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Pia de' Tolomei, 1868 - 1880, Oil on canvas, 41 1/4 x 47
3/8 inches (104.8 x 120.6 cm)
Spencer Museum of Art, University of Kansas,
USA>
프레라파엘리티는 1840년대 말 런던에서 시작되어 10여 년에 불과한 짧은 기간
동안 지속된,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미술운동이다. 하지만 이 운동은 활동 당시보다는 오히려 그 이후에 더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당대 최고의
사상가였던 존 러스킨이 이 운동을 적극 지지했고, 윌리엄 모리스는 이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시작으로 예술공예운동을 펼쳐나갔으며, 19세기 말에
유행한 아르누보 양식의 장식적인 꽃이나 곡선, 아름다움 여인상 역시 이 운동에서 영향받은 바 크다.
<A Sea Spell, 1877, Oil on canvas, 42 x 35 inches (106.7 x
88.9 cm)
Fogg Art Museum, Harvard University, Cambridge, Massachussetts,
USA
Bequest of Grenville L. Winthrop>
이 운동은 1848년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윌리엄 홀먼, 존 에버릿 밀레이를
중심으로 한 작가들이 런던의 고어가 83번지에 모여 ‘프레라파엘리티’라는 단체를 창립하면서 시작되었다. 프레라파엘리티는 문자상으로 ‘라파엘로
이전’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이들은 당신의 아카데미즘과 빅토리아 왕조의 관습주의 및 산업혁명으로 인한 사회의 부패에 항거하며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순수하면서도 프리미티브한 미술, 즉 라파엘로 이전의 순수한 미술로 복귀할 것을 주장했다. 그들은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의
라파엘로로부터 회화가 미를 위해 진실을 희생하기 시작했다고 보고 그 이전의 진실이 담긴 순수한 미술로 복귀하고자 뜻을
모았다.
프레라파엘리티를 대표하는 이 세사람은 모두 런던 왕립 아카데미 출신으로, 이
운동의 설립 취지는 이 학교에서 행해지는 관습적인 교육과 아카데미즘에 맞서 직접 자연을 통해 연구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클리블랜드에 있는
헌트의 스튜디오에 정기적으로 모여서 공부했으며, 그간 무조건 우상시 되었던 라파엘로를 비롯한 고전주의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 이 운동의 모토처럼
규범에서 벗어나 “정직하게 자연을 향해 나아가고, 근면하게 자연과 함께 걸어가고자”했던 것이다.
이들의 운동이 당시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존 러스킨과 같은
대사상가가 이 운동을 적극 지지했기 때문이다. 러스킨은 1852년 3월 13일자 <타임지>지에 프레라파엘리티 멤버들이 라파엘로 이전의
순수한 아르카이즘을 지향하고 있음을 밝혔으며, 이들의 ‘정성스런 데생과 빛나는 색채’를 칭찬했다. 러스킨은 또 프레라파엘리티 멤버들이 “자연을
단순히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라파엘로 이후에 시작된 게으로고 부정직하며 바보스런 자존심을 내세운 교육방식에 반기를 들었다. 그들이 주변의
자연을 그리면서 현대과학과 13,4세기 사회의 신중함의 도움을 받는다면 분명 영국이 낳은 새롭고 귀한 학파를 설립하게 될 것이다.”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The Lady of the Window, 1879, Oil on canvas, 39 3/4 x 29 1/4
inches (101 x 74.3 cm)
Fogg Art Museum, Harvard University, Cambridge,
Massachussetts, USA
Bequest of Grenville L. Winthrop>
19세기 프랑스에서 시작된 유럽의 근대미술 운동이 기존의 아카데미즘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시작된 것처럼, 이 운동 역시 일종의 저항적인 근대미술 운동이었다. 르네상스 이후 19세기 앵그르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 고전주의가
유행할 때마다 라파엘로의 작품은 교과서와 같이 여겨졌다. 프레라파엘리티 운동에 참여한 화가들은 바로 이 점이 회화를 부패하게 한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당시의 회화가, 라파엘로로 상징되는 고전주의 회화가 만들어낸 규범에 얽매인 나머지 자연에서 멀어지게 되었고 생명력을 잃었다고
본 것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 출발하다 보니 그들은 자연히 라파엘로 이전의 회화, 즉 중세
고딕과 콰트로첸토 회화의 순수함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콰트로첸토 미술이 라파엘로를 중심으로 한 전성기 르네상스 미술보다 순수하다고 본 것은
그들만의 주관적 평가였지만 말이다. 그들은 사실상 좇아야 할 모델을 라파엘로 대신 중세와 초기 르네상스로 바꾸었다.
