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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25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주현절 후 셋째 주일)
놓아두고 따라가다
사9:1~4; 고전1:10~18; 마태4:12~23
오늘 마태복음서 본문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에서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는 일을 생업으로 하던 시몬과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부름을 받은 자들은, 즉 시몬과 안드레는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고, 야고보와 요한은 배와 아버지를 놓아두고, 예수를 따라갔다고 합니다. 그물을 “버리고”라는 말과 배와 아버지를 “놓아두고”라는 말은, 헬라어 본문에서는 동일한 단어(<아피에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은, 일차적으로, “버리고” 혹은 “놓아두고” “따라가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버리고 놓아두는 것은 그들의 생업인 “그물”이나 “배”, 심지어 자기 “아버지”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은 “따르는” 일이지요. 이것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수도원으로 들어가거나 혹은 선교사로 파송 받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극단적으로 자기 생업에서 떠날 수 없고, 심지어 가족까지 단절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니겠지요. 게다가, 사람이 물리적으로 자기 생업을 버리고, 가족과 단절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각자의 마음에 심겨있는 “기본적인 프로그램”은 그렇게 쉽게 버리거나 놓아둘 수 없습니다.
4세기, 5세기에 실제로, 자기 생업과 가족을 버리고/놓아두고 예수를 따르겠다고 사막으로 들어간 사람들(남/여)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사막의 교부, 혹은 사막의 교모라고 부릅니다. 기독교 초기에 로마는 기독교인들을 매우 박해했습니다. 그들에게 기독교는 황제숭배를 거부하고 풍속을 해치며 무엇보다 국가의 기존체계를 인정하지 않는 위험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인들이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사자의 굴속에 버려지고, 형틀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래도 많은 교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굴복하지 않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처럼, 그 뒤를 좇았습니다. 그러고 250여년이 지난 후에 기독교의 세력은 점점 커져서 로마가 무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마침내 313년, 우리가 잘 아는대로, 로마의 황제 콘스탄틴 대제는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기까지는 순수한 신앙적 동기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로마가 겪던 위기를 극복해보려는 정치적인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이지요. 당시 로마는 내전과 외환, 경제 혼란을 겪고 있었는데, 강한 조직력과 결속력을 가진 기독교라는 집단을 이용해 제국을 안정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접근을 한 것이지요.
어쨌든,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자, 이제 기독교인들은 박해없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고, 기독교는 급속히 확산되어 이후 기독교는 로마국교로까지 승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황제의 권위는 신적 사명으로까지 연결되면서 강화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순교로 신앙을 지켜왔던 독실한 신자들은, 기독교가 순수한 신앙이 아니라 정치화되고 관습화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이들은 기독교 신앙 안에 있는 제자됨의 행동, 즉 “버리고 따르기”를 알고 있었고, 실제로 이들은 더 이상 순교할 수 없는 안락한 기독교를 떠나,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두고 매일의 순교를 위해 사막으로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한때 이집트와 시리아의 사막에는 이런 사람들로 가득찼다고 하지요.
그런데 이렇게 모든 것을 버려두고 사막에 들어왔던 사막의 교부/교모들은 곧 실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세상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사막으로 들어왔지만, 사실 버린 것은 보이는 재산과 생업과 가족일 뿐, 실제로 자신의 마음에 있는 보이지 않는 집착과 혐오는 그대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보이는 것을 다 버린 이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것을 버리는 일과 씨름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씨름이 훨씬 더 치열했고 훨씬 더 오래 걸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인간 마음의 본질을 보기 시작했는데, 그래서 사막 교부의 한 사람이었던 에바그리우스를 일러 “최초의 심리학자”라는 말을 쓰게 됩니다.
