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령”을 “전시법”으로 바꾸자
새벽에 일어나 자전거를 타면서 문득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왜 윤석렬과 그 일당들은 비상계엄을 대통령의 통치행위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강변하는 것일까. 물론 헌법과 법률에 따라 계엄령을 발동하지 않아서 명백히 불법이지만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나는 불현듯 “계엄령”이라는 번역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계엄령”은 “戒嚴令”의 한글 표기다. 풀어서 말하면 “엄하게 경계하라고 내리는 명령” 혹은 “엄하게 경계하라는 명령” 정도가 되겠다. “외적이 침입해 오니 경계를 엄하게 해라”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 백성을 평시에는 온화하게 대하다가 백성들이 통치자의 말도 안 듣고 자꾸 귀찮게 하면 “한 번 엄하게 혼내주는 영을 내린다”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통치자들은 첫 번째 해석보다는 종종 두 번째 의미로 해석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다스리는 사람 편에서 보면 그럴 필요도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보면 “계엄령”이란 단어는 기어오르는 놈들을 한 번씩 엄하게 다뤄서 집안이든 나라든 제대로 다스려 보고 싶다는 유혹을 일으키는 말이 아닐까 한다.
“계엄령”이라는 단어는 일본 사람들이 19세기 말 서양의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한자문화권에 없던 단어를 지어낸 말이다. 물론 동아시아에도 법령이 있었음은 자명하다. 이를테면 조선은 경국대전이 있었다. 왕은 경국대전의 조항에 따라 백성을 다스렸다. 다만 왕은 경국대전의 조항에 제한되지 않고 통치를 할 수 있었다. 조선의 법은 일방적인 것이었다. 법에 저촉되어 처벌받을 가능성이 있는 쪽은 백성뿐이었다. 왕은 법 조항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었다. 언제든 필요하면 초법적인 통치를 할 수 있었다. 특히 조선에서 왕은 법령에 상관없이 덕으로써 나라를 다스려야 했다. 반대로 근대 서양에서는 달랐다. 계몽 시대 이래 근대법은 쌍방적이다. 피지배자만 법치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배자도 법치의 대상이 된다. 지배자라도 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지배할 수 있다(덕치, 법치, 법치주의에 관한 설명은 건너뛰기로 하자).
“계엄령”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자. “계엄령”은 영어 “martial law”, 독일어 “Kriegsrecht”를 한자어로 옮겨서 만들어 낸 말이다. 두 단어는 모두 축자적으로 옮기면 “전시법(戰時法)”이다. 평화 시에는 지배자든 피지배자든 일반법에 따라야 하는데, 전쟁이라도 나면 특히 지배 당국이 더 효율적으로 사회를 통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전시에 지배자의 통치행위를 제한하기 위해 따로 법을 제정해 놓았다는 말이다. 전근대적인 사회에서는 전시라고 해서 굳이 따로 법령을 제정할 필요가 없다. 상황에 따라 지배자는 전쟁에 이기기 위해 제한 없이 통치행위를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martial law”는 근대법에서만 가능하고 필요하지 전근대 법에서는 불가능하고 불필요한 개념이다.
19세기 말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일본의 계몽주의자들은 이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근대 문물을 받아들여 일본을 서구화하고 문명국으로 만들고 싶어 했지만, 딱 한 가지 “천황제”만은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천황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그들의 신념이 서구 근대의 사상을 수용하면서 어떻게 표현되었는가는 예를 들어 후쿠자와 유키치가 “democracy”의 번역어를 선택하는 데서 잘 나타난다. 후쿠자와는 “democracy”가 주의나 사상이 아니라 정치 제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것을 “민주정(民主政)” 혹은 “민주제(民主制)”로 번역해야 마땅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정치 제도는 “천황제” 하나로 충분하므로 “democracy”를 그렇게 번역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민주주의(民主主義)"라는 단어가 탄생한 것이다. 후쿠자와는 “democracy”가 “천황제”와 대립적이고 모순적이라는 진실을 감추고 싶었다. “martial law”도 마찬가지다. 그 개념이 근대적 민주 공화정에서만 통용 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았던 그는 그것을 “천황제” 아래에서도 사용 가능한 것으로 왜곡하여 번역했다.
“계엄령”도 통치권의 하나라는 윤석렬의 주장이 얼마나 황당한지는 정확히 “전시법”이라고 올바로 번역해서 사용한다면 바로 드러나지 않겠는가?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웬 “전시법”이야? 라는 반응이 바로 나오게 될 것이다. 그걸 “계엄령”이라고 써놓으니 “대통령께서 엄하게 훈계하시는구나”하고 “조신하게 굴지 않으면 혼나겠네” 생각해서 스스로 경계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지 않겠는가? 최악의 번역어가 아닐까 싶다.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전시법”을 발동하여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시민과 제도의 힘에 밀려 실패한 윤석렬을 내란과 군사반란 우두머리로 처단해야 마땅하다. 나는 사형제 반대론자지만, 이번만은 사형을 집행하여 우리 제도의 지엄함과 실효성을 역사에 남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란범들 처단을 마치고 나면, 87년 시민의 힘으로 이룩한 우리의 제도적 장치를 재정비하자. 비상계엄 선포에 맞서 한달음에 국회 앞으로 달려와 계엄군들의 국회 침탈을 저지한 시민들이 윤석렬 일당의 내란 실행을 좌절케 한 가장 큰 힘이었다면, 또 하나의 축은 제6공화국 헌법 자체이다. 제6공화국 헌법은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으나 그 틀 안에서나마 국민주권주의에 충실한 제도적 장치로 손색이 없다. 대통령은 국민 주권의 대리기관인 국회의 동의 없이 권한 행사를 할 수 없도록 규정해 놓았다. 이번 내란 사태는 우리 대통령제가 제왕적이라서 벌어진 일이 아니다. 거꾸로 국회 권력이 대통령의 전횡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다. 다만 문제는 행정부 안에서 권력이 대통령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집중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행정부 안에서 대통령의 권력을 분산시킬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윤석렬을 파면하고 처단한 다음에 개헌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행정부 권력 분산 장치 마련이 급선무이지만, 개헌 논의를 하는 중에 “계엄령” 조항을 아예 폐지하든지 아니면 그 명칭이라도 “전시법”으로 변경해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면 어떨까 싶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