그러나 작품을 창조해 나가는 데 있어서 창의성에 바탕을 두지 않고 과거의 특정 양식에서 모델을 찾았다는
점에서는 대상만 바뀌었을 뿐 그들이 비난했던 이전 화가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은 이른바 중세의 프리미티브 쪽으로 관심을 기울였는데,
순수함을 추구했던 이들의 미술이 결과적으로 장식적이고 인위적이었다는 점은 매우 역설적이다.
<The Blessed Damozel, 1875 - 1878, Oil on canvas, 68 1/2 x 33 inches
(174 x 84 cm)
Fogg Art Museum, Harvard University, Cambridge, Massachussetts,
USA
Bequest of Grenville L. Winthrop>
건축을 포함한 19세기 미술의 특징 하나는 고딕 리바이벌로 대표되는 중세
복고주의일 것이다. 러스킨의 중세주의가 이 무렵에 나왔고, 중세사회의 순수한 노동정신을 본받고자 한 모리스의 ‘예술공예운동’ 역시 중세주의의
일환이며, 스페인의 위대한 건축가 가우디의 작품도 중세건축의 영향 없이는 생각하기 힘들 것이다.
이 같은 중세주의에 불을 붙은 것이 회화에서는 바로 프레라파엘리티였다. 물론
이들이 중세에 눈을 돌린 최초의 화가들은 아니었다. 이들 이전에 이미 19세기 초 빈에서 시작되어 로마로 이어진 라자레니라는 미술운동이 있었다.
라자레니는 빈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이 학교의 절충주의적 교육에 반기를 들고 1809년 성 루카 자치 단체를 설립한 후 중세미술을 모델로 한
작품을 그려나간 것이었는데, 프레라파엘리티는 바로 이들의 정신을 이어나갔다.
<The Childhood of Mary Virgin, 1848 - 1849, Oil on
canvas
32 3/4 x 25 5/8 inches (83.2 x 65.4 cm), Tate Gallery, London,
England>
프레라파엘리티의 가장 대표적인 화가는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1828~82)이다.
부친은 영국으로 망명한 이탈리아 카르보나라 당원 출신으로, 시인이자 문학가였으며 특히 단체 전문가로서 킹스 칼리지의 교수였다. 단테 연구가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로세티는 어려서부터 시를 가까이 했으며, 단체의 작품을 소재로 한 그림을 다수 남기기도 했다. 또한 단테를 통해 자연과
가까워지는 법을 배웠다고 술회한 적도 있다. 열 세 살 되던 해에 사스 드로잉 아카데미에 입학했으며 1845년 왕립 아카데미 고전학교에
입학했다. 문학서적의 삽화를 그려주는 일로 작가 생활을 시작했으며, 1846년에는 괴테의 <파우스트>에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리기도
했다.
로세티가 1848~49년에 그린 <마리아의 소녀시절>은 프레라파엘리티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의미 있는 작품이다. 성서에는 마리아의 생애가 나와 있지 않지만 로세티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상황을 그려냈다. “자연에
충실하고, 주제를 장엄하고 엄숙하게 그린다”는 러스킨의 말을 실천이라도 하듯, 등장인물들의 행위에는 고요함과 엄숙함이 감돌고
있다.
햇살이 잘 드는 실내에서 소년 마리아는 어머니 성 안나로부터 수놓기를 배우고 있다. 앞에 있는 천사는
마리아의 순결을 상징하는 백합 꽃병을 책 위에 놓고 있으며, 창 밖에서는 관리인이 나무를 손질하고 있다. 나뭇가지에 앉은 비둘기는 성령을
뜻한다. 천사만 없었다면 이 그림은 영락없이 당시 중류층 집안의 한가로운 한때를 담은 작품으로 보일 것이다. 실제로 이 그림에 등장한는 인물들은
화가의 모친과 여동생 그리고 관리인을 모델로 하고 있다. 명료한 윤곽선과 정적인 인물처리, 충실한 사실묘사, 원근법에 의한 구도 등이 이탈리아
콰트로첸토 미술를 연상시킨다. 창 밖의 덩굴잎이나 천사가 들고 있는 백합은 화가가 식물의 사실적 묘사에 관심이 있음을
보여준다.
