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의 큰집이라 일컫는 봉화 축서사 부석사를 나와 식당에서 점심 공양을 하면서 식당 주인아주머님께 이 지역에서 부석사 다음으로 가장 많이 다니는 사찰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축서사라 한다. 축서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하기 전에 지은 초암사, 비로사, 성혈사, 흑석사와 더불어 5부석으로 알려진 사찰 중 하나인 사찰로만 알고 있었는데 내려온 김에 일정을 바꾸어 먼저 들려보기로 했다.
@축서사는 경북 봉화군 물야면 개단리 1번지 문수산(文殊山, 해발 800m) 기슭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제 16교구 본사(本寺)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末寺)다. 축서사의 홈피에 의하면 『신라 제 30대 문무왕 13년(서기673년)에 의상조사가 창건한 절로서 문수산 아래 지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절의 스님이 어느날 밤 지금의 개단 초등학교 앞산을 바라보니 휘황찬란한 빛이 발산되고 있어 광체가 나는 곳으로 달러갔더니 한 동자가 아주 잘 조성된 불상앞에서 절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동자는 청량산 문수보살이라고 하며 구름을 타고 사라져 버리자 불상만 남았다. 훗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의상대사가 불상을 모실 곳을 찾아 다니다가 현 대웅전 터에 법당을 짓고 불상을 모시니 이것이 축서사의 창건이다. 이때 산 이름도 문수보살이 출현 하였다해서 문수산이라 하며, 축서사를 창건 후 3년 뒤에 의상대사가 축서사에서 40여리 떨어진 봉황산 중턱에 세운 사찰이 동국화엄제일도량인 부석사이다. 흔히 축서사를 부석사의 큰집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
축서사는 867년(경문왕 7)에 부처님 사리 10과를 얻어 부처님 사리탑을 조성했고, 참선 수행 도량으로서 명맥을 이어오다가, 1705년(숙종 31) 중건했다. 대웅전 상량문에 의하면 이 절은 광서(光緖)7년(서기 1875년)에만 해도 대웅전, 보광전, 약사전, 선승당, 동별당, 서별당, 청련당, 백화당, 범종각등 여러 동의 건물이 있었고, 산내 암자만도 상대, 도솔암, 천수암등 세 개나 되었고 대중이 44명이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조 말기 을사보호조약(서기1905년)과 정미7조약(서기1907년)으로 왜구의 속국화되는 것을 분개하여 전국적으로 의병이 무장봉기하여 항일투쟁할 때 이 곳에도 일본군이 의병을 토벌하기 위한 작전으로 방화하여 대웅전 1동만 남기고 전소시켰다.
축서사의 자랑은 보탑성전과 장엄한 위용을 뽐내는 부처님 사리 112과를 모신 사리탑이다. 현재 전각들은 대웅전을 비롯하여 1994년 무여스님이 발원으로 건립된 것으로 보광전, 법종각과 안양원, 심검당, 요차채 등 17개에 달하는 전각과 요사채가 있으며 석조아미타삼존불 조성 등 불사가 이어지고 있다. 유물로는 보물 제995호인 봉화축서사석불좌상부광배, 보물제 1379호인 축서사괘불탱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58호인 석등과 제157호인 삼층석탑 등이 있다.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창건 당시의 것으로 대웅전 안에 봉안되어 있다가 지금은 보광전으로 옮겨 봉안되어 있다. 석등은 신라 말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원래는 대웅전 앞에 있었던 것을 함께 보광전 앞으로 옮겨 놓았다. 보탑성전 지형을 이용한 계단식에 석조 기둥을 올리고 그 위에 2층으로 지은 전각으로, 대웅전을 마주한 전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식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보탑성전은 사리탑과 대웅전을 마주하고 후면을 전부 유리로 장식하였다. 전면 편액의 <寶塔聖殿>은 월정 김주상(月汀 金周相)선생의 글씨이고, 후면편액 보타성전은 영주 출신의 서예가 삼여제(三餘齊) 김태균 선생의 글씨라고 한다. <보탑성전 주련> 摩訶大法王 마하대법왕 無短亦無長 무단역무장 本來非皂白 본래비조백 隨處現靑黃 수처현청황 크고 위대하신 진리의 왕(부처님)이시여 짧은 것도 아니며 긴 것도 아니고 본래 희거나 검지도 않으며 곳에 따라 푸르고 노랗게 나타나시네. 축서사사리탑 축서사의 심불로 보이는 이 탑은 불기 2549(2005)년 9월 20일에 낙성된 것으로 축서사 대웅전 계단 아래 심검당과 선열당 사이에 있다. 탑 모양은 5층 아(亞)자형 한옥식 석탑이고, 기단 길이는 7.3 m, 높이는 15.5m이다. 조성자는 충청남도 논산시 광성면 왕전리 자광불교연구소 김광열씨의 작품이라고 한다. 이 탑에는 괘불에서 발견된 적(赤) 사리 2과를 포함해 신도가 미얀마에서 구해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합쳐 총 112과가 봉안되어 있다. 괴산 공림사에도 이와 비슷한 석탑이 있는데 축서사의 사리탑은 더 정교하고 장엄하게 장식되어 있어 축서사의 상징처럼 알려져 있다. (이 그림은 참고로 석탑의 일반적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축서사 사리탑의 설명을 생략하고 대신 올려놓은 것이다.) 대웅전에서 바라 본 사리탑이다. 뒤편 전각은 보탑성전이다. <대웅전> 정면 5칸, 측면 3칸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법당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좌우에 문수와 보현보살을 협시로 봉안했다. 축서사 괘불탱화는 보물제 1739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큰 법회나 행사시에만 공개됨으로 볼 수 없었다.
