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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원문보기 글쓴이: 선과
상전벽해. 너무도 변했다. 보물인 해탈문은 오랫만에 다시 찾은 객에게 모습을 숨기셨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일주문도 새로 조성된 듯 했다. 변하지 않은 것은 사하촌 행복식당 상호 였다. 우리 아이들이 어렷을 적에 행복 식당에서 민박을 했었다. 주인집 아저씨의 넉넉한 인심과 호의를 아직 잊을 수 없지만 혹여 나쁜 이야기 들을까바 도저히 아저씨의 문안을 묻지 못하고 스쳐 지났다.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픈 과욕 때문이다.
변하지 않아 좋은 예도 부지기수 일텐데, 내 추억 한자리를 잃기 싫어 성보박물관은 애써 회피 했다. 그자리 그 추억을 간직하고 픈 욕심 때문이었다. 버리지 못하고, 얻고자만 추구하는 답사자세도 스스로 문제 임을 알지만 나약한 중생인걸 어쩌겠는가?
복원중인 해탈문을 돌아 중정으로 들어가는 길. 고마웁다. 우울모드 마음도 흐뭇해진다.
"신라 말 창건이후 고려시대의 도갑사의 모습을 알려주는 문헌자료나 유적이 없어 사세를 확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미륵전에 봉안된 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호)의 조성연대로 미루어 10~11세기경에도 법등이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단지 조선시대 이후의 모습은 <도갑사사적기>를 통해 소상히 살펴볼 수 있다. 도갑사가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은 1456년(세조 2) 수미(守眉)선사에 의해 중창되면서부터였다. 수미선사는 세조로부터 각별한 존경을 받았던 인물로 도갑사의 중창 역시 세조의 국가적 지원으로 이뤄졌다. 이때 중창 직후 도갑사는 전각이 966칸에 달하였고, 부속암자만 해도 상동암(上東庵), 하동암(下東庵), 남암(南庵), 서부도암(西浮屠庵), 동부도암(東浮屠庵), 미륵암(彌勒庵), 비전암(碑殿庵), 봉선암(鳳仙庵), 적암(大寂庵), 상견암(上見庵), 중견암(中見庵), 하견암(下見庵)으로 12개를 거느리고 있었다고 전한다. 또 1473년(성종 4)에는 해탈문을 새로 지었는데, 이 때에도 대시주로 수미대사가 등장하고 있어 그에 의해 1456년에 시작한 절의 중창이 결국 17년간이나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중기 1555년(명종 10)에는 서남해안에 왜구가 침입하여 노략질을 자행하는 중 도갑사에까지 들어와 불을 질렀으나 저절로 불이 꺼져 화를 면하기도 하였다. 이후 광해군(1608 ~1623)때에는 낡은 전각을 중수하였는데 당시 상주 승려만도 73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1633년(인조 11)에는 ‘월출산도갑사왕사묘각화상비(月出山道岬寺王師妙覺和尙碑)’를 건립하였는데 여기에 스님은 물론이고 지방의 유력인사들도 동참하였다. 또 같은 해에는 절 입구의 돌다리를 중창하고 ‘월출산도갑사석교중창비(月出山道岬寺石橋重創碑)’를 세웠으며, 국사전(國師殿)에는 수미대사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20년 뒤인 1653년(효종 4)에는 ‘월출산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月出山道岬寺道詵國師守眉大禪師碑)’와 ‘조계곡석교신창비(曹溪谷石橋新創碑)’를 세웠는데, 두 비문의 건립에도 당시의 영의정, 형조판서 등 최고의 권력자들과 당대의 고승들이 참여하고 있어 당시 도갑사의 위상을 엿보이고 있다. 도갑사의 중수는 계속 이어져 1677년(숙종 3)에는 괘불대를 세우고, 1682년에는 대형 석조(石槽)를 만들었다. 18세기 중엽에는 연담 유일(蓮潭 有一) 스님이 절에 머물며 불교사전이라 할 수 있는 <석전유해(釋典類解)>를 편찬했다.