그러니까 제자가 된다는 말을 의미하는 “버려두고 따라가기”는, 단순히 어떤 종교를 믿는다는 의미를 넘어서, 우리 안에 있는 기본적인 프로그램을 바꾸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버려둔다”, “떠나간다”는 말은, 현실을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서, “그물을 버리고”, 또 “배와 자기들의 아버지를 놓아두고”라는 말은 헬라어로 같은 단어, <아피에미>라는 단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가게 놔둔다” “포기한다”라는 뜻이 있고, 그 근본의미에는 “내버려 둔다”, “허용한다”, “용납한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죄를 사한다(용서한다)라는 의미도 있는데, 그럼으로써 용서한다는 말에는, 용납한다, 허용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아피에미>라는 단어는 “가게 놓아둔다”(letting go)라는 뜻인데, 이 말은 “허용한다”라는 의미와 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게 놓아두려면 용인하고 허용해야 합니다. 억지로 붙잡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게 놔두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말해서,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버리는 것, 놓아두는 것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 같지만, 아니라고 부정하면 부정할수록, 역설적으로 우리는 그것을 더 붙잡게 됩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이지만, 만일 우리가 낡은 지도에 의존해서, 인생 여정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인생살이에 좀 고생을 하게 될 것입니다. 현실이 자신의 낡은 지도와는 맞지 않은데, 자신의 낡은 지도를 바꿀 생각은 하지 않고, 우째 이런 일이, 이럴 리가 없는데, 이래서는 안 되는데, 현실부정만 하고 있다면, 그 삶이 고생을 좀 하게 될꺼라는 것은 예상할 수 있습니다. 심하면, 망상이나 착각에 사로잡혀 살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낡은 지도를 가지고 여행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모른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자신의 지도를 보기가 참 어렵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지도는 자신의 의식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기본바탕입니다. 그런데 기본바탕이란 말은 그렇게 밖에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지도 자체가 그렇게 밖에 볼 수 없는 산물입니다.
그래서 어떤 증상으로 우리의 지도를 체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삶에 원망하고 불평하는 일이 잦다면, 낡은 지도일 가능성이 큽니다.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남 탓을 자주 하게 되면 낡은 지도일 가능성이 큽니다. 남과 트러블이 잦고, 싸움이 잦으면, 낡은 지도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말은 내가 맞고 그 사람이 틀렸다, 혹은 내가 틀리고 그 사람이 맞는 말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옛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면서 원망과 불평이 잦았고, 일이 생기면 모세 탓을 하곤 했지요. 출애굽은 했지만, 아직 이집트에서 살던 지도를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그들은 현실이 힘들고 어려울 땐 자주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소리쳤습니다.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한참 더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읽은 이사야서에 보면, “어둠속에서 고통 받던 백성에게서 어둠이 걷힐 날이 온다”는 선포로 시작합니다.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쳤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 주님께서 그들에게 큰 기쁨을 주셨고, 그들을 행복하게 하셨다”고 선언합니다. 이 선언은 당시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상황 속에서 주어진 말씀이긴 하지만,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삶의 모든 고통들, 특별히 지금 힘들어 하는 모든 어둠과 혼란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 삶의 모든 현실에 주어진 말씀일 것입니다.
성경의 이런 선언들은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그 희망의 상징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세상에 등장하시는 장면에서, 복음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나사렛을 떠나 갈릴리 지역에서 활동을 시작하셨고, 그 지역은 바로 이사야가 말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갈릴리 지역은 유다와 예루살렘과는 가장 떨어져 있는 최북단 변방에 위치해 있어서 이스라엘의 가장 변두리라고 할 수 있는 지역입니다. 옛날 우리나라로 치면 함경도나 만주 땅에 해당하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곳은 종살이하던 땅, 어둠에 싸여 있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셨고, 이곳을 해방시키시고 그곳 사람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는 우리의 가장 어두운 곳에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시고, 기쁨을 회복시키시고, 행복하게 하셨다는 선언입니다.