<The Annunciation., 1849 - 1850, Oil on canvas mounted on
panel
28 1/2 x 16 3/8 inches (72.7 x 41.9 cm), Tate Gallery, London,
England>
로세티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성모영보>이다. 1850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성처녀 마리아 앞에 예수의 잉태를 알리는 천사가 백합을 들고 나타난 순간을 그리고 있는데, 마리아는 순수한 모습을 잃지
않으면서도 사실적인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림에 배경이나 인물의 옷이 모두 흰색의 조화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다만 침대머리의 파란 커튼과 창
밖의 하늘, 전경의 빨간 걸개 장식이 흰색의 단조로움을 완화시킨다.
집안의 여명이 비치면서
하얀 침대에서 일어나, 두려움은 없었지만
해가 질
때까지 울며 전율에 떨었네
시간이 다 차왔으므로.
로세티의 이 자작시를 읽고 나면 이 단순한 그림에 내포된 의미를 좀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단순한 구도와 고요하고 정적인 인물들의 모습은 이 화가가 의도적으로 르네상스 이전의 순수함으로 돌아가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The First Anniversary of the Death of
Beatrice, 1853 - 1854, Watercolour
16 3/8 x 24 inches (41.9 x 61 cm),
Ashmolean Museum, Oxford, UK>
단테를 소재로 한 그림으로는 <베아트리체 사망 일주년>이 있다. 여기서 화가는 단테와 베아트리체, 그리고
화가 자신과 그의 애인 엘리자베스를 나란히 등장시켜 두 쌍의 연인이 시공을 초월하여 실내에서 신비롭게 만나고 있는 장면으로 그렸다. 네덜란드
회화의 자연주의가 이탈리아 15세기 회화의 엄숙한 분위기와 결합된 듯한 느낌이다.
<The Blue Closet, 1856, Watercolour, 13 1/2 x 9 3/4 inches
(34.3 x 24.8 cm)
Tate Gallery, London, England>
<블루 스튜디오>에서는 화려한 색채와 장식적 모티프들이 어우러져서 마치
한 편의 현대 일러스트레이션을 보는 듯하다. 색채를 통해 음악을 들려주는 듯하며, 여인들의 우아한 자태나 바닥과 벽지의 장식적 문양은 이후
모리스나 아르누보가 걸어갈 길을 예고하고 있다.
로세티는 후반에 다수의 여인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여인은 각기 다른 모델을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모두 비슷한 입술, 화려한 꽃 등이 현실의 여인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으며, 화가의 손끝을 통해 신비롭게 거듭난 듯한
모습니다.
<La Ghirlandata, 1873, Oil on canvas, 45 1/2 x 34 3/8 inches
(115.6 x 87.6 cm)
Guildhall Art Gallery, London, England>
<기를란다타> 역시 꽃에 둘러싸여 있는 세 여인을 그린 작품이다. 여인들의 길고도 붉은
머리카락과 창백하리만큼 흰 얼굴, 붉은 입술은 순수함을 추구한 작가의 의도를 충분히 보여주지만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오히려 인위적으로 보인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꽃과 식물의 잎, 줄기 그리고 하프의 줄이 주는 곡선미를 프레라파엘리티의 장식적 취향을 잘 보여준다.
고종희의 <일러스트레이션 미술탐사> 중
◇ Rafal Blechacz ◇
첫댓글 베리굿 입니다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평범한 생각은
아무런 영감을 주지 못하는 훌륭한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게 한다.
-메리 케이 애시-
늘 즐겁고 健康 하시고 幸福 하시기 바랍니다,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평범한 생각은
아무런 영감을 주지 못하는 훌륭한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게 한다.
-메리 케이 애시-
늘 즐겁고 健康 하시고 幸福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