일제강점기와 6?25 등을 거치면서 도갑사는 여느 절과 마찬가지로 사세가 많이 기울게 되었다. 급기야 1977년에는 신도들의 부주의로 명부전과 해탈문을 제외한 전 건물이 소실되어 버렸다. 그러나 1981년 대웅보전의 복원을 시작으로 옛 모습을 찾아가고 있는데, 특히 1996년 주지로 부임한 범각(梵覺)스님의 노력에 의해 성보관이 건립 되는 등 대대적인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다"....전통사찰정보
도갑사 대웅보전 앞 터줏대감인 장방형 화강암 석조. 새마을 운동에 살아남은 동구밖 당산 처럼 반가웠다. 귀를 모죽임하고, 바깥 아랫부분도 반원형이다. 밑바닥에는 작은 배수구가 있다. 마치 아프리카 원주민 통나무배를 본 듯 하다. 도갑사 영화를 간직한 석조는 '강희(康熙) 21년(二十一年) 임술(壬戌)'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조선 숙종 8년(1682)에 제작된 석조임을 알 수 있다.
단층 전각이었던 대웅전은 통층의 2층 대웅보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석탑도 제위치가 아니고 괘불대도 보이지 않았다. 작은 3층석탑이 없었던가? 대웅보전 중정은 너무도 낯설었다. 어떤이는 스케일 크고 호방하며 넓은 공간을 적절하게 운용한 가람배치라며 좋아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산지가람에 익숙한 나에게는 옹기종기 아늑하고 포근한 분위기가 좋다. 대웅전 기단을 고식으로 꾸민 것은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신라말 우리나라 사찰 창건과 국토의 비보책에 지대한 영향를 미친 도선국사 안태고향이며, 창건한 도갑사이기에 다른 사찰과 구분되는 옛향기가 가득한 가람으로 거듭 나는 것은 환영받을 불사이지만 고풍을 간직한 가람으로도 많은 순례객에게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대웅보전 삼존불. 약사여래.석가모니.아미타불이다. 금당에 걸맞게 후불탱은 목각탱으로 조성했다.
천불전 삼존불. 후불탱. 어쩐지 예전 대웅전에 봉안되었던 부처님 같았다. 천불전이 예전에 있었던가?
대웅보전 영역에서 석조와 더불어 옛날로 남아 있는 오층탑. 도갑사 출생이 아니고 민증을 옮겨온 탑이라고 한다. 복원되었지만 안정감과 상승감이 돋보이는 고려 미남으로 알려져 있다. 2중 기단에는 1기 탱주와 양우주를 새겼다. 갑석 상부에는 1단의 각형 탑신받침이 있어 신라 전형에서 약화된 모습이다. 옥개석과 몸돌은 각각 별도의 부재이다.
옥개받침은 1~3층 5단, 4층 4단, 5층은 3단으로 줄어 들었다. 옥개석 낙수면은 물매는 깊지 않고 추녀 반전은 희미하다. 상륜부 노반과 보주는 석질이 달라보여 복원한 듯하다.
영암 출신 수미왕사비. 왕사의 활동과 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를 가져 왔다.
수미는 조선시대 승려로 13세에 출가하였고, 불교를 숭상했던 세조 임금이 그 스승(왕사)으로 모셨던 인물이다.
석가여래좌상. 절 마당을 가로질러 월출산 등산로로 향하는 부도전 길. 개울건너 작고 아담한 문을 들어서면 용화전에 모셔져 있다. 석가여래좌상이 미륵불로 모셔진 연유가 있을 것이지만 전각과 본존이 상이한 경우가 어디 한둘 인가?
불신과 주형거신 광배가 하나의 돌이다. 광배의 가운데에는 연꽃문과 불꽃문이 새겨져 있고, 상부에는 세분의 화불이 표현되었다. 삼존 화불을 상부에 모실 경우 나란히 모시는 경우가 일반적인 위치를 달리해 이채롭다. 나발에 유계는 큼직하다. 타원형 상호, 들어난 눈덩이, 높지 않은 코, 입술은 두텁다.
삼도가 뚜렷하고 무릎까지 감싼 법의는 우견편단이다. 결가부좌. 항마촉지 수인이며 대좌는 방형이다. 훈훈한 느낌의 불상은 통일 신라계열의 투박하고 생략이 강한 고려 중기의 불상으로 알려져 있다.