그 다음 단락에서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 다음 23절에는 마태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활동 사역을 한 마디로 요약하지요.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들의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 주셨다.”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했다”는 말씀을 동일한 내용이라고 본다면, 마태가 말하는 예수님의 활동 사역은 단 두 가지로 요약되지요. 가르치고, 고쳐주셨다! 무엇을? (하늘나라의 복음을,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가르치고/선포하고, 어떻게?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주셨다!
이것은 마태복음의 전제 구조가 됩니다. 이제 5장 이후부터는 예수님의 가르치는 말씀과 질병을 고쳐주는 치유 기사가 번갈아 가면서 등장합니다. 가령 5~7장의 산상수훈 뒤에 8~9장의 병자를 고치는 이야기...
다시 말하면, 마태는 예수님의 이 세상 활동을 “어둠 속에 빛이 비치는 사건,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는 사건”으로 보았습니다. 그것은 가르치시는 일, 즉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복음 선포는 공허하고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가난하고 소외된(어둠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질병에서 치유 받고 아픔에서 해방되는 구체적인 삶의 사건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빛으로 오셨다는 것, 그 빛은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에게 비추어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심지어 빛이 없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우리에게 빛이 비추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 신앙은 우리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께로, 행복으로 인도하는 빛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빛임을 증언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어둠 속에 있는 낡은 지도, 종살이 하던 지도, 그래서 어둠을 헤매고 죽음의 그늘 아래 있던 사람들에게 잘 보이지 않던 그 빛을 비추어 주시고자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엣 “가르치시며 고쳐주셨다”는 말씀은 그분이 빛을 비추는 활동이기도 하셨습니다. 여러분, 가르쳐 주시며 고쳐 주시는 주님의 빛에 온전히 참여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빛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빛은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그 빛을 알아차리는 것, 우리 삶에 비치는 빛을 알아차리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입니다. 사실, 알아차리면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알아차리면 바꾸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안에 빛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을까요? 우선은, 우리에게 있는 감사의 조건들, 우리가 걸어서 화장실을 갈 수 있는 것, 더구나 매일 아침 침대에서 나와 우리가 몸을 움직여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잠시의 휴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이 추운 겨울에 쉴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것, 곁에서 함께 하는 가족들이 있다는 것, 옆에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 등등. 우리가 감사의 조건들을 따지면, 한참을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우리 안에 빛이 비추고 있는 증거들입니다. 그 빛을 잘 알아차리십시오. 빛이 있을 때 빛을 알아차리십시오. 그런데 모든 빛 중에서 가장 빛난 빛은, 이것들을 빛으로 보게 하는 빛입니다.
정말 빛이 비치지 않는 시간도 있을 것입니다. 정말 깜깜한 밤만 계속되는 느낌! 그럴 땐 정말 힘이 들겠지만, 그러나 그 어둠 가운데도 빛이 있습니다. 알아차리기가 참 어렵지만 빛이 있습니다. 평상시에 빛을 알아차리는 것도 우리를 자라게 하지만, 정말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것은 우리에게 아주 견고한 성장을 가져다 줍니다. 이것은 우리를 정말 키워줍니다. 그 어둠에 압도되지 않고, 그 어둠 속에서 빛을 볼 수 있다면, 진정 순수한 믿음이 자라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감사는 우리가 그물에 걸리지 않고 자유롭게 날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처음의 제자가 했던 일, “놓아두고 따라가기”는 아마도 향심기도를 하시는 분은 무슨 뜻인지를 대번에 알 것입니다. 그리고 놓아두는 일은, 허용하는 일이고, 내버려 두는 일이라는 것도 향심기도를 하는 분들은 잘 알 것입니다. 허용하지 않고, 내버려 두지 않으면, 떠나보낼 수가 없습니다. 떠나보내지 못하면 비추어지는 빛을 알아차리기가 어렵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낡은 지도를 고수하고, 현실이 이렇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뭔가 이유가 있겠지, 이럴 때 우리는 떠나보내게 되고, 또 새로운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 사이에 빛이 비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