고 큰 길로 달렸다. 돌담길로 들어서면 다시 내 욕심이 늑장을 부추길 것 같으면서도, 혹시나 새로운 골목길을 볼까 하는 이중적인 마음이 있었다. 들판이 눈에 들어왔고 마을길에는 머물러 바라보고 싶은 옛날의 이발소 풍 가게들도 더러 있었지만, 그 모든 것 참고 뛰었다. 내가 늦게 출발한 것을 감안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가다가 들판 가득 핀 자운영들이 서산머리 따가운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뛰어가던 내 땀도 그때 몹시 반짝이고 있었을 것이다. 벌써 여름이 시작된 것처럼..... 돌아도 돌아도 큰길이 이어지더니 마침내 나를 기다리는 버스가 서 있었다. 빈혈이 일 것 같았지만 그리 늦지 않게(고지식하게) 도착했으니, 그만하면 되었다.
이것으로 감성충만했던 강진의 하룻길을 마칠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