도갑사 도선.수미비. 자료는 문화재청에서 가져 왔다.
도갑사 도선·수미비는 귀부(龜趺), 비신(碑身), 이수(이首)를 구비한 석비로 도갑사의 부도전(浮屠田) 부근에 건립된 보호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승려인 도선국사와 조선시대 수미왕사의 행적을 기록한 높이 517㎝ 규모의 석비이다.
뿐만 아니라 석비의 건립기간이 18년임을 알려주고 있어 이 방면 기술사 연구에 좋은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나아가 대부분의 석비가 1명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에 비해 도선과 수미선사를 표방하고 있어 이 역시 독특한 예라 생각된다. 한편 건립연대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비문이 각각 독립된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찬자는 물론 쓴 사람과 각자한 사람이 모두 다른 것은 비문의 내용을 볼 때 석비를 다시 세우기로 계획하고 3년의 모금활동과 건립기간 18년을 포함한 21년간에 걸친 건립과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아울러 2번째 비문에는 앞선 비문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으며, 석재의 채취로부터 이동과정이 기록되어 있으며, 3번째 비문에서는 음기를 청탁받은 사실이 기록된 점으로 보아 석비의 건립과정에서 3개의 비문에 대한 준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귀부의 머리는 오른쪽으로 약간 튼 형태인데 입에는 상·하 8개의 이빨로 여의주를 꽉 물고 있는 형상이다. 코는 큼직하며, 반구형의 양 눈은 부리부리하게 표현하였다. 등에는 전형적인 귀갑문 대신 평행 사선문(斜線紋)으로 정연하게 음각하였다.
4발 중 앞발은 5조, 뒷발은 3조의 발가락이 표현되었으며, 꼬리는 살짝 돌려 왼쪽 발의 허벅다리에 닿았다. 상면에는 비좌(碑座)로부터 중단에 이르기까지 넓게 방형의 얕은 받침이 표현되었다. 각 면 중앙의 내곡된 상면에는 화문(花紋)이 조식되어 있다.
비신은 귀부와 이수와는 달리 대리석으로 조성했다. 상면에는 전서로 「월출산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명」이라 썼으며, 비제(碑題)는 횡서로 「월출산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명병서」라 음각했다. 비문에 의하면 본래 이 곳에 있던 도선국사의 비가 훼손되어 다시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비문은 전면에 2개, 후면에 1개 등 모두 3개로 다른 석비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와 더불어 비문의 찬자가 각각 이경석(李景奭), 이수인(李壽仁), 정두경(鄭斗卿)인데 반해 연대는 모두 「숭정(崇禎) 병자(丙子) 사월(四月) 일(日) 입(立)」이라 기록되어 있어 1636년(조선 인조 14)에 건립이 시작되어 1653년(조선 효종 4)에 준공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양 측면에는 운룡문(雲龍紋)이 가득 양각되었는데,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마치 살아 있는 쌍룡이 구름을 타고 승천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수 역시 1석으로 조성되었는데, 하단에는 28판의 앙련(仰蓮)이 조각되었으며, 상면에는 운문 위에 2마리의 용이 각각 이수의 양끝을 물고 있는 형상을 지니고 있다.
부도전
국사전. 도선국사 진영
좌측 1번은 성보박물관에 전시중인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인 도선국사(827∼898)의 초상화이다. 사진은 도갑사 홈페이지,글은 문화재청에서 옮겨왔다.
우측 진영은 조선 세조 대의 승려인 수미왕사의 초상화이다.
우리 아이들은 도갑사를 기억할까? 행복식당의 할아버지는 당연히 모를 거고..., 도갑사가 내게도 그랬다. 기억과상실이 공존했다. 우리 역사와 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기신 왕사가 지근에서에 출생했고 오래 머물며 법향을 주신 도갑사는 모든 불자와 문화유산 답사꾼의 성지로 자리매김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색창연한 분위기를 간직하면서도 따뜻한 변화이었으면 좋겠다.
2009.07.27 |
첫댓글 도갑사는 아직 가보질 못했습니다. 그러고보면 가봐야 할 곳이 얼마나 많은 지 몰라요.
말로만 듣던 도갑사... 잘봅니다 선과님...