<대웅전주련> 萬代輪王三界主 만대윤왕삼계주 佛身普遍十方中 불신보변시방중 廣大願雲恒不盡 광대원운항부진 三世如來一切同 삼세여래일체동 雙林示滅幾千秋 쌍림시멸기천추 汪洋覺海渺難窮 왕양각해묘난궁
만대의 전륜성왕이자 삼계의 주인이신 부처님! 부처님 몸은 보편하사 시방세계에 두루 계시네. 넓고 큰 원력의 구름은 항상 다함이 없으니. 삼세의 부처님들도 모두 이와 한가지라네. 쌍림에서 열반을 보이신 후 그 몇 천년이던가? 망망한 바다같은 깨달음은 아득하여 끝이 없네.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좌우에 문수와 보현보살을 협시불로 모셨다. 신중탱 (축서사 홈피에서 펌한 괘불탱이다.) 괘불탱이란, 사찰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을 말한다. 축서사의 이 괘불탱은 보물제 173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모시바탕에 채색을 사용해 그린 그림으로, 정면을 향한 입불상을 화면에 가득 차도록 그린 다음 광배 주위로 화불과 보살상을 배치한 독존도 형식이다. 원래는 보광전에 걸어두고 예배용으로 사용했다고 하나 지금은 대웅전에 보관 중이다. 주불은 얼굴 형태가 원만하며 사용된 색채 또한 선명하고 화려해 전반적으로 밝고 명랑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서기 1768년(영조44년) 무자년에 점안한 괘불로 크기는 가로 550m, 세로 880cm, 면적 48.4제곱미터 로 대형괘불이다. 괘불탱에 걸려있던 복장주머니에서는 후령통(1구)을 비롯해 사리(2과)와 씨앗류, 다라니(4종 4매), 괘불원문(1매) 등이 발견됐다. 그림의 아래쪽 부분에 있는 <괘불원문>은, 이 괘불탱은 조선 영조 44년(1768)에 정일스님 등 10명이 참여해 조성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대웅전 왼쪽편으로 올라가면 석조아미타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아직 불사가 마무리 되지 않은 모양이다. 아미타불마애 삼존불 축서사 무여 큰스님께서 2011년부터 발원하여 현재까지 불사 중이다. 현재까지 조성된 아미타삼존불상의 크기는 가로가 15m, 높이가 13m로 화강암으로 조성되어 있다. 둠형 안에 부조형식으로 조각되어 있으며 본존불인 아미타불을 중앙에, 왼쪽에 관세음 보살, 오른쪽에 대세지 보살을 부조하고, 그 뒤에 지장보살, 미륵보살 등 8보살과 16나한, 그리고 상단에 범천과 제석천, 하단에 사천왕등 39분이 부조되어 있다. 보광전 보광전은 옛 전각 중 화마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전각이라고 한다. 정면3칸 측면 3칸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목조광배가 봉안되어 있다. 보광전 앞에는 문화재자료 제158호인 석등이 있다.
<보광전주련> 報化非眞了妄緣 보화비진요망연 法身淸淨廣無邊 법신청정광무변 千江有水千江月 천강유수천강월 萬里無雲萬里天 만리무운만리천
보신불, 화신불은 참되지 않으니 삿된 인연이고 법신불은 청정하며 넓고 끝이 없도다. 천강에 물이 있으니 천강에 달이 비치고, 만리 하늘에 구름이 없으면 만리가 하늘이라. 석등(石燈,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158호) 석등은 높이 2.3m쯤 되는데 원래는 석탑 앞에 있었으나 지금은 보광전 앞으로 옮겼다. 귀꽃이 장식된 복련하대석(覆蓮下臺石), 간주(幹柱) 중대석, 상대석으로 구성된 대석위에 화사석(火舍石)이 옮겨져있다. 이 석등은 8각으로 등불을 밝혀주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에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아래받침돌에는 연꽃을 새겼는데, 꽃잎의 끝마다 작은 꽃조각이 달려있다. 그 위에 세운 가운데 기둥은 약간 짧은 편으로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을 이어주고 있다. 윗받침돌의 밑면에는 아래와 대칭되는 연꽃 조각을 두었다.
화사석은 네 곳에 창을 두어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했는데, 짧은 가운데 기둥에 비해 몸집이 커보여 전체적으로 무거운 느낌을 주고 있다. 심하게 부서진 지붕돌은 특별한 조각을 두지 않았고, 꼭대기에는 지붕을 축소한 듯한 머리장식을 올려놓았는데 여덟 귀퉁이마다 조그마한 꽃조각이 솟아 있다. 전체적인 구성이나 조각기법을 보아 고려시대 전기에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등을 이해하기 위한 참고자료)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목조광배 이 석불상은 부석사를 중심으로 유행하였던 9세기 비로자나불상 계통의 하나이다. 당시의 불상 특징을 잘 보여주는 대표작이며, 867년(경문왕 7)에 제작된 석탑과 동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확실한 기년명 불상으로 크게 주목되는 작품이다.
@보물 제99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불상 높이 108㎝, 대좌 높이 96㎝. 전체적으로 호분이 두껍게 칠해져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지만 석조대좌는 화강암을 그대로 두었다. 나발(螺髮)의 머리 위에 육계가 분명하지 않고 정상에 계주(髻珠)가 장식되어 있으며 얼굴에는 눈·코·입이 작고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어 인간적인 모습을 느끼게 한다. 넓은 어깨에 걸쳐진 통견(通肩)의 법의는 옷주름이 몸에 밀착되어 있는데 양쪽 팔 위에 걸쳐 결가부좌한 다리까지 평행하게 흘러내렸다. 특히 가슴 위에 U자형으로 늘어진 옷깃에 꽃무늬가 장식된 점이나 양 다리 사이의 옷주름이 물결 모양으로 표현된 점 등은 특이하다. 두 손은 가슴 앞에 모아 왼손의 둘째손가락을 오른손이 감싸고 있는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있어 비로자나불임을 알려준다.
대좌는 9세기 석불상에서 보편적으로 보이는 8각대좌로 상대·중대·하대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대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을 새기고 그 안에 사자를 1구씩 조각했으며, 중대에는 안상 안에 공양상과 합장한 보살상을 조각했다. 상대는 밑에 각형과 호형(弧形)의 낮은 굄이 받치고 있으며 윗면에는 앙련이 새겨져 있다.
목조로 된 광배는 조선시대에 후보한 것이지만 두광과 신광에 보이는 화려한 화염무늬와 연화무늬 등은 채색이 뛰어나며, 불상 바로 위에는 일체 만물의 근본, 본질을 의미하는 옴(om)이란 글자가 부조(浮彫)되어 있다. 이 불상에 나타나는 인간적인 얼굴 형태나 왜소한 체구, 계단식 옷주름 표현, 옷깃의 꽃무늬 장식 등은 거의 같은 시기에 제작된 철원의 도피안사철불좌상(865)을 비롯해 9세기 중엽에 유행했던 비로자나불좌상 계통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또한 대웅전 앞에 있는 3층석탑에서 출토된 사리합의 명문에 의해 사리기와 석탑이 867년(경문왕 7)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이 불상도 양식적 특징으로 보아 탑이 건립된 연대와 같은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범종각 편액은 石堂 김종호(1901~1985)선생의 글씨다. 심검당 안양원 보탑성전 바로 옆 수각에는 감로병을 든 관음보살상을 세웠다. 사찰을 나서면서 담아 본 보현선원이다. 주차장 바로 왼쪽에 위치하고 있다. |
출처: 현림의 소리 원문보기 글쓴이: 나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